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초원으로 향하는 혈로(血路)!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사슬에서 벗어나 흑룡두와 신촌까지 다섯 개의 요새를 세우는 동안 가장 많은 전공을 올린 이반이다.
이반은 빅토르가 이끄는 흑룡 별무반의 직할대를 지휘하고 있다. 아직 그 수가 정규 별무반에 이르지 못했지만 예비대까지 합치면 얼추 3천이 넘어가는 군세다.
다만 흑룡두를 포함한 네 곳의 요새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최전방인 신촌에 많은 병력을 할애하지 못했다.
그게 지금 빅토르의 발목을 잡았다.
이반이 으슥한 밤을 이용해 동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요새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지금 할하부 전사들이 공격하는 서문과 반대편에 있는 동문이다.
동문은 그 크기가 작았다. 그래서 닫혀 있을 때는 성문인지도 모를 정도다. 그러나 지금 밖으로 나서는 이반의 부대를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그들은 할하부에서 풀어놓은 정찰조였다.
“놈들이 나온다. 대략 50 정도..., 넌 재빨리 장군께 이 사실을 알려라. 저놈들 아주 저승길로 보내주자.”
버티다 못한 요새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기습병력을 내보낸 것을 간파한 할하부에서 2백의 정예 전사를 급히 서문 근처로 파견했다.
이반은 조심스럽게 서문 방향으로 움직였다. 야전이 아니어서 별도의 척후조를 내보내지 못한 것이 걱정되었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따질 때가 아니었다.
말발굽에 헝겊을 씌우고 소리를 죽여가며 서서히 접근하고 있을 때였다.
시잇. 쉬이잇. 쉬익. 쉿.
갑자기 이반의 부대를 향해 화살이 날아들었다. 이건 명백히 자신들의 의도가 간파되었다는 의미였다.
“이런...×팔. 매복에 걸렸다. 말 뒤로 몸을 숨겨라.”
적군을 기습하려다가 오히려 매복 기습에 당해버렸다. 결사대로 나선 전사 여럿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튼튼한 가죽 갑옷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화살 한두 발에 치명상을 입지는 않겠지만 출혈이 멈추지 않으면 죽는다.
날아드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목숨처럼 소중히 아끼던 전마의 시체 뒤에 숨어 버티고 있지만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
“개새끼들..., 화살만 쏘고 근접전을 피하는구나.”
이반은 빅토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습을 반대할 때 그냥 따를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놈들이 좁혀옵니다.”
“버텨! 어차피 이곳을 벗어날 방도가 없다. 한 놈이라도 더 저승길로 끌고 가자.”
이반이 이를 앙다물었다. 너무 세게 물었던지 피가 배어 나왔다. 비릿한 혈향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아아아아. 쳐라!”
삼면에서 조여든 몽골 전사들이 동시에 공격해 들어왔다.
이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열 걸음 앞으로 다가선 놈에게 연노를 발사했다.
세 발의 화살이 시위를 떠났고 그중 두 발이 적군을 덮쳤다. 운이 좋았다.
이반은 기다리지 않고 몸을 날려 한 바퀴 구른 뒤 칼로 적군의 발목을 날렸다. 순식간에 세 놈을 제거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카자크 전사는 기마전에도 강했지만 단병접전에서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할하부 전사들 역시 전투에 이골이 난 놈들지만 카자크 전사에게는 한 수 접어주어야 했다.
놈들이 공격을 너무 빨리 서두른 것이다. 계속 화살 공격으로 진을 빼고 숨통을 조였다면 어렵지 않게 몰살을 시켰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중과부적이다. 적군 두 명에 카자크 전사 한명 꼴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반의 눈이 뒤집혔다. 그는 닥치는 대로 적군을 베고 쓰러뜨렸지만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어느새 포위망에 갇혀 동료들끼리 어깨를 맞댈 정도까지 내몰렸다. 마치 몰이사냥을 당하는 짐승처럼.
이반은 가죽과 철편을 덧댄 갑옷 이곳저곳이 적군의 칼날에 뚫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장검을 휘둘러 적군 여럿을 베어 넘겼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고 해도 한없이 용력이 솟구치는 전설 속의 광전사가 아닌 바에야 기력이 다할 수밖에 없었다.
철컥.
이반의 한쪽 무릎이 바닥에 꿇렸다. 장검의 끝이 땅바닥에 박혀 있지만 그의 눈빛은 적을 향하고 있었다.
“저 새끼...죽여! 저놈 손에 우리 전사 열 명이 넘게 죽었다. 무엇하느냐? 목을 쳐라.”
적장이 소리쳤지만 누구도 쉽사리 덤빌 수가 없었다.
포위망 안에 갇힌 일곱 명의 상처 입은 맹수들이 마지막 기력을 짜내 최후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반과 전사들의 살기가 적병들의 접근을 막았다.
“에이. 머저리 같은 새끼들. 화살을 쏴라.”
순간 포위하고 있던 몽골 전사들이 활에 살을 걸고 이반과 동료들을 겨누었다.
“후후. 뭐 이 정도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겠지. 열한 놈을 베었어. 크크큭.”
“대장!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그럼. 울어? 이 정도 날뛰었으면 할 만큼 한 거지. 안 그래? 나머지는 빅토르 형님 몫이지. 미안하다.”
“미안하기는...대장 지켜주지 못해 내가 미안하지.”
이반과 동료들은 죽기 전에 몇 마디 나눌 시간이 있어 그나마 행복했다. 놈들이 겨누는 화살을 피할 길은 없다.
솔직히 조금의 기력만 있었어도 한 놈 정도는 더 저승길 동무로 삼을 수도 있었다.
죽음을 앞둔 마당에 서로 웃고 떠들며 노는 꼴이 못마땅한 몽골 장수가 벼락같이 외쳤다.
“쏘지 않고 뭐해. 쏴라!”
쉬익. 쉬잇. 쉭. 시잇. 시시싯.
“으악.”
“커허억.”
“어...어떤 놈...?”
막 화살을 날리려는 몽골 전사들을 향해 수십 발의 화살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반과 전사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던 때 갑자기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적군을 보고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뒤이어 난입한 검은 복색의 갑주를 입은 전사들이 무방비 상태의 몽골 전사 수십 명을 순식간에 도륙해버렸다.
“이...이반..., 어딨느냐?”
“마...마스터...? 어떻게...?”
이반은 너무 놀라 부릅뜬 눈으로 이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기절하듯이 바닥에 쓰러져 눈을 감아버렸다.
“이반..., 이 새끼..., 눈을 떠라. 이반...!”
이한의 목에서 처절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한은 몽골군을 정탐하기 위해서 직접 정찰조 30명을 이끌고 강가 억새밭으로 숨어들었다.
서문 근처까지 접근해 적군의 군영을 살피고 물러서던 중에 갑자기 벌어진 전투를 목격하고 급하게 현장에 다가갔다.
그런데 치열한 교전 끝에 포위된 아군을 보고 눈이 뒤집혀버렸다.
다른 사람에 비해 유난히 밝은 이한의 시야에 부상을 입고 포위된 채 죽음을 앞둔 이반과 부하들이 보였다.
마지막 일전을 겨루기 위해 고슴도치처럼 움츠려 적군과 대치하고 있는데 적장이 화살을 쏘라는 명을 내리고 있지 않은가.
이한은 부하들에게 수신호로 적군을 요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화살을 쏘자마자 곧바로 난입하여 적군을 도륙해버린 것이다.
빅토르 다음으로 정을 많이 주었던 카자크 전사 이반. 그가 죽었다. 이한은 이반을 안고 울부짖었다.
“으아아아! 이반..., 이반.”
“주...주군! 이곳은 적지입니다. 어서 이곳을 떠야...,”
바얀이 이한의 어깨를 흔들었다. 넋을 놓고 있던 이한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모두 데려간다. 죽은 놈들까지...모두...,”
그 말과 함께 이한이 이반의 시체(?)를 들어 올렸다.
“으윽...,”
그 순간 죽은 줄만 알았던 이반이 신음을 내뱉었다.
“이...이반..., 사...살았구나. 이반!”
“마스터..., 맞군요. 마스터가 저흴 구하러 오셨군요.”
피를 많이 흘려 파리해진 얼굴에 웃음이 감돈다. 이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얀. 부상자들 응급조치해. 이반은 내가 하겠다.”
이한은 군장에서 천과 노끈을 꺼내 신속하게 지혈을 하고 응급처치를 했다. 이한의 손놀림이 무척 조심스럽다. 마치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이.
피를 많이 흘려 파리해진 얼굴로 이한을 바라보는 이반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벌써 두 번째다. 마스터가 자신이 목숨을 구한 것이.
“마스터께 자꾸 빚이 늘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소릴..., 그 빚 차곡차곡 쌓았다가 죽을 때 한꺼번에 갚아. 뭐 나보다 먼저 죽는다면...,”
“허허허. 당연하지요. 제가 나이가 훨씬 더 많은데...,”
이반은 서른이 넘었다. 그는 카자크족 전사 중에서도 실력이 무척 뛰어났다. 빅토르조차 이반에게는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완전무장하고 혈통 좋은 군마를 탄 이반은 어지간한 적군 몇십 명은 찜 쪄 먹을 정도로 뛰어난 전사다.
이한은 살아남은 이반과 부하들을 서둘러 강 건너 자신의 진영으로 옮겼다.
할하부에서는 2백 명이나 보낸 매복군이 전원 몰살을 당한 것을 알고 공성을 중단시켰다. 카자크 전사의 시체도 40구가 넘었다.
그러나 사상자 비율은 터무니없이 자신들이 높았다. 적군의 기습사실을 알고 미리 매복을 깔아두었는데도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사실 과거 전성기 시절의 몽골 전사들은 강했다. 여진 족속 따위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하물며 서쪽 초원에 거주하던 카자크쯤이야.
그러나 완전히 바뀌었다. 카자크 전사들은 루스 차르의 지원을 받아 동진했다. 그들에겐 화승총이 보급되었고 혈통 좋은 전투마가 주어졌다.
대규모 기병전에서는 카자크 기병대를 능가할 부대가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심했다.
전투는 밤이 깊어지자 소강상태로 빠져들었고 몽골군도 피곤에 지쳐 경계조를 제외하고는 잠에 빠져들었다.
할하부는 이한의 부대가 자신들의 목을 노리고 있음을 꿈에서조차 모르고 있었다.
첨벙.
“야. 죽을래...?”
“죄...죄송합니다.”
“둘 다 입 다물어. 이 새끼들이 뒈질라고 환장을 했나.”
자정이 넘은 시각. 이한은 5백의 전사를 이끌고 신촌 요새 밖에 주둔하고 있는 할하부 바르다체족을 야습하기 위해 강을 건너고 있었다.
찬바람이 부는 계절은 아니지만 물은 시리고 차가웠다. 병사 하나가 발을 잘못 디뎌 물소리를 내고 말았다.
고참 병사가 신참에게 눈을 부라리자 십인장이 나서 소란을 잠재웠다. 야습이 발각되면 역으로 공격을 받아 몰살을 당할 수도 있다.
이한은 바얀과 함께 선두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무척 신중하게 이동했다. 낮은 포복은 기본이고 은폐 엄폐를 철저히 하고 한 발자국씩 발을 놀렸다.
침투조들은 모두 그와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굼벵이가 기어가는 속도도 그보다는 빠르겠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도 불만을 터뜨리지 못했다. 이한은 아군의 피해를 유난히도 싫어한다. 완벽한 작전을 수립하고 또 그렇게 움직였다.
불빛이 보였다. 백여 개에 이르는 전투용 게르가 요새 앞 들판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이한이 수신호를 보냈다. 그의 손이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소대 단위의 병력이 지시한 방향으로 산개하기 시작했다.
곁에서 이한의 지휘를 지켜보는 바얀은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항상 놀랍다. 어떻게 이런 신호체계를 알고 있단 말인가.
십인대부터 소대, 중대까지 일사불란하게 제자리를 잡았다. 이번 작전은 섬멸이다. 아군의 피해 없이 적군을 몰살시키는 작전인 것이다.
선발대 세 개가 가죽 주머니 하나씩을 들고 사방으로 움직였다.
게르 주변에 화톳불을 피어놓고 경계를 서고 있는 적군 초병이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가 졸지에 봉변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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