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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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통로
작품등록일 :
2024.09.09 02:20
최근연재일 :
2024.09.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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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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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DUMMY

폐허가 된 비요트성을 쓸쓸히 지나가던 바람이 길을 잃고 마이더스

산맥으로 흘러들어갔다. 바람은 숲속의 구석구석을 스치며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불빛에 흠칫했지만 신이 정해준 자신의

길을 바꿀 수는 없었다.그리고 그 바람은 빛에 부딪치며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빛 주위엔 작은 파동이 일어나 바람의 향기를 공기중에 퍼트렸다.

바람이 이끌고 온 산 내음이 여인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녀는 어제 밤, 살아남은 카누를 타고 움직인 일행 중 한명이었다.


"켄트, 추적은 따돌린 듯해.."


켄트라 불린 이는 자신의 상의로 만든 베개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녀는 여인의 무릎을 베고 녹초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아가씨가 깨어나시는 대로 다시 이동해야해..

레이..그 일은.."


켄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아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치료마법과 약초 등으로 그녀를 치료하긴 했지만,

소녀의 상태는 좋아보이지 않았다.

입술에는 마른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얼굴은 그을음과 잿더미들로

더럽혀져 있었다. 거기에 입고 있던 드레스는

찢어지고 올이 나가 주요 부위만 가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켄트의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레이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그들을 위해 미끼가 되었던 기사와 혼인을 약속한 그녀였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슬픔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켄트는 그녀에게 쉽게 말을 붙이지 못하고 힐끔 거리며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즈음.

켄트는 굳게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레이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에 올려졌다.


"쉿.."


켄트는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반대편 숲 속에서 거친 짐승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켄트가 조용히 물었다.


"몇 마리나 되는 것 같아?"

"한 20마리쯤... 아무래도 아가씨를 깨워야 될 것 같은데.."


켄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아아앙!!


"제기랄!"


레이의 뒤에서 거대한 늑대들이 쏟아져 나왔다.

늑대들을 향해 달려가는 켄트의 손엔 어느새 검이 들려져 있었고

레이는 아르를 두 팔로 안은 채 그의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켄트의 검이 앞서 뛰쳐나온 늑대들의 배를 가르자 비린내나는

짐승의 피와 내장이 사방에 흩뿌려 졌고 뒤이어 나오던 늑대들은 잠시 주춤했다.

늑대들은 곧 일행을 포위하 듯 둥글게퍼져 이빨을 내밀고 으르렁 거렷다.

늑대들의 입에선 끈적이는 침이 떨어지고있었고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떴다. 그러나 레이의 품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늑대의 거친 숨소리와 눈빛이 그녀의 모든 신경과 생각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려움에 떨며 레이의 옷을

꽉 움켜잡는 것 밖에는 없었다.


"이놈들.. 뭐지..?"


켄트는 자신들을 포위하는 늑대들의 모습에 당황했다.

보통의 늑대들이라면 동족의 죽음에 저토록 침착할 수 없었다.

더욱이 초점 없는 붉은 눈을 가진 늑대는 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레이에게 마법을 쓰게 만들 수는 없다.

그녀가 마법을 썼다가는 추적대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알려주게 되는 꼴이었다.

대책을 만들어 내야 했다. 하지만 늑대들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늑대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불의 벽!!"


레이의 외침과 동시에 불 기둥이 일행의 주위로 솟아올랐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달려들었던 늑대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불 기둥의 여파는 나무들까지도

재로 만들어 버렸지만 마나의 힘으로 일어난 불길은 나무를 재로 만들어

버렸을 뿐 산불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불 기둥은 일분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사그라들었고, 레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철썩!


건장한 사내의 손바닥에 무방비 상태로 맞아버린 레이는

힘없이 날아갔다.


"무슨 짓이냐!!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것 인줄 알 것이다!!"


켄트는 인상을 찌푸린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레이는 땅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그녀는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아르의 앞으로 걸어갔다. 아르는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공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생각지도 못한 켄트의 모습을 본 탓이었다.

아르는 켄트를 뒤돌아 보았다가 그의 무서운 눈빛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르앞에 선 레이가 덥썩 무릎을 꿇었다.


"소인을 죽여주세요.. 저희의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위치를 노출시키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소인.. 죽음으로 실수를 만회하겠습니다.

아가씨의 판단을 기다리겠.."


레이는 말을 이으며 허리춤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어 자신의 목 언저리로 가져갔다.

아르는 깜짝 놀라며 그녀에게 달려들어 단검을 맨손으로 움켜잡았다.

날이 선 검날을 움켜잡은 아르의 손에선 붉은 선혈이 솟구쳤다.

레이는 당황하며 단검을 놓았으나 아르는 단검을 여전히 움켜잡은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놀란 켄트가 아르에게로 달려왔다.


"도대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죽지 못해 안달이라도 났어요??

지금의 위험에서 벗어난 걸로 됐잖아요!! 왜들 죽지 못해

안달이 났느냐 말이예요!!"


아르는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서 단검은 놓아져 있었지만

날카로운 단검을 움켜잡은 손에서는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레이는 자신의 소매를 길게 찢어 아르의 손을 감았다.


"나는.. 나는.. 얼마든지.. 위험에 빠져도 좋아요.. 흑.. 그때마다.. 이겨나가면

되는 거잖아요..흑흑.. 제발.. 더 이상 제 곁을 떠나지 말아요..

죽지 말란 말예요.. 흑흑.."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켄트의 눈이 붉게 충혈 되었고, 레이는 아르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레이는 말꼬리를 흐리며 아르를 더욱 감싸 안았다


'마커스.. 미안해요.. 조금 기다려 줘요..'


켄트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산맥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레이가 만들어낸 불길을 발견하지 못하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산맥 너머에 있는 큰 성은 분명 크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것이었다.

지금은 검게 그을리고 심하게 부서져 나갔지만 그럼에도 본래의 웅장함이 남아있었다.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불길이 군데군데 살아있었고

회색 연기가 성 곳곳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병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몇몇의 기사들이 무장을

벗어 두고 강물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또 다른 기사들은 주변의 숲을 헤치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숲속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이 걸어나왔다.

머리까지 눌러 쓴 후드로 인해 신원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로 보아

여자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높고 맑았으나 또 차가웠다.


"찼았나?"


그녀의 앞에 부복한 기사가 말했다.


"자폭한 것으로 보입니다. 옷가지는 찾았는데 시신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폭발하면서 산산조각이 난 것 같습니다."


여인은 한숨을 쉬었다.


"근위기사단 이라는 놈들이 고작 비상통로 하나 예상하지 못해서 이런 결과를

만들어? 쓸모없는 놈들!"


기사는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면목.. 없습니다.."

"계속 찾아라! 반드시 잡아야 한다!"


기사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기사들을 인솔하여 수색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고 여인은 그런 기사들을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너무 부하들을 닦달하지 마시지요"


여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수풀쪽에서 갈색머리의 준수한 청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기사들이 자신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만 모습을 나타낸 채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여기서 그들을 찾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무슨 뜻이지?"


청년은 강물 뒤편에 펼쳐진 산맥을 가르켰다.


"지금쯤이면 저 산맥의 중턱쯤에 도착해 있겠군요"


여인은 청년의 손이 가르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빙성 있는 얘기인가?"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데리고 있는 늑대들"

"흥! 그 구역질 나는 변종들 말인가?"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역질은 좀 나지만 그만한 추적자 또한 찾기 힘들지요. 냄새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도록 잘 맡으니까요"

"그래서?"

"산맥으로 보냈던 늑대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암컷을 만나 발정이라도 난 것이겠지"


청년은 고개를 젖히며 웃어제꼇다.


"하하하하! 믿기 싫으신가 보군요. 구역질 나는 늑대들이 당신의 어줍잖은

근위기사들 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요"


여인의 몸이 약간 떨렸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지는 모르겠다만 네 말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널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겠다."


청년은 여전히 미소지은 채 고개를 숙였다.


"제가 출생이 미천해서 말이 나오는 데로 지껄였습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용서하시지요."


그는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어제 저녁 산 중턱에 큰 불길이 솟아올랐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곳과

제 늑대들이 간 곳이 일치 합니다. 거기다가 육안으로 식별할 정도의 불길이

솟아올랐음에도 불이 붙지 않았다는 것은 곧 마법이라는 소리겠지요.

도망친 이들 중 마법을 쓰는 여자 마법사가 있으니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그 레이라는 계집 말인가?"


청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인이 기사를 향해 소리쳤다.


"복귀해라! 재정비한 뒤 저 산맥을 샅샅이 뒤져라. 이번에도 실패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기사는 갑작스러운 수색 중단 명령에 아무런 의심없이 복창했다.


"옛!"


청년이 말했다.


“기억하시지요? 저희의 요구사항은 단 한가지 였습니다. 아르 공녀의 신병말이지요.”


여인은 그를 노려보며 얘기했다.


“나 역시도 그년의 목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다.”


청년은 반색하며 말했다.


“아니 될 말씀입니다. 무조건 산 채로 넘겨 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저희의 유일한 조건이었습니다.”


여인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년이 도대체 뭐가 대단해서 그토록 그년을 원하는 것이지? 네놈들이나 황제나

그런 창녀같은 년이 도대체 뭐가 대단해서!!”


청년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물론 공녀님에 비하면 티끌 만큼도 못한 존재이지요. 허나 저희에게 필요한 정보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 이상은 밝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희의 약속을 잊지 말아주시길..”


여인은 잠시동안 그를 노려보다 청년을 뒤로 한 채 걸음을 옮겼다.

청년은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단해. 엄청난 미모 뒤에 감춰진 세상을 엎을 악독함이라..큭큭.."


청년도 곧 자리를 떠났고, 기사들은 벗어두었던 무장을 다시 입고 있었다.

대부분이 타들어가고 찢겨진 천 조각을 들고 있던 기사가 자신의 단장에게 말했다.


"이건 어떡합니까?"


단장은 천조각을 힐끔 쳐다보더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지금 그딴 걸 신경쓰게 생겼어?? 그냥 버려!"


기사는 망설임없이 강물로 천조각을 던져버렸다. 천조각은 강물을 따라

흘러가기 시작했다.

깨끗한 강물에 잿물이 조금씩 빠져나가자 금색실로 수놓아진 글씨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정성들여 수놓아져 있는 문구 하나가 보였다.




죽음까지 함께 하기를..

-레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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