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불완전한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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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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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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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DUMMY

서막(序幕). 당신에게

Prologue ┃ My Dear





당신이 입궁한 후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던 시절, 나는 매일 자시(子時) 무렵 궐문이 여닫히는 걸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곤 했다.


당신과 만난 육 년 동안 스무 번이 넘는 계절을 당신으로 시작했는데, 만나지 못한 지난 이 년 동안은 칠백일이 넘는 하루가 당신 없이 지났다.


당신은 전처럼 내 눈앞에 실재하지 않고 기억 속에만 머물러 야속하다.


아니다. 섭섭하고 언짢게[野俗] 여겨야 하는 건 당신이지. 어째서 더 치밀하게 당신의 비밀을 지켜주지 못하였는지.


세간에서 세상 모든 지략이 들어있다고 떠들어대는 내가, 어찌 당신 하나 죽을 길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하였는지. 못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의심하며 원망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처음 익힌 당신의 이름은 찬란한 세월[霜華]이었다.


서리처럼 하얗게 머리가 세도록 오랫동안[霜] 더없이 찬란[華]하고 무성할, 그 이름 잃지 않고 여생을 채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신의 비밀을 알아챈 후로 나는 당신이 품은 비밀을 엄중히 지키면서도, 때로는 그 비밀이 밝혀지기를 바라기도 했다.


당신이 시전을 거닐다 멈춰 서성이던 좌판대에는 때로 얇고 질기게 무두질한 가죽이며 날카롭게 벼린 금속성의 날붙이가 줄을 이어 빛나고 있었고, 때로는 격구를 위한 기다란 채나 공이 늘어서 있기도 했지만, 당신은 그걸 가진 적이 없었으니까.


고귀한 당신의 혈통엔 그까짓 무구나 말안장 혹은 놀이도구 따위는 외람된 물건들이 아니었는데도, 당신은 늘 구경만 하다 그 자리를 뜨곤 했으니까.


하나 당신의 비밀이 발각된 후 나는 그리 바란 적이 있음을 후회했다. 당신 비밀의 수문장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음을 무수히 후회했다.


아니, 내게 헤아릴 수 없는 숫자는 없으니 셀 수 있다.


당신이 궐문을 넘어 사라진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빠짐없는 매일이었다.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한 적이 없었지. 나의 기억에 한계가 없다는 것도, 그로 인해 내가 언제 당신의 비밀을 알아챘는지도.


전날의 얼굴과 골격이 한 달, 일 년, 수년이 지나면 어떤 모습으로 발달하고 성장해 나갈는지 예상하는 건 내게 쉬운 일이었다.


열두 살배기를 보며 열다섯 살의 모습을 상상했고, 그 예상과 절반이 닮고 절반이 빗나간 당신의 열다섯을 보며 열일곱을 그렸다. 열일곱을 보며 스무 살을, 서른 살을, 마흔 살을, 계속해서 성장하고 늙어갈 당신을 예측했다.


이제는 그 예측이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늙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자리는 황제의 액운을 대속하는 제단 위. 당신의 열아홉 생일이 돌아오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황제의 옷가지를 걸치게 할 것이다. 육신의 일곱 군데를 삼베로 묶은 다음 입안에는 나이 수만큼의 쌀알을 집어넣어 명주실로 동여맬 것이고, 온몸과 입이 염하기 전의 시신처럼 틀어 막힌 당신의 목은 내리치는 검날에 두 동강이 나겠지.


그렇게 불에 태워져 화장될 당신의 중장년을 목도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는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당신을 눈앞에 두고 보아야겠다.


어째서인지는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음에 답하고자 그 이유를 정의 내리게 되면, 그것은 영원한 규정이 될 테니까. 망각이 없는 나를 무한히 구속하고 말 테니까. 그러니 나는 내 의지의 향방에 까닭을 찾으려 심수(心髓)를 헤집지는 않겠다.


다만,


보고 있지 않아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당신의 얼굴만으로는 희로애락도 목소리도 체온도 닿을 수가 없어서. 하마터면 나는 당신을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영정인가 헷갈릴 뻔했으니.


그러니,


나는 헷갈리지 않도록 보겠다.


보아야겠다,


생동하는 당신을.


―미송부(未送付) 서한(書翰)


「필연적 결말을 기다리는 당신에게」





1막(一幕). 당신의 고독

Chapter 1 ┃ Solitude vs Loneliness





뛰어난 기억력은 자주 유능함이나 천재성에 비견되곤 한다.


인간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에 집중하여 살아가곤 하기에.


그렇듯 평범한 인간들의 관심은 신의 선물이라 일컬어지는 ‘기억’에 치중되기 십상이다.


그러면 그와 대척하는 ‘망각’에 대해서 가치를 매기고자 할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이며, 그들이 매길 망각의 가치는 기억의 가치를 넘어설 수 있는가.


기억이 신의 선물이라면 망각은 신의 축복이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흐릿해지는 것.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망각으로 누른 채 무디게 현재를 살고 내일을 기대하는 것.


신은 인간에게 숱한 고난과 역경을 주면서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안배하는 존재이니, 그 안배에 망각이라는 축복이 포함되어 있음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축복이 결여된 인간이 존재한다면 이는 무슨 사유일 것인가.


전생에 쌓은 업보에 대한 신의 단죄인가? 아니면 우연하게도 악마에게 신의 축복을 가로챔 당한 불운인가?


악마적(惡魔的) 천재성(天才性).


그녀는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을 기억한다.


다리 사이로 머리를 두고 웅크린 채, 칠흑 같은 어둠 사이로 어스름하게 비치는 붉은 빛을 느낀 것이 그녀가 가진 기억의 첫 번째다. 자궁 안에 있었던 순간부터 시작하여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상세히 기억한다.


떠올리고자 하면 언제든 기억해 낼 수 있다.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소리와 스스로 뱉은 말, 코로 맡은 냄새, 피부에 닿은 촉감, 물리적으로 가해진 것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 가해진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모든 일을 전부 기억하는 인간의 삶을.


【과잉된 기억이 정신을 좀먹는다.】


누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천자문을 베끼어 쓰다가 보면 어느새 곁눈질로 넘겨보던 난해한 서책의 문장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그리고 있는 상태를.


저자를 지나다 스쳐 들은 상단의 거래 품목 몇 가지를 떠올렸다가, 무심코 그 거래 금액을 나열하고 더하다가, 그것이 어느 지역 어느 범위까지 퍼져 있는지 수십 자리의 숫자로 계산해 나가다가, 도저히 멈춰지지 않아 쓰던 종이를 갈기갈기 찢고 붓을 꺾고 벼루를 던져 깨부수며 생각을 멈추고자 발광하는 고통을.


대문을 넘나들 때마다 문짝에 새로이 새겨진 흠집이 어떤 무늬를 이루어가는지까지 정확히 인지하는 무쓸모한 무한을.


잠들면 모든 생각이 멈추니 밤이 오기만을 기다려 보기도 했다. 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려 하면, 그러나 그때부터는 아침부터 낮과 오후를 지나오며 했던 모든 대화가 저절로 되감아지고······.


그런 상태로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세상의 온갖 것에 순간순간 생각을 빼앗기고 집착하니, 정작 삶의 본질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미치광이처럼 발광하기 일쑤였다.


세상과 타인을 향한 희로애락은 없고 오로지 자신의 머릿속을 향해서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으니, 광증이 도지지만 않는다면 타인에게는 무감한 인간이었다.


그 어린아이, 결국에는 번뇌의 악귀가 씐 것이 틀림없다며 신당에 버려져 수행하기에 이르렀으나. 그조차 그녀에게 새겨진 숱한 기억에 경전의 온갖 구절들을 더하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결과가 되었을 뿐이었다.


신당에서 새로이 길러진 것은 다만 고통을 견뎌내는 인내심, 타인에게 무분별하게 표출하지 않는 예의범절에 그쳤다.


그녀를 거둔 무녀가 내려준 이름은 무량심[無量心]의 무량. 괴로움과 미혹을 없애고, 모든 중생을 향한 무한한 자비와 가여움 아는 마음을 기원했건만.


그녀에게 있어서 한정됨 없는[無量] 것은 오로지 번뇌뿐이더라.








653년의 어느 날, 늙은 무녀와 열 살배기 견습 무녀가 탁발(托鉢)을 하러 신당이 있는 산 아래의 마을로 내려왔다.


속세의 사람들은 귀 기울여 들어도 무슨 뜻인가 한참 헤아려야 할 어려운 경전 구절을 어린 소녀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 암송하며 탁발하는데, 도중 어느 아낙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는 것을 마주했다.


이를 외면하지 못한 노(老)무녀가 아낙에게 다가가 사연을 물었더니, 남편이 누명을 쓰고 끌려가 사형수가 되었다며 구제할 방도가 없겠는가 하소연하였다.


무녀는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또한 국법으로 죄인 된 몸을 무죄방면 할 권한이 어찌 한낱 무녀에게 있겠는가.


늙은 무녀는 진정으로 누명이라면 반드시 밝혀져 목숨 구하기를, 끝내 목숨을 잃는다면 극락왕생하기를 빌겠노라 위로했다.


아낙의 울음소리가 다시금 음량을 키워가려는데, 일말의 연민도 담고 있지 않은 무정한 표정의 어린 무녀가 가만히 아낙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목숨만 구제하면 됩니까?”


아낙은 울음을 그치고 눈만 끔뻑이다가, 시선을 맞추며 물어온 어린 무녀의 손을 다급히 붙들었다.


“살릴 방도가 있습니까?”


“행형쇄장(行刑鎖匠)에 자원케 하십시오.”


이에 노무녀는 그게 무슨 소리냐 기함했다. 소란을 지켜보던 구경꾼들도 절로 벌어지는 입을 손바닥 뻗어 가리기 바빴다.


행형쇄장이란 사형수 가운데서 자원하는 자에게 사형을 면제해 주고, 다른 죄인들의 사형을 거행케 하는 자리다.


대다수 사람은 차라리 제 목숨을 잃을지언정 타인의 목을 베는 인간 백정이 되어 괴롭게 살아남는 일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 정신적인 고통이 오죽했으면 아무도 하려 들지를 않아 사형수들 사이에서 살릴 목숨을 담보로 선발하게 되었겠는가.


한데 그런 자리를 자처하게 하라는 말이, 살생을 업(業)으로 삼으라는 말이, 열 살배기 어린아이 그것도 신의 도리를 닦는 어린 무녀의 입에서 나올 소리였던가.


하나 아낙만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또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부터 윤리와 도덕이 생존보다 우위에 있던가. 고상한 체하는 자들의 능갈이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의 미덕인 적 있던가. 훗날 누명이 벗겨진다 한들 이미 죽은 다음이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무엇이든 살아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살아있어야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아낙은 곧 어디론가 내달리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노무녀는 어린 무녀를 마구니(魔仇尼) 취급하듯 화를 냈다.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어찌! 나 살고자 남 죽이는 길로 가란 말을 그리 스스럼없이 뱉을 수가 있느냐!”


어린아이 버려진 게 가여워 거두었더니, 가르치고 수행케 한 수고가 무색하구나. 모든 생명은 선도(善道)를 지니고 있다 하였는데.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어린싹이라면 더욱이 순진해야 마땅할 터인데. 이 아이는 악을 타고나기라도 한 것인가?


늙은 무녀의 꾸지람에도 어린 무녀의 안색은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그때, 구경꾼 중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 일색인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검정 삿갓을 눌러쓴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단지 내뿜는 기운만으로 압박감을 느끼게 하는 사내였으니 반드시 귀인이었다.


“왜 그런 방법을 알려줬을까, 어린 무녀님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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