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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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향馨香
작품등록일 :
2012.09.2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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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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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14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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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붉은 못 84화 - 사람 꽃

DUMMY

"성주님의 자제분께서 여기 계신 모양이군요."

"무슨 헛소리야. 어서 나가."

부러 뜬 눈만큼은 지지 않는 에첼이었다.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에첼은 대답 대신 비명을 길게 질렀다.

"네가 아무리 케인레스가의 사람이라곤 해도 이곳은 스어가의 영지. 허락도 없이 이 안에 든 것은 잡아 죽여도 명분이 서는 일이지."

에첼의 외침을 듣고 곧 주변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지하의 문 앞은 빈틈없이 메워지기 시작했다.

"도적이다! 어서 잡아 죽이거라!"


헤이즈의 손동작과 거의 동시에 횃불들이 기둥에서 떨어져 불덩이가 바닥을 굴렀다. 손잡이도 없는 얇은 날붙이가 지면에 박히었다. 그는 어떠한 동요도 없이 허리춤의 작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바닥에 떨어진 횃불 근처로 던졌다. 곧 펑 소리와 함께 녹색과 붉은색의 이중 연기가 높게도 솟아올랐다.

에첼이 끝없이 올라가는 연기 기둥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빨리 꺼! 끄란 말이다!"


근처에 섰던 자들이 급히 타는 그것을 발로 밟기 시작하였다.

"케인레스가 직통의 신호입니다. 성의 병사가 아니라 저희 쪽 사람이 움직일 것입니다."

신호탄이 쏘아 올려지고 케인레스가의 이름이 나왔으니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다 여겨 다들 선뜻 나서지를 아니하였다.

"왜 넋들 빼는 것이야!"

저 기사도 뭣도 아닌 것의 지껄임이라도 이스터와 함께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니 정말로 사람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자를 죽이는 것은 침입에 대한 정당한 행위라 할 수 있겠으나 문제는 이 아래였다.


'불,'

불을 질러야 했다. 그리고 나면 어떻게든 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너! 기름을 가져와!"

에첼은 뒤편에 선 자와 눈을 쳐다보며 다급하게 말하였다.

명을 받은 자가 움직이려 하자 빛나는 칼이 그 허벅지를 뚫고 지나니 팍하고 피가 튀며 사람 하나가 휘청이며 주저앉았다.

칼의 빛은 땅에 박히고서도 잠시 발하다 꺼졌다. 둘러선 이들의 시선이 땅을 향하였다.

헤이즈는 얇디얇은 날 몇 개 더 손에 쥐어 부챗살마냥 펴 보였다. 불을 붙인 듯이 빠짐없이 흔하지 않은 빛의 선이 자리했다.

"죽여. 죽여야 해. 이자를 살려두면 나도 에스윈도, 스어가가 전부 곤란해질 것이야. 진짜 케인레스가라면 이런 곳에 함부로 들어올 리가 없잖아! 사칭이다! 잔말 말고 죽여!"

미적거렸다가는 누군가 들이닥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적으로도 자신이 우세하였다. 헌데도 흐르는 시간이 초조함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란돌은 거칠어진 숨을 안정시키려 무진 애를 썼다.

계단을 내려서는 발소리가 울려왔다. 에첼은 떠났을 것이고 아마 곧 다시 낫을 들 자가 올 것이었다. 란돌은 온 힘을 다하여 몸을 움직였다. 그래 봐야 별 능력이 없어 바닥만 기어대었다.


사람은 없고 횃불만 바닥을 구르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뚱이 하나가 계단도 딛지 않고서 바로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아까 그자가 땅에 누워 신음을 내고 있었다.

발을 헛디뎌 구르기라도 한 것일까 이런 게 바로 천운은 아닐까 란돌은 순간 그리 생각하였다.

횃불을 향해 기었다. 줄만 끊어 이 안을 나설 수 있다면 살 좀 구워 먹는 것이야 별문제도 아니었다.

연신 바닥을 닦아대고 있는데 언제 들어선 것인지 낫을 들어 올리는 또 다른 손이 보였다. 동시에 란돌의 몸부림도 멈춰버렸다.

앞에 선 자가 자세를 낮추었다. 창백한 얼굴에 약해진 불의 그림자가 반을 뒤덮고 있어 등이 오싹하였으나 이내 아는 낯짝임을 깨달았다.


"너..."

그쪽 편, 저쪽 편, 아니면... 이쪽 편인가. 온갖 잡생각이 솟구쳤다. 살을 스치는 차가운 쇠의 기운이 서늘하였다. 곧 손발이 자유로워졌으나 바로 설 힘이 없었다. 휘청휘청 거리는 몸뚱어리의 팔이 다른 어깨에 걸쳐졌다.

"너... 네가 왜 여기에..."

"이번엔 질문에 답을 듣겠다."

이 몰골의 사람을 보고도 목소리에 한 점 떨림이라곤 없었다.

"또 케인레스가 보냈나."

"나는 아니다."

"기사단 사람이 아닌가? 그럼 대체 넌 누구지."

"...외부인."

"뭐야 그 성의 없는 대답은. 아냐, 아무래도 좋아. 여기서 날 꺼내주기만 한다면 사례를 해 주지."

그는 제법 진지하게 뱉은 말인 듯하였으나 옆에선 실소가 터져 나왔다. 왜 웃는지 알기나 하는지 몸도 못 가누는 주제에 란돌은 더 크게 웃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이런 데 며칠 갇혀 있다 보니 실성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계단을 오르는데 밖에서의 소음이 크게도 들려왔다.

'밖은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 말한 이는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려는가. 문이 가까워지자 이번엔 또 갑자기 조용해지었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에첼이 주저앉아 있었고 선 이 보다 누운 이가 더 많았다. 해도 얼핏 본들 살아 움직이고 있어 보였다.

"뭐... 뭐야... 기사 작위도 못 받았다면서... 이 괴물은..."


"다시 보니 아주 좋구나. 에첼."

에첼의 곱다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급히 저택을 향하여 몸을 움직였다.

"변명하려면 머리 열심히 굴려."

란돌은 눈도 제대로 못 뜬 주제에 그 뒤통수에다 웃어대고 있었다. 사실 이 작자도 그리 호감이 가지는 않았다. 하도 후달달 떨어대니 바닥에 앉혀놓았다.


헤이즈가 란돌에게 다가가 상처 자리를 살피었다.

"곧 사람이 올 것이니 잠시 기다리셔야겠습니다."

비사는 아마 지하에 쓰러진 사내를 포함하여 몇 마주친다 하더라도 조용히 이곳을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헌데 헤이즈 이자는 일을 제법 크게 벌여 놓았다.

"왜 모습을 드러냈나."

"되도록 목격자를 많이 남기고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 하셨습니다."

두 사람 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의 대화였다.

"그 말이 맞아. 그냥 나갔더라면 무슨 말이든 만들어 덮어대었겠지. 뭐라도 하나 건져 다행이군."

란돌이 맞장구를 쳐대었다.

모든 것을 뒤에서, 그런 자신과 달리 카일러스의 문제 해결 방식은 유동적이었다.


곧이어 저택 입구 쪽에서 소란이 이는 듯하더니 말을 탄 케인레스가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밖으로 나간 인원들 탓에 수련생들도 몇 끼어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소식을 전해 들은 카일러스와 란코르트 백작이 몰고 온 사람들까지 들어서자 스어가의 앞마당은 작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공작께서 우리 아둔한 아들놈에게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고맙소. 고마워. 그란성을 위해 기사단이 많이 움직여 주었는데 이런 부분까지. 덕분에 모자란 아들놈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내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아버님의 벗이셨지 않으십니까.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하니 괘념치 마십시오."


비사는 카일러스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까. 공식적으로 아니 나서기는 얼어 죽을, 말은 또 어찌나 청산유수인지 정말이지 얻어가는 것도 많은 이였다.

그는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서 픽하고 웃어 보였다.

"감이 좋군. 비사."

"칭찬인가."

"물론."

공치사 따위는 필요 없음이나 왠지 최근 자신이 나서는 일이라곤 저 인간 득이 될 결과만 불러오는 기분이었다.



스어남작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자신은 모르는 일이고 하인이 벌린 일이라 에첼은 그리 외쳐대었다. 일단 사병의 무장을 해제시키고서 그들을 제외한 스어가의 사람들을 저택 안으로 밀어 넣어 감금하는 것을 일선으로 자리가 정리되었다. 밤이 깊어 내일을 기약함에도 편히 잠들지 못할 인간이 여럿이었다.




비사는 허락도 없이 살금살금 들락거렸던 방을 당당하게 문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사람들이 란돌의 상처를 살피는 사이 아렌이 급히 뛰어들어 왔다.

"란돌!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인가."

"숨 좀 돌리고 이야기하게나."

타는 속을 달래니 그제야 비사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왠지 이 말을 자주 그녀에게 하는 기분이었다.

"넌 또 왜 여기 있어."

"날 찾아냈거든."

란돌이 대신 입을 열었다.

"기사단이 개입되었다고 하더니 비사도 거기 있었나 보구나."

"상황을 마무리 지은 것은 기사단이지만 이 아가씨는 기사단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군."

케인레스가에서 먹고 자고 그곳 사람들이 비사에게 인사를 해대었으니 그의 눈으로 보자면 거짓말처럼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기사단의 손님이라 하질 않았나. 일단, 아는 것을 얘기하게. 남김없이.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란돌은 다른 이들을 모두 방 밖으로 내보내었다. 그리고 팔을 뻗어 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입속으로 넣었다.

평민과의 결혼을 허가하는 황실의 인가(認可)를 받아 돌아온 자신에게 딸을 찾아달라 매달리던 제스미의 얼굴이 떠올라 목을 넘는 물에 숨이 막혀왔다.


그리고 그의 마음 안에서 무한히 반복되었던 길고도 짧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앞부분은 아렌 그대와 거의 함께였으니 그 시간의 내용은 아는 것과 다르지 않을 거야."


두 사람은 폐허가 된 마을부터 그란 주변은 물론 산속의 오두막까지 모든 것을 뒤졌다. 전쟁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었고 실종되었으니 성주인 란코르트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외려 자신의 아이 역시 찾아 달라며 종이를 건네는 자들까지 있던 시기였다.

허탕을 치고 허탕을 쳐도, 그만둘 수 없었다. 하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이름 없는 시체들이 벌써 태워지고 계속해서 묻히는데 시체라도 찾겠다는 마음 역시 부질없는 것일지 몰랐다.

더 어디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감조차도 잡을 수 없었다. 거진 반년의 시간을 떠돌며 지낸 이들은 빈손으로 그란성에 돌아왔다.

여기까지가 아렌이 함께한 이야기였다.


"자네도 알다시피 돌아오고 나서 나는 거의는 술집에서 시간을 보냈네. 어느 날 그곳에서 스어가의 이야기를 하는 이들을 보았어. 전쟁 중에 징병이 있었어도 스어가 같은 상단 가문은 저택 방비를 하고 식량을 지원한답시고 사병들을 데리고 있었지. 사병들이 도움을 청한 아주머님의 이야기를 비웃고 있었어. 돈이나 뜯으려고 스어가를 기웃거린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 대화 중에 케리가 에첼과 정원 한 편에서 함께 있었다는 걸 본 하녀가 있다는 말이 나왔지. 얘기를 계속 들으니 그리고 그날 웬 마차 한 대가 정원 가까이에 세웠던 것을 자신도 본 일이 있다 하는 자가 있었어.

손님이 올 것이니 와달라고 했던 말이 맞았던 거야. 하지만 아가씨들이 나서서 온 손님도 없었다 케리도 오지 않았다고 말을 하니 아랫것들이 이렇다저렇다 말을 꺼내지들 못하는 모양이었어. 에첼의 눈 밖에만 나도 살기 어려워질 테니 말이야."

"그렇다면 역시 케리는 그날 스어가를 찾아갔다는 이야기인가."

아렌은 차분히 얘기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란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중에는 성문을 지나는 마차를 모두 기록을 해 두었었어. 나는 서고를 뒤졌지. 들어 올 때에는 스어가를 간다고 진입한 마차가 한 대 있었는데, 묘하게 나간 흔적은 없었어. 그리고 이상하게 성의 공무를 보러 왔다고 나가는 마차 한 대의 기록은 늘어 있었지. 말을 바꾼 것이겠지.

나는 확신에 차 스어가를 들락거리며 어렵사리 하녀를 매수하였어. 남작은 내가 에스윈이나 에첼과 혼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언질을 넣었더니 작은 분란 정도는 신경을 쓰지 않을 모양이었지. 나는 그 길로 에스윈을 다그쳤어."

"에첼님이 아니라...?"

"에첼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꺾이지 않을 것을 아니까 나는 약한 에스윈을 물고 늘어졌어. 그것이 에첼이든 에스윈이든 상관이 없어. 난 그만큼 절박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빌고 사정하고 윽박질러도 절대 말을 하지 않더군."


에스윈은 작은 새의 지저귐처럼 옅은 목소리로 그저 모른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말이 거짓이라고 믿고 있는 란돌에게 그것은 오히려 그를 미치게 하는 주문으로 들려왔을 것이다. 과격한 행동과 폭언을 퍼붓는 란돌과 그것을 그저 참는 에스윈. 어느새 그것은 해를 넘기며 지속하여 그들만의 전쟁의 연장으로 이날의 약혼에 이른 것이었다. 질기고도 질긴 신경전이 이어진 셈이었다. 란돌은 에스윈에게 자신이 무엇을 캐내고 싶어하는 것인지 그것조차도 잊혀진 채 습관처럼 분노에 차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란돌, 대체... 만약 그 하녀가 잘못 본 것이면 어찌하려고."

"그 하녀는 에첼에게 혼이 날 때에 케리가 감싸주었던 적이 있다 했어. 그래서 그 뒤로는 항상 눈여겨보았다고 말이야. 잘못 보았을 리가 없다고 그리 말했어. 에스윈에게 목격자가 있다는 말을 했더니 곧 그 하녀가 바로 다음날 저택에서 사라졌다. 어차피 종속이었으니 누군가에게 줘버렸든 팔아버렸든 나로서는 찾을 방도가 없었어. 해도 너무 이상하잖아. 무언가 문제가 없다면 그 하녀를 찾아내서 다른 곳으로 보내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잖아. 그렇지 않은가!"

"그래... 그것은 좀 이상한 일이군."

"거기다 이상한 행동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어. 이맘때가 되면 하얀 꽃을 방안에 늘어놓더니 갑자기 선물을 들고 그대의 집을 찾아가질 않나."

란돌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해도 점점 아렌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란돌. 케리는... 죽었나."

"나는 줄곧 생각했어. 살아있다면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 누구보다도 가족을 생각하는 케리가, 나와 기다림을 약속한 케리가 자취를 숨길 이유 따위는 없다고, 그러니 분명 그날 케리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렌은 속이 타는지 물을 병째 집어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란돌이 케리의 죽음을 확신하는 이유는 비사가 아는 이유만큼이나 남에게 말을 할 것이 못 되는 것이었다. 이성과 감정이 반반씩 섞인 결과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일이 이렇게까지 번지지 않았더라면 그냥 란돌의 과민한 신경을 논할 부분이었을지 몰랐다.

해도 결국 사실을 유추해내었다. 이걸 사랑의 힘이라 해야 할지는 모를 이야기였으나 확실한 것은 어지간히도 신뢰받는 여자였다. 그리고 실상 그 믿음을 증명하였다.

그걸 아는 이가 전혀 상관없는 비사뿐이었어도 말이다.


"아렌. 내 판단이 어리석은 것일지도 몰라. 어쩌면 추측만으로 에스윈에게 내가 너무 심한 짓을 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에스윈을 압박하면 그녀는 항상 어딘가 체념한 듯한 눈빛이었어.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들은 분명 무언가를 내가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했어. 이번 일만 해도 봐. 내가 잡혀 올 때에 거긴 에스윈이 있었어. 날 쳐다보고 있었단 말이야. 그 여자는 자기에게 불리할 것에선 눈을 뗄 수 있는 여자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제는 난 알아. 에첼은 나에게 케리가 에스윈에게 돈을 요구했고, 그 돈을 가지고 도망을 갔다고 했어.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

아렌은 이야기를 듣고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란돌이었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이 되든 안 되든 그것을 떨쳐낼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아렌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해답도 없는 질문이 감정과 함께 쏟아져 나오기에 주체할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

"어쩔 셈이야. 란돌."

"공론화할 것이다. 케리의 문제를 이번 사건과 함께."

"설사, 그날 케리를 봤다는 사람들이 몇 명이 더 나타난다고 해도 무엇을 증명하겠어."

아렌은 차마 케리의 시신조차도 없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제 공개 재판을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고 죄목과 의심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것 정도겠지. 하지만 그것이라도 할 수 있다면 케리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말이 뚝 끊기었다. 대화를 들은들, 이렇다 하게 풀리는 것도 없었다.

아렌이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많은 추측을 뒤로하고서라도 기적적으로 살아 있을 수는 없을까. 오늘 자네처럼 말이네."

란돌도 에첼의 '도망'이야기에 순간 흔들렸던 것이 사실이었다. 해도 4년. 짧지 않았다.



"죽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대화를 주욱 듣던 입이 결국 열리니 눈 네 개가 한 번에 한곳에 모였다.

"너 또 그렇게 단정하는 말을... ...그래... 그렇겠지..."

아렌은 이 이야기들로 비사가 결론을 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곧 다른 말이 이어졌다.


"그대의 동생은 스어가의 저택에서 죽었다."

그간 그리도 망설였던 부고(訃告)가 막상 소리를 내니 쉽게도 말이 되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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