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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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통로
작품등록일 :
2024.09.09 02:20
최근연재일 :
2024.09.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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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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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DUMMY

위치가 발각 됐을 거라고 생각한 아르 일행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밤낮을 이동한 켄트와 레이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르는 켄트의 등에 업혀 잠들어 있었고 그녀의 볼에 남은 눈물자국은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는지 짐작케 했다. 앞서 걸어가던 레이가 말했다.


"도대체.. 누구지.."


켄트는 잠시 침묵했다.


“짐작할 수 조차 없는 일이다. 다만 한군데가 집히는 곳이 있지만..”

"누구?"

"피에르 공작"


레이가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리고 그들의 전력으로는 무리수였을텐데?”

"그래서 지금이겠지."


레이가 말었다.


"금사자 기사단이 파견나가 있다고 해서? 그들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영지내 주둔한 수비병력을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전멸시켰다는 것은 말이 안돼.

아니, 무엇보다 공작이 왜? 그들에게는 명분이 없잖아“

"나도 모르겠다. 다만 짐작일 뿐이지. 그들 외에는 우리와 악감정이 있는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테니”

"으...음.."


켄트는 잠시 멈추어 섰다. 아르가 뒤척거리며 신음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르가 다시 잠잠해 지자 발걸음을 옮겼다.

켄트가 말했다.


"흉수가 피에르 공작이라 할지라도 설명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

외곽 성벽에서 단 하나의 경고조차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계획되어 있던 공격은 피에르 공작의 성격상 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대공전하의 신병을 확보했음에도 수색조를 편성했다는 점.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피에르 공작과 한패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다만 피오네 공작의 짓이라 할지라도 그 혼자서 실행한 일은

분명하다. 한 시간안에 우리 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힘은 피에르 공작의 수중에서

나올 수 없는 일이니까. 분명 이 계획은 오래전 부터 계획되었을

것이고, 그 배후는 하나의 공국이 아닌 그 이상의 국가일 것이다."


레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황국?"

"아직 속단하긴 일러. 네 말처럼 황국에서 직접 병력을 지원해 줄

명분이 없으니까."

"으..음..켄트?"


켄트는 멈추어 서서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아니예요.. 내려주세요.. 이제부터 걸어갈래요."


켄트는 그녀를 내려주었다.


"조금 더 쉬시지요. 아직 많이 걸어야 합니다."


아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저만 편할 수는 없어요."


아르는 곧바로 걷기 시작했고. 켄트와 레이는 대화를 멈추고 묵묵히 걸었다.

한참을 걷던 아르가 입을 열었다.


"레이경, 우린 어디로 가는 건가요?"

"일단.. 지금은 오스만항구로 잠입해.. 공녀님의 안전을 위해

신성왕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아르는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우리 바이서스 공국은...망한 건가요..?"


레이는 흠칫했다. 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가씨께서 살아 계시니까요. 아가씨가 바이서스를

다시 일으키셔야 합니다. 그리고 아가씨라면 바이서스의 명예를 반드시

회복시키실 겁니다."

"하지만..."


아르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켄트가 말했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시지요."


아르는 힘없이 주저앉아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켄트는 그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조금있으면 도착한다. 혹시나 매복병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살펴보고 오겠네."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


켄트는 살짝 미소지어 보이며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레이는 아르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아르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아가씨. 괜찮아요. 저희가.. 옆에 있을께요."


아르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그 둘은 한동안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앉아 있었다.

얼마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던 레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켄트였다. 그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켄트!!"


켄트의 오른쪽 팔뚝에 부러진 화살이 박혀있었다.


"좀비라는 것.. 처음 보았다."


레이는 응급조치를 하기위해 그에게 다가갔고, 켄트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좀더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한다.. 저놈들 말고 또 있을지도 모르니까..

걸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가씨?"


아르는 울먹거리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켄트는 앞장서서 우거진 숲을 헤집고

들어갔다.


펑!


하늘에 붉은색 해골모양의 빛이 수놓아 졌다.

켄트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살아있었나...젠장..확실히 했건만.."


일행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우거진 숲속이 조금씩 밝아진다 싶더니 마을의 불빛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숲속에서 오솔길을 살피던 켄트는 안전하다는

손짓을 보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오솔길에 발을 딛었다.


쉬~익~

챙!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은 켄트의 검에 의해 두 쪽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어서 날아온 수십 발의 화살 중 두 발이 켄트의 옆구리와 어깨에 박혔다.

아르가 소리쳤다.


"켄트!!"


켄트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고개만 숙인 채 멈춰있었다.

부스럭 소리가 들리며 건장한 사내들 십 여명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들어냈다.

그들의 복장으로 보아 용병들인 듯 했다.


"크크, 이제 칼든 놈은 무용지물이군, 독 화살이 제 역할을 하나 보구만, 큭큭.

그나저나..네 뒤에 보이는 계집들은 꾀나 발버둥 치겠는데?

바로 죽이긴 아깝군 그래. 우리도 재미 좀 봐야지 않겠어? 큭큭큭"


그의 말에 사내들의 얼굴엔 조소가 흘렀고, 벌써부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는 이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목소리에 한껏 힘을 주며

말했다.


"네놈을 죽인 사람이 어떤 이름인지 기억해라. 음하하하"


사내들의 입에선 폭소가 터졌고 대검을 든 용병이 켄트에게로

다가갔다. 레이는 아르를 뒤로 숨긴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아르는

레이의 옷을 붙잡은 채 울먹거리고 있었다.

사내의 검이 치켜 올라간 순간 켄트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희들의 목숨을 가져간 이는 바이서스의 종 크리스만 켄트다"


사내는 콧방귀를 끼었다.


"큭! 곧 죽을놈이 입만 살..."


사내는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켄트의 얼굴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눈앞에 울퉁불퉁한 땅이 다가오고 있었다.

켄트는 목이 없는 사내의 몸을 방패삼아 적에게 달려들었다.

우물쭈물 하던 용병들은 활을 던지고는 검을 뽑기위해 검집에 손을 가져갔지만,

이미 켄트는 그들의 눈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주인을

잃어버린 육신들은 땅에 떨어져 꾸물댔다. 아르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

비친 켄트는 악귀 같았다. 그의 검은 달빛에 반사되어 번쩍였고, 그때 마다 육신의

조각들이 허공을 떠돌다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온통 피를 뒤집어쓴 켄트가 말했다.


"아가씨, 가셔야 합니다."


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와 함께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의 발에 무엇인가

밟혔다. 손이었다. 그 손은 마치 혼자 살아 움직이는 듯 아르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으웁.."


아르는 토악질을 했다. 죽음의 냄새.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꾸물거리는 시체의

파편들과 피의 웅덩이들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하지만 아르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발목을 움켜잡고 있는 손을 뜯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가요"


두두두두.

일행의 고개가 동시에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갔다. 마을 반대편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점점 명확하고 거대하며 가깝게 들려왔다.


"기..마..병.. 인가.."


켄트의 입에서 절망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이가 갑자기 켄트를 제치고 앞으로 나와서 그들을 등지고 섰다.


"아가씨 부디.. 바이서스를 다시 일으켜 주십시오.."


아르는 레이에게로 달려갔다. 그녀의 머리속에 마커스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르는 레이를 붙잡지 못하고 켄트의 팔에 힘없이 늘어졌다.

마법으로 잠들어 버린 아르를 안고 있는 켄트가 레이를 응시했다.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켄트는 말 없이 뒤돌아 달렸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부디.. 저 세상에서는 .. 그 사람과 영원히 행복하게나..'


레이는 멀어져 가는 켄트의 뒷모습을 보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녀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가까워 오는 말발굽 소리 쪽을

노려보았다.


"절대 살아서 이곳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켄트는 귀청을 파고드는 폭음과 후끈거릴 정도의 불길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을에 거의 다다른 켄트는 마을 앞의 돌다리를 건너기 전 다리 밑으로 뛰어내려

몸을 숨겼다. 마을 쪽에서 병사들의 발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저기다!! 빨리 뛰어!!"


철컹철컹


소리가 조금씩 멀어지자 그는 다시 다리로 올라와 비어있는 성문으로 들어갔다.

항구도시 오스마틴 성벽 밖에서 일어난 화염은 마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에 충분했고, 켄트는 그 구경꾼들의 시선을 피해 골목길사이로 빠르게 달렸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화염은 한 여인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기까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늘 따라 밤늦게 까지 마을이 소란스럽다고 생각한 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 머리를 긁적이며 뒤돌아섰다.

자신이 있는 곳이 지하이며 창문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폴드는 반 이상 타들어간 초 두 개가 비추고 있는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갈색 곱슬머리는 촛불이 반사되어 주황색을 띠고 있었다.

폴드는 안경을 고쳐쓰며 말했다.


"이번만큼은 합격해야 하는데.. 흠.."


그의 안경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폴드는 안경알을 다시 끼워 넣으며 말했다.


"손님이 오시려나 보네..오늘 저녁은 심심하지 않겠어"


폴드는 초 하나를 들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고 탁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움푹 패여 들어가거나 튀어나온

주전자와 컵 세 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폴드는 옆에 놓아져 있는 깨끗한 수건으로 그것들을

닦고는 입을 열었다.


"ecswa twast"


주전자 주위에 흰빛이 일었다.

그리고 곧 김이 솟아 오르고, 물이 끓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고마워,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주전자 주위에 일던 빛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덜컹


폴드의 안식처로 통하는 유일한 문인 낡은 대문이 열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앗, 생각 보다 일찍 오셨습니다?"


그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짊어진 사람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여기가... 밴 마이드 폴드씨의 지,집이 맞소..??"


폴드는 자신이 가진 초를 탁자 위에 놓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집이라고 하기엔 좀 누추하고 좁지만, 제대로 찾아오셨습니다"

"다..다행이군... 내.. 숨이 끊어지기 전에.. 찾아와서..."


남자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폴드는 계단에서 쓰러지는 남자를 막기 위해 있는 힘껏 그를 받혔지만

체격이 좋지 않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무게가 워낙 무거웠던지 휘청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는 한숨을 쉬었다.


"휴...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네.."


폴드는 천천히 그와 그의 등에 엎혀있는 소녀를 데리고 잠자리로 만들어놓은 모포

위에 눕혔다. 그리곤 문 쪽으로 뛰어가 문밖을 살피고는 문을 걸어 잠구었다.

그는 문에 기대어 서서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심심하지 않겠다는 말은 취소해야겠어."


그는 부산히 움직였다. 마구잡이로 쌓아 둔 상자들을 뒤적거리던 폴드는

작은 상자하나를 찾아서 쓰러져 있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업혀 온 소녀는 심하게 다친 곳이 없었지만 그 소녀를 업고 온 남자는

만신창이었다. 이동에 불편하지 않도록 활의 대를 부러뜨려 놓은 것이 심하게

움직이면서 몸 깊숙이 박혀 들어가 있었고, 옆구리에 박힌 화살은 입고 있는

가죽갑옷에 걸려서 빼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는 상처부위를 살피다가 눈쌀을

지푸렸다.


"독.. 이 상태로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다니.."


사내의 상처부위는 푸르스름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극독이네.."


그는 품속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어 켄트의 옷가지를 잘라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이마엔 굵은 땀방울 들이 늘어갔다.

거의 다 타들어간 촛불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아르는 긴 잠에서 깨듯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일어나셧군요"


아르는 낯선 목소리에 벽 쪽으로 물러났다. 아르는 머리위에 떠나니는 하얀

구체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지 마세요. 그건 빛의 정령이랍니다. 당신이 놀라면 정령이 달아나 버릴 수

있으니 소리를 지르거나 하진 말아주세요"


아르는 폴드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켄..!!"


아르는 급히 입을 닫았다. 폴드의 손가락이 그의 마른 입술위로 올려져 있었다.

그는 하얀 구체를 가리켰다. 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폴드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다시 켄트의

상처부위에 집중했다. 그는 켄트의 상처를 봉합하고 있었다.

상처부위엔 하얀 가루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가 봉합을 끝내고 무엇이라 말하자

가루들이 빛을 내며 타들어 갔고 연기가 솟아올랐다.

놀랍게도 빠른 속도로 상처부위가 아물어갔다.

아르는 놀라웠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렸을 적에 정령을 부리는 이들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의 치료법은 조금 독특하긴 하지만 신성마법과 버금가는 효능이 있다고 했다.


"이제 다 끝났어요. 흉터는 남겠지만, 더 이상 상처가 곪거나 터지는 일은 없을

꺼예요. 피를 많이 흘렸다는 점이 조금 걱정 되지만 이 분께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네요"


폴드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웃어 보였다.


"감사해요..저기..혹시.. 레이라는 사람도 같이 오지 않았나요?"


폴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고, 아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흑..나 때문에..흑흑.. 나 때문에..흑.."


그녀는 자신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감정이 복받치는 듯 곧 숨넘어가는 소리까지 내며 울기 시작한 그녀는

한참을 울었다.

폴드는 그러한 그녀를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켄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는 깨끗한 붕대로 상처부위를 감기 시작했다. 그가 붕대를 다 감고,

치료용으로 쓰인 도구들과 피로 범벅이 된 옷들, 그리고 바닥에 묻은 혈흔들을

정리한 뒤 다시 켄트의 곁으로 다가가 앉을 때까지 아르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아르의 울먹거림은 잦아들었다.

아르는 폴드를 바라보며 입을열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어요. 제 이름은 네어시스 아르라고 해요."


폴드의 눈이 커지고,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바이서스의 종 밴 마이어 폴드가 공녀님을 뵙습니다.

이때까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요"

"아니예요. 무례라니요. 오히려 제가 무례를 범했죠. 그리고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어찌 평민의 신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십니까."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폴드는 믿어도 되나요..?"

"저는 바이서스에 귀속된 몸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바이서스를 저의 조국으로

택한 제 신념은 변치 않을것입니다."


아르는 한참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켄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언제쯤 깨어나요?"

"짧아도 2,3일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군요..편하게 앉아요, 괜찮아요"

"그럴 수 없습니다."

"편하게 앉으세요. 그리고 고개도 드세요"


앳되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단호한 음성이었다.

폴드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들고는 편하게 앉았다. 하지만 그는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했다. 아르는 일어나서 깨끗한 수건을 찾아 들고는,

탁상 위에 있는 주전자 뚜껑을 열었다.

주전자에서는 아직까지 뜨거운 김이 솟아 나왔다. 아르는 거리낌없이

수건위로 물을 부었다. 폴드는 기겁하며 일어섰지만 그녀는 어떤 표정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수건과 주전자를 조심스럽게 들고 와 켄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곤 자신의 무릎 위에 수건을 짜내고 켄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상당히 뜨거울 텐데.. 그때의 그 어린 공녀가.. 이리도 성장했다는 말인가..'


폴드는 그런 그녀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다 문득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공녀가 왜 쫓기고 있는거지? 무슨일이 일어난 것인가..?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는데'


폴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바이서스의 공녀의 신분이란 현 대륙의 황태자와도 버금가는 힘을 가진 공녀였다.

비록 하이오겐 황국에 속한 공국이지만,

하이오겐 황국의 세 공국가 중 가장 세력과 힘이 큰 공국이 바로 바이서스 공국 이었다.

이 바이서스 공국의 세력은 나머지 두 공국의 모든 세력을 합쳐도,

충분히 승기를 잡을 만큼 힘이 있었다.

바이서스는 하이오겐의 최고 권력자라는 소리다.

그런데, 그 바이서스 공국의 하나뿐인 딸이며, 그 누구보다 사랑을 받는 다는

공녀가 이런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치료한 기사가 들고 있는 검의 손잡이엔 바이서스 공국의 수호기사라는

표식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그것은 자신이 익히 보아 알고 있는 문양이었다.

공국에서도 공왕의 최 측근인 수호기사 단 다섯에게만 부여되는 검이다.

그런 그가 데려온 소녀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녀의 눈에서 본 모습은 일체의 의심 따위는 생기지 않게 했다.

그래서 그는 진짜 공녀인지 의심하지 못하고 왜 공녀가 쫓기는지에 대해

궁금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녀에게 묻지 못했다.

현재 자신은 일개 평민의 신분일 뿐이었다.

바이서스의 공녀에게 질문을 할 처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아르의 뒤에서 아무말 없이 그녀를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아침 햇살이 낡은 지하실의 문틈을 비집고 들어올 때까지 아르는

켄트의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폴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앉아서 밤을 지새웠다. 폴드는 자신도 모르게 하품을 하다가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아르는 고개를 돌리며 미소지었다.


"피곤하시면 잠시 주무세요. 간밤에 수고가 많았어요"

"아, 아닙니다. 감히 제가 어찌!!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제가 또 진지하게 얘기해야 하는 걸까요?"


그녀는 웃음을 잃지 않았고, 폴드는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쾅쾅!!


"문열어!!! 당장 열지 않으면 부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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