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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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복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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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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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DUMMY

투란이 마법의 힘을 깨우친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 그가 열 살이 되던 해의 겨울이었다.

어머니가 양을 데리고 나간 사이 불이라도 피워 둘까 하고 생각하자 난로에서 불이 확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얼마 지나지 않아 투란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건을 들어 올리고, 불을 붙이고, 바람을 불어오게 하거나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기까지···.


‘엄마, 이거 좀 봐! 장작이 날아다녀!’


그날 저녁, 투란은 목양견과 함께 양을 몰아 집에 돌아온 어머니에게 자신의 능력을 자랑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이러한 능력을 신기해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저 체념과 좌절이 섞인 표정으로 허공에 떠다니던 장작을 잡아챘을 뿐.


‘투란, 엄마랑 약속하자. 앞으로 그 힘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특히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절대로.’

‘왜?’


투란은 언제나 어머니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지만, 이런 신기하고 재밌는 힘을 억제하라는 요구에는 투정을 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따뜻하게 데운 양젖 한 잔을 먹여주며 처음으로 저 먼 아래 세상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언덕 아래에는 귀족이라는 사람들이 있어.’


어머니가 말하기를, 귀족은 먼 옛날 세상에 강림하여 인간을 구원한 프레아 신족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강력한 마법의 힘을 타고나, 인간의 지배자이자 수호자로 군림했다.


그리고 그중 평범한 인간과 여러 차례 피가 섞여 태어난 이들을 기사라 했는데, 이들 역시 귀족처럼 마법의 힘을 타고나긴 하지만 그 정도가 약하기에 시종으로 부려졌다.

어머니는 투란이 아버지에게서 기사의 힘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그래서 저 산 밑으로 내려가면 나쁜 귀족들이 그를 잡아다 마구 부릴 것이라고 말했다.


‘귀족을 우리 같은 양치기라고 하면, 기사는 그 양치기가 키우는 개와 같은 거야. 때로는 가족처럼 여기고 귀여워해 줄 수도 있지만······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팔아넘길 수도, 희생시킬 수도 있지.’


귀족들은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하나라도 더 가지고자 자기들끼리 끊임없이 싸웠는데, 그러는 와중 희생되는 것은 대부분이 휘하의 기사들이었다.

마치 양치기가 늑대를 상대로 직접 나서는 대신 목양견을 싸우게 보내고 자기는 뒤에서 돌팔매질만 하는 것처럼.

이를 설명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투란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허망함을 담고 있었다.


‘투란은 엄마랑 같이 오래오래 살고 싶지?’

‘응.’

‘그러면 그 힘을 감춰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쁜 귀족들이 와서 너를 데려갈 거야. 엄마랑 평생 못 보게 되겠지.’

‘알았어, 절대로 남들 앞에서는 안 쓸게!’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약속한 지가 어느덧 8년째.

어머니가 병들어 죽은 뒤로도 투란은 여전히 히사릴 언덕의 한편에서 양을 치며 살아가고 있었다.

언젠가 그를 찾아올지도 모르는 귀족들을 피해서, 그들이 키우는 목양견이 되지 않기 위해서.


* * *


“머저리들 같으니.”


투란은 얼굴을 찌푸리며 오두막집의 문을 닫았다.

해가 채 뜨지도 않은 이른 아침, 마을 청년들이 몰려와서 며칠 전 라부스가 죽은 일로 그를 추궁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표범 마수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건만, 그들은 투란이 노인을 해친 뒤 마수 앞에 먹이로 던진 게 분명하다며 되먹지 않은 누명을 씌우려 들었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젊은 청년들을 두고 나이 든 노인네가 마을을 나왔다가 희생된 상황 아닌가.

너희가 게으르고 겁이 많은 탓에 노인이 죽은 것이라는 비난을 듣기 전, 투란을 이용해 자기들에게 돌아갈 책임을 분산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투란은 그렇게 시비를 걸어온 마을 청년들을 흠씬 두들겨 패서 내쫓아 버렸다.

아마 다음에 물물교환을 위해 마을에 내려가면 이번 일을 꼬투리 잡아 값을 후려치거나 물건에 장난을 치는 식으로 보복하려 들 터였다.

그러면 투란은 그런 마을 놈 몇 명을 또 후려갈겨 제정신을 차리게 한 뒤 공평한 거래를 하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이미 몇 번이고 있었으며, 아마 앞으로도 있을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기도 잠시, 갑자기 누군가 밖에서 문을 탕탕 두드렸다.

투란은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문을 열며 으르렁거렸다.


“또 어떤 새끼야? 진짜 뒈지고 싶어?”


분명히 조금 전에 교훈을 주었는데도 그사이에 잊어버릴 정도로 머리가 나빠졌단 말인가?

그런데 문 너머에 있는 것은 의외로 조금 전 찾아왔던 마을 청년 중 누군가가 아니었다.

먼지가 가득 앉은 망토를 두른, 사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실례했네, 젊은 친구. 여행 중에 잠시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해서 왔는데, 안 좋은 때 왔나 보군.”


여행객이라니, 십팔 년 평생 처음 만나는 존재에 투란의 머리가 잠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정말로 볼 것 하나 없는 이런 시골에 여행을 올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잠시 뻣뻣이 굳었던 투란은 곧장 문에서 비켜나며 들어올 길을 내주었다.


“아뇨, 아닙니다. 들어오시죠. 조금 전까지 기분 나쁜 사람들이 왔다 갔었거든요.”


과거 어머니에게 배웠던, 손윗사람에게 쓰는 정중한 말투가 몹시 입에 설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던 게 언제였던가?

라부스를 비롯한 마을 유지들이 모조리 개새끼들이란 사실을 알기 전이니 실로 오래되기는 했다.


“그럼 실례하겠네.”


사실 정체를 감추자면 정체불명의 손님 따위는 후딱 쫓아내는 쪽이 맞겠으나, 투란은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오랜만에 적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상대가 나쁜 마음을 먹은 악당이라면 충분히 해치울 자신이 있기도 했고.


“혹시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일세.”

“저도 안 먹었으니 같이 드시죠.”


여행객을 식탁에 앉힌 투란은 어제 짠 양젖과 치즈, 마을에서 가져온 말린 곡물로 만든 죽, 으깬 암염 한 덩이와 양고기 육포를 올려놓았다.

굶어 죽을 지경이 아니라면 손님을 극진히 대접해야 하고, 그러면 손님 역시 집주인을 해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법.

이 역시 어머니에게 배운 예절이었다.


“워낙 궁핍한 곳인지라 차린 게 많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진수성찬이 따로 없는걸. 내 감사히 먹겠네.”


빈말은 아닌 듯, 남자는 며칠 굶기라도 한 것처럼 투란이 내놓은 음식을 맛있게도 먹어치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마을 사람들과 달리 식사 예절이 제법 잡힌 모습을 보였다.

음식을 씹으며 말하지 않거나 무언가를 마실 때는 살짝 고개를 돌리는 등···.

여행객 역시 비슷한 인상을 받았는지, 양젖을 한 잔 내려놓고는 투란에게 덕담을 건넸다.


“기본적인 식사 예절을 아는 친구로군. 부모님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받은 모양이야.”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데서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여행객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그분은 마을에 계시는 건가? 집을 보니 같이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새 집안에 이부자리가 하나밖에 없는 것을 간파한 모양이었다.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몇 년 전에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여행객은 잠시 낭패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한 손으로 성호를 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투란이 살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손짓이었다.


“조의를 표하네. 자네처럼 훌륭한 젊은이를 키워내셨으니 틀림없이 신들과 함께 천상의 궁전에 머무실 걸세.”

“저 역시 그러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를 잃었을 무렵에는 그냥 떠올리기만 해도 온종일 입맛이 없고 눈물이 흘렀건만.

이를 겉으로나마 웃으며 언급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른이 된 것일까, 아니면 시간이 흐르며 그의 마음속에서 어머니의 존재감이 흐려진 것일까?

투란은 급격히 우울해지는 기분을 환기하고자 억지로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어르신은 무슨 일로 이런 외진 곳까지 여행을 오셨습니까?”

“우연히 근방의 도시를 지나는데, 어떤 노인이 자기 마을에 표범 마수가 나타났다며 이를 물리칠 마법사를 찾더군. 이야기를 듣고 퇴치하러 왔네. 싸움에는 꽤 자신이 있거든.”

“혼자서요?”


심지어 한창때의 젊은이도 아니고 이제 곧 허리가 구부러질 것 같은 중늙은이가, 무기조차 없이 덤벼들려 하다니?

투란의 놀란 표정에 여행객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기사일세. 아라비온 가문에서 육십 년 동안 봉사했지. 어지간한 마수쯤은 충분히 해치울 수 있어.”


기사라는 말을 들은 순간 투란의 눈이 커지며 온몸의 근육이 바짝 긴장했다.

어머니에게 말로만 들어 왔던 존재, 귀족의 하수인······.

긴장하기도 잠시, 투란은 그를 보는 상대의 눈빛에 적대적인 기색이 없음을 알고 천천히 힘을 풀었다.


“왜 그러나?”

“마법사를 본 것은 처음이라······그보다 도저히 육십 년간 일하신 분으로는 안 보이는걸요.”

“마법사는 보통 사람보다 느리게 늙으며 오래 살지. 내 나이가 올해 일흔다섯일세. 나는 기사라서 이 정도고, 강한 귀족들은 이백에서 삼백 살도 거뜬히 넘긴다더군.”


처음 듣는 사실에 투란은 감탄하며 자신과 같은 족속을 유심히 관찰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사람과 차이를 찾기 힘들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체격이 좋고 얼굴에 혈색이 돌아 건강해 보인다는 것 정도······.

즉, 마법사라고 해서 쳐다보기만 해도 상대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아챌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정보였다.

투란이 사람들이 모인 도시 한복판에 서 있더라도, 눈에 띄는 마법을 쓰지만 않으면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모르리라는 것 아닌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가슴을 옥죄던 사슬이 한 겹 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마법사라는 건.”

“대단은 무슨! 난 자네 같은 이들이 더 대단하다네. 마법의 힘도 빌리지 않고 마수가 나오는 이런 험한 곳에서 살잖나? 나라면 엄두조차 못 냈을 일이야.”


그의 생각과 달리 이 근방에서 사람에게 위협적인 수준의 마수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투란이 태어난 이후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어머니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한들 이곳에서 홀로 양치기 일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마법의 힘조차 없이, 혼자 이 황량한 언덕에서 자식까지 키워낸 여인이야말로 정말로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그러고 보니 미처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내 이름은 케오른일세. 아라비온의 케오른-아니, 이젠 이렇게 자칭해서는 안 되겠지. 방랑자 케오른일세. 자네는?”

“투란입니다. 히사릴 언덕의 하나뿐인 양치기죠.”

“멋진 이름이군.”

“그런데 조금 전에 가문에 ‘봉사했다’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지금은 아니신 겁니까?”

“한 달 전에 정식으로 봉신 계약을 끝냈다네. 가문에서는 내가 원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보살펴 주겠다고 했지만······말년에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고 싶었거든. 열다섯 살에 고용된 이래 평생을 한 가문에 묶여 살았으니 말이야.”

“다른 가문에서 붙잡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뭐 하러 그러겠나? 내가 엄청난 업적을 세운 유능한 기사도 아니고 재능 있는 젊은이도 아닌데. 이런 늙은 개를 붙들어 봐야 밥값만 축내지.”


늙은 개라고 자기 비하를 하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자부심과 여유가 묻어났다.

귀족들은 오만하고 잔학한 포식자에다 기사는 그들이 부리는 감정 없는 사냥개라고만 들었건만.

케오른은 지금껏 그가 보아온 어떤 어른보다도 여유롭고 유쾌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즐거운 식사를 마친 뒤, 케오른이 일어서며 식탁에 작은 은화 한 닢을 내려놓았다.

윗면에는 누군지 모를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아라비온 은화라네. 은화 중에서도 가장 순도가 높지. 마을에서 거래하면 식사비로는 모자라지 않을 거야. 물론 이 동네는 물가가 좀 비싼 것 같지만 말일세.”


케오른은 이놈의 마을이 도와주러 온 사람까지 등쳐먹으려 든다고 툴툴댔는데, 그간 경험해온 마을 사람들의 인성을 생각하면 썩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투란은 은화를 챙긴 뒤 정중히 인사했다.


“부디 순조롭게 사냥에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너무 그렇게 못 볼 사람처럼 굴지 말게나. 도중에 몇 번 더 얻어먹으러 올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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