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기 만들다 회귀한 게임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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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같은
작품등록일 :
2024.09.0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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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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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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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005. 일러스트레이터 (3)

DUMMY

—꿀꺽.


하나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긴장감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나름 ‘그림’이라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그녀였지만 본격적으로 남과 협업을 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 강의에서 조별과제를 했던 적이 있었으나.


심각한 대인기피증을 지닌 여자 답게, 항상 추노를 하는 ‘빌런’의 역할을 자처했었다.


‘이, 이쪽이 맞나? 서, 성근 선배님이 오라는 곳이.’


언제나 혼자 다니며 뭐든 혼자 해왔던 하나는 당연하게도 기대감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지만.


나름 인적이 드문 장소 덕분인지, 평소보다는 어깨가 말려 들어가는 정도가 덜한 느낌이었다.


—끼익.


그녀는 마침내 오들오들 떨면서도 성근이 알려준 장소에 도착했는데.


“아, 오셨습니까.”


그 안에는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은 성근이, 공허한 눈을 한 채 노트북의 타자를 열심히 치고 있었다.


“히, 히익···!”


하나는 그런 성근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랐다.


하지만 성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의자에 손짓을 하며 앉으라는 행동을 취했다.


“자, 여기 앉으세요. 할 일이 많습니다.”


“······네, 네에.”


하나는 무미건조한 모습을 보이는 성근을 보니 오히려 안심이 됐다.


조별과제를 할 때의 팀원들은 마치 하나를 물어뜯기라도 할 기세로 관심을 보였었다(빌런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는 적절한 선을 지키며 관심을 표하는 것 같아, 오히려 더 좋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우선, 기획안에 대해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느, 네에···!”


그는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A4용지 뭉치를 건네주었는데.


그 두꺼운 두께를 보자마자 하나는 도저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손가락 두 마디 정도나 되는 분량.


여기에 과연 게임에 대한 정보가 다 담겨있기나 한지 의심스러운 정도였다.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게임이다 보니, 기획서 자체는 금방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든 말든 상관 없다는 듯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우선, 저희가 만들 게임은 SRPG라는 장르입니다. 대충 플레이어가 지휘자로서 파티를 이끌어 전투를 이어나가고, 성장시키는 그런 게임인데.”


그는 그리 말하고는 이내 다음 장을 넘겼는데, 그 안의 내용을 본 그녀는 더더욱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저게 뭐야···? 이게 한 사람이 가능한 거야?’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가 가지고 온 기획서에는 그가 만들려는 게임의 모든 정보가 담겨있었다.


스토리 라인, 등장인물과 그에 대한 디자인 요소, 심지어 게임의 UI나 레벨 디자인 등등.


너무나 자세하고 빽빽한 정보량 때문에, 유하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


한성근이 얼마나 이 게임에 진심인지 절절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게임 제작에 대한 집념은 정말 엄청났다.


“뭐, 솔직히 하나 씨는 여기에 있는 모든 걸 알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 씨께 분담할 업무는 어디까지나 아트쪽. 다른 세세한 사안들은 전부 제가 하게 될 테니까요.”


“무, 뭘, 제가, 어떤 걸···.”


“아, 하나 씨가 뭘 하면 되냐는 건가요?”


—끄덕.


그녀의 질문에 성근은 잠시 고민했다.


게임의 제작 과정은 기획 이후에 디자인이 정석이다.


이미 기획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상태였으니, 사실상 유하나의 업무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이는, 이미 게임을 제작한 적이 많았던 성근의 예상대로였다.


“그런 질문을 할 줄 알고, 제가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34 페이지 부분을 한번 펼쳐봐 주시죠.”


그의 말대로 그녀는 A4 용지의 페이지를 넘겼는데.


그곳에는 그가 손수 그려낸 것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친절하게 적혀있었다.


“게임 제작에 있어서 그래픽은 절대 빼놓을 수 없죠.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일러스트와 그래픽, 그들이 뛰놀 배경, 그리고 게임의 전반적인 아트 스타일 등. 그것들이 먼저 있어야 게임 제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에, 엗···?”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 사실상 눈에 보이는 ‘비주얼’에 관한 것들을 모두 하나 씨가 맡아 주셔야 할 겁니다.”


“에, 엗···?!!”


혼미했다. 마치 과호흡이라도 걸린 것처럼 뇌에 산소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책임감이 느껴지는 업무라니! 자신의 작업이 먼저 되어 있어야 제작이 된다니!


평소였다면 지금 당장 도망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중압감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이 끝난 이후에는 웬만해서는 하나 씨가 손 댈 곳은 없을 겁니다. 그 뒤에 있을 일들은 대부분 제 역할이니까요.”


허나 유하나는 나름 정신적 성장을 거쳤다.


항상 매번 도망치고, 또 몰래 슬금슬금 빠져나오길 반복했었으나.


이 곳에는 그녀 스스로의 의지로 찾아왔다.


이미 한성근의 ‘기대’를 받아버린 이상, 그녀는 어째선지 도저히 뒤로 물러설 수가 없는··· 심리적 저항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근은 그런 그녀의 심리를 읽었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뭐,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일들을 맡길 수는 없겠죠. 그래서 저는 하나 씨가 아트 스타일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도록, ‘키 비주얼’을 그려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키 비주얼.


작품의 중요한 부분(Key)이 되는 것을 장면(Visual)을 나타내는 말로 게임에서는 작품의 포스터나 설정화 같은 것으로 나타내곤 했었다.


물론, 홍보용 키 비주얼은 이름 값이 좀 있는 작가가 작업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나.


그들이 만들려는 게임은 어디까지나 인디 게임.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럴 상황조차 아니었다.


특히 게임 제작이 처음이라 방향성 자체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는 유하나에게는.


키 비주얼의 완성 과정은, 꽤나 뜻 깊은 일이 될게 확실했다.


“키, 키··· 비주얼.”


그녀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납득했다.


확실히 게임에도, 그리고 그가 말하는 서브 컬처 쪽에도 그녀는 문외한이다.


그런 만큼 그의 요구는 막막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의 말대로 키 비주얼이라도 그려보며 그의 컨펌을 받는다면, 어느 정도 그런 문제점이 해결이 될 것 같았다.


“하, 하지만, 뭐, 뭘 어떻, 어떻게 그려야 할지···.”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해봤어야 아는 이야기.


지금처럼 그림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유하나의 입장에서는, 키 비주얼을 그리는 것조차도 막막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성근이 걱정을 했던 범위 내였다.


그는 이미 진작에 해결할 방안을 마련해왔다는 듯, 청산유수와 같이 말을 이어나갔다.


“당연히 그에 대한 준비도 해왔죠.”


그는 그리 말하며 이내 자신이 준비해온 기획서의 페이지를 또 다시 몇 장 넘겼는데.


그곳에는 그가 그려낸 키 비주얼이 대문짝만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자, 이겁니다. 이걸 유하나 씨의 스타일대로 한 번 그려보세요.”


그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분명 자신의 그림을 유하나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그의 표정에 담겨있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기하학을 기본으로 둔 도형의 나열은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 심오했다.


그녀의 과는 서양화과. 컴공과인 성근과 달리, 그녀는 기하학을 해석할 능력 따위는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었다.


“···해, 해석해 주세요. 무, 무슨 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녀는 그 그림을 솔직하게 평가했는데.


“? 여기, 5명의 사람이랑 무너져 내리는 교회 잔해지 않습니까.”


“에, 아, 예?”


그녀는 의문스럽다는 그의 반응을 보자마자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가 이렇게 된 것에는 근거가 있었다.


그는 전생에서 어떻게든 페미 상사들의 컨펌을 받기 위해.


자신의 기획이 통과되길 바라며 외주까지 의뢰해 디자인을 뽑아왔었는데.


어떻게든 좋게 좋게 작업을 하려는 외주 인력들은 당연히 그의 그림 실력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 탓에 그는 자신의 그림 실력에 대한 자기 객관화가 그리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허나 유하나는 다르다.


그녀의 낮은 사회성은, 그리고 떨어지는 말주변은 돌려 말한다는 선택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죄, 죄송해요오···! 사, 사람을 그린 주, 줄 모르고··· 도, 도형 그려놓고 괴, 괴롭히는 줄 알고···.”



“···뭐, 서양화 전공자가 보기에 제 그림은 보기 안 좋을 수 있겠죠.”


그는 비난에 가까운 위로이자 사과를 들으니 빨간약을 먹은 듯한 기분이었지만.


이내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바탕으로 조금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게임의 주인공은 여느 폐허가 된 교회에서 봉인이 풀리며 시작됩니다.”


“교, 교회요···?”


“왕국은 지속되는 내전에 혼란스럽고, 수많은 인물들이 전복을 꿈꾸거나 과거를 지키려 하는 혼란의 시대. 그런 시대에 주인공이 깨어난 겁니다.”


“아, 아하···.”


“주인공은 그런 혼란의 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수많은 인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을 영입하거나, 싸우거나, 방치할 수 있는 등 주인공은 그들과의 관계에 선택권이 생기게 되는데.”


그는 이내 그림의 맨 왼쪽에 서 있는 기하학 도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중에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인물이 바로, 폐허에 숨어있던 수녀이고. 그 옆에 있는 인물들은 차례대로 도적, 마법사, 기사, 광전사로, 그 뒤에 만나게 되는 인물들입니다.”


그렇게 설명을 해주고 나서야 그녀는 그림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각 기하학적 도형에는 나름의 각주가 붙어있었다.


성녀에게는 순종적, 도적에게는 반항적, 마법사에게는 냉철한, 기사에게는 익살, 그리고 광전사에게는 관능적이라는 말이 쓰여져 있었는데.


‘순종적이라는 것은 곧 아가페적인 사랑을 의미해. 그렇다면 아무래도 모성애와 비슷한··· 그런 사랑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모성’은 아이를 돌보고 싶다는 욕망의 투영이고 이는 예로부터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로 나타나는—’


그제야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들의 디자인이 조금씩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것을 떠올리자마자 곧바로 스케치북에 러프를 그리기 시작하려 했는데.


“잠깐. 그리기 전에 하나 씨가 해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어째선지 그는 그녀의 팔목을 붙잡으며 그녀의 실력 행사를 제지했다.


“혹시, 일본어 좀 하십니까?”


일본어 실력을 물어보면서 말이다.


*


—저, 적당히 읽, 읽을 줄 알고, 드, 들을 줄 알아요···.


하나가 그리 대답을 하자 그는 의기양양하게 어느 CD를 건네왔었다.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언어의 장벽이 있다면, 다른 걸 갖다 드려야 했을 테니.


제목은 바로 ‘클라내드’로 일본의 걸작 게임이라고 했는데.


—서브 컬처 게임을 만들기로 했다면, 서브 컬처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은 있어야겠죠. 즉, ‘모에’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소립니다.


—무, 무슨 소린지 모,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때때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 그가 또 다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았으니.


더더욱 유하나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는 것 같았다.


—뭐, 서양화 전공이신 유하나 씨에게 ‘클라내드’의 아트는 조금 떨어져 보일 수도 있습니다. 초회판은 2004년에 출시된 게임이니까요.


—그, 그럼 왜···.


—하지만, 클라내드는 ‘모에’의, 서브컬처가 갖는 정수가 담긴 게임입니다. 이 분야에 대해 잘 모르시는 유하나 씨는, 더더욱 이 게임을 플레이하며 그 감성을 느껴볼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CD를 컴퓨터에 삽입하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 모에가 뭔데요. 그, 그림만 그리면 되는 거 아니었냐구요···. 왜, 왜 캐, 캐릭터 같은 거에 그렇게 집착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분명 그녀는 그림만 그리기로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게임 같은 것을 할 필요성도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놈의 감성이 뭐라고 반 강제로 게임을 경험해야 했으니.


솔직히 썩 그의 말에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하, 하지만··· 받, 받아와 버렸는걸. 하겠다 해버렸는걸.’


그렇다고 해서 이걸 안 할 수는 없었다. 지금껏 봐온 한성근은 꽤나 집요하다.


그런 그에게 클라내드인지 콜로네드인지를 한 척을 해봐야 곧바로 뽀록이 날 터.


울며 겨자 먹기로 조금이라도 플레이를 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에휴···.”


그녀는 그렇게 한숨을 쉬며 곧바로 클라내드를 켰다.


그러자, J-여캐식 디자인의 그림과 메인 화면이 나타났는데.


“···설마, 이렇게 그리라고 하라는 건가.”


서양화를 전공하는 입장에서 너무나 심하게 데포르메된 그림을 보며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시작해볼게요. 끝나고 감상평 보내달라고 하셨었죠?]


—[네, 부탁드립니다.]


그와 문자를 주고 받고는 나름의 책임감을 느끼며, 이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03/22][어떻습니까, 하나 씨?]

—[03/23][하나 씨, 오늘 학교에는 안 오신 모양이던데요.]

—[03/24][···하나 씨, 괜찮으십니까?]

—[03/25][하나 씨, 어디 아프신 거 아니죠?]


문제는, 그것이 그녀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취한 순간이라는 점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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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008. 데모 버전 24.09.16 41 3 11쪽
7 007. 본격적인 제작 단계 24.09.15 49 2 12쪽
6 006. 최루 게임 24.09.14 51 3 11쪽
» 005. 일러스트레이터 (3) 24.09.11 67 3 14쪽
4 004. 일러스트레이터 (2) 24.09.10 67 3 12쪽
3 003. 일러스트레이터 (1) 24.09.09 68 2 13쪽
2 002. 격동의 2011년 +1 24.09.08 93 3 14쪽
1 001. 뒤늦은 후회 24.09.08 105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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