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49화 - 감시
안개가 많은 그란성에도 며칠 날이 맑은 탓에 창을 타고 넘어 드는 햇살이 눈이 부셨다. 손때가 타 반들반들한 표면을 너저분하게 만드는 긁힌 상처가 가득한 낡고 낡은 나무 탁자. 그 위에는 쓸데없이 큼지막한 북과 북채 그리고 구겨진 종이봉투가 두 장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탁자를 둘러싼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테미 양,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인지. 말해 보겠습니까."
이스터가 물었다. 테미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대답이야 당연히 비사를 도발하여 밖으로 꾀어내면 다른 사람들 찍도 못하게 으라차차 한탕 하고 나서 나의 승리!로 이어질 멋진 계획이었으나 그리 말했다가는 더 혼이 날 듯하였다. 이럴 때는 긴 변명을 하는 것보다 반성의 표현을 해주는 것이 좋은 방법이었다. 그것은 다른 것도 아닌 사고 치기에 경험이 많은 말괄량이의 감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허리를 반으로 뚝 꺾을 듯이 접어 온몸으로 나는 지금 정말로 반성하고 있소이다! 하고 기운을 뻗어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폐를 끼친 것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겠습니다. 제가 많이 부족해서 제대로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이렇게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입으로 읊는 반성문을 하도 많이 써먹다 보니 이젠 줄줄이 박자 맞춰가며 쏟아낼 수 있었다. 자, 이제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알고 뉘우치는 기미가 보이니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이 용서해 줄 차례였다. 적어도 테미는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곤란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군요."
"네! 정말이지 잘못했습니다."
"그럼 무슨 생각이었습니까."
굽혀졌던 테미의 상체가 슬며시 올라왔다. 꼿꼿이 앉은 채로 웃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닌 이스터의 얼굴이 보였다.
"정말 실수였습니다. 반성하고 절대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대답할 생각이 없으시군요."
이스터가 테미의 말을 잘라버렸다. 무의미하게 반복된 대답이었기 때문이었다.
"테미양은 평소 기사관저의 숙소가 아닌 외부에서 묵는 것으로 되어있지요. 그 시간에 있었다는 것은 이 소란을 위해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 그러니 이것이 실수라면 다분히 고의적인 실수가 되겠지 않나요?"
"정말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테미의 말에 이스터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당황하기 시작한 테미에게서 시선을 거둬들이더니 지금껏 숨은 쉬는지나 모르게 옆자리에서 고개만 푹 숙인 채로 앉아 있던 폴레스에게 질문이 이어졌다.
"폴레스군, 당신은 이 행동이 어떻다 생각하였습니까."
"저... 저기..."
"폴레스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제가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가 말할 기회를 빼앗는군요. 테미양."
"잘..잘못 했다고 생각됩니다."
폴레스가 슬쩍 이스터를 올려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계속하세요. 듣고 있습니다."
"저택에 머무는... 손..손님에게 무례한 언사를 내뱉은 점과... 큰 소음으로 소란을 피운... 점입니다."
폴레스는 느리게 말을 이었고 이스터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말리기는커녕 동참한 이유는 뭔가요."
"제가같이 해달라 끌고 갔습니다. 전부 제 생각입니다. 폴레스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녀의 신분, 아니면 동료이기 때문에 잘못된 일이라도 함께해야겠다는 어린 의무감 혹은 자신보다 강한 자의 말이니 따르지 않으면 아니 될 거라 여긴 탓인가요."
"제가 억지로 끌고 갔다질 않습니까!"
결국에야 테미가 언성을 높이며 말을 끼어들었다.
"이상하군요."
이스터는 테미가 소리를 높이건 탁자를 치건 전혀 반응하지 않은 채로 이야기만 이어가고 있었다.
"뭐가 또 이상하신지요."
테미는 적당히 끝내고 싶은 마음이나 이스터는 쉽게 놓아주려 하질 않으니 답답함이 말투에 섞여 나오고 말았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종이봉투를 뒤집어써 보았자 이시스조차도 당신이 바로 누구인지를 알았어요. 아마 두 사람도 시작부터 끝까지 들키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겠지요. 그러니 징계를 받을 것을 예측했을 것인데, 그런 자리에 사람을 끌고 나가 놓고서 이제 와 모든 것은 내 책임이라며 옆 사람을 감싸는 것이 이상하다 여겨지지 않습니까. 질문을 바꾸지요. 테미양. 혼자서 벌여도 충분했을 일에 폴레스군을 끌어들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그건..."
테미의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사실 자신이 성공하여 비사를 불러내는 결과 외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폴레스군은 이 일의 처벌로 즉결 제명이 내려졌다 하면 그때는 어찌할 생각입니까. 일이 그리된다면 테미양을 탓하겠습니까."
"좀 놀린 것을 두고 제명이라니요!"
"의사 표현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과 체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과연 위로 올라갈 소질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군요."
두 사람 다 입을 닫고 말았다.
"해가 뜰 무렵에 정찰조 교대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종일 일해야 할 사용인들까지, 두 사람은 그들의 휴식을 방해하였지요. 난데없는 북소리에 번을 서던 자들까지 확인을 위하여 뛰어나오게 하였습니다. 기사단의 손님을 공공연한 웃음거리로 비하한 것은 물론이고 손을 맞이한 이곳의 주인이 결례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속한 사람에 의해서 말이지요."
차분한 목소리로 잘잘못을 읊어대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입을 모아 반성의 말을 내뱉었다.
"두 사람 모두 신입 단계로 강등조치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보름간은 어느 조에도 편성되지 않고서 매끼 식사준비를 도와야 할 것이고 마구간 청소와 먹이 준비도 도맡아 해주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기본 소양으로 정해져 있는 역사와 예법, 지리에 대해서 시험을 보겠습니다. 합격점을 넘지 못할 시에는 보름씩 기간을 늘려갈 것입니다."
다행히 제명은 아니었으나 앞으로 당분간 검술 수련에는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몇 마디의 말이 더 오가고서 이스터는 문소리도 우아하게 이들을 남겨놓고서 사라져버렸다.
털썩 소리와 함께 테미는 탁자에 머리를 올려놓았다. 햇빛을 받은 부분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고 눈도 제대로 못 뜨도록 밝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잘한 그릇들과 광이 나도록 닦인 은식기가 화려한 장식의 천 위로 올려졌다. 세 사람의 식사가 차려져 나왔고 비사를 붙들고 늘어졌던 이시스와 함께하는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비사가 빈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이시스가 말을 이었다.
"언니는 아마 아침을 거르지 싶네. 아까 그 바보들 혼내주러 갔을 거야.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금방은 안 끝날걸?"
분명 소란 속에서의 이스터는 날이 서 보이기야 했으나 이스터가 이시스 말고 다른 이를 혼낸다는 것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언니는 실수라 하면 웬만큼 큰일이더라도 화는 안 내. 그런데 고의적인 행동이라면 상황이 다르지. 그런 부분에서는 선이 확실하거든. 거기다 기사단 내의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상냥하지 말라고 몇 번 주의를 받았으니까 엄한 편이지. 쌤통이다."
비사는 이시스의 말이 어딘지 모르게 납득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드러운 듯해도 무르지는 않다 여겨진 이스터였으니 말이다.
'엉망이다.'
이스터는 카일러스가 이곳에 와 보고받았을 종이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란성의 상인들이 보내온 것과 기사단 내의 사람이 파악한 것들이었다. 북동 지부에서는 많은 사람이 빠져나가 버렸고 전쟁과 가주 교체 이후의 혼란 속에서 수도와 달리 제대로 관리가 안 된 탓에 엉망이었다.
그 안에 적힌 것은 케인레스라는 이름의 껍질을 두른 허세와 착각이었다. 위가 그 모양이니 아래 수련생들의 분위기까지 흐려진 셈이었다. 어차피 재정비 과정 중에 즉흥적으로 끼워 넣은 것 중 하나일 테지만 카일러스가 어째서 염치없게 비사를 내세웠는지를 알 것 같았다.
테미는 이스터가 방을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카일러스가 처음 내어 준 열흘 중 남은 닷새의 날만큼은 기회를 달라 말해왔다. 그리고 이스터는 그것을 허락하였다. 무례함에도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이니 남을 뭐라 말할 처지가 아니었으나 상황을 이해해버린 이상, 비사가 응하지 않을 때에는 쓸모없는 판일지라도 카일러스가 만들어 놓은 판을 엎어 버릴 수도 없었다.
'비사님께 폐를 끼친다 오라버니께 따져 물으려 했건만, 나도 어찌 되었건 이 가문에 메인 몸인가.'
허락을 구하던 테미는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생각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진다는 생각으로 싸움에 임하는 것은 물론 나약함이 묻어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이스터는 비사와 만나고 나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란성에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날에 이시스가 꺼낸 이야기로 시작된 대화였다. 세 사람이 처음 만난 마을을 벗어나며 이들에게 건네준 단검 두 자루가 이스터 앞에 놓여 있었다.
"난 사실 그 칼을 사줄 때 말이야. 우리를 버리고 갈 거라 생각했어."
이시스가 괜히 칼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꺼냈다.
"것도 아니면 적당히만 지켜줄 테니 제 몸은 알아서 지켜라. 뭐 이런 것?"
이시스의 생각과 달리 비사는 자신들을 버리고 가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실수가 아니었다면 그 칼을 꺼낼 일도 없을 정도로 보호받았다.
"상대가 산이든, 사람이든, 짐승이든 칼이 있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비사의 칼이 있잖아. 우린 뭐 있어봐야 다룰 줄도 모르고 말이야."
"내가 칼을 들지 못하게 될 시에는 필요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비사가 죽으면 말이야?"
"그렇다."
"헤에. 비사 같은 사람도 그런 생각 하는구나. 겁쟁이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누가 그걸 몰라? 강한데 왜 죽느냐 이 말이지."
아무래도 이시스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것인 것 같아 이스터가 말을 끼어들어야만 했다.
"강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고 상대도, 상황도 예측할 수 없는 때도 있다는 말을 하시는 거지."
"언제까지고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말을 하는 비사가 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이스터로서는 가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근데, 비사가 죽을 정도면 우리가 먼저 죽지 않겠어? 우리만 어떻게 살아남아. 아 하긴, 우리 뒤에 남았었지. 움. 뭐 안 죽었으니까 된 거지."
이시스의 작은 머리 안에서 이것저것 떠올랐다 내려갔다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스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테미와 이야기하는 동안 그날의 대화가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이제 겨우 집을 벗어난 테미에게 집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을 정도로 '밖'을 알고 있는 비사와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 작가의말
이번 회는 요새 좀 뜸했던 이스터의 대사가 참 많은 회였습니다.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회의 내용을 전부 삭제를 해버리고 축약하여 암시만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엄청 고민했으나 지우고 쓰고를 반복한 끝에 결국 올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두렵습니다만,;;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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