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방의 연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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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 - 탈진의 물약

DUMMY

#026




“탈진의 물약?”


【 대상을 서서히 탈진시킵니다. 】


살면서 수도 없이 접해본 단어다.

사전적 정의는 잘 몰라도 대충 ‘지친 상태’ 정도로 이해하면 될 터였다.


제조법을 보며 가만히 턱을 어루만졌다.

사람을 지치게 하는 물약을 대체 얻다 써먹지?

다른 건 대충 느낌이라도 왔는데, 이건 좋은 쪽으로 활용할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이나 모니터와 눈싸움을 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든 쓰겠지.”



< 26 >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샤워를 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털다가 손이 우뚝 멈췄다.


“···배 나왔네?”


내 몸에 붙어있는 살덩어리인데도 낯선 기분이다.

원양어선에서는 살찔 틈도 없이 움직였고, 서울에서는 마음이 힘든 탓에 틈만 나면 끼니를 거르곤 했다.


한약방 백수로 살면서도 살이 안 찐 이유는 아마 자전거 때문일 테고···.


“아침마다 동네라도 좀 뛰어야겠다.”


괜스럽게 입맛을 다시며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잠들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왜인지 오늘따라 눈이 말똥말똥했다.


고민하다가 연금술 가방을 꺼냈다.

탈진의 물약을 만든다고 지금 바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괜히 미루다가는 시간이 없을 수도 있었다.


“어디 보자···.”


재료들을 차례대로 가방에서 꺼냈다.

탈진의 물약에 들어가는 재료는 총 4개였다.


서큐버스의 옷조각, 말린 이끼, 소금···,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나 가루.


가만 보면 물약에 들어가는 재료들은 만들려는 물약과 공통점이 있었다.


힘의 물약에는 오크의 힘줄.

아가미 물약에는 온갖 해산물.

탈진의 물약에는 인간의 꿈에 나타나 정기를 빼앗는다는 서큐버스의 옷조각.


남들은 모르는 이스터에그를 발견한 것 같아 괜히 기분이 들떴다.


그 뒤로는 익숙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솥에 물을 넣고, 불을 올리고, 재료들을 넣고···.

원래라면 국자로 젓는 건 둥둥의 역할이었지만, 의자에서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내가 직접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나자 액체가 보글보글 끓어올랐고, 이내 탁한 갈색빛으로 변했다.


“색이 좀···.”


차마 음식 앞에서 똥물이라는 단어를 뱉지는 못했다.

재료들이 모두 녹아 없어진 것을 확인한 후 국자에 물약을 가득 떴다.


“많이 먹을 필요는 없겠지?”


괜히 먹었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떨리는 기분으로 국자에 입을 댔다.


호록-!


숟가락으로 먹어도 될 정도의 양이 목으로 넘어갔다.


“응?”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 상태를 살폈다.

당장 느껴지는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약을 너무 조금 먹을 때 종종 발생하는 일이었다.


“계속 먹어도 되나···.”


고민스러운 얼굴로 국자를 바라봤다.

몸에 좋은 물약도 아니고 계속 먹었다가는 무슨 탈이 날지 몰르기도 했고, 무엇보다 까먹은 게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문제는 뭘 까먹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거지만.


“에이, 몰라!”


후루룩-!


국자에 있는 물약을 반 정도 입에 들이부었다.

다시금 시간이 지났고, 몸이 약간 무거워지는 기분만 들 뿐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생각보다 효과가 덜 한 건가?


다행스러운 마음 반, 실망스러운 마음 반으로 국자에 남아있던 물약을 모두 마셨다.


“맛은 좋네.”


모든 물약이 대단할 수는 없다.

그랬다면 연금술사가 인기 직업이었겠지.

만들다 보면 분명 꽝도 있을 테고, 추측건대 지금이 딱 그런 경우인 듯했다.


그래도 이정도면 먹을 만큼 먹었다.

물약을 보관할 통을 가지러 작업실로 향하려는데 순간 몸이 휘청였다.


“어···, 어어?”


쿵쿵-!


좀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심장이 50m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가빠졌다.


“이, 이거 왜 이래?”


쿵쿵쿵-!


귀 옆에서 심장이 뛰는 듯하다.

잠깐 사이에 50m가 아니라 100m를 뛴 것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등줄기에서는 폭포처럼 땀이 흘렀고 타들어 갈 듯한 갈증이 밀려왔으며, 온몸에 에너지가 전부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제야 까먹고 있던 게 떠올랐다.


【 대상을 서서히 탈진시킵니다. 】


서서히.


멍청하게도 가장 중요한 내용을 잊고 있었다.

100m를 뛴 것 같던 심장이 잠깐 사이에 200m, 300m를 더 뛴 것처럼 가빠졌다.


“허억···, 허억!”


무거워진 몸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몇백 미터를 전력 질주한 것처럼 손발이 덜덜 떨리고 미친 듯이 땀이 쏟아졌다.


이게 탈진이구나.


헉헉대며 마당을 기어 다니는데 문득 익숙한 찰흙 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일어났는지 둥둥이 작업실 통창에 납작하게 붙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놈의 눈빛이 불길하게 반짝였다.


“두···, 둥둥! 허억! 문 좀 열어 줘! 허억!”


저 작은 놈이 나를 부축하지는 못할 터였다.

작업실까지 기어서 들어가는 건 내 몫이다.

다행히 말귀를 알아들은 둥둥이 후다닥 문을 밀었다.


끼익-!


“자, 잘했···.”

“둥둥!”


놈이 열린 문틈으로 쏙 빠져나오더니 나랑 같은 자세로 바닥에 엎드렸다.


순간 어이가 없어서 놈을 바라봤다.

뭐 하는 건가 싶었는데, 아마도 내가 동물 흉내를 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둥! 둥둥!”

“너···, 빨리 가서···, 허억!”


놈이 짤막한 네 발로 주변을 빙빙 돌았다.

복장이 터져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이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끝내 바닥에 풀썩 고꾸라지며 얼굴을 박았다.

차가운 잔디로 가쁜 호흡이 퍼져나갔다.


“너는···, 내일 죽었어···.”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눈이 감겼다.


* * *


다시 눈을 뜬 건 해가 중천에 뜬 오후였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았다.


“으···, 목말라.”


간밤에 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쳤다.


앓는 소리와 함께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흙덩어리였다.


제 주인은 마당에서 기절했는데 침대에서 잠을 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둥둥 앞으로 걸어갔다.


쪼르륵-!


“두아악!”


얼굴에 물을 붓자 둥둥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놈이 축축해진 얼굴을 감싸며 창고로 도망갔다.

쫓아가서 머리통이라도 한 대 때릴까 하다가 관두고 웃옷을 벗었다.


간밤에 흘린 땀 때문에 온몸이 찝찝하다.


화장실로 들어와 곧장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이 쏟아지니 생각지도 못한 쾌감이 느껴졌다.


땀을 흘려서 그런가?


헬스장에서 힘들게 운동한 다음 샤워를 하는 기분이다.

개운하게 샤워를 끝내고 화장실에서 나오려는데 문득 어제와 다른 형체가 거울에 비췄다.


“···뭐야?”


멍청한 얼굴로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는 갸름해진 것도 모자라 피부가 도자기처럼 반들거리는 내가 서 있었다.


하루 만에 살이 빠지고 피부가 좋아졌다.


왜?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건 물약 때문이다.

헐레벌떡 화장실에서 나가 마당으로 향했다.

솥에는 어제의 갈색빛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침을 꼴깍 삼키며 물약을 국자로 떴다.

이걸 또 한 바가지 들이켰다가는 기절 정도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새끼손가락에 물약을 쿡 찍어 입에 넣었다.

아몬드 같은 고소함과 쌉싸름한 맛이 혀를 감쌌다.


“······.”


최대한 몸 상태에 집중했다.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으니 내가 직접 몸으로 느끼고 이유를 밝혀내야 했다.


그러기를 몇 분.


이마에서 촉촉한 습기가 느껴졌다.

땀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수준이다.

심장 역시 미묘하게 빨리 뛰는 듯했지만, 숨이 차거나 하지도 않았다.


굳이 기준을 정하자면 동네 한 바퀴 산책한 정도다.


그 뒤로도 얼마간 더 몸 상태를 관찰했다.

어제처럼 후폭풍이 밀려오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손가락에 찍어 먹은 정도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흐음.”


팔짱을 끼고 물약을 노려봤다.


물약은 2종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사용자가 먹는 물약.

회복 물약이나 성스러운 물약, 힘의 물약, 부활의 물약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상대에게 먹이는 물약.

이건 엄밀히 따지면 ‘공격용’ 물약이었다.

노화의 물약이나 폭발의 물약이 대표적이었고, 탈진의 물약도 따지자면 이쪽 분류였다.


“탈진···.”


탈진이 정확하게 뭐지?

게임사가 정해놓은 정의가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 속에서의 정의일 뿐이었다.


현실 세계의 물약은 엄연히 다르다.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계속 먹어보는 수밖에 없나?”


나도 무식하게 접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건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심스럽게 국자에 손가락을 찍었다.


* * *


이독제독(以毒制毒).


독으로써 독을 치료한다는 말로, 무협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말인 것과는 달리 실제로 의학에서도 독을 약처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탈진의 물약은 엄밀히 따지면 독이었다.

먹은 사람의 에너지를 몽땅 뺏어가니까.


그렇다면 에너지란 무엇인가?

인간의 몸에서 에너지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영양소였고, 이는 칼로리를 말한다.


탈진의 물약은, 쉽게 말해 '몸에 있는 칼로리를 전부 태워버리는' 물약이었다.


“허억···, 허억.”


바닥에 누워 가쁜 숨을 골랐다.

몸속의 에너지가 다 타버린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옛날에 취미로 복싱을 배웠을 때가 있다.

3분짜리 스파링이 끝나면 이 꼴이 나곤 했지.

물약을 먹으면 고강도 운동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건 그냥 느낌이 아니었다.


내 몸은 실제로 그런 상태가 됐다.


“하···, 하하!”


입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생사가 오가는 판타지 속에서는 실로 치명적인 물약이지만, 여기는 21세기가 아니던가?


누워서 먹기만 해도 에너지를 태우는 물약.

노화의 물약이 농업 혁명이라면, 탈진의 물약은 다이어트 혁명이다.


혼자 실실 웃음을 흘리는데 마당으로 익숙한 세단 한 대가 들어섰다.


끙하고 몸을 일으켰다.

운전석에서 내린 건 기사가 아니라 강하윤이었다.

두리번거리던 강하윤이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광합성 중?”

“아니요.”


강하윤이 걸어 오더니 빤한 시선으로 나를 봤다.


“무슨 일 있었어요? 얼굴이 반쪽이 됐네.”

“다이어트 중입니다.”

“···갑자기?”

“작업실에만 박혀있었더니 군살이 붙어서요. 근데 어쩐 일로 직접 차를 몰고 오셨어요?”

“저 원래 운전하는 거 좋아해요. 마침 최 비서가 휴가이기도 하고···.”

“아하.”


끄덕이며 작업실로 향했다.


“우선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뒤따르던 강하윤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은 여태 마당에 놓고 치우지 않은 탈진의 물약 쪽으로 향해 있었다.


“이건 뭐예요?”

“신제품이요.”

“아하.”


강하윤이 겁도 없이 국자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자, 잠깐만···!”


강하윤이 태연히 입맛을 다셨다.


“음, 맛있네. 아몬드 들어간 건가?”

“그, 그만 먹어요!”


급히 달려가서 국자를 뺏었다.

강하윤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무 아까워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게 아니라···. 저번에는 주치의가 처방해준 약 아니면 먹지도 않는다면서요?”

“백현호 씨가 만든 건 몇 번 먹어봤잖아요. 나한테 잘 맞기도 했고.”


회복 물약을 말하는 건가?

그보다 왜 아무렇지도···.


“어어?”


강하윤이 놀라서 휘청거렸다.

잠깐 사이에 얼굴까지 창백해진 상태였다.


역시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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