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엔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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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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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돈을 벌어야겠다

DUMMY

* * *


“내가 졌다.”


중앙종합병원 원장 김현석은 쌀집 사장 최태식과 달리 자신의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사장님, 이제 사과 좀 해주시겠습니까?”

“아, 예······. 미안하다······.”


약속도 지켰다.


“쌀은 내가 와이프한테 말해서 잘 보내주마. 벌레 때문에 입맛이 떨어질 일은 없을 거다.”


그는 바라지도 않았던 촌철살인까지 고아들을 대신해 날려주었다.


“보육원에 사는 사람들이 스무 명 정도 되던가?”

“네.”

“내가 중국집에 말해둘 테니 오늘 식구들이랑 저녁에 중국집에서 실컷 먹어 봐라.”


심지어 약속하지 않았던 보육원 식구들의 전체 외식까지 시켜줬다.


“너 병신이냐?”


하지만 이경민은 지금의 상황이 몹시 불만족스러웠다.


“미안하단 한마디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그는 자존심 때문에 보육원의 소중한 후원자를 날릴 뻔한 이였지만, 고작 사과 한마디에 목을 맬 만큼 감정적인 이는 아니었다.


“내기 같은 거 없이 바둑을 두고 싶다고? 목욕탕에서 사는 아저씨들은 뭐 노름꾼이라 내기를 하는 줄 아냐?”


말만 잘했어도 더 대단한 선물을 받을 수 있었을 거라는 강한 아쉬움이 그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막말로 벌레 먹은 쌀 좀 먹으면 어때! 어차피 배 속으로 들어가면 똑같잖아! 차라리 이 망할 거적때기 좀 어떻게 해달라고 했어야지!”


행복보육원에 사는 원생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은 새옷이었다. 수년을 입어야 하는 교복조차 누가 입던 걸 물려받다 보니 아무리 깨끗이 씻고 꾸며도 고아라는 걸 숨길 수 없어서였다.


“너무 돈돈돈하면 매력 없잖아.”

“뭐?”

“톡 까놓고 말해서 우린 그냥 장난감 같은 거야. 싫증 나면 버리는 장난감. 막말로 돈을 달라고 했으면 스무 명의 원생이 중국집에서 양껏 먹을 만큼의 돈을 줬을까?”


이경민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강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듣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쌀집 아저씨한테 우리 보육원은 그냥 쓰레기통일 거야. 애물단지인 벌레 먹은 쌀을 버리기 좋은 쓰레기통. 근데 이마저도 이제 아까웠던 거지. 그래서 괜히 시비를 걸었던 거고. 이런 사람이 과연 쌀집 아저씨 하나일까?”

“그럴 리가.”


그는 평생을 보육원에서 살았던 덕분에 갑자기 사라지는 후원자와 봉사자를 숱하게 봐왔다.


“그런데 그러니까 더 제대로 뽑아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 어차피 우리한테 싫증 낼 사람들이고. 어차피 사라질 사람들이라면 중국집 같은 걸로 생색내지 말고 이 망할 옷 좀 어떻게 해달라고 제대로 말을 해야지!”


그는 자신의 옷에 담겨 있는 고아의 흔적이 정말 싫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옷을 벗고 다닐 순 없었으니까.

그가 실내 수영장과 바다를 코앞에 두고도 굳이 목욕탕에서 수영하는 이유도 다 ‘수영복’을 살 수 없는 형편과 가난보다도 치욕스러운 고아의 흔적이 담긴 옷으론 물에서 놀 수 없어서였다.


“옷 사줄까?”

“어떻게? 아, 장기랑 바둑을 두면 되겠네!”

“나랑은 내기 안 할걸?”


최태식과 달리 김현석은 그린사우나 넘어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고수였다. 그런데 이해강이 그를 압살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칠 만큼 멍청한 분들은 없어.”


장기와 바둑은 ‘운’의 영역이라기 보단 ‘실력’의 영역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판돈을 들고 이해강을 찾아갈 리 없었다.


“하여튼 헛똑똑이!”

“그래도 두고는 싶을 거야. 도대체 얼마나 잘하는 걸까? 이번엔 또 얼마나 재밌는 경기를 보여줄까?”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고아라는 이유로 괜히 구박받을 이유는 없을 거라는 거지. 안 그럼 내가 안 놀아줄 테니까.”

“하! 고작 그거 때문에 무료 봉사를 하시겠다?”

“무료 아니야. 단지 이걸 유료로 만드는 기술이 필요할 뿐이지.”


이해강이 씨익 웃으며 입을 삐쭉 내밀고 있는 이경민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최소 고아라는 이유로 알바도 못 할 일은 없을 거야.”

“뭐 이제 전단지는 돌릴 수 있겠네······.”


보육원에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는 이들조차 고아에 대한 선입견이 대단했다. 이러다 보니 구걸이 아니라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은 원생들조차 고아에 대한 선입견대로 살 수밖에 없었다.


“같이 돌릴래?”

“아니. 난, 좀 다르게 돈을 벌어보려고.”

“뭘 어쩌려고?”

“기보를 팔아보면 어떨까 해.”

“기보를 판다고?”

“누군가한텐 기보가 최고의 영화인 거거든.”


‘특히 AI의 기보가 그렇지.’


그는 알파고의 등장과 퇴장을 겪은 사람이자 AI 덕분에 몇 단계 더 발전한 프로바둑계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AI의 기보’가 가진 가치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AI조차 꺾지 못한 단 한 번의 대국을 담은 기보라면 제법 돈이 되겠어.’


문제는 이 AI의 기보를 어떻게 구하냐였지만, 명품 기보를 외우는 게 취미였던 그에게 이런 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복기는 걸러도 명품 기보는 꼭 외우는 그였으니까.

물론,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로 모든 기보를 외우고 있을 순 없었다.

하지만 알파고와 인간의 대결을 담은 12개의 기보와 지금은 바둑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이나 두는 3의 3 침투가 왜 정수인지를 보여주는 기보는 확실히 외우고 있었다.


‘엄청 될지도 모르겠군. 바둑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기보니까.’


AI가 프로 바둑계를 정복했을 때, 프로 바둑계에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떠드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프로바둑계는 AI의 기보를 학습하며 더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다.

AI를 이길 순 없지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방법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인기도 더 많아졌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기보 몇 개가 그를 세계 최고의 프로 바둑기사로 만들어줄 순 없었지만, 20세기의 바둑을 알파고 등장 전의 바둑보단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줄 힘이 있다는 부분에서 그의 기보 팔이는 꽤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었다.


‘이 동네 아저씨들한테 팔기 아까울 정돈데?’


“재밌긴 하더라. ‘바둑 저렇게 하는 거 아닌데······.’ 하던 양반들이 입 닫고 박수 치는 꼴이 말이야.”


이 동네엔 그의 수를 이해할 만한 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대단한 실력자라는 것 정돈 전부 눈치채고 있었다. 단지 그 깊이를 제대로는 가늠할 수 없을 뿐이었다.


“이 시대의 프로한테도 내가 통할까 싶긴 하네.”


그래봐야 21세기의 흔한 아마추어에 불과한 그였지만, 선진 바둑을 장착한 그라면 혹시 몰랐다.


‘결국 따라잡히더라도 지금은 내가 더 나을 수도 있는 거지. 지금의 난 뇌가 말랑말랑하기도 하고 말이야.’


“하하, 이제 겨우 목욕탕에서 내기 바둑이나 하는 아저씨들 몇 명 이긴 주제에 프로? 꿈이 너무 야무진 거 아니냐?”

“원래 꿈은 야무져야 돼. 그래야 꿈을 못 이루더라도 그 근처에는 가.”

“프로바둑기사가 되기 전에 보육원에서 쫓겨나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냐?”


이경민 역시 이해강과 마찬가지로 행복보육원에서 평생을 살았던 이답게 원장의 사상엔 빠삭했다.


“원장님이 틀렸다는 건 아닌데, 인생이 수학은 아니더라고.”

“응?”

“수학처럼 정답이 하나인 문제는 별로 없어. 그러니까 너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해봐. 결국 실패해서 최저시급을 받으며 일하게 되더라도 더 열심히 일할 마음가짐 정도는 장착할 수 있는 거야.”

“최저시급? 그게 뭐냐?”


‘아······. 이 시대엔 최저시급 같은 것도 없겠구나?’


“실패하면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것 정돈 제대로 깨달을 수 있을 거라고.”

“티끌은 모아봐야 티끌 아닌가?”


‘훗, 우리 원장님 진짜 대단하다.’


이해강은 원정의 가르침 덕분에 벌써부터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듯한 이경민의 한마디에 피식했다.


“그래서 전단지 안 돌릴 거야?”

“돌려야지! 아무리 티끌이라고 해도 제대로 된 옷 정도는 살 수 있으니까!”


‘경민이는 이 시대의 욜로족 정도 되는 건가?’


“아무튼,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어!”


* * *


“어! 피아노다!”


이경민이 보육원 안으로 피아노를 옮기고 있는 인부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이해강은 옛 추억에 젖어 입꼬리를 기분 좋게 씰룩였다.


‘프로바둑기사보단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긴 하지. 바둑은 원 없이 뒀지만, 피아노는 아니니까.’


그가 굳은살 하나 없는 작고 예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뇌가 말랑말랑한 것보다 손가락이 말랑말랑한 게 좋네.’


이젠 손가락이 굳어 치고 싶은 곡을 못 칠 일 없을 거라는 소소한 듯 소소하지 않은 기쁨이 그의 입꼬리를 귀까지 끌어올렸다.


“하루라도 사고를 안 치면 병이 생기나 보지?”


그런데 보육원장 강만식이 피아노를 쫓아가는 두 사람을 막아섰다.


“죄, 죄송합니다······.”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쌀집 사장 최태식’이라는 후원자를 잃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기에 이경민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용서를 구걸했다.


‘하여튼 빠르단 말이지. 핸드폰도 없는 시대에 말이야.’


이해강은 보육원에 틀어박혀 있었던 사람이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을 벌써 꿰고 있는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넌? 왜 이렇게 당당해?”


강만식은 전형적인 철부지 이경민보다 후원자를 이겨 먹은 이해강이 못마땅했다.


“칭찬이라도 해줄 줄 알았나 보지?”

“죄송합니다.”


이런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이해강은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지금은 손님이 있으니 이따 다시 얘기하자.”


보육원장은 두 사람을 뒤로하고 피아노를 기증하러 온 이에게 다가갔다.


“근데 설마 피아노만 가져온 건가?”

“그런 것 같은데?”

“도대체 머리가 얼마나 나쁘면 저럴 수 있는 걸까?”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이경민에게 피아노는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와 달리 피아노를 치고 싶은 이들이 몇 명 있을 뿐이었다.


“눈이 없나? 이 보육원에 필요한 게 뭔지 정말 안 보이는 거야?”

“우리 같은 고아도 음악이라는 걸 즐길 수 있길 바라는 거 아닐까?”


이해강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서 피아노를 크게 반겼다.


“자랑이 하고 싶은 거겠지! 내가 이렇게 피아노를 잘 쳐! 어때? 대단하지? 부럽지?”


반면 이경민은 보육원에 피아노를 기증하고 있음에도 보육원 아이들이 피아노에 손도 못 대게 하는 기증자의 일행을 쏘아보며 비난했다.


“내가 더 잘 쳐.”

“뭐?”


이경민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해강은 이런 그를 뒤로하고 나 홀로 피아노를 향해 걸었다.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피아노 앞에 앉을 순 없었다.

그래도 피아노 근처에는 앉을 수 있었다.


“자, 지금부터 내가 쇼팽의 녹턴 2번을 연주할 거야. 잘 들어봐.”


‘쇼팽이 얼마나 대단하고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마침 피아노를 기증하러 온 이의 일행이 선심 쓰듯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와!”


그녀를 피아노라는 장난감을 손도 못 대게 하는 마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원생들이 마녀의 선율이라고는 볼 수 없는 선율의 등장에 깜짝 놀라 자신들도 모르게 감탄사를 쏟아냈다.


‘조율이 제대로 안 돼있군.’


하지만 이해강에겐 어설픈 연주일 뿐이었다.


‘우릴 무시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실력이 없는 걸까? 전자였으면 좋겠네. 어쨌든 내 재능을 알아봐 준 첫 번째 사람이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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