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참는 남자
철그럭, 철그럭.
묵직한 금속음이 울려 퍼진다.
어설픈 누비 갑옷 따위가 아닌 금속음이다.
병장기로 무장한 병사들은 페인의 마을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전쟁물자를 징발하고 있으니 협조를 요구했다.
“지, 징발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리?”
“말 그대로다, 촌장.”
촌장이 되묻자 병사가 대답한다.
차가운 눈길로 그런 촌장을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주변을 훑어보면서 폭언을 쏟아 부었다.
“버러지 같은 네놈들을 지키기 위해 영주님과 우리 병사들이 피를 흘리고 있다. 염치가 있다면 후방에서 편하게 살아가는 네놈들도 도움이 되어야 할 게 아니더냐?”
병사는 노골적으로 그들을 무시했다.
그 말을 들은 페인은 열이 확 올라왔다.
그가 보기에 영주란 돈 걷는 깡패다.
농노의 삶은 절대 편하지 않다.
마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짐승이며 몬스터가 득실거린다.
후방이라고 해서 안전하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염치가 없다니.
‘미친놈인가?’
그럼 시시때때로 마을을 노리는 도적들은 뭐란 말인가?
도적만 그런 게 아니라 지나가던 용병들도 그랬다.
호시탐탐 마을의 재물과 여자들을 노리는 자들.
가끔 노예로 팔겠다고 마을 전체를 노리던 놈들도 있었다.
그때 영주는 어디서 뭘 했단 말인가?
영주가 보내는 병사는 눈을 씻고 찾아보지 못했다.
페인이 세운 울타리가 아니었으면 옛저녁에 당했을 거다.
울타리 위에서 마을 주민들의 손에 막대기라도 하나 쥐어준 뒤에야 간신히 도적들을 몰아냈다.
나중에 마을을 방문한 관리에게 이 소식들을 전하였다.
이만큼 고생을 했으니 세금이라도 깎아주지 않을까 해서다.
그때마다 영지에서는 ‘어쩌라고’식의 답변만 돌아왔다.
그래놓고는 누가 누굴 지켜줬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양심이 없는 건 오히려 영주 쪽이 아닐까.
페인은 이를 부득 갈면서 병사를 노려봤다.
병사는 그 시선을 느꼈는지 목소리를 깔았다.
“그 불민한 시선은 뭐지?”
“아이고,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나리······.”
병사의 폭언에도 촌장은 그저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렇다, 이곳은 신분과 폭력이 미개한 세상이다.
지나가던 귀족이 사람을 죽여도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농노는 사람도 아닌 물건 취급을 받는다.
농노 따위가 불만을 품어봤자 아무도 그 말을 신경 쓰지 않는다.
병사들도 그런 사실을 알기에 코웃음을 친다.
페인은 속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행동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본보기를 보여줘야겠군. 여봐라! 이곳을 싹 다 털어라!”
“다들 들었겠지! 보리 한 톨도 남김없이 전부 징발한다!!”
“아악! 그건 저희가 겨울동안 먹을 식량이에요!”
“제발, 제발 그것만은 남겨주시, 커헉!”
“이 새끼가 어딜 더러운 손을 뻗어!”
징발을 가장한 유린이 온 마을을 덮친다.
병사들은 마치 메뚜기떼라도 된 것처럼 미친 듯이 약탈을 시작했다.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싹 쓸어버린다.
농노들이 말려서 널어둔 나무뿌리까지 걷었다.
풀뿌리까지 뺏는데 옷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 이러지 마세요!”
“뒤지기 싫으면 그 손 놔!”
“손목을 잘라줄까?!”
병사들이 손을 댄 것은 천쪼가리였다.
여자들이 속옷 대용으로 사용하는 용도.
그게 뭐라고 그거까지 가져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애가 입고 있던 옷까지 벗기려고 한다.
얼마나 전황이 안 좋으면 입던 옷까지 뺏어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저놈들은 그냥 심보를 부리는 걸지도 몰랐다.
그지 같은 일이지만 농노들은 그저 참았다.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
‘참자, 참아야 해.’
약탈은 으레 있는 일이다.
농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병사들의 만행을 지켜봤다.
그런 병사들의 눈에 페인의 가족이 눈에 띄었다.
“저놈들 다른 놈들보다 때깔 괜찮은데?”
“숨겨둔 게 많겠어.”
사실 페인의 가족들은 약탈 1순위다.
다른 농노들보다 잘 먹고 잘 입어서 때깔이 곱다.
잘 먹었다는 것은 그만큼 빼앗을 게 많다는 뜻이다.
페인은 더러운 게 싫었다.
그래서 유난을 떨며 가족들도 깨끗이 씻기고 입혔다.
그 깨끗함이 지금 발목을 잡았다.
‘시발. 깨끗한 거도 문제가 되다니. 빌어먹을 세상 같으니라고.’
병사들이 온다.
페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현대인임에도 제대로 배워먹질 못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
환생을 했지만 딱히 특전 따위를 타고나지 못했다.
남들에 비해서 생각이 조금 트였을 뿐이다.
그나마 그런 페인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이다.
멍청한 아버지가 죽을 걸 알면서도 전장으로 향한 것이 바로 가족 때문이듯 그도 가족을 생각하며 여기까지 버티고 왔다.
안 돌아가는 머리를 죽어라 돌린 이유가 가족 하나라 이 말이다.
멍청한 아버지가 죽을 걸 알면서도 지킨 소중한 가족.
그 가족에게 개잡놈의 병사가 창대를 휘두른다.
퍼억!
우악스러운 폭력이 가족에게도 향했다.
페인의 눈에 쓰러지는 어머니가 보였다.
그의 눈에는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쓰러지는 그녀의 품에는 옷감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페인이 장가갈 때 쓴다고 아껴뒀던 옷감이다.
병사들이 징발하는 걸 보니, 몰래 챙겨두려다가 미처 숨기지 못한 게 분명하다.
거칠고 질도 썩 좋지 않은 싸구려.
그녀는 그게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하게 껴안고 있었다.
털썩-.
땅에는 먼지가 일었다.
그 위로 어머니인 메리가 쓰러져 있다.
어머니, 어머니. 페인의 어머니.
메리의 눈길이 바닥에 떨어진 옷감으로 향한다.
자신보다 옷감을 못 쓰게 됐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듯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서도 옷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눈이 감기면서 정신을 잃었다.
“썅년이, 그러게 왜 반항을-.”
창대를 휘두른 병사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메리를 노려본다.
그것을 본 페인의 눈알이 돌아갔다.
‘죽인다.’
덥썩.
그는 본능적으로 손에 창을 쥐었다.
다른 병사가 약탈을 한다고 내려두었던 무기였다.
창을 집는 순간 페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
두근-.
심장이 뛴다.
지금부터 자신이 뭘 할지 알고 있어서다.
‘죽인다.’
손에 쥔 창으로 찌른다.
배를 갈라서, 내장을 찢어발길 거다.
어머니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 살의가 들끓었다.
하나 그건 어리석은 짓이다.
병사를 죽이고 난 뒤의 후폭풍을 어찌 감당하려고?
‘살려두지 않는다.’
이성은 밖에다 내다버렸다.
머릿속에는 오직 병사를 죽일 생각으로 가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겁한 변명뿐이다.
남들도 다 그런다는 핑계를 대면서 참기만 했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외면하고 모른 체하면서 그렇게 살아왔다.
왜냐하면 그렇게 배웠으니까.
남들도 참는데 혼자만 티를 낼 수는 없으니까!
사회에 순응하기 위해서 모든 욕망을 꾹 눌러 참았다.
그러다 재수 없게 배때기에 칼빵을 맞고 죽었다.
급기야 다른 세상으로 환생해서 농노가 되었고, 여기서도 꾹 참고 살았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이런 개 같은 걸 언제까지 참아!?!’
화가 치민다.
환생해서도 참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자연스럽게 느려졌던 심장박동도 다시 빨라졌다.
두근두근-.
심장이 거칠게 뛴다.
창을 붙잡은 손아귀의 감각이 매우 예민해진다.
‘참아서 나온 결과가 고작 이거다.’
인내가 능사는 아니다.
때론 질러야 할 때도 있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하지만 저놈을 죽이면 다른 병사들이 자신을 죽일 거다.
남겨진 가족도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테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뒷일은 생각하지 말자.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
“죽인다!”
페인은 속에만 담아두던 단어를 꺼냈다.
환생까지 하고 느낀 게 없다면 병신모지리일 것이다.
자신을 농노로 만들고 평생을 착취한 영주를 증오한다.
이젠 몇 안 되는 행복마저도 앗아가려는 병사에게 분노한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약탈에 눈이 먼 병사가 내던진 창대를 집자 익숙한 손맛이 느껴졌다.
창을 잡는 것은 처음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페인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타다다다!
페인은 바닥을 박찼다.
달린다.
그저 양손으로 창대를 붙잡고 앞을 향해서 달렸다.
‘찌른다.’
달려가면서 추진력을 얻는다.
본능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러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거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머릿속을 쾅쾅 울렸다.
그의 시야로 놀란 기색의 병사가 들어왔다.
어머니가 품에 쥔 옷감을 주우려고 허리를 숙인 상태였다.
“뭐, 뭐야 저놈은?!”
당황하는 병사의 얼굴이 보인다.
어정쩡한 자세로 몸이 굳은 것이 이대로 공격하면 제대로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도 이기지 못하면?
뭐······그때는 죽기보다 더하겠나?
이미 뒤져본 자만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페인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로 창을 내질렀다.
- 작가의말
내일은 연참이 있습니다
오후 6시에 1번, 오후 10시에 1번씩 있으니 많이많이 봐주세요!
가시기 전에 좋아요 한 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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