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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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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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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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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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마르고 닳도록 1

DUMMY

마르고 닳도록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남자가 손바닥을 밑으로 내보이며 What? 묻는다.


‘뭐하는 겨...’


그러나 대상은 멈추지 않는다.


일렬로 가는 넷.


그중 맨 앞 사람이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보더니 발로 땅을 살살 비벼 뒷사람들을 부르고, 그러자 세 번째 사람도 발로 땅을 부비며 뭔가 재촉하는 듯하다.


쪼그려 앉은 남자가 일어서지 않자, 세 번째 남자는 “딱. 딱.” 혀를 튕기고, 쪼그린 남자가 쓰을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치고 ‘마시면 안 된다.’ 손날로 목을 친다. 못 마실 물이란 뜻 같다.


요즘 강물을 어떻게 그냥 마시나. 중국이든 한국이든 러시아든 미세먼지와 오염물질이 있고, 산성비가 내리면 더욱 더러워져 강물을 마신다는 건 불안하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푸르게 넘실거리는 바닷물을 마실 수 없듯이, 강은 이제 식수가 아니다. 정수제라도 넣고 흔들어 마셔야 한다. 전 세계에 목마르다고 강물을 편하게 마실 곳은 없다.


15m 거리를 두고 걷고 있는 넷. 맨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수통을 열어 강물에 담가 채우고 있다. 세 번째가 총열-덮개를 톡톡톡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마 하라니까.’


오른손 검지로 왼손 손목시계를 톡톡.


쪼그린 남자가 고개를 돌리지만 수통 입구에서 퐁~퐁~퐁 잠수하는 소리가 들린다.


참으로 이상하다. 첫 사람이나 세 번째 사람이나 오른손으로 What? 하고 수기도 쓴다. 오른손을 쓰려면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빼야 하는 수고를 마다하며. 왼손이 소총 몸통과 총열 이음새를 잡고 있어서 한 손으로 들 때 균형이 편해서 그런가.


그렇다. 왼손은 조준이다.

방아쇠 당기는 것보다 조준이 오래 걸린다.


드디어 세 번째가 다가가 속삭인다.

“소리 나...”

“꽉 채울게...”


월광 15%. 서로가 무시하기에 딱 알맞다. 피아가 서로 못 보기 딱 알맞다. 강물로 수통을 채우던 사람은 구부린 자세에서 고개를 돌려 앞 사람들을 본다.


이들 넷은 피아가 식별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 피아가 누군지 모른다. 가끔은 본인들도 헛갈린다는 소리다. 어느새 이 고장 말에 이 고장 방식을 취하며 산다.


동가식 서가숙(東家食西家宿)?

밥은 동쪽 본가에서 얻어먹고 잠은 서쪽 첩 집에서 잔다?

북가식에 마음은 남가숙?


퐁 퐁 퐁 소리 외에 넷이 서로 쳐다보며 정지 화면이다.


강물에 담근 손, 인민군모에 검은 얼굴 길쭉한 수염, 어색한 미소, 각도가 제대로 맞은 달빛이 남자의 눈을 스치며 침을 쏘려는 벌처럼 인광을 번쩍인다. 화가 난 건 아니다. 어느 때부터 그런 표정과 눈, 자신들만 모른다. 인간은 죽일 놈과 아군, 두 가지를 순간 판단한다. 그 판단의 기회가 상대보다 빠르지 않으면 죽을 수 있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 상황이 피아가 만난 것이라면 무성무기! 사회와 다르다면 찌르는 데 힘을 쓰지 않고 빼는 데 힘을 쓴다. 두 번 왕복을 기본으로 한다.


“딱. 딱.” 응답.


세 번째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으니까, 빨리 빨리.’ 이소룡 손짓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땅바닥에 침을 주욱 늘여 뱉는다. 잠시 길어지자 앞의 두 명이 길가 수풀로 붙어 은폐 관망. 뜨지 않은 세 명은 저 물을 안 마실 분명하다. 선두는 사방으로 고개를 꺾으며 검은 봉우리들을 확인하며 위치를 정치하고, 귀에 손바닥을 펴서 사방의 소리를 자세히 듣는다. 풀벌레 울고 강물이 휘돌며 꼬르륵꼬르륵 한산한 밤.


이렇게 조용한 밤은 드물다. 드물었다.

그래서 괴이하다. 불알이 좀 오그라든다.


두 번째가 앞을 바라보다가 선두와 눈이 맞자 손가락 둘을 든다. 그러자 선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가락 셋을 든다. 두 번째는 저 앞으로 지시하고는 손아귀로 자기 목을 쥐고, 다시 목을 놓으면서 검지와 중지를 구부려 돌려 양 눈을 지시한다.


‘저 앞부터 위험. 개인 간격 더 벌린다. 앞을 잘 봐...’


그러자 선두가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 사이를 천천히 늘린다.


선두가 강 건너편을 지시한다.

두 번째가 피식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V!


물을 뜬 사람이 합류하고, 선두는 수풀에서 나와 ‘전진한다!’ 수기. 두 번째가 돌아보며 나머지 두 명에게 첨병의 수기를 복창한다. 야간 수기는 뒷사람이 보일 정도라도 습관적으로 복창해 전달해야 한다. 아리송한 거리에서 수기 한 번을 못 봐서 큰 문제가 생긴다.


길.


넷이 가는 방향으로 왼쪽은 일련의 검은 산 그림자들, 오른쪽에는 물, 강물.


이제 지형이 바뀌려고 한다. 가는 방향 양쪽에서 커다란 산이 길로 모이고 그 중간에 물이 흐르는 셈이다. 하지만 ‘가봐야 알지.’ 지형은 가봐야 알지. 졸병이 행군하면서 가장 힘들 때가 앞에 보이는 지형을 상상하고 그리며 다가가 전혀 안 맞을 때다. 능선이 끝날 것으로 보였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 안 끝난다, 계곡이 끝날 그림자로 보였는데 다시 새 지형이 이어지며 안 끝난다. 휴식할 걸로 생각했는데 안 한다...


군인이 독도법을 배우는 건 지도가 아니다. 지도는 당연히 본다. 독도법이란 : 지형이 가까이서 보이는 것과 멀리서가 다르고, 바로 앞산이 훨씬 높은 뒷산을 가리며 높아 보이고, 방향이 180도 바뀌면 또 다른 모습 등등, 내 키와 눈높이가 환상까지 창조함을 깨닫는 것.


‘남조선보단 편하지 않냐?’

‘물어물어(정작)가 정확해졌어. 흐흐.’


등과 어깨를 펴고 나서는 선두,

다시 조용한 발걸음이 시작된다.


선두는 앞만 보는 게 아니라 땅바닥도 본다. 우마차길, 도로라고 부르기도 뭐하고 차가 지나갈 폭도 된다. 대원들은 맨땅에 바퀴 자국 같은 걸 찾는다. 비가 온 지 오래됐기에 바퀴 자국은 금방 바람에 날려버린다. 종종 정지해서 자국의 타이어 폭을 손 뼘으로 재보기도 한다.


졸졸졸 흐르다 곳곳에 굽이치는 물소리. 밑바닥에 붓으로 고무 칠한 수준의 부실한 농구화 신발. 넷은 디딜 때 발가락들을 들어 뒤꿈치부터 천천히 딛는다. 발소리는 거의 안 들린다. 다리가 긴장/집중력을 풀면 발소리가 커진다. 발만 조심해선 안 된다. 무용처럼 몸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발소리가 적다.


원래 이들은 이런 길을 걸으면 안 된다. 그래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발가벗은 것처럼 마음이 편치 않다. 위에서 시켜 어쩔 수 없이 길을 타고 있다. 길을 타기 시작한 지 20분, 빛이라고는 사시미 같은 초승달과 별이 전부. 원통형 챙 모자에 풀 꼽고 펑퍼짐한 바지에 총구를 45도 아래 거총, 걷는다.


다시 사부작사부작 땅과 발바닥 사이 먼지가 오른다...


두 번째가 귓구멍을 검지로 누른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어깨에 달린 워키토키 무전기 버튼을 두 번 길게 누르고 멀리 뒤쪽 산을 본다. 저 산 위에서 누가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똑같은 무전기가 있는 선두는 ‘따로 말할 필요 없다.’ 돌아보지 않고 왼손만 들어 공중에 빙글빙글 돌린다. 선두는 정면, 2~3번은 길 좌우 측면, 후미는 강 건너편과 뒤를 주시하며 걷는다.


처음에는 허리를 구부리고 경계 자세로 걸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걷되, 천천히 걷는다. 다소 위압적인 자세로 걷는다. 그게 더 안전하다. 누군가 날 보는 건 내 잘못이자 우연이며, 어차피 복장부터 북가식하고 있다면 구부리고 조심스러운 놈이 더 이상하다. 밤에. 조용한 밤에.


선두가 손을 높이 들더니 강 건너편을 지시하며 내린다. 저 멀리 불빛이 하나.


어둠 속에 표정이 굳는다. 서로가 했던 지난 이야기를 떠올린다.


‘전쟁이 지면 어쩌냐?’

‘만주로 도망가서 민주주의 게릴라 되지.’


‘거, 가능하겄어?’

‘와 가능 안 하노.’


‘넘어가는 게 가능하냔 게 안니라, 거긴 중국이라고.’

‘살라면 뭘 모대... 이 동무 군기 빠졌구만.’


‘중국군이 우릴 토벌해싸코. 거긴 벌판야.’

‘비트 파고 숨으면 되지 뭐.’


‘니에미 참 상상은 근사한 거여. 넘어가서 중국군에 토벌을 당하고, 겨울이면 혹한이 몰아치는 곳에서 뭐다자는 거냐.’


‘그냥 하던 농담 아이가. 뭐이 민감해!’

‘우리 땅에서 니뽄 말로 쇼부를 쳐야지.’

‘우리 상태는 이미 오링 났다. 뭘 더해.’


‘가능하다며.’

‘동무가 동무 입으로 예로 들 것은 있어.’


‘어떤 거. 쿠르드족처럼 무장 군벌이라도 이뤄?’

‘그건 서양 쪽이고.’


‘그럼 뭐.’

‘국민당군.’


‘국민당군?’


‘마오쩌뚱이 중국을 먹게 되었을 때, 국민당군이 모두 타이완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게 아냐. 병력 엄청 많았거든. 사방에 국민당군이 남아 있다가, 장개석이 섬으로 건너가자 각자도생 도피탈출을 시작했지. 그중 일부가 미얀마 태국 라오스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에 들어갔어.’


‘그래서...’


‘어떻게 됐을 거 같니. 그 지역에 체계적 군대로 된 새로운 군벌이 된 거야. 조직적 무장세력, 오랜 시간 실전을 치렀고 패주에 악이 받힌 군대. 병기는 군대식으로 제법 갖췄고. 국민당 패잔병이 거기 모여서 자리 잡기 시작했지. 지역 사람들도 처음에는 잘해주다가, 이거 위험한 놈들인걸? 그런 거여.’


‘그래서, 어쩐 거야?’


‘내치기 시작했지. 그러자 바로 공격! 그 지역 마약 조직들을 공격해서 세력을 넓히고 마약 밭도 장악하기 시작한 거야. 국민당군은 그 지역 군벌들이 대적할 상대가 아니었어. 수년 간 전쟁을 치른 국민당군은 과감한 전투로 나와바리를 만들었어. 바로 그거 때문에 골든트라이앵글 마약 조직들이 최신 병기들을 사들이기 시작한 거야. 국민당 패잔병 부대하고 어떻게 상대가 안 되니까.’


‘거석이 지금도 있어? 타이완으로 가부렀나?’


‘지금도 있어. 하지만 현지화됐을걸. 우짜노. 그 지역 여자와 결혼하고 애 낳고 정착한 거지. 국민당군에서 시작한 트라이앵글 군벌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들었어. 타이완도 거기가 우리 쪽이다, 말하기 힘들 정도로 세월도 지났고. 어느 방송에서 봤는데, 얼굴들은 거의 두 세 대가 흘러서 동남아 비슷한데 자기들 입으로 그래. 우린 국민당군 출신이다.’


‘그게 만주에서 가능이나 하냐. 말은...’


‘마 쎼끼 상상에 돈 드나?’


‘야 임마...’

‘왜 또...’


‘나라가 망하면 어떻게 해야 돼!!!’

‘.... 다 쥐기 뿔지.’


‘그때는 공비지. 인민이고 나발이고.’

‘체면이고 씨발 이고.’


‘그라~지. 빙고지, 니미.’


상상에 돈 드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아름다운 상상을 주로 한다. 애써 시간 내서 미래의 고통을 상상하지 않는다. 다 좋자고 상상하는 것 아니겠어?


선두가 손을 든다.

천천히 무릎 앉는다...

무슨 일이 있다고 꼭 이러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섯다 가는 거다.

이것이 너무나도 반복되어 지루하기까지 하다.


한 인민군모가 고개를 하늘로 꺾는다.


구불구불 이어진 산 그림자와 별빛,

넷은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

오늘은 풍경이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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