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백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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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5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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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기면 된다(2)

DUMMY

#002화. 나를 이기면 된다(2)


‘만일 모든 것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으로 시작된 아리아의 유언.

그건 내가 이룰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새삼스럽진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이룰 수 없는 걸 바라곤 했으니까.


―우리가 저 마물의 파도를 막아낼 수 있다면, 그래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그때도 내 곁에 남아주겠느냐?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날. 아리아가 내게 그렇게 속삭인 적이 있었다.


―당연히.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마물의 파도를 막아낼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녀의 유언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걸 돌이킬 수 있다면.

그녀를 이기는 일이던, 세상을 구하는 일이던. 기회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못할까.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말 과거로 돌아왔다.

그것도 귀족 자제를 죽여 주홍 글씨가 새겨지기 전의 시절.

무려 18년 전의 과거로.


“그것도 벌써 2달 전이지.”


나는 복잡한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봤다.


골목마다 병사들이 순찰을 돌고, 곳곳에 무기를 든 남녀가 걸어 다니는 거리.


삭막하고 살풍경하지만, 어딘가 활기 넘치는 모습.


이곳은 제국 서부의 대영주, 클라이스트 변경백이 지배하는 영지였다.


더 정확히는, 아직 폐허가 되지 않은 클라이스트 변경백령의 풍경이다.


아리아가 아닌 그녀의 아버지가 지배하는 땅.

지금의 클라이스트는 마경을 틀어막는 인류의 방패였다.


그 모습을 보자, 새삼스럽게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시간을 거슬러 온 내가 할만한 일은 결국 단 하나.


―나를 이기면 된다.


아리아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건 내게 은인이나 다름없는 그녀를 구원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내가 살아갈 세상을 구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다른 선택지는 없다.


하여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클라이스트 변경백령으로 왔다.


하지만 당장 아리아의 부탁을 들어주는 건 불가능했다.


첫째로, 아무런 배경도 없는 고아인 내가 그녀와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리아는 클라이스트 변경백의 장녀니까.


물론 클라이스트 가문은 가풍은 제법 개방적이다.


기사들이 수련을 목적으로 외부의 도전자들과 검을 나누는 일도 잦았으며, 그중 실력이 뛰어난 이를 영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도전하는 이들이 최소한의 명성을 갖춰야 가능한 일. 어중이떠중이나 수상쩍은 놈을 받아줄 리 없었다.


나는 그것을 위해 일대를 떠돌며 마물 사냥꾼으로 활동했다.


두 번째 문제는, 내게 아리아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검만 놓고 본다면 가히 이 시대에 견줄 이가 없는 천재였다.


아무리 아직 소드마스터가 아니라고 해도, 과거로 돌아온 직후의 내가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는 수준.


사실 마음 같아서 한 몇 년 정도 힘을 쌓고 그녀를 찾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조만간 아리아의 부친, 클라이스트 변경백이 실종되기 때문이다.


제국 서부를 파국으로 몰고 간 시발점이자, 그녀가 항상 내막을 궁금해하던 과거.


그걸 외면할 순 없다.


그래서 부득불 클라이스트 변경백령으로 찾아와 마물 사냥꾼 일을 하며 명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렇게 두 달.


이제 클라이스트 가문의 기사들에게 대련을 청할 수 있을 정도로 명성을 얻는 데 성공했다.


“가야겠군.”


창밖으로 펼쳐진 시가지.


그 너머엔 우뚝 선 클라이스트 가문의 내성이 보였다.


새까만 강철로 단조된 성벽.


지난 생엔 처참히 무너졌던 그것이,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있었다.


나는 검 한 자루를 챙겨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그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 * *


클라이스트 가문의 성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쌓여있다.


나는 그 앞에 무덤덤한 자세로 서있었다.


지금은 ‘마물사냥꾼 카일’의 자격으로 클라이스트 가문의 기사들에게 도전한 상황.


내 상대로 배정된 건 풋내기 티가 나는 젊은 기사다.


“펠릭스. 위대한 서쪽의 수호자, 클라이스트 변경백 각하를 모시는 기사다.”

“카일입니다.”

“흥, 천한 마물사냥꾼. 내가 검을 나눠주는 걸 영광으로 알도록.”


헌데 그 이름이 아주, 아주 익숙했다.

바로 죄수병으로 복무할 때 찢어 죽인 지휘관이었으니까.


펠릭스는 용맹하다 못해 무모한 데다 달려 있는 머리는 치장품 같은 수준이라, 몇 번의 전투만으로 부대를 거의 전멸로 이끌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몸과 머리를 찢어서 우애 깊은 펠과 릭스로 만들어줬었지.


저 새끼를 이렇게 바로 만날 줄이야.


마음 같아선 저 목을 다시 예쁘게 잘라주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엄연히 클라이스트 가문의 검법을 견식하러 온 도전자.


게다가 가문의 장녀인 아리아와 대련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니까 죽일 순 없다. 죽일 수는.


“기사님.”


내가 펠릭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픈 거 잘 참으십니까?”

“?”


내 뜬금없는 질문에 펠릭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어금니 꽉 깨무십쇼.”


못 죽이면 죽기 직전까지 줘패야지.


난 펠릭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땅을 박찼다.


뻐억!


바로 다음 순간, 창졸간에 그의 앞에 도달해 폼멜을 들어 펠릭스의 광대뼈를 내리찍었다.


“···컥, 무슨!”


펠릭스가 당혹스럽다는 듯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있었다.


폼멜이 아니라 검날로 찍었다면, 이미 승부가 끝났으리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고명한 검을 견식하게 되어 참 영광입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빨리 끝내기엔 쌓인 게 좀 많아야지.


퍽! 퍼어억! 뻑!


펠릭스는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지만,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었다.


아무리 과거로 돌아오며 약해졌다고 해도, 나는 한때 소드마스터에 가장 가까웠던 검객.


저런 풋내기 기사 따위에게 밀리진 않는다.


그렇게 펠릭스와 일방적인 교우를 나누길 30분.


놈이 거의 산송장처럼 변했을 때.


이미 주변은 우리의 대련, 아니 내 일방적인 폭력을 구경하러 온 기사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 * *


클라이스트와 서부 전선 소속의 기사들은 대련장에 모여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 아닌 참상에 눈살을 찌푸렸다.


“거참 펠릭스가 그래도 신입 중엔 좀 치는 편 아니었나? 저렇게 쪽도 못 쓰고 처맞을 줄은 몰랐네.”

“가문의 기사가 마물 사냥꾼 따위에게 밀리다니. 클라이스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일입니다. 다음엔 제가······.”


호기롭게 말을 꺼낸 기사는, 제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은빛 머리칼이 기사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대가 뭘 모르는구나. 클라이스트의 명예는 고작 저런 걸로 떨어질 만큼 가볍지 않단다.”

“···! 아가씨께서 왜 여기에.”


기사들이 갑작스런 아리아의 등장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변경백의 장녀인 그녀는, 클라이스트의 혈육 중에서도 유별난 축에 속했다.


천재적인 재능도 그렇지만, 성격 역시 종잡을 수 없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신들이 그녀의 혼처를 알아볼 때.

그녀가 변경백에게 찾아가서 한 이야기는 기사들 사이에서도 아주 유명했다.


-제게 필요한 것은 그저그런 남자가 아닙니다. 저와 함께, 제 옆에서 싸울 수 있는 동반자가 필요해요. 그러니까 저는 저를 이기는 사람과 혼인할 겁니다.


-허락한다.


그녀의 형제들은 위엄 넘치는 변경백과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는데. 아리아는 당당하게 자신의 요청을 관철시켰다.


“마물 사냥꾼이 기사에게 대련을 청했다는 소리가 들려서 나와 보았다. 심지어 압도하고 있구나.”


아리아가 기사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저런 무뢰한을 뭣하러···.”

“그가 나를 이길 수도 있지 않겠느냐?”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아리아는 기사들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감각은 카일에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재밌네.”


아리아가 나직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 * *


두근.


그녀를 보는 순간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세상이 느릿하게 흐르지도, 알 수 없는 꽃향기가 풍겨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진짜 운명은 때때로 무엇보다 고요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나는 정말로 돌아왔다. 그녀에게.


클라이스트로 온 이상 곧 보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내가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순간.


“죽어라, 이 사악한 놈!”


이를 악문 펠릭스가 검에서 오러를 뿜어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처맞고도 반격할 기력이 남았다는 건 칭찬해 줄 만한 일이었다.


저번 생엔 똥고집으로 동료와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지만,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근성을 봐서 슬슬 끝내야겠군.’


나는 그리 생각하며, 칼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대련이 시작된 이후 첫 번째로 번뜩이는 내 검광.


쨔악!


그 직후, 검면이 펠릭스의 따귀를 강타했다.


“···!”


펠릭스는 경악과 억울함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검이 닿은 순간, 녀석의 뇌가 크게 진탕된 탓인지 뭐라 소리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까무러쳤다.


“고생하셨습니다, 펠릭스 경.”


나는 거품 문 채 고꾸라진 펠릭스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렴, 예를 갖춰야지. 이건 격식을 갖춘 ‘대련’이니까.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주위에 모여든 인파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클라이스트의 검을 조금 더 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아리아에게 도전하려면 아직 밟고 올라갈 먹잇감들이 더 필요했다.

그리 묻자, 제법 많은 기사들이 나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누군가는 순수한 호승심을 불태웠고.

누군가는 동료나, 섬기는 가문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해 복수심을 불태우는 모습.


하지만 단연 눈에 띈 건 아리아였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구나.”


팔짱을 낀 그녀가 붉은 눈동자를 섬뜩하게 빛낸다. 전생에도 질리도록 봤던 모습.


저런 눈빛을 한 그녀는 항상 상식을 초월하는 기행을 저지르곤 했다.


절벽을 쪼갠다거나, 집채만한 마물을 가루로 만들어버린다거나 하는.


‘설마 지금도?’


문득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대가 말한 클라이스트의 검. 내가 보여주겠느니라.”


아리아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은 젊다못해 어린 얼굴. 하지만 말투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리아는 기다리지 않고 성벽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부끼고, 익숙한 눈동자가 나를 주시한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단 조금 더 생동감 넘치는 모습.


그녀의 눈가엔 여전히 끝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맴돌고 있었지만, 그에 상응할 정도의 갈망 역시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갈망은.


‘나를 향하고 있다고?’


하지만 의구심을 제대로 품기도 전에, 날카로운 기세가 사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마치 예리한 칼날 수백 자루가 나를 겨누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아련한 감정 때문이 아니라, 물리적인 현상이었다.


‘시발, 이거 이길 수 있나?’


아리아가 생각보다 너무 강했다. 아직 소드마스터도 아닌데.


하지만 이제 와서 무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좋습니다.”


검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최대한 여유를 부리면서.


“그럼 가지.”


아리아가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말했다.


타앗!


그리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리아의 검에서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성격 급한 건 여전하군.’


나를 혀를 차며 검을 들어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래, 적어도 번거로운 과정은 덜 수 있었으니 다행 아니겠나.


* * *


“···후우.”


끊임없이 공세를 펼치던 아리아. 치열하게 합을 나눈 뒤, 뒤로 훌쩍 물러선 그녀가 숨을 거칠게 고르며 나를 바라봤다.


감탄과 흥미로움이 깃든 눈빛.


“그대는 아주 흥미로운 존재구나. 여러모로 상식을 벗어나있다.”

“...저도 즐겁긴 하군요.”


나를 찬찬히 뜯어보는 아리아를 향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정말 즐거웠다.


내가 모르는 그녀의 검을 보는 것이.

내가 모르는 그녀를 보는 것이.


하지만 아리아의 폭풍같은 검세를 버텨내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몸 여기저기에 무시하기 어려운 생채기가 났으며,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


아마 내가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아직 아니다.


기사들의 승부란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은 것. 이는 첫 번째 소드마스터라고 불리는 건국시조의 회고록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나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리아를 바라봤다.


어느새 호흡이 고르게 정돈된 모습이다.


길게 늘어뜨린 은빛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세파에 갈려 나가지 않은 그녀는 퍽 아름다웠다. 새삼스럽게도.


나는 복잡한 감회를 밀어내며 검사의 눈으로 아리아를 바라봤다.


언제라도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긴장하고 있는 근육. 그리고 나를 면밀하게 살피는 눈동자. 빈틈을 찾기 힘들 정도로 완벽하다. 마치 우아한 백호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 완벽함이야말로 하나의 빈틈.


소드마스터이던 시절의 아리아는 언제고 빈틈을 내보였다. 그건 상대를 유혹하는 일종의 함정.


하지만 지금의 아리아는 그런 함정을 파두지 않고 있었다.


제법 흥미로운 상대긴 하나, 심리전까지 걸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거겠지.


틀린 판단은 아니다. 내가 코어에 쌓은 마력의 양은 몹시 미미하고 얕았다.

쌓아온 경험이 있으니 일천한 힘으로도 풋내기 기사를 농락할 수는 있으나, 검에 미쳐 살아온 그녀를 해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녀는 젊은 나이임에도 막대한 마력과 잘 벼려진 검술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건 내가 회귀자가 아니었을 때 이야기지.’


나는 아리아를 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완성된 그녀가 어떻게 싸우는지를 안다.


또한 나 역시 소드마스터는 되지 못했으나, 그만한 격을 갖춘 존재들과 자웅을 겨뤘던 바.


쌓아온 마력과 단련한 신체가 사라진들 어떠랴, 경험은 남아 있다.


‘딱 한 번. 한 번의 기회만 있으면 돼.’


그리 중얼거리며 아리아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다시 시작된 격전.


나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그녀가 공략할만한 빈틈을 만들었다.


마치 밀리고 밀리다가 어떻게든 반격을 하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처럼 군 것이다.


아리아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번뜩였다.


마치 내가 연기를 하는 것인지, 진심인지 감별하려는 듯.


과연 동물적인 감각.


하지만 그녀는 곧 결정했다는 기세를 끌어올렸다.


설령 연기라도 괜찮다고 판단한 것일 터.


그 방심이야말로 그녀의 약점.


아마도 내게 나를 이겨달라고 말한 이유 역시, 저기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타고난 재능에 취해 상대를 경시하는 저 오만함을 깨뜨려 달라는, 그런 뜻이었겠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아리아의 검을 바라봤다.


유려한 궤적의 검격.


허공을 가르는 검날에선 막대한 은빛 오러가 타오르고 있었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녀가 판단한 내 전력이라면 그랬겠지.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잡으며, 심장의 코어를 과부하시켰다.


두근― 두근―


심장이 강하게 맥동하며 코어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허공에 퍼진 무주공산의 마력이 내 박동에 동조하듯, 심장이 뛸 때마다 몸으로 빨려든다.


그와 동시에 전신에서 격통이 치밀어올랐다.


정제되지 않은 힘을 받아들인 대가. 하지만 나는 이를 꽉 깨문 채 그 힘을 통제해 냈다.


지닌 것 이상의 마력이 몸에 깃들자, 모든 감각이 첨예하게 벼려졌다.


마치 세상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착각.


머리끝까지 차오른 마력이 인지를 가속시킨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백치가 되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마력 운용법이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행했다.


아리아가 움직이는 장면이 아주 느릿하게 보인다.


내딛는 걸음.

회전하는 허리.

뻗어오는 팔.


오러가 눈꽃처럼 산란하며 허공을 불사르고. 그녀의 은빛 속눈썹이 움찔 떨리는. 그런 모습들.


나는 느려진 시간 속에서 몸을 움직였다.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뚜두둑―


그러자 근육이 파열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충분히 단련되지 않은 근육을 너무도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 과부하야말로 내가 소드마스터도 아닌 주제에 초월적 존재들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이유.


쐐애액―


내 검이 극도로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아주 빠르게, 번갯불처럼 번쩍인다.


옅은 황금빛 오러에 감싸인 검이 아리아의 검과 맞부딪친다.


까아······앙!


느릿하게 울리는 격돌음.


속도 탓인지, 아리아의 검이 살짝 밀려나고.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러를 진동시켰다.


우우웅!


내 오러가 잘게 떨리며 아리아의 은빛 오러를 분쇄하기 시작했다. 마치 회전하는 톱날이 바위를 갉아내듯.


숙련된 기사들 중에서도 소수만이 쓸 수 있는 기술.


“대체···!”


아리아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외친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말을 이어갈 여유 따윈 없었다.


당혹도 잠시, 그녀가 남은 여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오러를 강화하는 게 보였다. 찰나에 내린 판단치고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한 발 더 빨랐다.


빠르게 진동하는 오러가 그녀의 검날에 닿은 것이다.


째애애애앵!


그 순간, 이름난 명장이 만들었을 것이 분명한 그녀의 검이 날카로운 철의 비명과 함께 산산이 깨져나갔다.


“···?”


아리아는 아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눴다.


이걸로 끝이라는 듯이.


“너!


아리아가 이제는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설마 내가 비겁한 수를 썼다고 대련을 물리려고 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상기된 얼굴.


내가 아는 그녀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애늙은이처럼 그대, 그대, 하던 것도 까먹고 ‘너’라고 빽 소리치는 걸 보면 마냥 믿을 순 없다.


“···내 검을 깨뜨린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굉장히 기묘하게 들렸다.


분노했다기보단 들뜬 듯한 모습.


“네?”

“오래도록 기다려왔어. 너 같은 사람을.”

“······.”

“혼인하자.”


제국에 두 명뿐인 소드마스터 클라이스트 변경백의 장녀이자, 미래의 대륙제일검.


아리아 폰 클라이스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기면 된다면서요?


이런다는 말은 없었잖아!


작가의말

오늘 중으로 2회차가 더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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