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신체 아일라 (1)
아일라는 눈을 깜빡였다.
“어... 만져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가?”
어쩌면 아까 전 다쳐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고블린에게 습격을 당하며 숲길을 한 번 크게 굴렀었으니까.
그때 머리를 다쳤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찰나였다.
메시지가 일렁이더니 새로운 문자로 바뀌었다.
[성좌 ‘방구석 대군주’ 가 방금 전의 일은 미안하다고 전합니다.]
[너무 급했던 상황인지라 무턱대고 힘을 사용해야만 했던 건 어쩔 수가 없었던 일이라고 당신에게 전합니다.]
“힘을 사용한다니...? 아.”
아일라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방금 전의 일. 힘.
아, 설마.
“호, 혹시.”
지금 눈앞에 메시지를 보내오는 건.
그녀는 이전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전 고블린에게서부터 절 구해주셨던... 그 존재신가요? 하늘에서 거대한 손을 드러내셨던.”
[성좌 ‘방구석 대군주’ 가 그것은 자신이 한 일이 맞다고 합니다.]
[방금 전에는 깜짝 놀래켜서 정말 미안하다고 합니다.]
“...!!”
엘프 아일라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앞을 향해 넙죽 허리를 숙였다.
화살이 박힌 다리에서 피가 주륵 흘렀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위대한 존재시여!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연거푸 허리를 숙였다.
[성좌 ‘방구석 대군주’ 가 그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는 없다고 전합니다.]
[그보다는 지금 크게 다쳐서 서 있기도 힘든 상태가 아니냐고 걱정합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그렇지만 그녀가 서 있기도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피가 조금씩 베어나오는 상태였다.
[성좌 ‘방구석 대군주’ 가 당신을 염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리가 많이 아플 텐데 앉아있기를 권합니다.]
“그, 그러면...”
몇 번이나 연이은 자제.
그제야 큰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위대한 부누을 앞에 두고서 염치가 없지만 조금만 앉아있겠습니다.”
[성좌 ‘방구석 대군주’ 가 그제야 좀 낫겠다며 한숨을 내쉽니다.]
‘아... 다행이야.’
아일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의 존재는 생각보다도 더욱 따듯한 존재였던 것 같았다.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그토록 크고 두려운 존재가 사실은 마음마저 자신을 배려해줄 정도로 따듯하다니.
언젠가 그녀가 보았던 ‘그 존재’ 와는 전혀 달랐다.
“방금 전 그 일이 사실은 날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였다니...”
아일라는 아픈 와중에도 조금이나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 * * *
메시지가 떴다.
[당신에 대한 ‘아일라’ 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와, 됐다.”
역시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시스템이 했던 말대로였다.
“가능하면 이런 식으로 친근한 느낌이 좋겠지? 쓸데없이 위압감을 줄 필요는 없을 테니까.”
[현명한 판단입니다.]
시스템도 가능하면 친밀감을 높이길 추천했다.
여기서 위압감을 늘어나기라도 했다간 오히려 역효과만 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화신체 계약? 이라는 걸 따내야 한다고 했으니까.
그때 아일라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ㅡㅡㅡㅡㅡ
[엘프 아일라 (현재 심각한 부상상태).]
[외딴 세상에 홀로 떨어진 엘프 생존자.]
[궁수의 재능을 지녔습니다.]
[위험! 현재 그녀는 출혈이 심각합니다, 빠른 회복을 요합니다!]
[현재 그녀에게 회복 마법의 사용이 가능합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ㅡㅡㅡㅡㅡ
회복 마법이라고?
“그렇지만 난 신성력이라곤 전혀 쓸 줄 모르는데.”
살면서 신관한테 힐을 받아본 적은 있었어도 누구한테 힐을 해본 적은 없었다.
헌터로 활동할 시절에도 그랬다.
그래도 나름 각성자라서 일반인보단 몸이 튼튼했으니 주로 전사계 헌터로 활동했었다.
결국 능력을 각성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성좌로 각성한 지금이라면 회복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향해 정신을 집중하세요.]
이하루는 시스템의 조언대로 그녀에게 집중했다.
곧 속에서 무언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일더니 환한 빛이 반짝였다.
“어... 어?”
파아앗!
그 순간 엘프 아일라의 몸에서부터 아주 환한 빛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아일라는 자신의 몸에서부터 새어나오는 밝은 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대체?”
그 순간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다리가 서서히 본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박혔던 화살을 밀어내고, 출혈이 멎었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듯한 광경이었다.
“다리가... 모두 나았어.”
아일라의 상처가 모두 회복됐다.
그녀는 신기한 듯 몇 번이나 상처 부위를 매만져봤지만 씻은 듯이 모두 나아져 있었다.
걸을 수도 있었다.
어, 그런데.
정작 이번에는 문제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하루에게 생겼다.
그는 속이 메스꺼운 걸 느꼈다.
“...어쩐지 좀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핑-.
아니다.
진짜였다.
이하루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나 죽어.”
진짜 쓰러졌다.
* * * *
“아.”
눈을 떴다.
이하루는 거실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의 머리맡으로 손가락 한 마디만한 하늘섬이 둥둥 떠다니며 스치듯 지나쳐가는 게 보였다.
...뭘까, 이건.
무심코 툭 건드리니 하늘섬이 저만치 퓽 날아가 버렸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직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 그렇지.
나 기절했었다.
“아일라한테 힐을 줬고, 그래서 그 이후엔 기절을ㅡ,”
아.
“아일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번뜩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하루가 물었다.
“시스템! 아일라는!”
[그녀는 완벽하게 몸 상태가 나아졌습니다.]
“아, 그래? 다행이네.”
그 말에 안도하며 도로 주저앉았다.
여전히 후유증이 있었다.
“아, 스읍. 머리 어지러.”
두통 탓에 머리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두 시간 가량입니다. 만일 조금만 더 힘을 사용했다면 하루 내내 기절했을 것입니다.]
그 정도라니.
“힐 한 번 만 잘못했다간 사람 골로 가겠네.”
아무래도 함부로 지상에 힘을 사용한다는 것도 신중해야 할 것 같다.
못 할 건 없어 보이지만, 몸소 느껴보니 각오는 단단히 하고서 힘을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그건 아직까지 당신이 성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장을 하면 다르다는 걸까?
아마 그런 것 같았다.
[당신이 지상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부담감을 지금보다 낮추기 위해선 성장하여 신성력 스탯을 높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신성력을 올린다면 내가 힐도 쓸 수 있어? 다른 신관들처럼?”
[그렇습니다.]
오. 그렇단 말이지?
예전부터 신관은 돈 잘 벌기로 유명한 클래스였다.
만약 지금보다 성장해서 신관들처럼 힐을 쓰거나 할 수 있다면 매일 아침으로 시리얼이 아니라 다른 걸 먹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신관들은 언제나 이런 기분을 느꼈던 걸까?
어쩐지 다들 툭하면 죽을 것 같다고 골골대더니 이유가 있었다.
이하루는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아일라는 괜찮나 보네.”
그녀를 지켜보던 이하루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걸음이 꽤 건강하다.
그는 키보드 자판을 꺼내서 두드렸다.
[성좌 ‘방구석 대군주’ 가 이제 다리는 좀 괜찮냐고 묻습니다.]
“아, 성좌님!”
그가 보내온 메시지에 아일라는 곧장 반응을 보였다.
“덕분에요! 정말 모두 나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그렇게 과한 예를 차릴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성좌님 덕분에 이렇게 나을 수 있었는걸요.”
이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전폭적인 신뢰가 가득했다.
모르는 그가 보기에도 선명한 호의였다.
자신을 구해다주고, 심지어는 상처를 낫게끔 해주기까지 했다.
상대를 믿기에 이만한 것보다 더 이유가 필요할까?
띠링!
메시지가 떠올랐다.
[엘프 아일라에 대한 적정 호감도 달성 완료!]
[현재 화신체 계약 시도가 가능합니다! 그녀에게 계약을 제안하시겠습니까?]
화신체 계약이라!
이제 드디어 계약 시도가 가능한 모양이다.
하루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예’ 를 클릭했다.
“...?”
그러자 아일라가 곧장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허공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드러냈다.
“어... 성좌님? 이건 뭐죠? 여기에 계약? 이라는 게 떠 있어요.”
그녀의 앞을 보니 푸른 무언가가 떠오른 게 보였다.
진짜 모기만할 정도로 아주 작은 창이었다.
저게 바로 화신체 계약화면인 걸까?
그가 보는 화면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해서 스마트폰 액정 화면을 확대하듯 화면을 연거푸 키우니 곧 아알리가 보고 있는 화면이 보였다.
“아, 보인다.”
ㅡㅡㅡㅡㅡㅡ
[엘프 아일라여.]
[성좌 ‘방구석 대군주’ 가 당신에게 배후성좌(背後星座) 계약을 제안하였습니다.]
[이 위대한 존재를 배후성좌로 선택한다면 당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성좌의 제안을 수락하시겠습니까?]
ㅡㅡㅡㅡㅡㅡ
“어. 계약? 이건 대체...”
아일라는 의아한 듯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기웃거렸다.
조심스럽게 허공을 매만져보거나, 아니면 가만히 지켜보기도 했다.
곧 그녀가 이하루가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물었다.
“혹시 여기 이 제안이라는 게... 혹시 성좌님께서 보내온 내용인 걸까요?”
[성좌 ‘방구석 대군주’ 가 그렇다고 합니다.]
“아, 역시.”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하늘을 올려다보는 엘프 아일라의 눈빛에 선명한 호의와 신뢰감이 서렸다.
아일라가 은은한 미소 어린 얼굴로 물어왔다.
“성좌님께서 저의 후원자가 되어주신다는 건 역시 절 지켜주시겠다는 의미이겠지요?”
‘벌써 날 저렇게나 믿는다는 걸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하루를 믿는다니.
그렇지만 그녀의 시선에는 이제 뚜렷한 신뢰감이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지, 오히려 내가 누군지 모르니까 저렇게 더 쉽게 믿을 수 있는 걸지도. 아일라가 아는 나는 평범한 존재가 아니니까.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힘을 가진 성좌, 신이지.”
엘프 아일라가 아는 이하루란 평범한 존재가 아니다.
그녀가 목격한 광경은 하늘과 대지보다도 더욱 거대한 초월적인 존재의 일부.
그 광경 하나만이 전부였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렇게 전폭적인 신뢰감을 보내올 수 있는 것이다.
아득한 힘을 지닌 존재인 성좌.
그러니 신뢰하기에 이보다 더욱 좋은 사실이 있을까?
하루는 얼른 키보드 자판을 두드렸다.
[성좌 ‘방구석 대군주’ 는 엘프 아일라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합니다. 선택을 고르는 것은 자유라고 의사를 드러냅니다.]
“저는 성좌님을 믿어요. 절 지켜주신 분이니까요. 그러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신뢰감 어린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님과 계약할게요.”
띠링!
알람음 소리와 함께 이하루의 눈앞에 알람창이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첫 화신체와의 계약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으로 300 포인트가 주어지며, 지금부터 포인트 상점이 개방됩니다!]
[이제부터 ‘화신체 관리’ 기능이 생성됩니다!]
“오, 계약했다!”
이하루에게 첫 화신체가 생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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