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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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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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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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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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해변으로 가요 4

DUMMY

드디어 정상 부근에서 우회길을 만난다. 산길은 항상 위험하고 가능하면 피해 가야 한다. 특히 주간에 사방 노출된 곳은 더 그렇다. 지형을 보니 산 정상을 돌아 그들이 들어왔던 곳에서 더 북쪽으로 내려가 산을 떠날 것 같다. 생각은 공통. 산 하단에 도착해 어둠을 기다리고, 컴컴해지면 다시 바다 쪽으로 간다. 그들이 왔던 바다로. 거기 시도하지 못하고 남은 목표는 그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다. 그게 목표인지 그들 밖에 모른다.


둘은 이제 하산길로 들어선다. 넘어온 산 건너편에 누운 사람들. 주기도 못 찾고 방치하고 왔다는 기분 씁쓸하다. 내려가는 길... 힘은 덜 드나 발목 같은 데 다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삐끗만 해도 큰일이다. 아무도 못 도와준다. 몸은 훈련으로 적응되었으나 잠시 스치는 사념이 꼭 그렇게 발을 삐고 균형을 잃게 만든다. 산에서는 오르면 오르는 것만 신경 쓰고, 특히 내려갈 때는 더 위험하기에 내려가는 것만 신경 써야 한다.


그렇게 정상 부근을 돌아 10분을 내려갔나? 둘은 또 갑자기 멈춘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과 같지 않다. 고참이 졸병을 보고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수직으로 댔기 때문이다. 고참은 눈을 뜬 상태에서 동작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5초? 갑자기 사방을 둘러본다. 그리고 한 그늘진 곳을 찍었다. 고참은 재빨리 속보로 가고 졸병도 뒤따랐다.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고참은 탄창을 빼 실탄 확인하고 아래를 본다. 졸병도 깨달았다.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찌그덕거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린다. 확실했다. 군인들이 단체로 이동할 때 나는 그 찌그덕 소리. 둘은 마주보고 입을 다물어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몸이 바닥으로 침잠한다.


소리는 저 밑에서 오고 있었다. 졸병은 희망의 눈동자를 표현한다. 다른 지역대나 중대? 그러자 고참이 가로젓는다. 그러기엔 너무 많아. 저건 적이야. 아군일 수가 없어.


2개 소대가 통과했다. 무장은 지금까지 본 적 중 남달랐다. 경기관총과 류탄발사기 RPG 상당했다. 북한군 소대가 갖출 걸 다 갖췄다. 무장이 훈련처럼 가볍지 않다. 다른 병사들이 RPG 예비탄을 상당히 휴대했고 탄통도 들고 가고 있었으며 저격총도 두 정이나 목격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중무장에도 그들이 올라와 지나치는 속도였다. 상당히 빨랐고 많이 헐떡이지도 않는다. 북한인 인상이야 다 마르고 얼굴 날카롭고 까맣기는 하지만 밀고 올라오는 기(氣)가 있었다. 그 강한 파워 때문에 둘은 순간 꺼지는 풍선처럼 몸을 움츠렸다. 군관도 보총과 가슴 탄입대를 착용했다. 그리고 그들 군복은 위장무늬였다. 디지털로 바뀌기 전, 아 육군의 군복 무늬와 비슷한 우드랜드 카피판. 조악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게 풀 세트였다. 적어도 두 번의 격렬한 전투를 치를 정도로 무장했고 말도 없다.


그들은 묵묵했고 발걸음이 소리를 많이 내지 않는다. 산을 많이 타 본 부대였다. 둘은 정말 놀랐다. 해안에서 봤던 북한군과 전혀 다르다. 그리고 북한 경보여단처럼 철갑모를 쓰지 않고 맨 군모. 산중의 아군을 토벌하기 위한 단일 목적으로 투입된 부대가 분명했다. 왜 저런 부대가 남으로 가지 않고 여기로 왔을까. 일대는 뭔가 중요하다. 뭔가 있다. 이 분초를 다투는 좁은 땅 단기 혈전에서 말이다. 고참은 순간 굳었다. 혹시 자신들을 적 파수병이 멀리서 보고 알린 건 아닌지. 지나치는 그들은 분명 무전기를 메고 있다. 은거지 수색 당시 누가 멀리서 봤다는 기분이 든다.


‘이런 씨발...’


둘은 총에 댄 손의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도 천천히 늘여 소리를 줄였다. 밤도 아닌 낮에 산에서 저런 부대를 본다는 건 상당했다. 아마도 산 너머 목격한 그 지역대에 관련된 무엇을 완전히 해결하려고 산을 뒤지는 것 같다.


한 명, 두 명, 그리고 분대 소대, 2개 소대가 그렇게 지나갔다. 그들 선두가 나타나고 후미가 사라질 때까지 둘의 위치를 통과하는데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빠르다 빨라. 어디 놈들인가. 어떤 뚜렷한 장소로 빨리 가려는 것 같다. 다 통과해도 둘의 굳은 숨은 금방 풀리지 않는다. 한번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해야 돼? 저 산길을 타는 건 이제 죽음의 행로다. 산을 떠날 때까지 밤이건 낮이건 이제 절대로 길을 타선 안 된다. 편한 행로를 택하면 죽는다. 산길에서 이들 외에 다른 적 소대를 만날 수도 있다. 늦더라도 무조건 길과 떨어진 어려운 지형으로 기동해야 한다. 적은 둘이 숨은 곳 오른편으로 통과했다. 둘이 이제 가야 할 행로는 왼편의 험난한 방향. 안쪽에 먼저 들어온 고참은 이제 갈 방향을 알았다. 길이 없고 벼랑도 있는 왼편. 올라가는 적의 소음이 완전히,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면서 고참은 이제 갈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북한군을 봤던 것보다 두 배는 넘게 까무러칠 뻔했다.


왼편에 뭔가 있었다. 뭔가.


숨는 자를 찾지 마라

두려움에 칼을 들 것이다

도망치는 자를 끝까지 쫓지 마라

너를 향해 달려들 것이다.


그저 천천히 산보하듯이 쫓아가라

놈이 긴장과 힘이 풀릴 때를 기다리며

천천히 쫓아가라. 언젠가는 풀린다.


오래 살고 싶거든

범이나 사자 말고

하이에나가 되어라.

소수가 살아남는 희망이다.


밀랍인형. 얼굴은 핏기 없이 하얗고 눈을 뜬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산 자와 모양은 같지만 만지지 않아도 차갑고 딱딱해보였다. 죽은 자의 눈은 애절했다.


눈은 ‘이것이 정말 마지막인가’ 말하는 듯 애절하게 굳었다. 첫 출산을 하는 산모의 고통과 경이가 섞여 멈춘 것 같다. 여기저기 벌레가 먹었다. 얼굴 살 1/3 정도가 없다. 자랑스러웠지만 이제 초라한 특전복. 어느 부대 구호처럼 수의가 되어버렸다.

가슴에 K-2 소총. 군복은 피가 흥건하게 물든 뒤 굳은 것 같다. 추정컨대 어디서 총상을 당하고 도피탈출하다 출혈이 지속되면서, 최대한 안 보이는 수풀로 기어들어 잠시 누웠다가 저승으로 갔다. 생각해 보자면 아까 그 유선안테나가 달린 곳에서 교신하다 전투가 발발하고 이곳으로 도피한 것 같다. 비겁하게 전투를 회피하고 도망친 것일까? 다른 이유가 있었나? 최후의 생존자였나? 피를 흘리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게 놀랍다.


몸통 어딘가에 맞았다. 출혈은 압박붕대가 끝나면 손으로 막던가 방법이 없다. 분명 이 어려 보이는 친구는 산 너머 은거지 기습 때 여기로 튀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산 너머와 다른 지역대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총을 치우니 가슴에 음어낭이 있었다.

‘통신(주특기)이야...’


고참이 음어낭에 손을 넣어 뒤졌으나 아무 것도 없고, 작은 수첩이 외려 음어낭 밑에 그냥 놓여 있었다. 열어봤지만 글자가 있는 모든 장은 찢겨져 사라졌다. 파기한 거다. 졸병은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기분 끔찍했고 또한 시신이나 본인이나 외로웠다. 졸병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여기선 이렇게 가는구나. 이렇게...


대검, 소총, 실탄 200발, 수류탄 둘, 특전조끼 안의 모든 물품을 수거했다. 고참은 대검을 뽑아 날을 유심히 살피고는 졸병에게 주었다.


‘고맙다. 누군진 모르지만 잘 쓸게.’


문득 전사자 총의 탄창을 분리해서 보니 세 발 남아 있다. 약실까지 네 발. 그건 이 친구가 여기서 죽기 전까지, 그날 총을 쐈다는 뜻이다. 그렇게 뒤지며 물품을 회수하다 둘은 깜짝 놀랐다. 전사자 특전조끼 등낭에... 특전식량 두 개가 있었던 거다. 둘은 다른 모든 물품보다 흥분했다. 이 불쌍한 친구의 비상식량이었다. 평상시 먹기 위한 게 아니라 위급상황을 위해 두 개 챙겨둔 거다. 봉지는 굳은 피로 도포되어 있었다. 너무 고마웠다. 하나씩 가졌다.


고참은 생각한다. 기록을 남겨줘야 한다. 이 이름 모를 산중에서 죽어간 아마도 하사. 주특기 통신. 불쌍한 놈. 그러나 모든 마크는 제거되어 있고, 상의 오른쪽 포켓에는 경마장 트랙 같은 여단 마크 재봉질 자국이 남아 있다.


몇 여단이냐 녀석아. 이 녀석도 부모가 있고, 그냥 북한서 실종됐다는 한 마디 말로 하기에는 얼마나 구슬픈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죽었다는 것이 부모 마음에 더욱 못질을 할지 몰라도, 그래도 아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음어낭도 총에도 군복에도 어떤 주기가 없다. 문득 고참이 다시 몸을 굽혀 군복 중간을 열어 안쪽을 본다. 허리가 아픈지 천으로 꽉 졸라맨 복대 같은 걸 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기가 있어!’


부대를 암시하는 숫자는 없었다. 그건 유성매직으로 쓴 글자였다. 적어도 지역대, 크게 보면 대대에서 세탁기로 군복 마구 돌렸을 때 찾기 위해 쓴 주기. 디지털 무늬가 되면서 자기 군복 식별이 우드랜드에 비해 어려워졌고, 찍찍이 마크를 떼기에 세탁기에 넣을 때를 위해 쓰는 주기. 참 글씨가 뭐랄까 워드 오이체나 가지체 같은 여성 필체처럼 글씨가 예쁘다고 할까 그렇다. 뚜렷한 한글 세 글자. 김......원......기. 김원기. 사람 참 착실했을 것 같은 이름이다. 수첩을 분실하더라도 까먹지 않도록 둘은 속으로 여러 번 반복했다.


고참은 음어낭에 꼽혀 있는 볼펜을 뽑아 수첩에 대충 위치와 이름을 적었다. 둘 다 자기 기억 한도 안에서 김원기란 이름은 없다. 모르는 친구이다. 안쪽 다른 곳을 뒤져봐도 적은 주기는 그 세 글자가 유일했다. 군화까지 벗기고 생각은 없었다. 망자를 더 건드리기도 싫었고, 군화에 대대 지역대 명칭 쓰는 놈은 없다. 써봤자 중대.


휴...... 이 외딴, 북한 땅의 어느 산. 김원기. 뭐 나중에 대충 전사 프로필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다만, 둘 다 살아서 누군가에게 증언할 기회가 생긴다면 말이다. 망자에겐 미안하나 이제 떠나야할 시간이었다. 2인조는 마음이 울컥하나 입술을 굳게 힘 주어 닫았다.


그런데 졸병이 불쌍한 얼굴을 보며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다. 시신 입 안에 치아가 아닌 뭔가 하얀 게 보였다. 졸병은 미간을 좁히고 다가가 천천히 어금니에 물려 있는 그걸 입에서 꺼낸다. 왜 이런 짓을 했지? 종이를 왜 씹어? 총이 있는 걸 보면 적에게 발견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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