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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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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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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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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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퇴학이란 말입니까?”

“저희도 이런 통보를 할 수 밖에 없어 유감입니다.”


말만 그랬다.

선생들의 표정은 전혀 유감스러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널따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류지호와 고우찬의 부모님들이 앉아있고, 맞은편에 신포고 학생부 선생들이 마주보고 앉아있다.

부모 뒤에 류지호와 고우찬이 죄인처럼 나란히 서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모든 이들의 낯빛은 꽤나 굳어 있다.

아네모네에서 패싸움을 벌인 일행들은 현행범으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박광렬 측은 자칫하면 특수폭행으로 가중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폭행 가담자들은 합의금을 지불하며 단순폭행으로 무마 했다.

파손된 아네모네 집기 보수비용 역시 박광렬 측이 일체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처벌을 별개다.

이미 주동자 박광렬과 고우찬은 퇴학이 확정됐다.

패거리들은 1년 정학을 받았다.

고성재는 막노동판에서 금방 달려온 것처럼 추레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류민상 역시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고성재가 교감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선생님, 한번 만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놈이 부모 사랑을 못 받고 자라 좀 거친 데가 있어 그렇지 천성은 착한 놈입니다. 아직 열여덟 살입니다. 선처를 해주시면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가 단단히 이르겠습니다.”

“진작 그러시지 그러셨어요.”


건조하게 말하는 교감의 목소리에는 비아냥거림이 묻어나왔다.

류민상이 과도하게 굽실거리는 고성재가 딱해 보였는지 거드는 말을 꺼냈다.


“선생님들도 자식을 키우시지 않습니까? 부모의 마음으로 이 번 만은 너그럽게 봐주시면...”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죠. 우긴다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학교가 명문고인 건 아버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적당히 넘어가면 다른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해칠 수 있어 학교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꼭 퇴학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한 일 년 정학이면 충분히 반성하고.....”

“몇 번을 말씀 드립니까?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 만 더 선생님들께서 의견을 모아보시면....”

“아, 정말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들으세요!”


교감이 별안간 언성을 높였다.


“미성년자 주점 출입, 음주, 폭행, 기물 파손. 저 놈이 깡패새끼지 학생입니까?”


선생이라는 사람이 학생을 교화시켜 올바르게 인도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사고를 쳤다고 무조건 학교에서 쫒아낼 생각만 한다.

류민상의 눈에는 귀찮고 골치 아픈 일은 잽싸게 치워버리는 공무원의 모습이지 절대 교육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흥분한다고 일이 해결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경찰은 학교에 처벌을 위임한다고 했습니다. 한 번 만 기회를 주신다면 저와 우찬이 아버지가 책임지고 제대로 훈육하겠습니다.”


교감의 말투에 짜증이 담겼다.


“지금 학교 꼴이 얼마나 우스워졌는지 아십니까?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최상위권 명문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사건입니다.”


어차피 저들은 공립학교 교사라 때가 되면 다른 학교로 발령 받고 떠나면 그만이다.

자신의 인사고과에 영향을 미칠까 염려되어 문제 학생을 퇴학시킴으로써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 지으려는 것이다.


“선생님들 제자입니다. 보리도 밟아줘야 튼튼하게 자란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번 일로 두 녀석 다 반성하고 있고, 무엇보다 성인도 아닌 아직 여물지 않은 청소년들입니다. 열여덟 살은 충분히 실수할 수 있는 나이 아니겠습니까? 일벌백계는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선처를 내려 아이들이 이를 뼈저린 교훈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요지부동인 교감을 보며 류민상이 애원조로 말했다.


“지금 보리 이야기를 하셨지요? 논이고 밭이고 잡초가 자랍니다. 그런 잡초들이 다른 농작물들의 영양분을 다 빨아먹습니다. 우리는 잡초의 뿌리를 뽑으려는 겁니다.”


삭초제근(削草除根).

류민상은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고우찬 학생은 잡초입니다. 보리에 비유하시는 건 잘못된 겁니다. 다른 학생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테고, 이번 일을 눈감아 준다면 다른 학생들에게 잘 못 된 메시지를 줄 겁니다.”


학생부실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잡초란다.

잡초처럼 뿌리를 뽑아야 한단다.

범죄자란다.

류지호는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역겹다.

머리가 뜨겁고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꽝.


고성재가 화가 폭발해 솥뚜껑 같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당신들이 선생이야!”


고성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호통을 쳤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우찬 아버님!”

“내가 뭐가 지나쳐, 엉? 뭐 잡초? 범죄자? 그게 선생이란 작자들이 할 소리야!”

“이...익...!”


교감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말을 잇지 못하고, 고성재에게 삿대질만 해댔다.


“당신들이 뭔데 내 자식을 함부로 그런 식으로 매도해? 선생이란 감투 쓰고 있으니까 뭐 대단한 인간이라도 된 것 같아?”

“여보세요!”

“한번이라도 우리 아이를 이해해보려고 했어? 말해 봐! 사정 한 마디 들어봤어? 우리 아들이 가해자야? 경찰에서 폭행 피해자라잖아! 그런데 뭐? 잡초? 세상에 어떤 선생이 제자를 지켜주지 못할망정 기다렸다는 듯이 내쳐!”

“뭘 잘했다고 큰소리를 치십니까?”


교감도 지지 않고 반격에 나섰다.


“우리 아들이 깡패면 당신들은 뭔데? 깡패와 다를 게 뭐야? 이 깡패도 못되는 양아치 자식들아!”

“양아치? 말이면 다 인줄 알아?”


학생주임이 벌떡 일어섰다.


“말 다 했다! 왜?”


고성재가 받아치며 학생주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류민상이 말리려고 팔을 붙잡았지만, 고성재는 뿌리치고 걸어갔다.

학생주임도 지지 않고 맞섰다.


“왜 치게? 쳐 봐, 쳐 봐? 부자지간이 아주 쌍으로 철창신세 한 번 져봐.”

“너 일루와. 오늘 깽값 한 번 물어보자.”


고성재가 대뜸 학생주임의 멱살을 덥석 쥐었다.

학생주임도 마주 멱살을 잡았다.

이리 엉키고 저리 엉키며 두 사람이 바닥을 뒹굴었다.


“너 이 썅! 이 멱살 안 놔!”

“안 놓으면 어쩔 건데!”


명문 신포고등학교 개교 이례 전무후무한 학부모와 교사의 싸움이 벌어졌다.

주먹다짐까지 벌어지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볼썽사나운 광경이 연출된 것은 분명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톡톡히 망신을 당할 사건이다.

곧이어 류지호 일행은 수위와 선생들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났다.


“아우님... 지금 일터로 복귀해야 하나?”

“오늘은 공쳤습니다.”

“술 한 잔 할 텐가?”


고성재는 류민상의 계속된 권유에 못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안 그래도 교감이란 작자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던 차다.

막걸리라도 한 사발 해야 분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 ❉ ❉


류지호 부자와 고우찬 부자가 동인천의 삼치구이집에 마주 앉았다.

두 명의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차라리 혼쭐을 내시거나 볼기라도 치시지.

고우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고성재가 류민상의 빈 잔을 채워주며 대답했다.


“이 놈들이 아까부터 술맛 떨어지게.”

“아빠.”

“또 뭐가?”

“퇴학이래.”

“자식이 자꾸 엄한 데다 헛발질이네. 아버지 속이고 술집 가고 거기서 쌈질 한 건 괜찮은 거냐?”

“그런 뜻이 아니잖아.”

“퇴학은 네 잘못이 아냐. 선생이란 작자들이 자기 살려고 학생을 학교에서 내쫒은 거지. 생각해보니까 또 열 받네.”


고성재가 연거푸 소주를 들이켰다.

류민상이 빈 잔을 채워주자 고성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 작자들이 선생이라고 행세하는 학교는 때려치워. 그런 작자들한테 뭘 배우겠냐? 남들보다 좀 빨리 사회 나왔다고 쳐.”


고성재가 술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형님. 우리는 이만 일어나야겠소.”

“이거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류민상은 자신의 아들만 특혜를 받은 것 같아 씁쓸했다.

성적이 우수하며 모범생인 류지호는 보름 근신처분에 그쳤다.

류지호의 학업성적은 SKY 진학을 노려 볼만 했다.

따라서 근신 징계는 생활기록부에 표기하지 않기로 했다.


“형님이 미안해하실 게 뭐가 있겠수.”

“자식이 걸린 일이라 이기적일 수밖에 없네.”

“지호 저 놈이 혼자 싸우는 친구를 내버려 둘 수 없어 끼어들었다고 합디다. 이 쬐깐한 놈들이 건달처럼 의리 찾는 것도 웃기지 않수? 두 놈 다 퇴학당했으면 내가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었을 거요.”

“......”

“지호야.”

“예, 아저씨....”

“우찬이 이 놈 중졸이라고 막 무시하고, 안 만나고, 친구 안 할 거냐?”

“우찬이는 제 불알친구에요!”

“이 아저씨는 이놈이 지금부터 기술 배우면 사람 노릇은 못해도 먹고는 살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류지호는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넌 그냥 지금처럼 공부 열심히 해. 알겠지?”

“......”

“왜 대답을 안 해?”

“예.”


고성재가 류지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조금 힘들겠지만 너라면 잘 이겨 낼 거다.”


고성재는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럼 형님, 저하고 아들놈은 먼저 들어가 보겠수.”

“조심해서 들어가게.”


류지호는 멀어지는 고우찬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과거로 돌아와 반드시 바로잡고 싶은 일 중에 고우찬의 일도 있었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최대한 고우찬을 이끌어 주고 싶었다.

기초적인 공부부터 태권도까지.

방황하는 고우찬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살도록 안내하고 싶었다.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평생 감옥에서 썩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래를 바꾸려고 했다.

뭔가 해보기도 전에 친구가 큰 상처를 입었다.

류지호는 후회가 되었다.

괜히 태권도를 배우게 해서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는 성격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아닐까.


❉ ❉ ❉


류지호 부자가 다시 삼치구이집에 마주 앉았다.


“아들, 힘들어?”

“.......”

“거기 빈 잔 들어봐라.”


류민상이 소주병을 들어 아들에게 소주를 따라주었다.


“술은 누구한테 배웠어?”

“그냥 우리들끼리 마셨어요.”

“아빠 앞에서 한 잔 마셔봐라.”


류지호가 고개를 돌려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우리 아들~ 술 좀 하네?”


류지호가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줬다.


“됐어. 털어버려.”


류지호가 고개를 숙였다.


“아들... 우리 장남. 고개 숙이지 마.”


류민상의 마음도 무거웠다.

아들의 친구는 퇴학을 당하고, 아들은 계속해서 학교에 다닐 수가 있게 됐다.

혹여 아들놈과 친구의 사이가 틀어질까봐 일부러 그 아버지와 술자리를 가졌다.

그래서 잔소리를 안 하려고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툭하고 튀어 나왔다.


“아빠는 네가 무슨 계기로 어른스러워졌는지 모르겠다만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넌 인석아,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이야.”

“......”

“우리 집 가장이 누구지?”

“아버지요.”

“아빠하고 엄마가 미안해. 우리 새끼들 용돈도 많이 못주고, 좋은 옷, 좋은 운동화 못 사주는 못난 부모라서 미안해.”

“아녜요. 아버지.”

“아빠가 더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 우리 삼남매 대학이든 대학원이든 다 뒷바라지 해줄 거야.”


류지호는 못 견디게 부끄러웠다.


“공부만 하라고 강요하지 않을 게. 신나게 놀아도 돼. 비디오 촬영하는 걸로 시간을 낭비해도 잔소리 안하마. 다만 가족을 아프게 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구나.”

“죄송해요.”

“어깨 펴고, 아빠가 뒤에 있어. 몇 번이고 넘어져도 돼. 아빠가 다시 일으켜 줄게.”


못났든지 잘났든지.

부모는 늘 자식의 편이다.

류지호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위로를 받았다.

아버지의 말이 이렇게 힘이 된다는 것을 전에는 왜 몰랐을까?


“아버지, 고마워요.”


부자지간에 많은 대화를 나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버스마저 끊겨 부자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늦은 시간까지 부자를 기다리던 심영숙에게 부자가 나란히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새벽.


밤새 뒤척이던 심영숙은 잠든 남편을 돌아봤다.

남편은 술에 취한 채 잠들어 있다.

얼마나 속상했을까.

남편은 주량을 한참을 넘겨 술을 마신 모양이다.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심영숙이 조용히 일어나 안방을 빠져나갔다.


끼익.


류지호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애처럼 잘 자네......’


심영숙은 문가에 우두커니 서서 안타까운 눈으로 잠든 큰아들을 바라봤다.

하긴 큰아들은 이제 열여덟, 어른인척 해도 청소년이다.

그럼에도 하루가 다르게 부쩍 어른스러워지는 든든한 장남이기도 했다.

잘 이겨낼 것이라 믿을 수밖에.


‘힘내. 아들....’


당장은 아프겠지만, 털고 일어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영숙은 잠든 아들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다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 ❉ ❉


류지호는 2주 근신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유흥업소 출입과 음주 부분만 처벌 근거로 들었다.

박광렬과 오강두, 고우찬이 패싸움과 관련해 퇴학이라는 중징계를 받을 것과 비교하면 명백한 솜방망이 처벌이다.

누구도 그 부분을 지적하는 이가 없었다.

류지호는 누가 뭐라 해도 모범생이다.

게다가 박광렬 패거리의 그간의 행적들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일정부분 동정론도 일어났다.

날라리가 아니더라도 암암리에 고등학생들이 일일호프집 등을 통해 술을 마신다는 사실이 그리 비밀도 아닌 시기다.

학생들 사이에서 유흥업소 출입과 음주 부분은 걸린 놈만 바보라는 인식이 강했다.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유아무야 넘어갈 순 없었다.

미성년자가 주점에 출입한 것은 명백히 처벌 사안이니까.


“후우.”


산다는 것은 어리든 늙든 쉽지 않다.

또한 처음이든 두 번째든 마찬가지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잘할 텐데.

어린 시절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쉽지 않다.

문제가 벌어지고 난 후에 후회하는 것도 똑같다.

류지호는 근신 첫 날은 등교하지 않았다.

방안에만 틀어 박혔다.


“큰오빠 학교 안가? 학교 안 가면 선생님한테 혼날 텐데....”

“큰오빠가 아파.”

“많이 아파? 감기약 먹었어? 그럼 내가 간호 해줄 거야.”

“큰오빠가 스스로 나아 되는 병이야.”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아들을 보다 못한 심영숙이 나섰다.


“사업하기로 했다고 큰 소리 떵떵 친 아들은 어디 갔어? 세상 다 산 것처럼 풀이 죽어 있으면 아빠와 약속은 지킬 수 있겠니?”


심영숙이 잔소리를 하고 나서야 류지호가 집을 나섰다.

판사진관의 편집실에 앉아 영화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영화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가방에서 마이마이를 꺼내 이어폰을 연결했다.


- 지이익.... 뿌리를 뽑아요?”

- 우찬이 저 놈은 잡초에요 잡초! 보리에 비유하시는 건 잘못된 겁니다. 다른 학생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테고, 이번 일을 눈감아 준다면 다른 학생들에게 잘 못 된 메시지를 줄 겁니다.

- 지이익....지직.

- 우리 학교는 범죄자를 교육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하시죠.

- 그 애비에 그 자식이구만. 누구한테 배워서 그런지 알겠네.


학생부 징계위원회장에서 교감이 했던 말이 고스란히 녹음되어 있었다.

사실 이런 녹음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현재는 ‘PD수첩’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지도 않았다.

남부경찰서 형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끼리끼리 다 한통속이다.

퇴학을 당한 고우찬도 아니고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류지호가 나서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정말 교감부터 해서 관계자들을 크게 혼내주고 싶다면 파커가문 정도가 움직여야 할지 모른다.

그러긴 싫었다.

그들이 움직일 정도로 거대한 위기에 봉착한 것도, 교감과 학생부 교사들을 치워버린다고 이 나라의 교육현장이 정의로워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꾸만 잡념만 넘쳐흐른다.

류지호는 운동으로 잡생각을 떨쳐버리기로 했다.

용연태권도장에 도착해 보니, 고우찬이 퇴학당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씩씩하게 하체근력 운동을 하고 있다.

녀석은 머리에 여섯 바늘을 꿰매고 왼팔에 반깁스를 하고도 힘이 넘쳤다.

류지호는 친구의 천하태평인 성격이 조금 부러웠다.


팍! 파팍!


류지호는 고우찬이 대주는 미트를 쉴 새 없이 찼다.

미친 듯이 미트를 차고, 몸을 혹사 시켰다.


꽈당!


끝내 다리의 힘이 풀려 넘어지고 말았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사실은 턱밑까지 차오른 가쁜 숨이 더 답답했다.

벌써 몇 시간째인지 모른다.

류지호는 미친 듯이 몸을 굴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분노를 풀길이 없었다.

류지호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켰다.


털썩!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젠장! 젠장! 젠장!”


송도유원지에서 여동생들과 물놀이할 때 지었던 봄 햇살같이 활짝 웃는 얼굴.

파커 가족을 향해 보였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

방송제에서 보여주던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

2단 승단시험장에 보여줬던 건강한 웃음.

그런 것은 모두 사라지고.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표출하는 분노만 가득했다.


‘사람의 운명이란 게 바뀌지 않는 걸까?’


몸을 혹사시키다보니 정신이 갈가리 풀어헤쳐진 것 같았다.


후우우웁.


가만히 누워 호흡을 골랐다.

류지호는 현재 시대에 완전히 적응을 마쳤다.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으론 적응이 곧 순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또래들처럼 그저 주어진 시간만 따라간다는 건 과거로 돌아온 축복을 쓸모없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바꾸려고 노력했다.


‘지난 일 년 간 나는 질풍노도 청소년의 역할 놀이를 한 걸지도 몰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더 신중하게 더 어른스럽게 대처할 일도 많았다.

종종 충동적으로 행동 할 때가 있었다.

정체불명의 정체성을 보인 적도 몇 차례 있었다.

조바심.

일말의 불안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지나친 자신감.


‘이미 알고 있는 똑같은 길을 다시 걸어도 쉽지 않구나.....’


사실 잠깐 쉬었다 가도 류지호에게 남은 시간은 많았다.

길고 긴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곧 기회이며 가능성이다.

잠시 멈추더라고 정체만 하지 않으면 된다.


‘아니 정체가 되면 또 어떤가. 나는 아직 젊잖아....!’


신체 나이와 사회적 지위로는 이제 겨우 열여덟 살에 불과하다.

비루먹은 50대가 아니다.

이전 삶의 시간만큼 더 살아야 죽음의 발끝이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으로 계산해보면 언젠 끝에 도달할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긴 시간이다.

지금의 시련은 인생에 있어서 작은 손실일 뿐.

연연하다보면 큰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버릴 건 버려야 한다.

포기하는 건 아니다.

포기하는 순간 그가 과거로 돌아와서 했던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부정되어버리는 것이니까.

스스로를 돌아보며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악! 빠샤!”


다시 일어서서 다리가 풀릴 때까지 미트를 차고, 발차기를 했다.

온갖 부정적인 잡념들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헉헉!”


도장 바닥에 주저앉는 류지호의 모습을 보고 홍 관장이 혀를 찼다.


“저 놈, 왜 지랄발광이야?”

“학교에서 근신 받았어요.”

“왜?”

“그게.....”


고우찬이 반깁스한 팔을 들어 머리를 긁적거리며 홍 관장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


사정을 전해들은 홍 관장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갑게 변해갔다.

고우찬은 언젠가 홍 사범이 한 말을 떠올렸다.


“헐렁한 저 모습에 속지마라.”


홍 관장이 태권도에서 만큼은 냉정한 분이라고.

오직 따라오는 이들만 냉정하게 끌고 가는 분이라고.

그것이 스승으로서의 홍 관장이라고 했다.

홍 관장의 표정을 살피던 고우찬은 절망했다.

끝났구나.

태권도장에서도 잘리겠구나.


“.....관장님. 그게요.....”


작가의말

주말 잘 보내십시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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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Begin again. (4) +5 22.01.18 9,717 214 20쪽
55 Begin again. (3) +7 22.01.18 9,596 216 24쪽
54 Begin again. (2) +8 22.01.17 9,759 211 21쪽
53 Begin again. (1) +11 22.01.17 10,300 200 24쪽
52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6) +14 22.01.16 9,823 211 19쪽
51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5) +8 22.01.15 9,530 194 19쪽
»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4) +15 22.01.15 9,560 186 20쪽
49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3) +16 22.01.14 9,621 192 22쪽
48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2) +12 22.01.14 9,586 196 21쪽
47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1) +6 22.01.13 9,859 194 21쪽
46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3) +7 22.01.13 9,988 204 22쪽
45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2) +20 22.01.12 10,195 204 24쪽
44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1) +14 22.01.12 10,843 211 24쪽
43 Carpe diem... (4) +12 22.01.11 10,464 215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10,409 229 18쪽
41 Carpe diem... (2) +12 22.01.10 10,551 237 20쪽
40 Carpe diem... (1) +12 22.01.10 10,928 225 20쪽
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993 240 20쪽
38 연풍(戀風). +12 22.01.08 11,020 232 17쪽
37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7 22.01.08 10,820 225 22쪽
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563 235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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