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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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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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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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하여(2)

DUMMY

북방의 유령 군체.


수억이되 하나인 것처럼 행동하는 죽지 않은 장군. 왕에게 향하려면 무조건 거쳐야만 하는 첫 번째 호위.


저마다 제각기 사연을 지닌 유령들이 이곳 죽지 않은 자들의 마을에 모여, 하나의 강력한 수호 의지로 거듭났다.

마을이 곧 군체요, 군체가 곧 마을이다. 군체의 허락이 없다면 결코 마을을 지날 수 없다.


단순히 왕이 아끼는 장소, 그의 고향이자 성지여서가 아니었다.


마을의 심부에는 리치의 수정 심장, 사자왕의 반쪽을 담당하는 라이프 베슬이 보관되어 있다.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은 힘의 근원을 가장 익숙한 장소, 가장 믿을 만한 수호자에게 맡긴 것이다.


======저자는 알고 있다======

======우리의 정체를, 그리고 생명 그릇의 위치를======

======어떻게 알아낸 것이지?======

======그릇을 강제로 회수하려는 건가?======

======그리 둘 수 없다. 마을을 지킨다, 대왕을 지킨다.======

======마법···? 상관없다.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다======

========================!


압도적인 숫자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유령 하나가 발하는 힘은 미약하지만, 유령 수백이 힘을 합치면 강철도 찢을 수 있다. 수천이 겹치면 마을을 부수고, 수만이 겹치면 산과 바다를 움직인다.


그리고 그 수가 수억에 달한다면···.



우우우우우우우우우────!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듯한 감각. 대지와 공중을 동시에 쥐어짜는 염력이 요란하게 주위를 할퀴었다.


짧은 사이에 소통을 마친 군체의 신경이 위협적으로 반짝인다. 하나로 뭉친 영의 힘은 날갯짓만으로 폭풍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유논은 이리 될 줄 알았다는 듯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분명 원혼들의 울부짖음이 마을 전체를 울려 떨치게 하고 있음에도, 그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듯 멀쩡했다.

영혼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기는커녕, 옷자락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하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기이한 마법을 부린 것인지, 금방이라도 도망칠 듯 요란하게 어찌 할 작정이냐고, 그러게 왜 유령들을 건드렸냐고 외치던 포식왕도, 눈을 질끈 감던 지저왕자도 유령 군체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무탈했다.


“···사령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다면 알게 되는 사실이 있지.”


심령의 폭풍이 가라앉고, 죽지 않은 자들의 마을이 다시금 고요를 찾은 뒤.

침묵하는 군체의 영혼 제각각의 뇌리에 울린 목소리였다.


“평범한 이들이 죽으면 그대로 사라진다. 오직 크나큰 한을 지닌 이들만 육신이 사라졌는데도 영령의 형태가 되어 남는다. 하지만, 이 땅에 묶어둘 몸이 없는 채로 오래 남을 수는 없다. 이 세상은 육신 없는 자들에게 적합한 곳이 아니기에.”


반대로 말하면, 육신 없는 영혼들에게 적합한 세상이 따로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영계靈界. 망자들의 세상, 유령들의 세계. 현실과 많은 점을 공유하나 결국은 한 겹 바깥에 존재하는 저승의 일부분이다.


저들 유령 군체는, 이 자리에 있으나 동시에 이 자리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다른 세상의 주민들이다.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의 힘에 말미암아, 그리고 이 지역의 특수성으로 인해 잠시나마 현현顯現했을 뿐이다.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이 저들을 마을과 라이프 베슬의 수호자로만 두고 전장에 데려가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저들은 이곳 유령들의 마을에서만큼은 최강이라 불러도 좋을 압도적인 존재이지만,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더없이 미력한 존재가 된다.


서로 다른 세상의 벽이란 이리도 골치 아팠다. 아무리 용을 써도 뚫기가 힘들다.

아무리 영계를 뒤흔들고 지배하는 거대한 유령의 군체라 한들, 현실에서는 보잘것없다.


그 벽을 한 겹 치워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게 도왔던 것이 왕이 남긴 수정 심장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 심장은 지금···.”

========설마!========


경악한 원혼들의 포효를 뒤로 하고, 유논은 공간의 저변에서 보랏빛 수정 덩어리를 꺼내들었다.

마을의 지하 깊숙한 심처에 봉인되어 있던 사령의 핵은, 이미 그의 수중에 들어온 지 오래였던 것이다.


======어떻게! 분명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거늘!======

“상성이 좋지 않았지.”


정말로 그랬다. 상대가 하필이면 사령술에 정통한데다가, 은밀한 공간의 작용에 능한 흑색의 마법사인 탓이었다.


영계의 베일에 둘러싸인 유령 군체의 입장으로서는, 제아무리 빽빽하게 둘러싸고 감시한다 한들 유논의 마법을 막거나 눈치 챌 수 있을 리 없었다.

한참 전부터 인근을 전부 공간마력의 감시망 아래 놓고, 수정 심장의 위치를 알아낸 뒤 공간을 치환하여 단숨에 손에 넣어버리는 저 움직임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처음부터 확신에 차 있는 것은 아니었고, 만일 수정 심장을 숨겨두었다면 이곳일 확률이 가장 높다는 생각으로 와 본 것이었는데···딱 들어맞았군.”


유논은 손 위에 들린 요사스러운 광채의 보석, 그 속에서 속삭이는 사악한 울림을 흘려내며 중얼거렸다.


우우웅─


저항하려는 듯 짙은 사기가 뿜어져 나오나, 이내 가볍게 차단당한다.


검은 공간의 장막이 보랏빛 그릇을 감싸 군체에 힘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가로막고 있었다. 이러니 아무리 저 너머 영계에서 용을 쓴다 한들 현실계의 유논이나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할 수밖에.


그리하여, 상황이 지금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풀려 도달한 갈림길.


한때 그의 것이었던 사령의 심장이, 죽지 않은 자들의 왕과 유령 군체의 손을 거쳐 다시 그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것을 어찌할지는 전부 그의 의지에 달린 문제였다···.


당장 깨부숴 세상에서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릴 수도 있고, 혹은 공간 너머에 던져 넣은 뒤 다시는 바깥세상의 빛을 볼 일이 없도록 봉인해 버릴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몸 반쪽이 수정 리치의 것이 되어버린 죽지 않은 자들의 왕으로서는 뼈아픈 손실일 것이다.


지닌 힘의 절반을 잃는 것은 기본이요, 겨우 그 정도에서 끝나면 오히려 다행일 것이다.

기존에는 수정 심장의 힘으로 유지되었던 몸 반쪽을 새로 지탱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요, 리치의 능력 없이는 지금처럼 거대한 군단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고, 시체들을 강화하는 보랏빛 기운도 더는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니···.


지금 이 순간 그의 행동 하나로, 군세의 전력을 삼분지 일에 가깝게 줄여 버릴 수 있었다. 현재진행중인 전쟁의 향방을, 세상의 권력 구도를 단숨에 뒤바꿀 수 있었다.


그 끔찍한 진실을 눈치 챈 것인지, 유령 군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저 너머 저승에서 수군댔다.

자기네 딴에는 조용히 의견을 나눈다고 했을 것이나, 그 수가 억 단위를 넘어가니 듣는 입장에서는 귀곡성에 청각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귀를 틀어막는 포식왕과, 외골격의 청각 센서를 조정하는 지저왕자. 유논은 미동도 않은 채 내뱉었다.


“조용.”

========···.========


그 말에 담긴 압력 하나만으로, 수억의 유령 군단이 한꺼번에 합죽이가 되어 속닥대던 것을 멈춘다. 섬뜩한 고요가 마을을 감싼 가운데, 유논은 수정 심장을 매만지며 말했다.


“한 놈만 대표로 나와 말해라. 들어는 줄 터이니.”


수많은 원혼들 가운데, 침묵을 뚫고 엉거주춤하게 나선 것은 일전의 피투성이 신부였다.

수십 년은 더 늙은 듯한 지친 모양새로 허탈하게 말을 건넨다.


=결국은, 과거의 물건을 돌려받았군요, 흑색의 마법사.=

“그래.”

=···기쁘십니까?=


원망하는 어투. 대답하는 마법사는 그저 무미건조한 낯빛이었다.


“약속을 지키고, 내 것을 되찾았을 뿐인데. 딱히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는군.”

=그러합니까? 저희와는 몹시 다르군요. 저흰 분하고 원통하여, 서럽고 괴로워 죽을 것만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가?”

=예. 그러합니다.=

“그 심정 잘 알았다. 그러나 딱히 내 알바는 아닌 것 같군.”

=···.=


골리려는 듯한 언사에 피투성이 신부는 흐린 낯으로 입술을 깨물었으나, 홀로 분을 삭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수정 심장을 손에 넣은 이상, 흑색의 마법사는 이 자리의 압도적인 갑이었다. 저 자의 손아귀에 군세의 미래가, 대왕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마법사의 발바닥을 핥는 한이 있더라도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해야 했다. 대왕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리 할 수 있었다···.


그리 다짐하며 웃는 낯으로 다시 말하려던 때였다.


“크하하하, 무슨 속내로 죽지 않은 자들의 마을, 이 험난한 적지 한복판에 들어오셨나 했더니, 이런 묘안이 있으셨소, 흑색의 마법사···님.”


돌연 마법사 옆의 거한, 검은 로브를 둘러쓰고 있던 그가 몸을 가리던 옷가지를 집어던지며 크게 외쳤다.


유령 군체의 위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꼴이 누가 보아도 마법사의 하수인에 불과할 뿐, 신경 써야 할 강자는 아닐 것이라 여겨 눈여겨보지 않았던 인물이나···이게 웬걸.


반은 인간, 반은 괴수. 녹색 비늘과 붉은 안광을 발하는 저 흉폭한 기세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포식왕 카르발네스···!=


유논에게 하도 당해 그 위세가 줄어들었으나, 이래 뵈도 세계 최강의 돌연변이, 방사능의 아이들 세 지배자 중 하나다. 군세가 상시 예의주시하는 강적인 것이다.


피투성이 신부 홀로 나서 대표로 말하기로 약속했음에도, 군체 전체가 술렁여 영계가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흑색의 마법사가 월드 이터즈의 방사능 왕과 함께 이곳까지 자리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어쩐지 흑색의 마법사가 찾아온 시기가 심상치 않아 수상하다 싶었는데, 정말로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저 흑색의 마법사가, 죽지 않은 자들의 군세와 전쟁을 벌이는 지구숭배자들, 방사능의 아이들, 제국주의자들의 연합세력과 손을 잡은 것이다!


애초에 이러기로 계획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겠지. 피투성이 신부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과 분노에 영체를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군세에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대왕에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자, 어서 그 시체 놈의 보석을 부숴 버립시다! 한 방에 그 빌어먹을 네크로맨서를 골로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지긋지긋한 죽은 것들의 세력이 이렇게 무너지게 되겠구나! 크하하하하!”


일이 너무나도 쉽게 풀렸다는 것에, 머지않아 왕을 죽이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더없이 들떠 호탕한 외침이었다.

괴수의 성대를 통해 마을 널리 울려 퍼지는 요란한 목소리에, 유논은 눈살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입 다물어라.”

“···흡!”


두뇌 깊숙한 곳에 새겨진 복종의 회로. 깜짝 놀라 입을 턱 막으며 끅끅대는 모습. 그 추태, 저 포식왕을 완전히 제 수하 다루듯 하는 모습에 피투성이 신부는 절망적인 어조로 내뱉었다.


=지구와 돌연변이들의 손을 잡으셨군요.=

“그런 셈이지.”


유논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변명한다 한들 믿을 리도 없다.


게다가,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대對군세 연합 세력과 그의 목적은 꽤나 달랐으나, 결과적으로 죽지 않은 자들의 왕에게 볼일이 있다는 점은 같았다. 실제로도 그것을 위해 힘을 합치기도 했고.


더 깊숙하게 파고들자면 실상은 유논이 본인의 목적을 위해 연합군을 이용한 것이긴 하나, 그것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다.


어차피 이제 와서 저 유령 군체가, 죽지 않은 자들의 군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칼자루는 어디까지나 그에게 있었다.


“아까, 내가 죽지 않은 자들의 왕에게로 향하는 길을 열라 했던가.”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더 빠른 길이 눈앞에 있었다.


“취소하지. 내가 가지 않겠다. 너희의 왕더러 오라고 불러라.”


유논은 보랏빛 수정 심장을 금방이라도 짓이겨 부술 듯, 위협적인 흑색 공간마력을 항성처럼 둘러 회전시키며 말했다.


“흑색의 마법사가 부르니, 대화나 하자고···참고로, 안 오면 라이프 베슬에 관해서는 기대하지 말라고 전해라.”


까드득.


칼날처럼 날카로운 공간의 결이 수정 겉면을 벗겨내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롭다.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 모습에, 유령 군체의 일부가 바삐 전장으로 날아갔다.


왕을 부르러 쾌속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그 모습에 유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드디어.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을 만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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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흑과 백(Black & White)(1) +1 22.03.24 199 9 15쪽
270 스승과 제자(4) +6 22.03.23 218 12 15쪽
269 스승과 제자(3) 22.03.23 190 13 13쪽
268 스승과 제자(2) +3 22.03.23 193 11 13쪽
267 스승과 제자(1) 22.03.23 191 11 13쪽
266 드래곤 사냥(7) 22.03.23 202 10 12쪽
265 드래곤 사냥(6) +2 22.03.22 197 15 14쪽
264 드래곤 사냥(5) 22.03.22 187 11 15쪽
263 드래곤 사냥(4) +2 22.03.22 191 12 14쪽
262 드래곤 사냥(3) 22.03.22 198 8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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