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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slaa
그림/삽화
리건
작품등록일 :
2020.11.17 09:21
최근연재일 :
2021.02.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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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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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길은 멀고 사람은 더 멀고 (2)

판타지 소설로 송나라 역사를 배우다!




DUMMY

한강은 잠에서 깨어났다. 햇볕이 반투명한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날은 벌써 밝았고 창밖에서 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술자리에서 한강은 모처럼 취했다. 노명처럼 곤드레만드레 취한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가 멍한 상태까지 마셨다. 술이 깨난 지금은 후회가 밀려왔다. 거꾸로 류중무는 오히려 요전 날 술을 마시고 속병이 났던 탓에 어젯밤은 평소와는 달리 몇 모금만 맛보고 그쳤던 것 같았다.


아마도 어젯밤 술자리에서 한강이 차를 한잔 따라주고 난 후 주남이 태도를 돌변해 친밀하게 다가왔던 탓일 것이다. 주남이 향긋한 몸을 밀착시켜 앉는 바람에 한강의 팔꿈치가 탱탱한 몸에 닿아 폭신한 감촉을 느낄 정도였다. 여인이 유혹하기 전에 스스로 홀린다더니 한강의 머리는 순식간에 흐리멍덩해졌고 정신을 못 차린 채 술을 퍼마시고 말았다.


술 권하는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졌다고 느꼈다면 옆에 서시와 초선 같은 미인이 앉았더라도 한강은 경계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남은 자기에게 호감을 가졌고 다음 날 진주로 돌아갈 것이란 얘기를 듣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한강이 비록 재지가 뛰어나다지만 여인의 마음을 읽는 건 늘 힘들었다. 가무의 절정 고수인 명기 행수를 놀리고 조소했던 것 외에 별로 좋은 인상을 남긴 것도 아닐 텐데 왜 갑자기 자기에게 호감을 나타냈을까?


방안에서 뜨거운 물로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후 재빨리 여행용 외투로 갈아입고 바깥 칸으로 나갔다. 이소육은 벌써 아침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관인께서는 아직 안 일어나셨나?”


문밖에서 노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길을 나서야 하는 데 늦잠을 자다니요!”


한강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노명을 향해 말했다.


“노 형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관인을 송별하러 오지 않았겠소.”


한강은 노명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했다. 그는 매일 밖으로 나가 이곳 저곳 시장을 돌아다니며 물건과 시세를 조사했으니 장사꾼이 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강의 느낌으로 노명이 성공할 확률은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노 형께서는 동경성에 남을 생각이십니까? 이곳은 노형께 낯선 곳이라 장사하기에 좋지가 않을 겁니다.”


노명은 웃으며 말했다.


“이 노모는 문인의 자질도 무관의 자질도 없으니 이문을 쫓는 일밖에는 할 게 없지요. 돈을 벌지 못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소이다.


“······. 노형이 경성에서 일이 잘 안 풀리거든 진주로 한번 오십시오. 진주가 궁벽한 곳이긴 해도 지금 왕 기의께서 전매 교역을 준비하고 있으니 노형의 재능이 발휘될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한강은 약속을 몇 마디 남겼다. 그 말은 당장 노명을 추천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왕소 신변에 있는 시위 중 세 명은 이미 자신이 추천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노명을 더한다면 왕소의 마음에 경계심이 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일이 시작되고 난 후라면 노명을 끼워 넣어도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노명은 감사하다고 말 한 후에 류중무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나갔고 한강은 다 식은 양고기 탕을 보자 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불길한 것!”


건물 밖 마당에서 까마귀가 깍깍거리며 우는 소리에 이어 이소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어디서 재수 없는 것들이 날아왔지!”


한강은 방 밖으로 나가 보았다. 이소육이 까마귀를 쫓아내려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이소육에게 그만두라고 말했다.


“그만 두거라. 그것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


“아니, 옥곤 자네는 까마귀를 좋아하는가?”


마당 밖에서 정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장전과 같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강은 급하게 다가가 인사하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 선생님께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옥곤에게 송별연을 해주러 왔네.”


정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우리가 만난 세월이 얼마인가. 이제 옥곤이 떠나는 데 당연히 와서 배웅해야지.”


장전은 마당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금 전 정호가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옥곤은 까마귀를 좋아하나?”


한강은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학생은 까마귀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장전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까마귀는 흉사를 알리고 참새는 희소식을 가져온다고 하지만 학생 생각에 까마귀는 충에 가깝고 참새는 아첨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까마귀는 충에 가깝고 참새는 아첨에 가깝다라······. 재밌군, 재밌어.”


장전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감히 직언을 할 수 있는 자는 충신이고 소인배들은 그저 듣기 좋은 말만 한다 이말이로군.”


그러나 정호는 한강의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강의 말은 겉으로는 세속적인 것과 다르게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세속에 영합해서 튀려고 하는 것이었다.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인정에 영합하는 것은 정도가 아닐세. 옥곤 자네 입으로 중용의 도에 대해 말하지 않았나?”


한강은 고개를 숙였다.


“학생은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장전, 정호와 한담을 나누는 동안 류중무와 노명이 같이 다가왔다. 노명은 동경에 남기로 했지만 한강과 류중무가 떠나고 나면 자신이 머물 곳을 찾아야 했다. 이소육은 짐을 다 꾸려놓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벌써 미시(13시에서 15시 사이)가 다 되었다. 정호와 장전 외에 다른 사람이 더 오지는 않았다.


왕안석과 여혜경 등은 한강의 방으로 송별 선물을 보내놓고 직접 배웅하러 오지는 않았다. 한강도 그들이 와서까지 배웅해 주기는 바라지도 않았다. 일단 일이 매우 바빠 짬을 내기가 어려울 것이기도 했고 왕안석이라는 참지정사가 오지 않더라도 변법파의 주력들이 몰려와 배웅한다고 하면 끔찍한 소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왕안석과 여혜경 쪽에서 배웅하러 오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한강이 제시한 책략이 너무나 과격해서 꺼려지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그 책략을 앞으로 쓸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여전히 내키지 않기 때문에 한강을 조금 멀리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도 한강이 바라던 바였다.


왕안석 주변에는 도와줄 인재가 너무 적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주변에 정8품과 종7품 관원만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신분이 높은 관원 중에 왕안석과 끝까지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현재 재상이 된 진승지만 해도 처음에 변법파가 막 일어날 초기에는 주요 후원자로 나서서 삼사에 조례사 설치하는 일을 주관했다. 그러나 재상의 자리에 올라 화려한 옷을 걸치게 되더니 순식간에 돌변해 변법을 반대하기 시작했다.


인재가 부족한 왕안석은 과거를 개혁하려는 마음까지 갖게 되었으니 인재라면 한 사람도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한강은 자신이 너무 말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때 마지막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회담 전반에 했던 얘기만으로도 왕안석은 자신이 진주에서 이삼 년 보내고 난 후면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중추로 불러들일 것이다. 그것은 변법파와는 일정한 선을 긋겠다는 한강의 계획에는 부합하지 않는 일이었다. 비록 지금은 왕안석이 안정되게 변법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돕고 싶은 생각에 변법파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으나 그래도 역시 외곽에서 지원하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신당과 구당 사이의 정치투쟁은 단기간에는 왕안석의 승리로 끝나겠지만 끝까지 변법파가 끝까지 승리를 이어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앙도 이십 년간 의기양양하게 지냈지만 결국 거열형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니 변법파와 너무 가깝게 지내서도 신당의 핵심 구성원으로 들어가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을 모질게 먹고 왕안석의 마음에 심지가 너무 깊다는 인상을 남기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한강은 왕안석이 조정을 당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도록 버티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일을 처리하는 사람에게 호감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왕안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그것을 토대로 왕안석의 심리를 추정했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효과는 한강의 예상보다 더 좋았다. 준비하고 있던 더 많은 단계를 보여 줄 기회조차 얻지 못했으니 말이다.


올 사람이 없으니 더 기다릴 더 필요도 없었다. 한강이 대표로 성남 역참의 역승에게 결산 서명을 한 후 일행은 성의 서쪽을 향해 길을 나섰다. 한강이 동경성을 떠나는 날이 바로 예부시 하루 전날이었다. 과거 보러 온 사람 숫자는 수천 명에 불과했는데 어쩐 일인지 성안 거리의 분위기는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한강은 말 위에 올라 평소보다 낮은 소리로 손님을 부르고 있는 시장 풍경을 바라보았다. 전생의 생각이 절로 났다.


‘고3 대입 시험 보던 날과 다르지 않은데?’


천 년 후에도 대입 시험을 치르는 3일 동안은 전국의 모든 시장 상인들마저도 수험생을 생각하며 긴장했다. 만일 정신없는 운전자가 수험장 근처에서 경적이라도 울렸다간 분노한 학부모들이 몰려와 차를 뒤집어버리고도 남을 정도니까.


과거가 이처럼 사람들에게 큰일이었어도 개봉성 안에는 과거용 전문 시험 장소인 공원(貢院)이 없었다. 예부시를 치를 때면 태상사나 국자감 혹은 무성왕 묘 등을 빌어서 시험장으로 삼는다고 했다. 한강은 그런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의외라고 생각했다. 전생에 과거 시험장이라고 닭장처럼 만들어놓은 공원을 둘러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게 아직 생기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일행은 어가를 건너가려고 말 위에서 내렸다. 어가를 지날 때는 아무도 말을 탄 채 건너갈 수 없었다. 한강은 어가를 지나가면서 남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가의 남쪽 끝 머리에 개봉성 남문인 남훈문(南薰門)이 있었고 그 근처에 국자감이 있었다. 올해 희녕 3년 경술 과거가 그곳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며칠 전 한강은 성의 남쪽에 있는 국자감을 둘러보러 갔다. 그런데 그 근처도 못 가 경비병들에게 제지당했다. 송 황실이 만든 최고 학부인 국자감은 이미 병졸들로 겹겹이 삼엄하게 둘러싸여 외부인은 출입금지였다. 한강처럼 멋모르고 다가갔다가는 금방 쫓겨났다. 경비가 삼엄하기가 어사대에 있는 감옥 못지않았다.


북송이 세워지면서 과거 제도도 점차 기틀을 잡아갔다. 관리 중에서 과거 출제관으로 선정되면 모두 시험장 안에 갇혀 과거 당일까지 살아야 했다. 시험장은 무장 병사들이 물샐 틈 없이 지켰으므로 쥐들 외에 아무도 들락거릴 수 없었다. 그런 제도를 두고 ‘쇄원’이라 불렀으며 이번 과거를 주관하게 된 왕규 등은 한 달 전에 출제관으로 결정이 나자마자 일찌감치 국자감 안에 감금되었다. 그게 곧 한 달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한 달이나 감금되어 있어야 한다니 한강은 생각만 해도 갑갑했다. 그러나 그만큼 현 조정에서 과거를 얼마나 중시하는가 하는 반증이기도 했다. 과거 시험이 지금과 같은 틀을 잡기 전 태조 때는 웃지 못할 일이 빈번했다. 장원과 차석을 구분하려고 전시에서 가장 좋은 점수를 받은 두 사람을 불러내 겉옷을 벗고 어전 앞마당에서 무예 대결을 시켰다고 했다. 그 대결은 무예를 겨루는 어전 무예 시범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했고 첫 회 과거는 문무를 겸비한 왕사종(王嗣宗)이 일등을 차지했다.


어전 무예 시범에서 서로 대결해서 장원을 먹었던 일화와 더불어 어가와 연결된 곳에 있는 문과 관련된 일화도 생각났다. 바로 예전 개봉성의 남쪽 문이었고 지금은 동경성의 범위가 훨씬 커져서 성안에 있는 성이라 내성으로 불리는 주작문과 관련된 것이었다.


주작문의 누각에는 ‘주작지문(문朱雀之門)’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태조 조광윤은 옆에 있던 신하 조보에게 그냥 간단하게 ‘주작문’이라 쓰지 뭣하러 저 지자는 붙여 놓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보가 ‘之’자는 그저 도와주는 조사일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광윤은 우습다는 듯이 ‘지’자 하나로 얼마나 도울 수 있겠는가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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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용천검과 변법파 (4) +9 21.02.11 1,428 48 15쪽
128 용천검과 변법파 (3) +7 21.02.11 1,466 42 13쪽
127 용천검과 변법파 (2) +13 21.02.10 1,604 6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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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문묘에 바친 논단 (4) +6 21.02.05 1,579 4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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