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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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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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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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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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의 백로 1

DUMMY

히포크라테스의 백로(白露)



우리가 기억 못할 어느 때부터 초상은 빠르고 가벼워졌다. 3일장이라 해봤자 둘째 날 저녁 밖에 없으며 조문도 잠시 자리도 잠시, 육개장 앞에 놓고 울면 과한 사람 되고, 술 먹겠다 작정하고 온 사람만 오래 머문다. 어지간한 사연 아니면 슬픔이 번개와 같다. 망자도 상주도 문상객도 병원 절차에 따른다.


사람들아, 하루라도 더 살려고 발버둥 쳐라. 슬퍼하는 사람도 적고 금방 잊힌다. 세상은 먹고 살아야할 산 자 우선이며, 어쩌면 그게 치부와 같은 진리였다. 죽은 자는 서랍 냉동 칸에 누워 산 자들과 따로 놀고, 망자는 죽자마자 얼었다가 버스에 실려 가서 강력한 버너를 만난다. 3일 만에 가루가 된다. 아무에게도 이상하지 않다. 세월이 흘러 다음 세대는 더 간략해질 것이고, 영혼이 있다면 죽는 입장에서 너무 숨 가쁘지 않아?


난 조용한 곳에 좀 느긋이 누웠다 가고 싶다.


포장 다 뜯고 알맹이만 챙겼다. 내 주특기 물품은 포장이 반이다. 알맹이만 가지고 다니니 컴컴할 때 더듬으면 종종 혼동이 온다. 이제 그마저도 없다. 항상 뛰려고 별에 별 부피를 다 줄였다.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진다. 뛰다 정지하면 날 호출한다. 가진 게 부실하기는 6.25 때 위생병 같고, 가끔은 내가 의무인지 종부성사 주는 성직자인지 모르겠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심리적으로 날 붙들고 늘어진다.


넷과 작별했다. ‘끝’을 목격한 케이스.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는 이런 거 매일 보겠지? 의무낭은 이제 홀쭉하다. 설파와 항균 알약, 봉합용 실과 연고, 붕대 2개. 문명세계에서 들고 와 삭막한 곳까지 질기게 남은 돌팔이 주특기의 상징 소화제. 약이 필요 없다. 이제 두 번 씹고 삼켜도 소화불량 없고, 입에 넣자마자 나도 모르게 벌써 삼킨다.


딱딱하든 물렁하든 목부터 녹아. 음식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위치를 정말로 느낀다. 눈 감으면 어디를 지나가는지 손가락으로 짚을 수 있다. 농담 아니다. 위장에 들어가고 단 30초면 화학적 에너지를 창출하는 변화가 온다. 먹으면 누워서 한숨 자고 싶다. 이걸 경험하면 당신은 확실한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거다. 허기에 시달리면, 먹은 직후 몸이 한숨 자면서 영양분을 최대한 짱박으려고 한다. 생각이 하는 게 아니라 몸이 한다, 정말로 놀랍다.


세상은 인생은 어찌할 바 모르는 일의 연속인가, 아직 받아들이기 내가 미성숙한 것인가. 나만 그런가? 현실을 의심할 정도로 빠르게 많은 일들이 지나간다. 내가 감당할 선을 넘었다. 맥박 멈춘 사람을 포기하고 떠나는 시간이 빨라진다. 몸이 식는 징후가 보이면 내가 살기 위해 떠난다. 어쩌면 그 마지막 ‘끝’을 안 보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나는 심령술사가 됐다. 누운 사람의 표정과 눈으로 뜻을 읽는다. 정확하다. 다른 뜻일 수가 없는 느낌을 준다. 벼랑 끝에서 몰린 사람은 어려운 표현 쓰지 않는다. 눈 하나에 열 개 문장이 들어 있을 때는, 지금처럼 내가 말로 표현 못할 것들도 드러난다. 그 눈에 어쩌면 책 한 권 인생 하나. 촛불은 꺼지고 나는 책을 덮고 또 총 들어 뛴다.


누구나 마지막은 본색을 감추지 않았다. 새롭게 다가올 것에 겁먹은 사람도 있었고, 새롭게 다가올 따위가 없다고 확신하며 냉정하게 조소하기도 했고,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끝낸 사람도 있고, 총알이 신경을 건드렸는지 눈이 초점을 잃고 부들부들 경련하다 다기도 했다. 끝까지 하이에나처럼 본능을 숨기지 않는 도전적인 사람도 있었다. 아군인 날 죽일 듯 광포한 눈으로 간 사람, 자기가 죽을 거면 적진에 자폭이라도 할 거 같은...


난 어디에 속할까?


(정말 숨김없이) 나 태어나 무엇을 꿈꾸었고 인간을 뭐라 생각했는가. 뭐라긴...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했지. 내가 그럴 나이도 아니고 남자답지 못하다 생각했지. 삶과 죽음 앞에 다 거기서 거기였어. 자꾸 죽고 싶다고 남에게 떠드는 놈은 죽음이 무서운 거다. 진짜 죽을 놈은 말을 하지 않는다. 내 조수는 도도한 표정으로 정지되었다. 난 녀석과 2년을 같이 있으면서 그런 놈인지 몰랐다. 사람 속 모르는 거다.


2차 타격. 폭발. 몬드 쓰리. 얼굴이 피떡이 되어 해소천식 환자처럼, 한을 품은 귀신처럼,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허어어억 허어어억, 숨이 모자라는지 몸을 비틀고 마취한 사람처럼 말은 늘어진다. 말로 듣던 걸 봤다. 기흉... 흉벽/폐가 찢어져 공기가 들어간 상태. 입에서 각혈이 울컥울컥 터진다. 귀에 대고 어느 쪽이 결리냐 물어도 대답하지 못한다. 발버둥만 친다. 이렇게 죽느니 빼보려고 메스를 뽑았다. 좌우로 한번 씩 찌르려고 했다. 혹시나 길이가 안 될까봐 대검까지 뽑았다 씨발...


그 가벼운 플라스틱 호스 하나 못 넣고 왔다니. 죽기 전에 가슴 답답한 거라도 풀어주고 싶었는데... 중증-다발성외상. 두상 골절 및 안면부 파열, 폐 손상 기흉, 내장출혈 복부 팽만, 그 풍채 좋고 미남인 중대장이. 좋은 대학 나오고 애써 ‘특’자 지원해서 온 중대장. 합리적이지 않으면 지역대장 앞에서 조용히 의견을 피력하던 사람. 외줄 오르기가 안 되자 체중을 줄이고 일과 끝나도 연습해서 체형을 바꾼 사람.


아, 똑같은 부상의 남쪽 교통사고였다면 100% 살았다.


[게릴라는 처음 쓰러질 때 죽는다.]


더 이상 안 해. 떠올리면 그림을 그리고 영사기가 돌아. 감정으로 기억할수록 오래 물고 늘어져. 생각을 피하는 게 좋지. 난 너무 어려서 임종을 봤어. 부모형제라도 죽는 순간을 기억해서 뭐가 남아. 영정사진으로 기억하면 되지. 난 남에게 그걸 떠버리기까지 했어. 말로 떠들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수필이 되고 미사어구가 들어가. 왜? 버너로 태우는 것도 보여주지?


생각이란 곳, 문장, 말. 사람의 말이란 그 상황의 1/4도 되지 않아. 화면을 끄고 음성만 들으면 진실을 호도해. 인간의 말은 반 이상이 거짓말이거나 쓸 데 없는 말이라 하지. 진실은 알고만 있고 입으로 말하지 않는 게 좋아. 선진국이란 곳에서 언어란 진실을 중심에 두고 빙빙 돌며 시간 허비하는 도구야. 진실을 먼저 언급하는 사람이 져. 패배해. 자신의 진실은 타인에게 무의미해. 상대가 이해할 거라고 말하는 놈이 병신이지. 필요한 말은 딱 하나. 적 같다 씨.


마지막에 뭘 봤을까. 뭣이 나타난 듯한 표정을 보고, 난 뒤를 돌아봤다. 뭘 봐. 뭘 본 거야? 뭐가 있어? 소스란 바람이 부는 이 회색 산악에 저승사자가 왔어? 그 다음은 무엇인지 좀 알려주고 가면 안 되니. 정말 검정색 도포와 갓이야? 인도 저승사자가 지역을 착각해 터번 쓰고 나타나는 거 아냐? 하하하 염병.


여긴 어디야. 토성의 위성 인켈라두스 표면인가. 뭐가 이렇게 없어!


고아가 이런 기분인가. 마음 기댈 곳이 없다. 민둥산에 홀로 남은 고양이 같다. 대충 좌표는 알지만 무의미해. 사방 어디로 가도 여기와 다르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한숨이 끊이지 않아. 대체 끝이 없어. 골인점이 온다는 말이라도 들어야 사람이 힘을 낼 것 아닌가. 지친다. 마음이 더 지친다. 내가 날 컨트롤하기 힘들어질까봐 걱정이다.


총도 없는 신세. 전투의 여파든, 낙오든, 군인이 무기 하나 가지지 못한 상황에 도달한 일은, 참 없어 보이고 바보 같다. 언제나 떨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리가 가볍다 생각해 더듬어보니 부 무장 권총도 빠져 사라졌다. 콩알이 사방을 때리면서 조각과 먼지들이 우수수, 2미터 앞에 놔둔 총 개머리판 모가지에 손댈 생각도 못하고 뛰었어. 병신이라고 욕하지 마. 그 총 잡았으면 그 자리가 무덤이었어.


뒤로 물러서는데 총알이 정말 내 총을 때려. 가까이서 살점이 튀며 무너지는 누가 보이고. 놈들이 포로는 안중에 없어. 그냥 일단 쏴. 자동으로 드르르르 드르르르 갈겨. 우리가 두려운 거지. 과도한 폭력은 과도한 공포로부터 온다. 우린 소수 전사자 외에 드러나지 않는, 밤에만 움직이는 실체가 없는 남조건 항공륙전. 밤에 갑자기 나타나 치고 빠지는 유령. 우리에게 우린 그저 인간이지만, 저들에겐 괴물인 게지. 우리가 보기엔 니들도 괴물이다.



‘볼에 손을 대 봐...’


얼굴. 피골이 상접하고 위장크림도 필요 없는 땟국에 드문드문 수염. 눈동자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정지화면이 되었다. 볼에 손을 대니 아직 미열은 있다. 맥박... 심장... 없다. 피부가 투명해지면서 이제 서늘해지는구나. 하도 CPR 눌렀더니 늑골이 부러진 거 아닌가 미안하다. 오늘 같은 건 또 처음이다. 대부분, 기본적인 절차를 거쳐 포기하고 자리를 떴다.


지역대 작전부터 그런 말이 들린다.

“의무는 맨 뒤로.”

처음에는 ‘통신은 맨 뒤로’였다.

“어서 가. 가라면...”


통신도 앞 열에 서고 타격조에 들기 시작했다. 그들도 쓸 것이 없다. 인입구 불량 때문에 전선을 까서 쁘라찌하고 클립으로 물리고, 이마저도 주특기에서 손을 떼 전투원으로 비등해졌다. 날 뒤로 보낸다고 이렇다 할 대책이 있나. 물품이 없다니까! 팀 작전에서 물 쓰듯 소모했다. 뾰족한 수가 없어. 나중을 위해 이 사람에게 쓸 걸 아끼라고? 도로 매복이나 차량에서, 남들은 먹을 것과 총포화약류를 물색하지만, 난 내가 쓸 것을 뒤진다. 어둠 속에서 시야가 확장되고 밤눈은 야투경 저리 간다. 말하고 싶었다. 병원을 타격하자고. 거길 약탈하자고. 119, 119...


단추를 채우고 옷깃을 가지런히 해준다. 우리 대대인데 이름도 모르겠다. 어떻게 우리와 섞였지? 손바닥으로 망자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별을 고한다. 응급실 의사가 그랬지. 이송된 환자가 명을 달리했는데, 발에 난 자상에 소독약을 발라주고 있었어. 내가 쳐다보니 그러더라. 살아 있는 분처럼 이런 걸 해주곤 한다고. 상처는 아물지 않겠지만 자상에 자주색 소독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안 발라주면 염할 때도 그 자상도 치료받지 못한 채...가 슬픈 것이다. 그래 이해한다. 이 친구 손을 가슴에 모아서 기도 해주고 끝내자...


결심. 이제 나다. 해낼 수는 있지만 어떻게 올지 모르겠다. 상의를 벗고 내의에서 왼팔을 꺼내... 설파 가루를 대검 끝에 뿌리고, 턱을 들어 맑고 동그란 걸 봐.


‘닐 암스트롱의 조명. 훤해서 좋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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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게릴라의 길 1 +2 20.12.09 479 17 13쪽
156 남조선 항공륙전 3 +3 20.12.08 474 26 12쪽
155 남조선 항공륙전 2 20.12.07 409 24 11쪽
154 남조선 항공륙전 1 +1 20.12.04 482 26 11쪽
153 격납고 2 20.12.03 418 19 12쪽
152 격납고 1 20.12.02 434 20 11쪽
151 마지막 가을비 5 20.12.01 364 23 10쪽
150 마지막 가을비 4 20.11.30 371 19 14쪽
149 마지막 가을비 3 20.11.27 367 20 16쪽
148 마지막 가을비 2 20.11.26 445 22 11쪽
147 마지막 가을비 1 20.11.25 448 2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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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분주한 여명 속으로 1 20.11.23 387 2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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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포크라테스의 백로 1 +1 20.11.20 413 2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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