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불완전한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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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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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

DUMMY

소녀의 앞에 쪼그려 앉은 귀인이 질의하자, 늙은 무녀의 습관 같은 꾸지람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소녀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사람의, 누명인지 아닌지 모르는 죄를 벗길 방법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목숨을 살릴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니 말해주었을 뿐입니다.”


노무녀의 노기와 당황스러움이 가시지 않는 와중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오직 귀인의 얼굴에만 희미하게 미소가 번져갔다.


“국법을 어기는 일도 아니고, 아무도 곤란해지지 않으며, 외려 다수의 곤란을 해결해 주는 방도라 생각했습니다.”


소녀의 말 중 틀린 것이 없었다. 아낙의 남편이 이를 받아들인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으나, 아낙은 남편의 목숨을 살릴 방도를 찾았고, 관청에서는 처치 곤란한 사형수의 일을 자처한 사람이 생기는 것이니 그야말로 현답이었다.


“그러면 왜 도우려고 하셨나? 가여워서?”

“아니요.”


소녀에게 타인에 대한 동정심 같은 것은 없었고, 그저 자기 전에 다시 기억날 것이 분명했기에. 잠을 설칠 것이 자명했기에.


“시끄러워서.”


찰나라도 이 기억의 시끄러운 순간을 줄여보고자. 소녀는 그런 사유로 그리했다. 그런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 대부분이 한탄 혹은 탄식을 흘렸다.


그러나 귀인은


“아, 이런 낭중지추를 봤나.”


흡족하게 웃었다.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나기 마련[囊中之錐]이지. 신당에 숨겨져 있었다고 한들 이렇게 그의 눈에 띌 운명이었던 것이다.


며칠째 푹 잠들지 못해 예민하던 소녀는 가물가물 피로에 덮여갔다. 눈꺼풀이 감겼다가 느리게 뜨였다가 다시 감기기를 반복했다.


귀인은 그 소녀를 품에 안아 들고 황궁에 들었다.


그 사내가 모시는 이의 이름은 천고원(天高遠).


당대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에게 바쳐진 열 살짜리 여아가 황궁에 기거하며 수족이 되었으니,


이 소녀가 바로 훗날 삼대의 천씨 황제를 지척에서 모신 책략가,


정무량(貞無量)이다.








책략의 본질은 상대를 간파하고 자신을 관철하는 데 있다.


상대의 속내를 알아차려 꿰뚫기 위해 선행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세태를 파악하고 상대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현재 정세가 어떠한지, 상대가 살아온 생은 어떠하였는지, 상대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며, 선택지가 여럿일 때 어떤 것을 우선하여 선택해 왔는지.


상대가 나아가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이며, 자신이 그를 막고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물론 한 인간의 말이나 행동이 언제나 일관되리라는 법은 없고, 그로 인해 만고불변의 정답은 없다. 인간의 이성은 복잡하고 개개인의 감정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니까.


그러나 정무량이 습득한 세상의 이치는,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本性不變]는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천재적인 능력은 획책(劃策)의 착수에 무척이나 적합한 도구였다. 놓치는 정보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패착을 줄이는 요소였다.


기억 속의 이런저런 사건들이나 흘러온 양상을 나열하고, 현시점과 연관성이 높은 것과 낮은 것을 추려내다 보면 언제나 답이 나왔다.


어떤 인사를 들이고 내칠 것인지, 어느 나라와 무엇을 주고받을 것인지, 어느 지역에 무엇을 배치하고 무엇을 거둬들일 것인지. 황제가 고민하는 문제들 대부분에서,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것이 북대륙이 낳은 시대불문 모사가 중 하나로 정무량의 이름이 오르게 된 경로였다.


그러면 그토록 유능한 그녀가,


그녀의 첫 번째 주인인 천고원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은 어째서였는가?


그녀의 능력은 경험한 것을 완벽히 기억하는 것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보고 듣고 판단한 것. 따라서 치밀하게 진실을 가리고 거짓을 심는다면, 그녀를 속이고 역공하는 것도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때는 656년.


황제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약탈자는 그녀에게 첫 실패를 안겨주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실패에 대한 좌절감을 느끼지 않았다. 주군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정무량은 천고원의 도구에 불과하였으니, 어찌 도구가 사용자에게 이런저런 마음을 갖겠는가?


다만 주인이 바뀐 집에 그 전 주인의 개가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무량이 황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이 천고원의 수족이란 증좌였으니, 천고원을 죽인 신황(新皇)이 그의 수족을 어찌 자신의 울타리 안에 두겠는가.


그녀는 황궁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이를 만류한 것은 다름 아닌 신황이었다.


“천고원의 것은 이제 모두 내 것이다.”


선황의 것을 모두 빼앗은 약탈자는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고,


“너는 천고원의 것이었지. 그러면 이제는 나의 것이다. 여기에 틀린 명제가 있는가?”


그의 주장은 꽤나 합당하게 들렸다.


“없습니다.”


정무량은 그의 말을 가만 헤아리다 틀린 점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면 선황에게서 내게로 이전된 이름[維] 외에도, 나를 위해 지은 이름이 하나 있으면 좋겠구나.”


그녀는 일찍이 첫 주인에게서 두 개의 글자를 받았다. 하나는 속세의 귀족 신분을 내려주며 하사한 성씨 ‘정(貞)’이고, 다른 하나는 관직과 함께 내려준 별호(別號) ‘유(維)’였다.


별호로 받은 그 글자는 가는 실[糸]과 새[隹]가 결합한 모습인데, 이것은 새를 끈으로 묶었다는 뜻을 표현한다. 외자의 별호가 흔치 않았기에 때로 사람들은 유를 사추(糸隹)라 읽었다. 정정하지 않는 때가 많았다.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능히 어디든 멀리 날 수 있을 새. 그러나 이 집 울타리 안에 묶어두었으니, 주인이 허락하지 않은 먼 곳으로는 날 수 없다는 증명. 하니 정가의 유라는 호적은 더없이 완벽한 노비 문서였다.


“이 자리에서 하나 지어보겠느냐?”


새 주군의 표명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임을 영특한 그녀는 바로 알아들었다.


이에 그녀가 무심히 던지듯 내놓은 이름이 있었으니,


“화거(化去).”


‘다른 것으로 변하여 간다’는 글월은 죽음의 이칭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죽는다. 산다는 것의 결말은 필연적으로 죽음이다.


“화거로 하겠습니다.”


모든 삶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녀에게 산다는 건 번뇌의 고통뿐이었으니,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그날을 바랐다.


그러나 당장으로 죽음을 앞당길 이유 또한 없음에, 그저 그날을 기다릴 따름이었다.


아무도 그 이름의 진위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의 동태를 살피는 사람은 많았으나 그녀의 마음을 살피는 다정은 없었던 관계로, 그녀의 새 별호는 이렇게만 읽혔다.


‘다른 것으로 변하여 간다니, 변절자의 맹세로 아주 적합한 이름이구나.’


그녀의 나이 열세 살이었다.








제국력 660년, 정무량의 두 번째 주군인 천홍원의 치세 다섯 번째 해.


고운 광택이 나는 짙은 남색의 도포를 입은 귀공녀가 느리게 몰던 말을 저택 대문 앞에 멈춰 세웠다.


현판에는 강직한 필체로 명림세가(明臨世家)라고 새겨져 있었다. 북대륙 대부분의 땅을 차지한 대제국 도창(導唱), 그 역사에 개국공신이라 이름 올린 다섯 개의 가문 중 하나인 명림의 본가였다.


명림 본가가 위치한 선정도(先晸道)는 북대륙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지역으로, 제국 중심부에 위치한 수도로부터는 동쪽으로 최소 열흘이 넘게 말을 몰아야 당도하는 곳이었다.


먼 길을 달려온 귀공녀는 말에서 내려 문지기에게 신분패를 보였다. 패에 쓰인 귀공녀의 신분을 확인한 문지기가 안으로 들어가 소식을 전하자, 마지기며 청지기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마지기는 귀공녀가 몰고 온 말을 끌고 들어갔고, 청지기는 귀공녀를 안으로 모셨다.


귀공녀, 정무량은 선황을 모시던 시절에 드물게 이곳에 들렀던 적 있었다. 정무량을 발탁했던 귀인은 선황의 그림자 같은 인물이었는데, 그가 모종의 일을 진행할 때 정무량을 데리고 온 적이 간혹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황제를 모시고부터는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으니, 명림의 가노가 따라붙으며 안내하겠다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비록 정무량의 머릿속에는 이미 명림 본가의 구조며 전각과 행랑의 위치와 크기, 각 건물에 머무는 사람의 인원과 인명까지 훤히 들어있었지만, 그래서 안내는 불필요하였지만, 그녀는 안내를 거절하지 않았다.


종이 주인을 모신다는 것은 단지 길잡이의 역할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고했던 일정보다 며칠 이르게 당도했는데, 고하였는가?”


“물론 입죠. 마마들을 모시는 여종이 두 분께 고하러 앞서갔습니다요.”


이 시기, 정무량이 명림의 본가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은 명림씨와 더불어 천씨였다.


현 황제의 후궁 중 하나인 귀비 명림씨는 여러 해 전에 딸을 출산한 뒤로 몸이 약해져, 요양을 이유로 사가에 머물거나 전국 곳곳에 유람을 다녔다. 그녀 소생의 어린 딸, 천상화가 함께였다.


천홍원이 황제가 되어 그의 딸 천상화가 황녀가 된 다음에는 유람을 자제했으나, 황궁으로 거처를 옮기지도 않았다. 귀비의 사가인 이곳에 머무르기를 택했다. 가끔 큰 행사가 있거나 하면 잠깐 와서 황제에게 인사만 하고 곧 돌아가곤 했다.


따라서 정무량은 따로 그들에게 가까이서 인사를 올린 적이 없었다.


황제의 애정은 적통의 아들을 향하고 있었고, 태어나자마자 제 품을 벗어나 어미의 사가에서 자란 서녀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천상화는 위정자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황녀를 살피고 오라는 걸까?’


제국의 주인이 바뀐 때로부터 새 달력이 네 번 발행되는 동안, 정무량에게는 수도성 밖으로 나가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다.


나갈 일이라고는 황명과 관계된 업무가 전부였는데도 그랬다. 황제는 그의 책사에게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을 허락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머리 좋은 도구를 요긴하게 사용은 하고 싶으나, 온전히 신임하지는 않는다. 정무량은 그것을 그렇게 이해해 왔다.


천홍원은 자신의 황위를 피로 썼으니, 누군가 그의 역사를 피로 닫겠다 할 가능성을 어찌 셈하지 않겠는가?


아무렴 정무량은 본디 선황의 그림자가 발굴한 열 살배기 어린아이였다. 이미 한번 실패한 전적이 있는 데다, 아직도 그녀의 나이는 열일곱. 약관(弱冠)에도 이르지 못한 나이였다.


신임받지 못할 이유는 몇 가지라도 꼽을 수 있었고, 정무량은 그것에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불만이 아니라 의문이었다.


황제가 자신에게 허락한 첫 출장지는 왜 선정도인가?


항구나 교역에 관한 업무들이 잔뜩 있기는 했지만, 다녀오겠다는 정무량의 인사에 결국 황제는 이렇게 덧붙였다.


‘간 김에, 상화도 잘 살피고 오거라.’


살피라는 명은 보살핌, 즉 ‘보필’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었지만. 황제의 목소리가 어떤 고저로 울리는지 정무량은 똑똑히 들어왔다. 이번 것은 황제가 주로 감시나 관찰을 명할 때 내는 음성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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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불완전한 당신에게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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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정도 NEW 19시간 전 1 0 11쪽
» 낭중지추 24.09.18 7 0 11쪽
1 당신에게 24.09.17 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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