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먼 연대기 (윙클리드의 비밀)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마정(魔井)
작품등록일 :
2016.06.20 01:12
최근연재일 :
2016.12.05 08:10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11,311
추천수 :
9
글자수 :
167,280

작성
16.07.18 08:10
조회
285
추천
1
글자
9쪽

경매와 왕녀의 피 1

DUMMY


퍼레이드가 끝난 뒤 우승팀을 뽑으면서 잠시 전도시의 전력을 끊었다가 일제히 공급하는 연등행사 때문이었다.


엘리베이터 내부의 버튼 표시등, 병원의 불빛, 도로 중앙선의 약한 불빛, 사람들이 가진 개인 조명 외의 모든 빛이 사라졌다. 5분 정도 멈춰있던 엘리베이터는 전 도시의 빛이 돌아오면서 다시 올라갔다.


피유유우 웅. 파방.

다시 폭죽이 터졌다. 3단 폭포 모양의 폭죽으로 카퍼레이드의 우승팀이 발표되는 시간이었다.


띠링.

문이 열려 내렸더니 11층이었다. 누군가 11층에서 눌러놓은 모양이었다. 되돌아 타려 했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는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엘리베이터도 층수가 멀어 걷는 것이 더 빨라 보였다. 난 어쩔 수 없이 가까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카니발 때문인지 1층 로비 이후에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12층에 도착해 막 복도의 모퉁이만 돌면 라운지가 나오기 직전이었다. 대화소리가 들려 잠시 멈췄다.



“···지아가 근처에 온 거지? 나도 느꼈어, 큰 누님. 요즘 감이 무뎌진 것 아냐?”



“건방지구나. 각성한 지 수십 일 밖에 안 된 아이주제에!”



“중요한 건 그 얘기가 아니잖아, 누님. 요 며칠간 갑자기 변했어. ‘인간’ 때문인 거 맞지?”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난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내가 들어서도 안 되고, 내가 나타날 장소도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공용어도, 칸다르디야어도 아닌 처음 듣는 언어였지만 자연스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평소와 달리 어떤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엘자와 루비인의 것으로 난 여전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럴지도. 너라면 알겠지, 루비인. 아니 ‘왕녀의 피’?”



“나는 한 개체 일뿐이야. 내가 느낀 것보다는 왕녀들이 가진 감정이 더 컸지. 맹목적이거나 지나친 정서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어. 급격한 감정의 변화는 능력을 주기도 하지만 생명을 빼앗기도 하잖아. 큰 누님은 예외라 괜찮다고 주장하는 거야? 왕국에 매여 있던 나와 큰 누님은 달라. 지배자의 위치를 생각해야지.”



“너, 혹시 영향 받았어?”



“본체에 금이 갔어. 근원인 누님이 변하면 가까이 있는 자일수록 영향을 많이 받는 법이잖아?”



“···맞아. 갓 태어난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만큼의 세월을 살다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지루해져. 매일 매일이 같은 날의 반복일 뿐이지.

하지만 ‘감정’을 느끼는 순간 세상은 달라진단다. 그렇게 길던 시간의 흐름이 짧아지고, 세상은 빛으로 가득 차 여러 번 본 것을 봐도 매번 새로움을 발견해. 어제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맛봐도 신체 구석구석에서, 세상의 모든 것에서 기쁨을 느끼게 되지.

그렇기에 감정이 변한다는 건 커다란 축복이란다.

그 중에서도 특별한 감정은 내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우리 같은 존재들에겐 태어나는 순간 느낀 것보다 강렬한 감정이 없지. 그 때와 같은 감정은 지금의 나도 몇 번 겪어 보진 못했어.

그런 감정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그건 ···너무 강한 기억이야. 내 일생동안 또 겪으라면 기꺼이 맞이하고픈, 설레면서 슬프기도 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큰 누님, 설마 그가 그자인거야?”



“아직은 모른단다. ‘삶’을 느끼기 위해선 끊임없이 감정을 만들어 내니까. 차선의 감정이라도 영겁을 사는 나에겐 행복을 가져다주지. 지금의 난 호기심을 느끼는 단계이고, 이 감정에 충실한 기쁨을 느끼고 싶구나. 하지만 시간이 없어. 새벽이면 그놈이 도착할 거야.”



“지금 상태로 그 자식과 만난다면 우리도 위험할 테니, 빨리 떠나야겠지?”



“예상보다 빨리 따라왔어. 추적을 막으려면 길을 여는 것보단 인간들의 교통수단이 좋지. ···새벽 첫 배로 가도록 하자. 그리고 그가 꿈을 통해 너를 봤다. 그는 ‘잠재자’야.

어떤 능력인지 모르니 지금은 더는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우리에게도 좋겠지.”



“··· 그렇다면 각성하지 않으면 기억은 사라지겠군.”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나면서 커런덤 남매의 대화가 끊겼다.

무슨 말이지? 왕녀의 피, 본체.

암호인가? 그렇다고 보기엔 각성이나 지배자, 영겁, 추적 등의 단어가 거슬렸다.


혹시 이들은 보석광산주의 자녀가 아니라 신종 마약 카르텔의 두목과 그 동생인가, 아니면 어느 단체의 스파이인가.


모퉁이 너머 한발자국 앞에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알면 안 되는 것을 들은 난 그들 앞에 나타날 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부채를 돌려주는 것이 급한 게 아니었다.


힘이 쪽 빠졌다. 우아하고 고상한 모습, 누구보다 빛나는 아름다운 외모, 사교계에 익숙한 태도의 엘자가 계속 아른거렸다.


지금은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다.

본능이 속삭였다.


아무 것도 들은 것이 아니고, 여기 온 적도 없어야 한다. 힘없이 돌아서서 걷는데 눈물이 났다.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그녀가 누구이든 이미 난 엘자에게 빠져든 것은 사실이었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기분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여파를 몰아 밤을 새려했으나 새벽이 되자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


사방이 녹색이었다. 초록색 덩굴을 휘감은 어마어마한 높이의 갈색 나무와 내 키는 가뿐히 넘는 양치식물이 보였다. 열대 우림 특유의 습한 공기에 나무 냄새가 가득했다.

안개비와 섞인 축축한 공기와 상큼한 나무 향 사이 매캐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뭔가가 타는 냄새는 곧 바람을 탔고, 그 원인 같은 시커먼 연기도 보이기 시작했다.


휘이이.

휘파람 소리인지 새소리인지 이상한 소리가 났다. 곧이어 사방에서 피비린내와 함께 간간이 사람과 동물의 비명이 섞여 들렸다.


눈앞의 커다란 나무 하나를 지나자 저 멀리 궁전으로 보이는 거대한 석조건물 일부가 보였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붉은 피를 흘리며 하얗게 죽어가고 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이 패닉에 빠진 채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휘리릭.

갑자기 날카로운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찰싹’거리며 감기는 찰진 소리가 나면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어깨 부근에서 구불거리며 찰랑이는 청동색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채찍을 감아 들었다.

연기가 앞을 가리며 시야가 희미해졌다.


반대편에 여자로 보이는 사람이 가슴께를 감싸 쥐고 있었다. 남자가 다시 채찍을 휘둘렀고 상대방이 피하는 순간 반짝이는 단검 몇 개가 날아갔다. 거의 동시에 남자를 중심으로 땅에서 빛나는 파란 원들이 솟아났으나 반짝이는 실들에 의해 모조리 잘려나갔다.


갑자기 바람이 불며 매캐한 냄새와 연기가 더 진해졌다. 안개 같은 연기 너머 누군가가 붉은 머리를 흔들며 일어섰다. 환한 빛이 번쩍이더니 빨간 머리는 곧 여자와 함께 사라졌다. 비슷한 순간 강력한 힘으로 안개들이 순식간에 물러났다.


안개가 사라진 곳에는 깨진 거울이 넓게 흩어져 있었다.


-------------------



햇살에 길게 늘어진 창문이 침대 옆까지 뻗어 있었다.

벌써 해가 떴다니! 놀라서 일어나는데 커튼 그림자의 일부가 움직였다. 거기엔 처음 본 이래로 군중 속에 있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서 있었다.



“···눈을 떴군요..”



“엘자? 어떻게··· 언제 왔어요?”



“당신이 가진 것 중의 하나가 위치를 알려줬죠. 마지막으로 보러 왔어요. 그동안 즐거웠어요.”



역광임에도 하얀 피부에 보라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자신의 생명이라던 길고 긴, 흰색에서 시작해 아래로 갈수록 그라데이션으로 진해지는 보라색까지 다양한 상징이라는 색을 지닌 머리카락도 우아하게 말려 있었다.

외국 풍의 비녀를 닮은 몇 개의 장식 꽂이 뒤에 자연광과 인공 광에 따라 변하는 머리핀도 보였다.


엘자는 내가 주웠던 것과는 다른, 펼쳐진 깃털모양의 부채를 든 채 처음 보는 양식의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니요? 제가 갈게요. 어디로 가나요?”



“전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아요. 우린 앞으로도 보는 일이 없을 거예요.”



난 내가 잠옷 차림이라는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앞으로 보는 일이 없다니. 말해야 했다. 늦기 전에!



“잠시만요! 행선지를 알려주기 힘들다면 제가 ···.”



“미안하군요.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당신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호기심은 좋은 것이지만, 앎이 꼭 기쁨만은 아니죠. 당신은 이 시간 후로 날 잊을 겁니다. 만약 만나더라도 날 기억하지 못 할 거예요.”



엘자가 부채를 다른 손에 바꿔 들었다. 깃털은 가짜로 유리같이 뒤가 살짝 비치는 재질이었다. 그 너머의 손톱이 전보다 좀 더 길어 있었다.


약간 엄숙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 창문을 바라봤다. 우아하고도 우아하게.



작가의말

앙코르와트에 가보고 싶습니다. 정말로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샤먼 연대기 (윙클리드의 비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2 괴담과 카니발 4 16.07.16 232 0 9쪽
11 괴담과 카니발 3 16.07.14 165 0 9쪽
10 괴담과 카니발 2 16.07.12 147 0 9쪽
9 괴담과 카니발 1 16.07.12 158 0 10쪽
8 사라센 - 성년 파티 5 16.07.08 238 0 9쪽
7 사라센 - 성년 파티 4 16.07.06 220 1 9쪽
6 사라센 - 성년 파티 3 16.07.05 167 1 10쪽
5 사라센 - 성년 파티 2 16.07.03 172 1 10쪽
4 사라센 - 성년 파티 1 16.07.01 189 0 9쪽
3 프롤로그 - 장례식과 손님들 3 16.06.29 215 0 9쪽
2 프롤로그 - 장례식과 손님들 2 16.06.28 323 2 9쪽
1 프롤로그 - 장례식과 손님들1 16.06.27 579 0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