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보트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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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재
작품등록일 :
2024.09.02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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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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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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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선의의 거짓말

DUMMY

모두가 살아나간다는 진혁의 계획대로라면, 네 명의 사람은 한 시간 전력질주, 3시간 휴식을 반복해야 했다. 한 바퀴가 4시간이니 하루에 6번. 5일이면 30번이었다. 5일동안 30시간의 수영을, 그것도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휴식 없이 전속력으로 하는 것이 애초에 가능의 범주 안에 들어있기는 한 걸까? 아무리 봐도 될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 한 시간만에 탈진할 게 뻔했다. 이미 민희는 보트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보트가 속도를 맞춰 주고 기다려 준다 해도 체력적인 한계가 먼저 올 터였다. 


“저기, 진혁 씨. 이거 안 될 것 같지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물리적으로 안 될 것 같은데. 그냥 한 번에 수영하는 시간을 줄이고 중간중간 전체 휴식 시간도 넣어야겠어요. 일단 돌아가서 민희 씨부터 다시 태우던가 하죠.”

그 말에 진혁이 고개를 들어 재혁을 올려다봤다. 진혁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뭐야, 울어요?”


충혈된 눈과 조금 붉어진 볼을 따라 눈물이 몇 방울 흘러내렸다. 그 소식에 다른 모두가 진혁을 바라봤다. 잠시 훌쩍이던 진혁은 눈물을 닦아내고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 방법 뿐이었어요. 그래도 최소한 선정 방식은 공정했잖아요.”

“아니, 그게 뭔···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길현이 물었다. “뭐, 민희 씨 버리겠다는 거에요? 누구 맘대로?”


“모두를 위해서죠.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러분들 간의 타협점이 나올 것 같지 않았어요. 수영을 자원할 정도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공정한 방식으로 한 명을 뽑아 희생시킬 생각이었어요. 첫 주자가 누가 되던, 공정하게 선발된 그 사람을 버려야겠다고 애초부터 결심했었다고요. 네? 비록 그게 제가 된다 해도 말입니다.”


“그걸 아무런 의논도 없이 혼자 정해버렸다고요? 누군가의 목숨이 달린 일을? 분명 모두 다 같이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했잖아요. 이제 와서 그렇게 말을 바꾸면 어쩌자는 겁니까?”

길현이 진혁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오묘한 일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민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재혁의 편을 들며 그녀를 압박하던 이 남자는 어째서 그녀를 위해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는가. 길현은 복잡한 것은 정말 질색이었기에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사실 관계만 보면 되는 일이었다. 진혁이 거짓말을 했고, 민희가 희생자가 되었다. 그게 전부였으니 당연히 이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야 했다. 지금이라도 보트를 돌려서 민희에게 간다면,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구명조끼도 입었으니 탈진했더라도 분명 어딘가에 둥둥 떠 있을 테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길현은 진혁을 옆으로 밀쳐내고 모터로 향했다. 조작 방법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만지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재혁이 그를 막았다. 

“돌아가서 구하면, 네가 대신 죽게?”

재혁은 확신했다. 이렇게 된 이상 죄책감 같은 건 안 보이는 구석에 쑤셔 넣고 쳐다보지도 말자고. 최소한 우리는 살자고. 배를 돌리면 결국 원점일 뿐이었다. 이럴 때 일수록 냉철하게 판단해야지, 길현처럼 김정에 휩쓸려 버리면 모두의 생존 확률만 낮아질 뿐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직진해도 식량이 부족할 판인데, 심지어 하루치를 되돌아가기까지 한다면? 절대 안 될 일이다. 게다가, 민희가 뽑힌 것은 결국 운이었다. 모두가 살아남고 싶어 하는 와중에, 운보다 더 공정한 방식은 없었다. 


“이기적인 사람으로 살아남을래, 아니면 이타적인 척 다른 모두와 함께 수장당할래? 정말로 배를 돌리는 게 정의라고 생각해? 과정이 지저분하긴 했어도, 결국 민희 씨가 뽑힌 것도 순전 운이었잖아. 어차피 타협이 안 된다면 최후에는 결국 제비뽑기 아니었겠어? 형태만 달랐지 이것도 무작위로 뽑은거나 다름 없어. 그러니까, 정말 기가 막힌 대안을 가져올 게 아니라면 그냥 순응해. 내 마음도 절대로 편하지 않지만 이런 건 가슴 속에 묻어두고 앞을 봐야 해. 살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냐.”


이 말에는 길현도, 다른 누구도 따질 수 없었다. 물론 모두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분명 잘못이지만, 그 거짓말로 여섯 명의 목숨을 구할 수만 있다면 진위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길현의 목구멍을 타고 구역질이 솟구쳤다. 

보트 밖에 토를 하는 길현의 등을 두드려 주며 재혁은 지나온 바다를 바라봤다. 이미 민희는 저 멀리 작은 점이 되어 있었다. 마음을 굳게 먹기로 다짐한 재혁이었지만 그럼에도 눈물이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흐느낌과 소년의 기침 소리만이 보트를 가득 채웠다. 어느새 저 멀리 태양이 져 가고 있었다. 


잠에 들기 직전, 재혁은 그래도 이게 이 고난의 마지막 비극이겠거니 생각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죄책감과 슬픔을 더 이상 느낄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그저, 남은 9일 정도를 버텨내기만 한다면 꿈만 같던 일상이 다시 돌아와 주겠지. 버티기만 한다면···.

하지만 다음 비극이 찾아오기까지는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지후의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한 건 다음 날 아침 즈음부터였다. 따뜻한 외투 속에서, 또 은정의 품 속에서도 밤새 덜덜 떨던 소년의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은정은 이것이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해 안심하며, 더워 하는 지후의 외투를 손수 벗겨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지후의 혈색이 돌아오지 않았고, 여전히 입술은 새파랬다. 


“지후야, 아직도 더워? 추워 보이는데, 이거 좀 다시 입어 봐.”

“더워···하나도 안 춥고 덥기만 해, 엄마. 벗을래···.”

“아니, 얘 좀 봐. 이렇게 추워 보이는데 자꾸 덥다고 그러니? 저기, 진혁 씨. 얘 좀 봐요. 자꾸 덥다고 그러면서 옷을 벗으려고 하네. 얘가 왜 이러지?”


반나절 내내 생기 없는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던 진혁이 고개를 힘없이 지후 쪽으로 돌렸다. 진혁의 머릿속은 아직까지도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분명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했던 건데, 자꾸만 가슴을 옥죄여 오는 죄책감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더워 한다고요.” 진혁이 천천히 지후를 보며 말했다. 뭐, 이제 해도 떴고, 그렇게 추운 날씨도 아니니까. 그런데, 더울 정도인가? 춥진 않아도 더울 정도는 또 아닌 것 같은데. 잠깐, 덥다고? 


텅 비어 있던 진혁의 눈동자에 다시금 초점이 잡혔다. 그는 급하게 소년을 붇들고 얼굴을 마주봤다. 소년의 입술은 여전히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눈에는 힘이 없었으며 단지 떨림만은 멈춰 있었다. 창백한 그 얼굴을 본 진혁은 이제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소년의 이마에 손을 짚으며 급히 말했다. 

“안 돼요, 빨리 다시 따뜻하게 옷 입히세요. 아직 저체온증입니다. 아무리 덥다고 해도 절대 벗기시면 안 됩니다. 마른 옷으로 빨리 감싸고 벗기지 마세요.”


이미 재혁의 외투는 다 젖어 축축해져 있었다. 진혁은 외투가 없었기에 옆에 불편한 자세로 자던 형남을 급히 흔들어 깨웠다. 그 소란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

“형남 씨, 외투 좀 벗어 주세요. 지후가 위험합니다. 아직도 저체온증이에요.”

“예···? 지금이 몇 시인데···.”

진혁은 비몽사몽한 형남의 외투를 벗겨 지후를 감싸 안았다. 소년은 더운 것인지 계속 몸을 바둥대며 칭얼댔다. 더워, 덥단 말이야···. 어느 새 다른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다. 진혁은 은정에게 절대로 옷을 벗기지 말라고 한 번 더 강조한 뒤 지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아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체온을 잴 수단도 없고, 아이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리고 애초에 진혁은 의사도 뭣도 아니었다. 뱃사람인만큼 저체온증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변수가 너무 많았다. 지후가 물에 빠진 것은 전날 저녁이었고, 직후 바로 외투를 덮어 주어서 어느 정도의 체온 유지는 되었겠지만 밤 동안 외투를 갈아 주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수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외투로 물기를 닦아내며 동시에 덮어 주었던 것이었기에 밤을 지나며 보온 효과는 전부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 상태로 몇 시간이 지나 아침이 되었으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저체온증 환자가 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건 분명한 위험신호였다. 지금부터라도 다시 마른 옷으로 감싸 안아서 회복될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지만, 문제는 지후가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다. 다섯 살 아이가 이 정도의 저체온증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명확한 의학적 식견이 없는 진혁이 보기에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진혁은 수시로 지후의 상태를 확인하며 가슴을 졸였다. 시간은 그렇게 천천히,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소년의 위태로운 목숨을 달고, 보트는 조금씩 물살을 뚫고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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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7] 구조대 24.09.13 3 0 8쪽
16 [16] 비극 앞에서 인간은 24.09.12 10 0 9쪽
15 [15] 두 개의 이름 24.09.11 9 0 10쪽
14 [14] 주마등 24.09.10 10 0 8쪽
13 [13] 비장의 한 수 24.09.09 10 0 8쪽
12 [12] 일촉즉발 24.09.06 7 0 8쪽
11 [11] 미싱 링크 24.09.06 7 0 9쪽
10 [10] 모성애 24.09.06 6 0 10쪽
9 [9] 1보 전진 1보 후퇴 24.09.06 8 0 10쪽
8 [8] 투쟁 그 끝에는 24.09.05 9 0 10쪽
» [7] 선의의 거짓말 24.09.05 10 0 10쪽
6 [6] 자기희생 24.09.04 10 0 10쪽
5 [5] 생존 본능 24.09.04 9 0 10쪽
4 [4] 궤변 그리고 분열 24.09.03 10 0 9쪽
3 [3] 살인자의 회고록 24.09.03 8 0 9쪽
2 [2] 살아야 하는 이유 24.09.02 13 0 9쪽
1 [1] 침몰 24.09.02 2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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