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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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9.13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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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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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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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꿈(1)

DUMMY

검술 명가 스타인 공작 가문.


역사서에 기록된 초대 마검사들 중 하나였으며, 필로소스 대륙 서부와 오랫동안 명운을 같이 했고, 현재는 루비니아 왕국을 지키는 네 가문으로 자리매김한 상태.


독특한 취미가 있던 이들의 선조는 봉토를 하사 받은 뒤 외딴 숲의 절벽 위에 집을 지었는데, 사계절 내내 바람이 몰아쳐 사람들은 폭풍의 성이라 불렀다.

시간이 흘러 벽이 낡고 이끼가 낀 뒤에도 스타인 가 사람들은 계속 그 집에 살았다.


후손인 칼 스타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니, 그는 내로라하는 명문 귀족들의 대저택에 비하면 오두막이라 할 만큼 보잘것없는 그 시골 집을 매우 사랑했다.

어쩌면 귀애해 마지않았던 첫 번째 아내의 유해가 그곳에 묻혀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그 여자는 공작이 젊은 시절 서부의 늪지를 토벌하러 갔다 만난 이방인이었는데, 소부족 출신에다 아이까지 딸린 과부요 평민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개의치 않고 그녀를 첫째 아내로 맞아들인 것도 모자라 씨 다른 딸에게까지 스타인 성을 하사했다.

반발하는 가신들에게는 스타인 이상의 강대한 외척이 필요없다는 말로 일축했으니, 사람들은 그가 일찍 전쟁의 참상을 맛보며 현실 감각을 잃은 것이 틀림없다고 수군대곤 했다.


그처럼 무수한 낭설에도 공작은 기어이 아내를 성으로 불러들였다.

한동안 부부의 금실은 세간에 알려질 정도로 무척 좋았다.


하지만 그들이 혼인하고 몇 년 되지 않아, 아내는 아들을 낳다 그만 숨을 거두었다.

공작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국왕의 명을 받고 토벌에 나섰다가, 돌아와서는 주변의 권고에 따라 명문 여식을 둘째 처로 받아들였다.

그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쌍둥이 남매를 보고 다시 전장으로 떠났다.

그리고 첫 아들이 열 살 되던 해 서쪽에서 영영 실종되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가 국왕의 밀지를 수행 중이며, 전설적 기사요 구국의 영웅인 만큼 언제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스타인의 가신들 역시 그리 생각하여 공작의 젊은 동생에게 기꺼이 가주 대리를 맡겼다.


하지만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도, 가까운 인척을 대리로 내세워 영지를 통치할 수 있는 시한이 지나 새 가주의 선출 기간이 다가올 때까지도 사라진 공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히 성 안의 기강은 흐트러졌으며 곳곳에 비리와 부패가 만연했다.

또한 공작과 그 측근들이 멀쩡했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오래 전 죄를 짓고 내쫓겼던 공작의 다른 동생은 안주인과 정을 통한 끝에 조카를 돌본다는 명목으로 슬쩍 다시 영지에 돌아왔다.

아직 젊은 안주인은 그와 손을 잡고 집안의 서열을 무시하며 은근슬쩍 자신의 첫째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려 했다.

바른 말을 입에 올리던 자들은 모조리 내쫓겼고 큰딸은 애초에 핏줄도 아닌지라 적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편 공작의 적자이자 장자인 첫 아들, 데본은 어릴 적부터 유달리 몸이 약했다.

그는 말문이 트이기도 전부터 밤마다 아프다며 울어댔으나 왕실 의원조차 병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나이가 들며 악을 쓰고 뒤집어지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그는 심히 예민해졌고 눈가에 늘 신경질이 가득했다.

어려서부터 곁을 지켜온 유모 등이 아니면 누구도 시중을 들 수 없었으니, 그의 방문 앞을 지나는 하인들은 감히 숨소리조차 내기를 꺼려 했다.


이러한 성질 탓에 그는 늘 방 안에서만 누워 지냈다.

아버지인 공작이 실종되고 나서는 빈말로라도 함께 외출하려는 자가 드물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모습이 계모의 경계를 낮췄다.

그녀는 데본을 병신 천치로 여겨, 다음 공작이 될 아들의 세력을 다듬고 가꾸는 데에만 열중했다.

누나와 유모를 비롯한 몇몇 사람만이 그를 진정으로 염려했으나 데본은 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갓난아기일 때부터 그를 괴롭혀온 미상의 아픔이 날로 격해졌기 때문이었다.


식사라 하기도 민망한 수프 한 접시를 겨우 넘기고 나면, 그는 종일 침대에 누워 남들이 꾀병이라 비웃는 그 고통을 삭이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그는 성년을 앞둔 나이에도 아는 것이나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삶은 그저 지긋지긋한 것이었으며, 무엇 하나 담거나 채우지 못하고 단지 흘러가는 무언가일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모처럼 낮잠에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는데, 그것은 마치 일생을 살았다 착각할 만큼 긴 꿈이었다.


***


그 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밤이었다.

잠결에 커튼이 살랑이는 소리를 듣지만 않았다면, 데본은 어떻게든 다시 수마에 빠져들려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공기를 가르는 움직임이 기어이 그의 신경줄을 건드렸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감히 주인의 잠을 방해한 간 큰 하인을 벌주려 했다.


"누구···!"


하지만 그의 말은 커다란 손아귀에 가로막혀 나오지 않았다.

강한 힘에 눌려 침대 위로 쓰러지며, 데본은 그가 침입자임을 알아차렸다.


더 끔찍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일순 몸 중앙이 쪼개지는 듯한 격통이 퍼지더니, 그의 가슴 한복판에 검이 박힌 것이다.


데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괴한이 살 속에서 심장을 꺼내가는 장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감각이 멀어지는 가운데.

데본은 곧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이 사악한 침입자를 노려보았다.


"쯧쯧."


눈이 마주치자 상대는 가볍게 혀를 차며 데본을 내려다보았다.

조롱과 질시, 약간의 연민이 그의 눈가에 스쳤다 흩어졌다.


"가엾은 놈. 네 아비가 멀쩡하기라도 했으면 이런 꼴은 안 봤을 텐데. 기껏 마나 하트를 가지고 태어나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마나 하트?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왕궁에서 보낸 명의조차 그의 심장이 별다르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게 대체 무슨 말···.


데본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폐허가 된 스타인 성의 참상을 목도한 뒤였다.


'······!'


불타는 저택.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신들.

멀리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다 곧 멈췄다.


충격도 잠시 데본은 전신이 불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동시에 귓가에서 철판을 긁는 듯한 귀곡성이 울려퍼졌다.


꺄아아아아아악!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살려줘어어어어어어어!


기이했다.

마치 혼이 지옥의 강에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가는 듯한 체험이었다.

주위는 온통 붉었고, 불쾌한 악취가 흘러넘쳤으며 사방에선 비명과 신음이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데본은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벗어나려 귀를 막고 몸부림쳐도, 그는 제자리에서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몸을 번쩍 들어 옮겼다.

그는 공황 속에서 깨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마주 보게 되었다.


'······.'


이럴 수가.


데본은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거울 속 그림자를 확인했다.

그 상에 따르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에 짜증이 가득하던 비쩍 마른 청년은 온데간데 없고, 피에 물든 검만이 눈앞에 번득이고 있었다.

죽은 그가 검의 재료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데본의 머리가 아득해졌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다시 한 번 작열하는 고통이 그의 어깨를 휘감았다.

한편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속삭이는 듯했다.


이대로 정신을 놓고 가라앉으면 모든 것을 잊고 평온할 수 있다고.


데본은 그 말이 솔깃하게 여겨졌다.

안식의 약속은 당장의 고통에 비하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리하여, 이대로 눈을 감으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데본이 포기하고 유혹에 순응하려는 찰나,

검을 잡은 괴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니 스타인을 찾아라. 그 여자까지 죽여야 이번 일을 마무리할 수 있다."


'······.'


레니 스타인.

그 이름에 번쩍 의식이 돌아왔다.


레니는 데본의 어머니가 스타인이 되기 전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그에게는 동복누나였다.

비록 반쪽짜리 핏줄이었으나 그녀는 데본을 진심으로 아꼈다.

어린 시절에도 밖에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 동생을 타박하기는커녕 늘 마음 쓰고 보살폈으며, 좀 더 커서 먼 곳에 다녀온 뒤에는 항상 전리품 가운데 가장 귀하고 좋은 것들만 골라 그에게 선물로 보내곤 했다.


세간은 스타인의 핏줄도 아닌 계집이 검을 쥐고 설친다며 그녀를 깔봤지만, 데본의 기억 속에 그녀는 반듯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녀는 여러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분노나 열등감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았으며, 언제나 맡은 자리에서 역할을 다하려 애썼다.


친밀한 가족, 용맹한 기사, 부하에게 존경 받는 상급자,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는 여자.

만약 그녀가 계모의 심부름을 위해 멀리 떠나 있지 않았더라면, 오늘 공세에서 마찬가지로 화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침입자들은 그런 그녀까지 쫓아가 죽이려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데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지지 않겠다는 듯 허공을 쏘아보며 바짝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화마와 같은 고통이 여전히 그를 에워싸고 있었으나, 그의 인내심 또한 그 어느 때보다 길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는 의식의 소용돌이에서 마침내 약간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더 이상의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마지막 하나 남은 가족만은!


그가 이를 악문 채 발버둥치자, 그의 의지에 반응한 양 검이 짧게 맥동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던 괴한 역시 그것을 느낀 듯했다.


그는 당장 생피라도 토할 듯 붉어진 검신을 빤히 내려다보다, 조소하듯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아직 있었나."


괴한의 손이 날 끝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나 그의 눈은 한겨울에 내린 서리처럼 차갑고 섬뜩했다.


"그래, 그처럼 강력한 마나 하트는 나도 처음 보았으니···.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일찍 항복하는 게 네게도 이로울 거다. 너도 보았겠지만···."


그 속은 지옥이거든.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검을 문질러 닦고 칼집에 쑤셔넣었다.

데본은 무어라 악을 쓰려 했으나 거대한 피의 급류가 빠르게 그의 몸을 덮쳤다.

그는 인상을 찡그린 채 살기 위해 마구 허우적거리다, 가라앉고 다시 뜨고 지기를 반복했다.

새된 비명 소리가 귓가를 맴돌며 죽음에 대해서 황홀한 선율로 다시금 노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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