삼류 시사평론가 강대구, 토론의 신에 등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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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완결

엘멕스
작품등록일 :
2024.05.0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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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9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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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1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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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55화

DUMMY

한참 동안 멍하니 나는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프롬프터가 또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읽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긴 문장이 나와서가 아니었다.

문장들을 몇 번이나 반복해 읽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야! 너 지금 눈뜨고 자는 거야? 기면증 그런 거 걸린 거야? 너 어제 밤에 뭐 했어? 같이 침대에 누울 사람은 여전히 없을 테고. 뭐 또 중고딩 애들처럼 야동 봤냐?’’


최웅이 몇 차례 쿡쿡 옆구리를 찔러서야 나는 허공에 뜬 프롬프터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예? 왜요, 선배님?’’


하지만 나의 멍한 시선은 여전히 유효했다.

허공이 아니라 이번에는 내 아끼는 후배, 아니 그냥 후배 배은정 쪽으로 방향만 바뀌었을 뿐.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선배님?’’

‘‘아, 아니요. 그런 거 아니고. 아, 참나!’’

‘‘아이 이 자식 진짜. 괜찮은 거 발굴했으면 품번 좀 공유해.’’

‘‘아휴, 잠깐 나 이제 가봐야겠네.’’


자리에 벌떡 일어나면서 내가 말했다.


‘‘예에? 갑자기요?’’


배은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예. 아이, 정말 내가 기면증이 생겼나. 갑자기 졸음이 확 밀려와서. 어디 사우나라도 가서 한숨 자고 다음 일정 수행해야 할 것 같은데.’’

‘‘갈 때 가더라도 품번 좀 남기고 가라니까.’’

‘‘아무튼 다들 차 잘 드시고 다음에 또 맑은 정신으로 보죠.’’

''야, 야! 진짜 가는 거야?’’


허겁지겁 스튜디오를 나섰다.

걸었다.

한참을 걸었다.

그런데 걷는다는 걸 인식 못하고 걸었다.

멍 때리며 걸었다.


어느새 나는 시사팩폭쇼 스튜디오 건물이 있는 블록 다음 블록에 와 있었다.

광장이 있는 곳이었다.

여기저기 사방에서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는 광장 한 가운데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제야 나는 방금 전 내가 보았던 프롬프터 내용을 다시 곱씹기 시작했다.


[고연아가 아직까지 독신인 이유.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남자가 있었음. 엄친아. 진짜 엄마 친구 아들인 오빠. 유학생활 마치고 돌아와 그 사람이랑 거의 사귀기 직전이었는데 그 사람이 갑작스런 사고로 사망하게 됨. 벌써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있음. 그리고 한 가지 더. 강대구가 아끼는 후배 배은정의 경우 남편과 지금까지 별 다툼 없이 잉꼬부부로 살고 있는 건 팩트임. 근데 그러면서 지금까지 연애기간 포함해 총 3번 정도 바람 피웠음. 지난 번 강대구도 있었던 사석 자리에서 중간에 배은정이 달달한 말 나누며 전화통화 하러 나갔을 때 전화상대는 남편이 아니라 요즘 한창 썸 타고 있는 다른 의원 보좌관임]


나는 눈으로는 아까 전 보았던 프롬프터 환영을 보고 있었지만,

귀로는 아까 전 들었던 목소리 환청을 듣고 있었다.


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두 목소리가 중첩되고 있었다.


하나는 내 목소리였다.


‘야! 생각해보니 이 정도면 나 프롬프터 없어도 되겠는 걸. 나 강대구가 프롬프터다! 푸하하하하.’


그렇게 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던 내 목소리.

그리고 다른 또 하나는 최웅 목소리였다.


‘‘겸손하게 살라고, 인마. 교만함에서 벗어나라고, 인마.’’


방금 전 대기실에서 나에게 농담 반 진담 반 일갈하던 최웅의 그 목소리.

물론 그의 말은 얻어 걸린 말이겠지만, 제대로 걸린 말이기도 했다.



+++



‘‘오빠!’’

‘‘응.’’

‘‘자다 일어났나벼?’’

‘‘아니.’’

‘‘근데 목소리가 와이?’’

‘‘아니야.’’

‘‘주식 꼴아 박았음?’’

‘‘아니라니까.’’


동생 주화년이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걸어 온 이유가 있었다.


현재 주화는 애들 데리고 고향 집에 내려가 있는 중.

이유는 아부지 생신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나도 같이 내려가 하룻밤 자고 올라오기로 했었다.

시골 어르신들은 서울 올라간 자식들 자랑하는 것 만한 일상의 낙은 없는 법.


요즘 아버지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한테 나의 활약상에 대해 워낙 떠들어놓고 계시다 보니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원래 내가 세운 계획은, 아버지 생일을 맞이해 읍내 가장 큰 식당에 동네 어르신들 불러놓고 식사 대접하면서 나의 중구난방 등 공중파 녹화 후일담을 푸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름 전부터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송주나 라디오 방송 프로 출연 일정이 잡히게 된 것.


동네 분들 중 중구난방을 매주 시청하는 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정원택, 김여중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분은 아마 손을 꼽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송주나라고 하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팔구십 먹은 어르신들도 그녀 얼굴들은 다 알고 계시다.


‘‘얘! 올해 미스코리아 진짜 잘 뽑았다. 저 미국에서 왔다는 애 왜 이리 고급스럽게 생겼니?’’


20여년 전 TV 속 송주나 모습을 처음 보자마자 울 어머니가 했던 말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이후 앵커로 송주나가 다시 TV에 복귀했을 때 역시 어머니는 그녀의 아우라 넘치는 외모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저, 정말이니?’’

‘‘아휴, 내가 그러면 이런 거짓말해서 뭐해? 아들을 뭘로 보고, 참나.’‘

‘‘어머나! 어머나! 대체 이게 뭔 일이래? 나 이따가 읍내 미장원 가야겠다.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녀야겠다. 그래도 되는 거지?’’


그러므로 송주나 라디오 프로에 섭외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전했을 때 어머니 반응은 난리법석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얘, 이번에 아버지 생신에 내려오면 사람들한테 그 송주나랑 같이 방송하는 이야기 좀 제대로 해 줘라.’’

‘‘아이, 촌스럽게 진짜. 알았어요. 근데 어제 처음으로 쭈나씨랑 미팅했는데, 하하하.’’

‘‘어머! 드디어 만났어?’’

‘‘응. 사전 회의 겸 상견례 겸 겸사겸사 해서. 근데 실물 보니까 ......’’

‘‘실물 보니까 어떻든? 진짜 이쁘디?’’

‘‘이쁘기는.’’

‘‘안 이뻐?’’

‘‘이쁘다기 보다 뭐랄까, 저 세상 미모라고나 할까요? 하하하.’’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그렇게 나는 너스레와 거드름을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토요일 데뷔전에서 애 딸린 돌싱 설화를 겪고 난 후 나는 모든 계획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첫 끝발이 개끝발이라고 앞으로 출연이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괜히 사람들 앞에서 이런 저런 썰만 풀었다가 후에 무슨 망신살이 뻗칠지 모르니까.


혹시나 해서 송주나에게 간단한 안부문자를 보냈지만 읽씹만 당했다.

이 정도면 WYN 라디오 국에서 나를 잘랐다는 최웅의 정보는 사실임이 확실시된다.


솔직히 서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송주나는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외로운 내 마음에 나 몰래 다가와 상처만 주고 떠나가면 안 되는 거였다.


로맨틱 커플 컨셉은 내가 처음 제안했지만

자기가 플러팅하고 내가 뻰지 놓는 건 전적으로 그녀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 역할에 충실했던 것뿐이었다.

단지 그녀 옆이다 보니 울렁증이 생겨 평소의 여유로움을 상실했던 것뿐이었다.


설령 윗선에서 나를 자르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쳐도

내게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와 함께 다음에 더 좋은 기회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해야 인간이었다.

아무리 여신 미모를 가지고 있다 쳐도 내면은 그래도 인간적이어야 했다.


‘‘여기 철식이네랑 영숙이 이모도 와 있고. 명진이 할머니도 옆에 계셔. 인사 혀.’’


그리하여 결국 고향 집에 내려가기로 한 계획을 철회한 나.

하지만 그렇다고 송주나 프로에 더 이상 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말도 집에다가는 하지 않고 있는 상황.

오히려 방송 스케줄이 너무 많아 힘들 것 같다고 핑계를 댄 상태.


‘‘엄마가 오빠랑 스피커 통화 좀 하라고. 송주나 본 썰 좀 풀라고 해서.’’

‘‘하하하, 하하하.’’


동네 어르신들 앞이라 애써 웃었지만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주화년 혼자였다면, 야! 어린애냐!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니 애나 쳐 봐! 하고 일갈했겠지만.


‘‘실지로 보면 아직도 완전 여신이라며? 이번에 바뀐 머리 진짜 잘 어울리던데. 뭘 해도 되는 인생. 졸라 부럽던데. 참! 성격은 어때? 평소 말투도 그렇게 우아해?’’

‘‘음 ...... 사실 미팅 때는 잘 몰랐는데 ......’’

‘‘응.’’

‘‘방송 한 번 같이 해 보니까 ......’’

‘‘응. 한 번 해 보니까?’’

‘‘은근히 좀 깨는 면이 없지 않더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깬다고. 주화 너처럼. 아니 너는 깨고 자시고 할 게 없이 원래 첨부터 그렇지만. 아무튼 이야기 하면 할수록 뭐랄까, 볼매 스타일이라기보다 볼깨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어머! 정말이야?’’

‘‘응.’’

‘‘어머머머! 대구, 너 왜 말이 그새 틀려졌어? 지난번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만.’’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호들갑을 떨며 끼어들었다.


‘‘아이, 한 번 만나 본 거랑 두 번 보는 거랑 같나. 초면에 본 것 때문에 인생 망친 인류가 어디 한 두 명이에요? 특히나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자 첫 인상에 속아 넘어간 남자가 어디 한두 명이냐고요. 내 주변만 해도 아버지, 매제, 명숙이 이모부 등등.’’


핸드폰 너머에서 박장대소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모여 있던 동네 어르신들 중 한 분은 바닥을 뒹굴기까지 하셨다.


송주나 옆에서 했던 드립이나 지금 드립이나 뭔 차이가 있다고 이렇게 상반된 결과가 나오다니.

정녕 내 애드립 스타일은 이런 사석에나 어울리는 것일까?


‘‘아니, 뭐가 그렇게 깨던데? 그날 니들 방송 잘 마쳤더만.’’


어머니는 여전히 현실부정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휴, 참나. 방송에서 보여지는 것만 가지고 이야기할 거면 나한테 왜 물어 봐유. 방송 카메라 밖 모습 때문에 나한테 물어보는 거 아닌가유?’’

‘‘대체 카메라 밖에서 뭐가 얼마나 어떻게 다른데, 오빠?’’

‘‘뭐가 얼마나 어떻게 다르냐고?’’

‘‘응.’’

‘‘니 화장 전후만큼 다르지유.’’


다시 또 핸드폰 화면 속에서 빵빵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그러지 말고 구체적으로 썰 좀 풀어보라니까. 뭐가 그렇게 깨던데? 방송 전후 뭐가 그렇게 다르대?’’

‘‘모친! 이제 당신 아들 더 이상 인터넷 바닥 돌아다니는 애드립 팔이 아니라고요. 엄연한 공중파 방송인이라고요. 우리 공중파 방송인 사이에는 지켜야할 선이 있는 법! 다른 방송인 카메라 안과 밖에 대해서 다른 데서 떠벌리면 안 되는 선이요. 주화 쟤 눈 코 양악 성형 비포 애프터 사진 해당 병원들에서 함부로 공개하면 안 되는 거랑 거의 같은 이치에요.’’


대충 그런 식으로 상황을 면피하려고 했다.


‘‘자! 그러면 아버지 생일잔치 잘들 하시고. 혹시 돈 더 필요하시면 바로 문자 줘요. 바로 내 쏴 드릴테니까. 참! 그리고 제가 지난주에 말한 거, 마을 회관에 안마의자 놓을 자리 있어유? 아마 다음 명절에 최고급으로 안마의자 하나 주문해가지고 내려갈 게니까요. 자! 그러면 ......’’


그때였다.

느닷없이 프롬프터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에 보였던 그 프롬프터가 아니었다.


‘‘지난번 내 방송 들어보니까, 대구 쟈가 사고쳤더만. 그래서 저렇게 지금 입에 농약 품고 말하는 거 아니여.’’


팔순을 막 넘기신 고모 할머니셨다.


‘‘대구 인마 니 입에서 얼른 농약 뱉혀. 그거 다 니 목구멍으로 넘어가.’’


이 상황에서 프롬프터는 까마득한 어르신의 인생 경험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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