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기원의 난
김자점, 김류가 이종과 흉계를 꾸미는 가운데, 심기원은 최명길 등 그와 뜻을 함께하는 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산해관이 열리고 명 조정이 파천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심장이 떨어지는 줄만 알았건만, 저하께서 옥체를 보존하신 것으로 모자라 청의 큰 예우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신다니, 역시 왕재시네. 왕재야!”
껄껄 웃으며 기쁨을 숨기지 않는 심기원은 제 손에 든 술잔의 술이 넘쳐 제 옷깃을 적시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흥겨워했다.
“우리 조선이 앞으로도 국체를 보전하자면 앞으로도 저하께서 분명히 역할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인데, 이를 전하께서 가납하실지가 문제로군.”
심기원은 이내 목소리를 낮추며 은근한 투로 말을 이었다.
“오히려 견제라도 하려 하시는 날엔 청 조정이 조선 내부의 일을 깊이 살피게 하는 발단이 될 터.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면 전하께서 함부로 할 뜻조차 품지 못하시도록···.”
“청원군, 말이 과한 듯하네.”
심기원의 말이 꽤 엄한 지경까지 나아가려 하자, 최명길이 이를 끊고 나섰다.
하지만 심기원은 도무지 물러설 뜻이 없는 듯했다.
“과하다니? 우리가 이 나라의 훗날을 진심으로 염려한다면, 이는 말을 넘어 행동으로 실현해야 할 일이네.”
“이보게, 청원···.”
“이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세. 여기 모인 모두가, 심지어는 전하께서 크나큰 믿음으로 곁에 불러들이신 낙서(洛西, 김자점의 호)마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네.”
“낙흥부원군이?”
“그래. 안 그래도 벌써 우리 집을 다녀가며 그 대업을 위해 훈련도감이 할 바를 묻더군.”
심기원은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근래 평성부원군의 건강이 좋지 않아 근심이 크던 차가 아닌가? 나라의 군세 절반을 통제하던 당여가 힘을 쓰기 어려운 와중이고, 내가 손에 쥔 수어청은 남한산성을 주재하니 도성을 통제할 수 없는 형국일세. 저하께서 돌아오신 뒤에 별안간 전하께서 참담한 일이라도 획책하시면 어찌 되겠는가?”
“···그런 일이 없도록 도성을 통제하는 훈련도감이 저하를 옹위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그렇지. 어디에 진정 살길이 있는지 보는 안목으로는 낙서가 역시 으뜸이라 할 것이니, 그런 낙서의 눈에도 결국 저하야말로 이 나라가 살게 할 유일한 길로 보인 게지.”
심기원은 평소 잘 알고 있는 김자점의 그 박쥐 같은 성품을 이유로 깊은 신뢰를 보였다.
“평성부원군이 물러나면 군권은 온통 전하의 인척인 구씨 집안이 좌우할 것인데, 어디 그자들이 전하보다 저하를 위하겠는가? 그러니 우리가 뜻을 이어가자면 낙서는 꼭···.”
“그래서? 그래서 낙서와 무슨 이야기를 또 나눴는가?”
심기원은 김자점을 끌어들여야 할 이유를 거듭 설명하려 했으나, 순간 다급해진 최명길의 목소리에 말을 다 이을 수 없었다.
“뭐··· 낙서가 이르기로는 전하의 병세도 결코 가볍지 않으니, 이를 빌미로 대리청정을 청한다든가, 혹 불온한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수어청 군사 일부를 도성 인근으로···.”
“설마 그 말을 듣고 벌써 수어청에 군령을 내린 건 아니겠지?”
“허허, 군령까지야. 그저 훈련도감의 일을 나누어 맡을 여력이 될지 군관들에게 살피라···.”
“당장 그 말부터 거두어오게!”
최명길은 심기원의 말에 평소 그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허허, 갑자기 왜 그러는가? 이는 저하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이고, 또 낙서가 먼저 청한···.”
“낙서는 아직 조정에서 단 한 차례도 저하를 위해 전하께서 무언가 챙기셔야 한다 말한 적이 없네! 그런데 어찌 그 말을 믿고 벌써 일을 가늠한단 말인가! 이는 자칫 엄한 빌미가 될 수도 있음을 몰라? 어찌 내게 상의도 없이!”
“빌미는 무슨 빌미? 설사 빌미가 된다 하여도 전하께서 대놓고 우릴 치실 수 있겠는가? 우릴 친다는 것은 곧 저하를 끌어내리겠다는 뜻이고, 이는 청주에게···.”
세자를 공격하는 일과 친청은 함께 갈 수 없다.
이는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기에, 심기원의 안일함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어찌 수가 없겠는가?”
최명길의 뇌리에는 분명 한 가지 수가 선명하게 스쳤다.
그건 바로.
“아이고! 주인마님!”
최명길이 떠올린 바를 얼른 풀어놓으려던 그때, 밖에서 청송 심문의 종복이 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물을 새도 없이, 요란하게 집안 집기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장정들 들이닥치는 소란 소리가 이들 모두의 귓전을 때렸다.
“이, 이게 무슨···!”
심기원은 당황하며 일어나 상황을 물으려 하였으나, 이에 대한 답은 그가 묻기도 전에 그에게 돌아왔다.
“죄인들은 오라를 받아라! 감히 명의 위세를 빌려 전하를 폐하고 세자를 올리려 한 역도들을 모두 잡아들이란 어명이 떨어졌으니!”
어느새 이들이 모여있던 곳까지 들이닥친 장정들은 요란하게 문을 부수며 그렇게 외쳤다.
그 있지도 않은 역모를 운운한 장정들이 입은 군복은 김자점이 제조로 있는 훈련도감의 것이었다.
이날의 일은 조선의 왕 이종이 이름 붙이기로는 심기원의 난이라 하였다.
***
청 사절들이 내 귀국 소식을 조선에 전하고 돌아오길 기다리며, 나는 귀국에 앞서 미리 챙길 일들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일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에 임하고 있었다.
“이것 참 아쉽습니다. 내 근래 허왕비와 사귀는 일보다 더한 기쁨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나와 빈궁을 불러 마주 앉아 한껏 살가운 목소리를 내는 상대는 바로 영복궁 장비, 일찍이 홍타이지와의 대화에서 내가 지지할 이로 언급했던 아이신기오로 풀린의 친모였다.
일찍이 내가 조선에 청의 사절로 다녀오던 때 홍타이지의 허락으로 연이 트였기에 오늘과 같은 자리가 마련된 것이었다.
“마마께서 이렇듯 제 처를 기꺼이 여겨주시니, 실로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허허, 허왕이 참 처복이 많습니다.”
내가 한껏 겸양하자, 장비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더욱 호의를 드러냈다.
“아쉬운 것이 그뿐만이 아닙니다. 허왕이 돌아가게 되면 조선에서 보낸 시강원 인사들도 돌아갈 터. 그럼 우리 황자가 요동에서 유배나 당하던 한미한 인사들에게만 학문을 익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뒤이어 장비는 아들 교육에 관한 아쉬움을, 실상 이 대담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슬쩍 꺼냈다.
“물론 그들 사이에서 범문정(范文正) 같은 이들도 나왔음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이는 폐하께 인복이 따른 것이지 요동에 웅크리고 살던 한족 인사들을 높이 볼 일은 아니지요. 그렇다 보니 과연 그들만으로 황자에게 왕도를 온전히 가르칠 수 있을지가 참···.”
“폐하께서 엄선하시어 귀히 쓰시는 자들이 어찌 부족하겠나이까? 다만, 아무리 훌륭한 선생들을 쓰더라도 교육에는 응당 근심이 따르는 법이니, 마마의 근심은 부모로서 마땅히 품을 만한 바라 여기옵니다.”
나는 내가 한족 인사들을 폄훼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며, 장비의 바람에 은근히 장단을 맞췄다.
“저는 이미 폐하께 성충을 다하기로 하였으니, 마마의 근심은 곧 저의 근심이나 다름없나이다. 하오니 마땅히 그에 답하는 바가 있어야겠지요.”
“호오, 그럼 어찌 이 사람의 근심을 다스릴 생각입니까?”
“시강원은 응당 신을 따라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나, 마마께서 조선의 학자들을 귀히 여겨주신다면, 조선에서 마마께서 흡족하게 여기실만한 이들을 새로 뽑아 파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옵니다.”
“우리 대청에서 중화의 도를 구할 곳이 조선 말고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조선에서 가히 최고의 학자라 치는 자들이라면, 이 사람이 직접 조아리는 예조차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학자들을 새로 파견하겠다는 말에, 장비는 아주 극진한 예절을 입에 담았다.
“자고로 군사부일체라 하였으니, 허왕이 우리 황자의 교육에 그리 애써준다면, 이는 황자를 위해 아비와 같은 노고도 마다치 않겠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리고 장비는 내게 향후 풀린의 황위 계승을 적극적으로 도울 것을 주문했다.
이미 친정인 몽골 호르친 부족의 힘을 끌어오고, 홍타이지의 서장자인 호거를 경계하여 도르곤 등과도 연합한 그녀는 이제 청이 중화제국을 자처하는 근거로 삼는 조선의 지지까지 바라고 있었다.
역사의 흐름을 분명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는 제안.
따라서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화답할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마마, 조정에 큰일이 있어 허왕이 서둘러 입시하여야 할 듯하온데···.”
다소 소란스럽게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소로 다가온 장비의 시비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명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거기서 대공을 세워 홍타이지의 완전한 신임을 산 내게 이 시점에서 곤란할 일이 뭐가 있다고 저러는가?
절로 의문이 솟아나는 상황이었지만, 청 조정에 들어 확인할 일이라면 애꿎은 시비를 괴롭힐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얼른 예를 갖추고 물러나 청의 중신들이 모인 편전으로 들었다.
그리고 나는 내 귀국 소식에 화답하고자 들어온 조선 사절들을, 그리고 그 수장으로서 홍타이지 앞에 조아리고 있는 김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폐하, 찾으셨다···.”
얼른 홍타이지를 향해 예를 갖추려 하였으나, 나는 그 말을 채 맺을 수 없었다.
이는 내가 예를 갖출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감히 제 조국의 세자가 하는 말을 끊으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김류 때문이었다.
“폐하, 참으로 황망할 따름이오나, 이는 사실이옵니다. 그간 부자간의 정리로 차마 고하지 못하였으나, 신하 된 도리로 어찌 이를 끝까지 모른 척할 수가 있겠나이까?”
뭘 부자간의 정 때문에 말하지 못해 왔단 말인가?
그 정은 분명 내가 조선에 사절로 갔던 그때 이미 사라졌을 텐데.
“이것이 그 증거이옵니다!”
내가 속으로 의문을 품는 사이, 김류는 자신만만하게 소매에서 눈에 익숙한 교서를 꺼내 바쳤다.
그건 분명 내가 숭정제에게 받았던 발해왕 책봉 교서였다.
저게 왜 지금 여기서 튀어나오는가?
이 황당한 광경에 새로운 의문을 품는 그 순간, 나는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인조는 지금 자신의 위세를 넘어선 듯한 아들을 맞아들이는 대신 원수의 손을 빌려 무참히 죽이기로 한 것이다.
“조선의 중신들이 세자와 공모하여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니, 이에 명의 세력을 빌리고자 감히 폐하를 상대로 참담한 뜻을 세웠었나이다. 실로 천운이 돕고, 또 천명이 폐하께 있어 일이 이뤄지지는 못하였으나, 어찌 일이 이뤄지지 않았다 하여 역모가 아니라 하겠나이까?”
내가 명을 도와 심양을 치고, 더 나아가 홍타이지를 해치려 하였다.
말로만 존재하는 계획, 극소수만이 알던 계획이 청 조정의 모두에게 공표되었다.
이에 자연히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니, 여기까지만 보면 인조가 바란 결과까지는 코앞인 듯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내 아버지의 바람은 내겐 여기까지 몰린 와중에도 그저 어처구니없는 일일 뿐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모르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이 추태는 자해행위에 불과했으니까.
“허왕이 짐을 속이고 명을 도우려 하였다?”
홍타이지는 날 지칭하는 여러 호칭 가운데 그가 새로 내린 왕작을 언급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자못 선명했지만, 김류는 통역을 통해 전달받기 때문인지 이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예, 폐하! 이렇듯 고하면서도 송구한 마음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오니···.”
“그럴 리가 있는가? 이는 짐이 허왕과 소통하여 일찍이 알고 있었던 일이거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이는 명이 이 거짓 제안에 속아 그 물화를 허왕에게, 그리고 짐에게 내어주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더불어 그릇된 기대로 짐의 군사들 앞에 제 병력을 내어놓게 하기 위함이었지. 그런데 이것이 진실로 짐을 해치려는 흉계였다?”
그렇게 반문한 홍타이지는 이내 김류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혹, 조선왕은, 그리고 그대는 이를 진실로 기대하여 허왕의 대업에 국력을 보탰던 것인가?”
홍타이지는 이미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몰랐던, 오직 내가 적당히 걸러 전해줬던 정보만을 알고 있던 김류는 그대로 큰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실시간으로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그의 얼굴이 그의 속내를 대변하고 있었다.
“짐에게 충성을 다짐한 조선왕이 설마 그럴 리는 없고···.”
“예, 예! 폐하! 물론이옵니다! 어찌 그런···!”
“그럼 조선왕의 정신이 혼미해진 것인가? 몇 해 전부터 건강이 안 좋다는 말을 자주 하더니, 필시 그로 인한 것이리라.”
홍타이지는 대뜸 인조에게 금치산자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는 한껏 굳은 표정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일국의 중신이란 자가 임금의 정신이 혼미한 것을 들어 양국의 우호를 해칠 기회로 삼고, 더 나아가 국본을 끌어내리려 하였으니, 지금 짐의 앞에 조아리는 이놈은 번국의 사절이 아니라 역신이지 않은가?”
“폐, 폐하!”
“허왕은 들어라!”
홍타이지는 김류의 변명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나는 덤덤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예, 폐하.”
“그대의 아비가 실로 곤궁한 처지에 있는 듯하니, 그대의 귀국이 순탄할 리가 없도다. 안전을 도모하고 아비를 구하자면 마땅히 대비가 필요할 터. 그대는 충분한 호위를 이끌고 귀국하여 아비를 구하고 잘 다독여 이 흉참한 오해를 풀라.”
그 즉시 홍타이지는 내 귀국길에 군사를 일으킬 것을 천명했다.
말이야 안전, 설득을 운운하고 있지만, 이는 내게 힘으로 왕위를 계승할 것을 제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무어라 답해야 하는가?
이를 잠시 속으로 헤아리는 사이, 다시금 홍타이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는 조금도 짐의 뜻을 헤아리려 애쓸 필요 없다. 짐은 지금이 지난날 그대에게 옷을 지어주며 한 약속을 지킬 때라 여길 뿐이니.”
홍타이지의 약속, 이는 바로 때가 이르면 날 직접 왕으로 만들겠다는 것.
따라서 그는 지금 내게 그간의 내 모든 호의와 협력에 그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 뜻이 이러한데 더 무슨 말을 떠올리겠는가?
내 입에서 나올 말은 하나뿐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렇게 내 귀국은 단순한 귀국이 아니게 되었다.
나의 불효가 아닌, 오직 인조 본인의 비정함으로 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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