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엔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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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9.15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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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6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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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해도

DUMMY

* * *


“이거 놔!”


참된 어른을 흉내 내려다 냉탕에 오줌이나 싸는 어른이라는 걸 폭로 당한 쌀집 사장 최태식이 작정하고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너도 맞고 싶어?”


심지어 그는 자신을 말리려는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욕지거리를 퍼부음은 물론 주먹까지 휘둘렀다.


“아, 형님 제발 진정 좀 하세요! 아직 애들이잖습니까!”


하지만 혼자서 목욕탕에 있는 모두를 당해낼 순 없었다.


“형님이 참으십쇼!”


결국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사지를 붙잡혀 고아들을 바라만 보는 신세가 되었다.


“너희들이 더 나빠! 너희가 저 새끼들이 불쌍하다고 감싸기만 하니까 이 사달이 난 거 아니야!”


그래도 그의 입은 쉬지 않았다.


“고아가 벼슬이야? 불쌍하면 다냐고! 불쌍하면 아무 말이나 막 지어내도 되는 거냐고!”

“내가 무슨 말을 지어냈는데요!”


그에게 뺨을 맞은 여덟 살 고아 이경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근본 없는 새끼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내가 네 친구냐? ‘내가’가 아니라 ‘제가’라고 해야지!”


인제와 맞는 말을 몇 마디 한다고 해서 지금까지 저지른 추태가 아름답게 포장될 일 없었지만, 이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고작 이런 놈들한테 쌀을 주고 있었다니······.”


포장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 동네의 유지라면 유지인 사람이었으니까.


“노블레스 오블리주고 뭐고 다 때려치울 거야!”


고작 이런 일로 보육원에 약속한 후원을 끊는다는 건 득보다 실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굶어 보면 정신 좀 차리겠지.”


그가 이보다 더한 추태를 부린다고 해도 이 동네에선 그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그였다.

심지어 그의 사지를 붙잡고 있는 이들조차도 그에게 술을 얻어 마시는 사람들이었다.


“자, 잘못했어요······.”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바락바락 대들던 이경민이 고개를 푹 숙이며 사죄했다.


“왜? 배고픈 건 싫어?”


고작 배고픔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자기 때문에 보육원에 있는 원생들이 피해를 입는 게 싫어서였다.


“잘못했어요······.”


쌀집 사장 최태식이 사악하게 웃으며 탈의실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평상에 앉았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안 그래도 술김에 한 약속 때문에 다달이 고아 새끼들한테 쌀을 갖다 바치는 게 짜증 났는데 잘됐군.’


그는 고아들이 냉탕에서 물을 튀기며 노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보육원장에게 술을 한 번 얻어먹은 죄로 1년 넘게 다달이 쌀을 후원한 것도 모자라 앞으로도 쭉 쌀을 후원해야 한다는 게 너무 싫었다.

단지 동네 유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명분 없이는 후원을 끊을 수 없을 뿐이었다.


“앞으로 내 쌀은 돈 주고 사 먹어!”

“안 돼요!”


이경민이 다급하게 무릎을 꿇으며 싹싹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너 거지냐?”


최태식은 악랄하게도 여덟 살 아이의 자존심을 작정하고 건드렸다.


“쌀은 원래 돈 주고 사 먹는 거야! 거지도 쌀은 돈 주고 사 먹는다고!”


이렇게만 하면 이경민이 알아서 자신을 도울 걸 알아서였다.


“돈이 있는데 왜 벌레가 반인 네 쌀을 사는데!”


아니나 다를까 원생들을 위해 기꺼이 무릎을 꿇었던 이경민의 마지막 자존심이 제대로 꿈틀거렸다.


“뭐, 뭐가 어쩌고 어째?”

“벌레 먹은 쌀 같은 건 이제 안 먹어!”


그는 이제 더 이상 비참해지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여튼 배은망덕한 새끼.”


최태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평상에 놓인 장기판을 펼쳤다.


“봤지? 저 새끼가 저렇게 거짓말을 잘해. 나를 오줌싸개로 만든 것도 모자라 멀쩡한 우리 가게 쌀을 벌레 먹은 쌀이라고 하는 꼬라지를 보라고. 정식아, 우리 가게 쌀이 벌레먹은 쌀이냐?”

“에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까?”


목욕탕에 있는 모두가 누가 거짓말쟁이인지 알았지만, 이들은 감히 이를 내색할 수 없었다.


“장기나 한판 두시죠.”

“짜장면 내기다.”

“탕수육도 시키죠.”

“이 자식이 아주 작정하고 벗겨 먹으려고 드네.”

“고아들한텐 돈 한 푼 안 받고 다달이 쌀을 갖다주셨던 분께서 이 아우한테 탕수육 하나를 못 사주십니까?”

“하하, 그래! 사준다! 탕수육에 이과두주까지 사준다! 날 이긴다면 말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 봐줄 겁니다!”


고아는 집값을 위해서라도 이 동네에서 사라져야 할 대상이었지만, 쌀집 사장 최태식은 지루한 일상을 달래고 맛없는 점심에 양념을 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존재였다.


‘결국 이렇게 됐군.’


이경민 이상으로 이 상황만은 막고 싶었던 이해강이 깊은 한숨을 뱉으며 평상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순 없지.’


그는 문득 지금의 자신이라면 이 문제를 말끔히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랑도 한판 해주세요.”

“훗, 짜장면이 먹고 싶은가 보지?”


평상에 앉아 있던 어른들은 장기는커녕 오목도 잘 못 둘 것만 같은 이해강의 도발이 그저 우스웠다.


“짜장면은 안 먹어도 되는데 빌고 싶은 소원이 있어요.”

“하하, 진짜로 나랑 내기 장기를 하자는 거냐?”

“네.”

“장기를 둘 줄은 알고?”

“네.”


취미에 돈을 쓰는 게 아까워 한 달에 3만 원만 내면 되는 헬스장도 다녀본 적 없는 그에게 장기는 아주 좋은 취미이자 부업이었다.


“우리 보육원이 멀쩡한 쌀은 없지만, 멀쩡한 장기판이랑 장기알은 있거든요.”


그의 촌철살인에 최태식의 얼굴이 제대로 구겨졌다.


“바둑판이랑 바둑알도 있죠.”

“넌 뭘 걸래?”


평소의 최태식이었다면 말 대신 주먹을 날렸어야 했지만, 이경민과 달리 감정적인 말을 뱉지만, 절대 감정적이지 않은 것만 같은 그의 어조가 최태식의 머리와 가슴을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만들었다.


“저도 소원 들어드릴게요.”

“너 따위한테 빌 수 있는 소원이라는 게 있긴 할까?”

“이 목욕탕에 다시는 오지 않는 것 정돈 들어드릴 수 있죠.”

“하하, 그래. 그 정도면 너 같은 놈도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겠다. 꼭 빌어야 하는 소원이기도 하고.”


‘건방진 놈.’


그는 동네 목욕탕에서조차 최고라곤 할 수 없지만, 이제 막 국민학교에 입학한 아이에게만큼은 질 리 없는 자신의 장기 실력을 믿고 이해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네 소원은 뭐지?”

“말해 뭐 합니까? 다시 벌레 먹은 쌀이라도, 아니 멀쩡한 쌀을 보내달라는 거겠죠.”


구경꾼들 역시 지금의 상황을 크게 반겼다.


“훗, 그래. 네가 이기면 내가 계속 쌀을······.”

“아니요.”

“아, 지금은 그냥 짜장면에 탕수육이 먹고 싶은가 보지?”

“아니요.”

“왜? 돈이 필요하니?”

“쌀이든 짜장면이든 탕수육이든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아저씬 제 친구한테 사과하세요.”


이해강이 당돌하다는 건 예전에 눈치챘지만, 이런 식으로 사과를 요구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최태식과 그 친구들이 깜짝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했군.’


정작 이해강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상에 앉아 빨간색 장기말을 자기 앞에 깔았다.


‘고작 벌레 먹은 쌀 좀 얻어먹겠다고 허리를 숙이다니 말이야.’


최태식의 후원이 끊기는 건 분명 보육원에 있어 큰 부담이었지만, 그에겐 이를 기회로 살릴 능력이 있었다.


“제가 이기면 무조건 사과하시는 겁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걸 알아서가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보육원의 모두를 배부른 돼지 위 배부른 소크라테스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아서였다.

여덟 살이란 나이가 돈을 벌기엔 굉장히 불리한 게 사실이었지만, 이 나이를 극복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게 바로 회귀자였다.


‘재밌군.’


구경꾼들은 지금의 상황이 그저 웃겼다.


‘그런데 진짜 이길 수 있을까?’


그리고 기대했다.


‘어쩌면 진짜 이길 수 있을지도. 장기보다 더 복잡한 바둑만 보더라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팔은 분명 안으로 굽지만, 이런 팔조차 포기할 수 없는 게 ‘도파민’이었다.


“무릎도 꿇으셔야 하는 겁니다.”

“잔말 말고 두기나 해.”


장기말을 다 깔자마자 ‘상’을 움직인 최태식이 이해강의 수를 재촉했다.


* * *


‘왜 이렇게 안 와?’


이해강과 함께 목욕탕을 빠져나가기 위해 때도 벗기지 않고 다시 옷을 갖은 이경민이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이해강을 찾아 나섰다.


‘저 새끼 도대체 뭐 하는 거지?’


그러다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장기를 두고 있는 이해강을 발견했다.


‘장기를 둘 수 있었다고?’


그가 기억하는 이해강은 자신과 달리 밖에 있는 시간보다 안에 있는 시간이 많은 아이였지만, 장기와 친한 이는 아니었다. 보통은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렸다.


“외통수입니다.”

“와······.”


‘이긴 건가?’


그는 확신에 찬 그의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일제히 감탄사를 뱉어내는 어른들을 확인하고 그가 승리했음을 눈치챘다.


“하, 한 판만 더 두자.”

“사과부터 하시죠.”

“사과는 무슨 놈의 사과!”


하지만 최태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냉탕에 오줌을 싸고. 자기 아들보다 어린 고아에게 욕을 하며 주먹을 휘두른 이답게 이해강과의 약속을 깼다.


“장기 두기 싫으면 꺼져!”


이해강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경민에게 다가갔다.


“아가, 잠깐만.”


그런데 최태식과 이해강의 대결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백발의 노인이 그를 불렀다.


“나랑도 한판 둬 보자.”


최태식과 달리 돈만 많은 이가 아니었다.


“네가 이기면 내가 짜장면에 탕수육도 사주고 멀쩡한 쌀도 다달이 계속 보내주마.”


그에겐 최태식에겐 없는 품위와 여유 그리고 호기심이 있었다.


“어르신도 사과는 받아줄 수 없는 거죠?”

“하하, 최 선생님, 저를 봐서라도 제가 지면 사과 한 번만 해주시죠.”

“예?”

“그냥 미안하다 한마디면 됩니다.”

“으흠······. 선생님이 하라고 하면 해야죠······.”

“이제 됐니?”

“좋아요.”


이해강이 씨익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막돼먹은 졸부라고 해도 진짜에겐 꼼짝을 못 하는군.’


그는 최태식과 마찬가지로 이해강이 살고 있는 행복보육원에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는 사람이자 중앙종합병원에서 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였다.


“하하, 상대가 안 되는구나.”


하지만 이런 그도 장기로는 이해강을 이길 수 없었다.


“혹시 바둑 한판 부탁해도 될까? 실은 내가 장기보단 바둑을 더 잘하거든. 더 좋아하기도 하고 말이야.”

“좋아요.”

“하하, 고맙다. 그런데 이번엔 뭘 걸어 줄까?”

“그냥 해요.”

“바둑에는 자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보단 내기 같은 거 없이도 어르신이랑 바둑을 두고 싶은 거죠.”

“훗, 그래. 네 말이 맞다.”


중앙병원 원장 김현석은 이해강의 한마디 한마디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행복보육원에 이렇게 훌륭한 아이가 있는 줄은 몰랐군. 그래봐야 고아지만.’


하지만 그의 모든 걸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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