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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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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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6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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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승리

DUMMY

"······?"

아이작이 미미하게 이마를 구겼다.

"뭐냐?"

살갑지 않다 못해 은근히 귀찮게 여기는 말투.

들리는 말로는 딸 니나의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고통 받아온 데본과 달리, 그녀의 병은 원인과 해결책이 비교적 확실했다.

오래된 왕실 의서에서는 그녀의 병이 한 소수민족의 풍토병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치료 방안으로 몇 가지 약초를 달여먹일 것을 제시했다.

문제는 그 재료들 대부분이 본디 매우 특수한 지방에서만 났던 데다, 오늘날에는 그 지역이 마기에 휩쓸려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산골 마을의 어린아이도 알다시피 마기에 노출된 생물은 죽거나 그 성질이 변한다.

게다가 책에 언급된 재료 중 어떤 것은 온 대륙을 다 뒤져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가주 대리가 된 이래 아이작은 겉으로나마 매사에 공정하려 애써왔지만, 자식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눈에 불이 켜지는 아버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번번이 낙담하고 실의에 빠지며 또 절망해야 했다.

레니는 그런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녀가 기사 파견을 늘 자청해 나간 것에는 가문 내에서 그들 남매의 입지를 보전하기 위함이라는 목표가 뚜렷했지만 한편으로 다른 목적도 있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 데본의 병에 관한 실마리를 발견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그녀는 이번에 데본이 놓을 한 수가, 아이작과 그들의 관계에 큰 전환점이 되리라고 짐작했다.

"삼촌."

"······."

"니나의 병을 낫게 할 길을 찾았어요."


***


조용하던 성에는 간만에 활기가 돌았다.

그 근원은 다름 아닌 본관의 집무실로부터 나왔다.

아이작이었다.

"흠, 흠."

그는 요즘 늘 콧노래를 부르며 일했다.

얼굴에는 웃음이 넘쳤고, 시체 같던 뺨도 나이답지 않게 발그레했다.

그는 주변의 사용인들에게 한층 더 관대해졌으며, 종종 차를 잘 끓였다는 등의 사소한 이유로 그들에게 은이나 장신구를 주기도 했다.

물론 그가 가장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죽은 첫째 형수에게서 난 남매였다.

데본과 레니 스타인 말이다.

"레니, 새 거처에서 지내기에 불편한 점은 없느냐? 아랫것들이 만에 하나 네게 미흡할까 걱정이다. 만일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지금 말하거라. 바로 처리해주마."

"천만에요! 삼촌부터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데, 누가 감히 제 주인을 넘보겠어요? 새 거처도 아주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나중에라도 문제가 보이면 주저 말고 내게 이야기해라. 내가 네 편의 정도는 언제든 봐줄 수 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데본에게도 고개를 돌려 물었다.

"요즘은 좀 어떠냐, 데본? 근래 들어 레니와 함께 매일 정원 산책을 할 만큼 건강이 호전되었다고 들었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해요, 숙부님. 배려해주신 덕분에 아직 더디지만 그래도 날로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것 또한 좋은 일이지. 더 좋은 보양재가 생기면 네게 먼저 보내주마. 기껏 회복될 기미가 보였는데 괜히 몸을 소홀히 하여 다시 아프게 하면 되겠느냐."

그때 그의 시종이 다가와 약속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그는 알겠노라 답하고는 남매를 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구나. 요새 니나가 꼭 아비에게 승마를 배워야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말이다."

"네, 삼촌. 얼른 가보세요. 다음에 또 인사드릴게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숙부님."

"그래. 아무쪼록 건강 조심하거라."

그리 말하고 아이작은 시종과 함께 등을 돌렸다.

발걸음은 물론 그의 뒷모습에서 풍기는 분위기마저 달라져 있었다.

그가 완전히 자리를 뜬 뒤, 데본은 레니와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제 말대로 됐지요, 누님?"

"그래, 정말 기적 같은 일이구나."

니나가 씻은 듯이 나은 뒤, 아이작은 계모와 다른 형의 성화를 들어가면서까지 레니가 성에 남아 있게 해주었다.

한편 데본이 니나의 병을 고치기 위해 쓴 기술은 간단했다.

왕실 의서의 처방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다.

다만 책에는 현재와 다르거나 알려지지 않은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어떤 약초는 세월이 변해 다른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었고, 또 어떤 약초는 안개가 자욱하고 봉우리가 높은 산 너머 소수민족의 땅 위에 자랐다.

후자는 특히 왕국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데본은 검으로 살면서 악한을 따라 그곳까지 가본 적 있었다.

그때는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니나가 그토록 괴롭지 않았을 거라며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전자는 진명만 알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였고, 후자는 왕국 시중에도 드물게 유통되긴 하는 종이었으니.

레니는 이를, 파견 갔던 작은 마을 사람에게 들었노라 아이작에게 거짓으로 고했다.

그러나 그가 아마 진실을 알더라도 그녀를 크게 책하지는 않을 터였다.

무릇 핏줄, 그것도 자식의 목숨이란 진실보다 귀한 법이었다.

그들이 작은 승리를 만끽하는 사이 로지가 냉차를 내왔다.

데본은 그녀에게도 차를 한 잔 권한 다음 소파에 기대어 다과를 즐겼다.

레니가 옆에서 은은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네 옆에 있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야. 삼촌도 기꺼이 허락하셨단다."

"저도요. 안 계시는 사이 무척 보고 싶기도 했고요."

"얘는, 또 빈말을."

그녀는 데본의 등을 툭 치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한동안은 기초를 쌓는 데 매진하자. 맑은 정신에는 단련된 신체가 선행하는 법. 네가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려거든 결코 육체의 수양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단다. 내 말 알아듣겠니?"

"그럼요. 마침 저도 통감하던 참이었습니다."

데본의 눈길이 슬그머니 창밖의 공터로 향했다.

본디 작은 건물을 하나 지으려 했으나 도중에 공사가 중단되어 그대로 버려진 곳이었다.

"그러면 이 제자,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누님."


***


얼마 동안 훈련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에 앞서 데본은 레니와 또 한 가지를 꾸몄는데, 이로 인해 레니는 뒤늦게 치장과 장신구에 빠진 여자 역할을 해야 했다.

데본은 그런 누나를 위해 틈만 나면 시장에 가서 색색깔의 보석을 사 오는 우애 깊은 동생을 연기했다.

마석을 제외하고 남은 보석을 받아들 때마다 레니는 드물게 뾰로통해져서 투덜거렸다.

"네 부탁만 아니었으면 이런 돌멩이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란다. 난 검이 훨씬 더 좋거든."

"알죠, 누님. 늘 감사드려요."

"그래. 네가 이런 일을 뭐 때문에 획책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녀는 동생이 시장에서 남 몰래 할 일이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게 보석 그 자체라는 사실은 몰랐다.

데본은 하나뿐인 가족을 속이는 것이 못내 미안했지만, 그의 지위가 안정될 때까지는 마나 하트와 관련된 정보를 숨기기로 했다.

사람이란 높이 올라가면 반드시 표적이 되며, 강해지면 그를 시험하고자 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많이 알거든 필히 이용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데본으로서는 조금이라도 위험을 줄이고 싶었다.

괜히 레니를 끌어들여 꿈 속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데본은 비밀을 묻어둔 채 잠자코 레니의 지도에 임했다.

문제는···그녀가 날 때부터 천재였던 까닭에, 연약하다 못해 몸이 유리 조각 같은 동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퍽!

검 한 초에 데본이 종잇장처럼 나가떨어졌다.

레니로서는 동생의 수준을 고려하고 또 고심하여 나름대로 초보를 봐주며 가르친 것이었다.

그녀는 의아함을 넘어 시무룩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진 데본과 제 검을 번갈아 보더니, 앞으로 다가와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이 누나랑 대련하는 것이 싫니, 데본?"

데본은 속으로 외쳤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레니는 형편없는 스승이 틀림없었다···그가 아무리 누나를 사랑한다 해도 이 평가는 수정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 그녀 곁에 남아 있는 부관들은 미친 독종이거나 미모에 눈 먼 놈들이 분명했다.

그녀에 버금가는 천재도 아닌데, 매일 이런 식으로 얻어맞아가며 버틸 수 있는 놈은 드물 테니까.

다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스승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데본은 눈물을 머금고 이를 악문 채 또 한 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니는 그런 그를 보더니 아쉬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좀 쉬었다 하자꾸나. 여기가 전쟁터도 아니고, 배우는 사람이 너무 지치면 되려던 것도 안 된단다."

데본은 왠지 쥐어박힌 기분이 들었지만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레니는 잠시 그녀 휘하의 병영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러 떠났고, 남겨진 데본은 한동안 별채 1층의 휴게실에 누워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천장의 무늬를 바라보고 있자니 새삼 자신의 나약함이 서럽고 억울해졌다.

도대체 그놈의 심장에 구멍은 왜 뚫려서는 저를 이렇게나 고생시킨단 말인가.

레니의 말대로 공작과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은 자신이라면 지금처럼 연약하고 민감했을 리도 없었을 텐데.

내심 짜증을 부리던 그의 귀에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그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기사단의 훈련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평소에는 수련에 열중하거나 별채에서 문을 닫고 지내느라 몰랐는데, 오늘따라 훈련이 유난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는 로지를 시켜 창문을 닫을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바꿨다.

레니가 돌아오기 전까지 잠깐만 훈련장을 둘러보고 올 요량이었다.

자신에게는 레니라는 대단한 스승이 있을 뿐더러 평민 생도들 사이에 끼어 같이 훈련을 받을 입장도 아니었으나, 그들이 어떤 교육을 받는지는 꽤 궁금했다.

그리하여 데본은 로지에게 언질만 주고 일어나 재빨리 별채를 벗어났다.

그리고 가까운 풀숲에 숨어 생도들이 우로 구르고 좌로 구르는 광경을 가만 지켜봤다.

그들의 면면은 하나같이 앳되었지만 간혹 성숙하거나 나이 든 자들도 있었다.

얼굴에선 땀이 뻘뻘 흘렀고 태반이 눈에서 오기와 투지를 빛냈다.

교관은 그들에게 조를 반으로 나누어 싸우는 연습을 시키는 중이었는데, 당연하게도 대부분이 어설프기만 했다.

처음에는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갖추어 목검을 들고 돌진하다가도, 조금만 밀리거나 밀어붙이면 곧 한데 뒤엉켜 난전을 펼치곤 했다.

그들 중 돋보이는 자들은 보통 덩치가 크거나 힘이 좋은 자들이었다.

다들 아직까지 변변한 기술을 배우지 못한 탓인지, 그들은 과한 자신감을 보였으며 반대로 그렇지 못한 자들은 주눅 들어 유리한 고지도 뺏기곤 했다.

하지만 그런 난장판에서도 힘껏 분투하는 이들이 소수 있었다.

방금 막 데본의 시선을 앗아간 소년은 유독 몸집이 작았다.

얼마 안 가 그는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당장 그에게 레니가 있고, 가문 내에서 여자 기사들을 몇 번 본 적 있음에도 조그마한 그녀의 존재는 당혹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이왕이면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알아내고 싶었다.

일순 알 수 없는 충동이 그를 풀숲에서 밀어냈다.

저도 모르는 사이 그는 안전지대를 벗어나 한 발짝씩 훈련장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때, 우렁우렁한 저음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도련님이 여길 어떻게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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