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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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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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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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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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plash...!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50여명의 영화인들이 UPI(미국의 다국적 영화배급사)의 한국 직접 배급에 반대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또한 영화업협동조합은 긴급 이사회를 열어 추석에 개봉하는 <위험한 정사>의 상영 철회를 요구했다. 이 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거리로 나가 농성에 돌입할 것이라 발표했다. 서울명동 코리아극장 앞에서는 <위험한 정사> 상영에 분노한 한국 영화협회를 포함한 영화인, 시민단체 등이 UPI 직배 상영 철회라는 팻말을 들고 피켓시위를 통한 UPI 영화 안 보기 운동을 진행했다. 뱀을 극장에 풀거나 최루탄을 극장에 살포하고 스크린에 락커로 낙서를 하는 등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 한국신문 김수영 기자.


다국적 배급사 UPI(United Pictures International)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세 곳의 영화에 대한 글로벌 독점 배급권을 가지고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직배사업을 시작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42번째로 이들이 직배를 하는 국가가 되었다.


탁.


류지호가 보던 신문을 덮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고민에 휩싸였다.


‘신문에 광고하는 영화를 보면 대강 흥행할 영화는 기억이 나지만, 어떤 영화가 직배로 상영되는지 정확하지가 않단 말이야.’


류지호는 영화배급 일을 해본 적이 없다.

귀동냥으로 누가 무슨 영화를 얼마에 사와서 대박을 쳤다더라 하는 기억은 있다.

그것도 언제였는지 정확하지 않다.

영화잡지나 신문의 해외 영화소식을 체크하며 계속해서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어차피 내년부터 개봉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거의 대부분이 직배영화겠지. UPI말고도 20세기 팍스, 원더브로스와 콜롬비아스도 자기들 영화는 꽉 쥐고 한국수입업자에게 내주지 않을 거고.’


직배. 배급 대행. 우회 상영. 늑대와 함께, 동아수출. 서울극장,. 정보. 오동석.

종이에 의미 없는 단어들을 끼적거렸다.


“정보도 없고, 자금도 부족하고, 사람도 필요하고....”


UPI가 한국영화계의 강력한 반발 부딪치자, 20세기 팍스나 콜롬비아스는 2년간 한국의 대행업자를 끼고 우회상영 방식을 쓰게 된다.

류지호가 직배사를 대리해서 영화를 배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극장을 소유한 것도 아니고, 외화 수입·배급 능력을 가진 영화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류지호는 종이에 <사랑과 영혼>을 적고 동그라미를 쳤다.


“이 영화가 개봉된 게 90년 겨울이었지 아마... 대박 칠 영화를 선점하려면 2년의 시간 밖에 없구나.”


할리우드 직배사의 영화 개봉은 한국영화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친다.

때문에 한동안 서울 변두리 극장과 지방의 몇몇 극장에서 상영된다.

그러던 차에 <사랑과 영혼>이 흥행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결국 국내 메이저극장들이 할리우드 직배사에 백기를 들게 되고, 너도나도 할리우드 직배영화를 극장에 걸기 시작한다.


‘미국에 가야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


잠시 상념에 잠겨있는데, 고우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일하러 가야지!”


정신이 번쩍 든 류지호가 편집실을 나섰다.

할리우드 직배사들의 한국영화계 침공은 아직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

류지호는 당장 웨딩비디오 촬영에 집중해야 했다.

그들과 경쟁할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 ❉ ❉


가을 시즌을 바쁘게 보내는 사이, 중고등학교의 축제 시즌이 돌아왔다.


“친구들하고 아는 척 좀 해.”

“친한 놈도 없어.”


류지호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고우찬이다.

자퇴 이후 실로 오랜만에 찾은 모교(?)다.


“덩치 둘이 내 뒤를 따라다니니까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두 녀석의 위치나 태도가 마치 류지호를 경호하는 것 같았다.


“우찬아~”


김민아가 나타나고서야 고우찬이 류지호로부터 떨어졌다.


쓰담쓰담.

헤헤.


고우찬 커플을 보며 김재욱이 부러움과 질투심이 섞여 살짝 짜증이 일었다.


“미녀와 야수냐?”


류지호는 방송부연합회 동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진명여고 방송부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이다. 다들 잘 지냈지?”

“지호 왔어?”

“바빠서 못 온다고 하지 않았니?”

“요새 예식장에서 일 한다며?”

“자퇴하더니 날라리처럼 입고 다닌다? 완전 딴 사람 같아.”

“사촌 언니가 결혼식 비디오 찍을까 하던데, 어떻게 해야 돼?”


누구에게 먼저 대답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질문세례가 쏟아졌다.

진명여고 방송부 사이에서 공다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 연합MT에서의 일을 망신이라고 여겨 차마 얼굴을 비추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류지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인연이라면 계속 이어질 것이고, 아니라면 그걸로 끝이겠지.’


마지막으로 신포고 방송부 친구들과도 반갑게 해후했다.

그런 후, 두 친구들과 함께 객석에 신포고 방송제를 즐겼다.

류지호는 더 이상 신포고 방송부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방송제에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줬다.

올해부터 몇몇 고등학교 방송제에서 신포고가 했던 비디오 영상 상영을 시도했다.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했다.

뮤직비디오를 시도한 학교도 있었다.

신포고 방송제만큼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비디오 영상제에서 신포고가 앞서 나가는 건 확실했다.

인천의 방송부들, 더 나아가 전국의 고등학교 방송부들은 비디오를 통한 새로운 방식의 방송제로 선의의 경쟁을 펼치게 될 것이다.

언제까지 신포고 방송부가 고등학교 방송부 최고의 지위를 누릴 수 있을까.

누구도 알 수 없다.

경쟁은 발전을 이끌 동력이다.

방송제 수준이 아닌 더 거대하고 복잡한 세계.

복마전 같은 웨딩비디오 업계 따위는 류지호의 주관심사가 아니었다.

더 큰 판을 바라보고 있다.


‘.....충무로!’


류지호가 영화를 하는 한 언제나 할리우드 영화와 경쟁해야 한다.

전 세계 모든 영화인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당장은 할리우드 메이저 직배사들이 막대한 수익을 가져갈 것이다.

그들이 한국에서 가져가는 수익보다 더 많은 수익을 우리가 가져올 순 없을까.

이 좁은 판에서 서로의 살을 파먹을 것이 아니라, 언젠가 저들의 본거지에 깃발을 꽂아야 한다.


‘나라고 그렇게 못하리라는 법은 없지.’


친구들의 방송제를 보며 영화에 대한 갈망이 꿈틀거렸다.


쿵쾅쿵쾅.


류지호의 영화심장이 다시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 ❉ ❉


그런 가운데 대한민국은 여름보다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바로 9월 중순에 개막된 88서울 올림픽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결승전을 치룰 때면 온 국민이 TV 앞에 앉아 가슴을 졸이며 응원했다.

류지호는 대강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 사진관에서 TV를 보며 가슴을 졸였다.

고우찬은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태권도 경기에 열광했다.

박상우는 복싱경기를 보며 흥분했다.


“금메달을 따긴 했는데.....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다.”


박상우가 복싱에서 금메달을 딴 경기를 두고 몹시 못마땅해 했다.

두고두고 편파판정 논란에 휩싸이게 되는 복싱 결승전이었다.

올림픽은 올림픽대로, 가온웨딩의 업무는 업무대로.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한 류지호는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올림픽을 즐기면서 업무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올림픽은 한 달 간 이어졌다.

그 기간과 추석연휴가 겹쳤다.

류지호 가족은 어김없이 강화도 외가에서 추석 명절을 보냈다.

올림픽은 추석명절까지 집어 삼켰다.

추석연휴 내내 온 가족이 TV 앞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선수들을 응원했다.

어쨌든 88서울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 획득해 종합순위 4위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류지호가 기억하는 역사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관련된 부분의 역사는 바뀔 수밖에 없다.

신포고 방송제,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의 삶 등.

거대한 흐름에 있어서는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올림픽 선수단의 선전보다 그 사실에 류지호가 안도했다.


“곧 사라질 나라가 나란히 1,2위를 차지한 걸 보니 기분이 참 묘하네.”

“없어져? 어디가? 동독이 망하기라도 한대?”


류지호의 혼잣말을 들은 모양이다.

막내 외삼촌 심재우가 물었다.


“소련을 시작으로 동구권 공산국가들이 수년 안에 붕괴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누가? 타임지에 그렇게 나와?”

“미국에서요.”

“참전용사라는 그 회장님?”

“아드님이신 제임스씨가 편지에 그렇게 적어 보냈어요.”


류지호는 어물쩍 대답하는 것으로 대화를 피했다.

그때 류지호와 두 살 터울의 외사촌 형 심중구가 다가왔다.


“잠깐만 일어나 봐.”

“왜?”

“일어 나봐.”


심중구가 자신의 키를 류지호와 비교해 봤다.


“삼촌, 지호 키가 큰 거 같죠?”

“그러네. 중구 네 키가 몇이냐?”

“178이요.”


고우찬이나 김재욱과 함께 다니다 보니,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였다.

비슷한 체구와 비교를 해보니 확실히 성장한 것이 드러났다.

갓 군대를 제대해서 복학을 준비하고 있는 심형석이 말했다.


“거, 뉘 집 자식인지 훤칠하다.”

“여학생들 좀 울리겠는데?”


심영주가 류지호의 등판을 팡팡 두드리며 놀렸다.


“영주야, 가서 술상 차려와라.”


심재우의 말에 씩씩하게 대답한 심영주가 술상을 봐왔다.

막내 외삼촌을 중심으로 외사촌 형·누나들이 술상에 둘러앉았다.


“어디가. 일루 와서 너도 앉아.”


심영주가 류지호의 손을 붙잡고 술상으로 이끌었다.

심재우가 대뜸 류지호에게 사발을 내밀었다.


“지호도 막걸리 한 잔 해. 이젠 고등학생도 아니잖아.”

“삼촌, 지호 자퇴했다고 노는 애 취급하는 거예요?”

“사업하다보면 접대 할 일도 생길 텐데 미리미리 연습해 놔야지.”


심영주가 류지호 앞으로 전이 담긴 접시를 놓아주며 물었다.


“검정고시 점수 높게 나왔다며?”

“어머니가 그러셔?”

“말도 마. 이모는 네 이야기만 나오면, 아주 그냥!”


심영주가 생각하기 싫다는 듯 치를 떨어댔다.


하하하.


그 모습을 보며 사촌들이 웃어재꼈다.

심형석이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고, 류지호에게 물었다.


“영어회화는 할 만해?”

“그럭저럭.”

“토익이나 토플도 보려고?”

“내년에 볼까 생각 중이야.”

“유학 갈 거냐?”

“지금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조금 고민 중이야. 형은 내년에 복학하지?”

“응.”

“등록금 벌어야 하지 않아? 우리 스튜디오에서 아르바이트 해볼래?”

“난 비디오 찍을 줄도 몰라.”

“촬영보조로 따라다녀도 막노동판 잡부 일당은 벌어. 일도 덜 고되고.”

“제안은 고마운데.... 됐다.”

“.....?”

“곧 추수철이기도 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할아버지하고 아버지 하시는 농사일이나 도울란다.”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 받아야지 뭐.”


류지호가 심영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나는 취업 했어?”

“아직.”

“전문대 졸업반은 지금쯤 취업 나가지 않나?”

“몇 군데 이력서 내고 기다리는 중이야.”

“우리 스튜디오로 올래?”

“......?”

“세무회계 전공했지?”

“나보고 경리보라고?”


심재우가 웃으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영주야, 지호가 믿을 사람이 필요한가보다. 너한테 전대 맡기고 싶은가봐.”

“오오. 날 믿는 다는 말?”

“가족이잖아.”

“구멍가게 아니었어? 직원 월급 줄 수나 있냐?”

“내년에는 구멍가게보다 조금 커질 것 같아. 동네 수퍼 정도?”


심재우가 은근히 류지호의 편을 들었다.


“지호 사업 도와주다가 시집가면 되겠네.”


심형석이 여동생을 놀렸다.


“영주는 남자 손 한 번 못 잡아 봤을걸요.”


류지호까지 농담을 던졌다.


“연하도 상관없어? 우리 촬영기사들 소개시켜 줄까?”

“얼마 줄 건데?”

“...외삼촌?”

“나도 스카우트 하게?”

“요새 대기업 여사원 초봉이 어떻게 되죠?”


심재우는 대유자동차 부평공장에 다니고 있다.

생산직이 아니다.

명색이 대학졸업자였기 때문에 생산관리부서에서 사무직으로 일을 하고 있다.


“회사 마다 다르지. 우리 회사는 대졸 여사원 초봉이 40만원 조금 넘나.... 수습 3개월 동안은 70% 나가고 상여금이 150인가 200%인가 할 거야. 고졸은 30만원인가 35만원인가 할거고.”

“누나, 대졸 초봉에 맞춰줄게.”

“대기업 수준에 맞춰준다고?”

“월 45에 수습기간 없고, 보너스는 구정하고 추석 두 번에 200% 보장하고, 내년에 10인 이상 사업장으로 직원 늘어나면 직장의보, 연금 다 들어주고.”

“진짜?”

“대신 경리일만 해선 안 돼. 고객 상담도 같이 봐줘야 할 거야.”

“직원 뽑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되냐?”


심재우와 심형석도 관심을 보였다.


“올해는 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했는데, 내년에는 제대로 체계를 잡으려고. 어차피 경리직원이 필요하기도 했고.”

“요새 경기가 좋다고 해도.... 안 망할 자신 있어?”

“정 못 믿겠거든 추석 지나고 주안으로 한 번 나와. 누나가 직접 확인하면 되잖아.”


심영주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쌓였다.

이후로 심재우와 심형석의 호기심을 풀어주느라 류지호는 꽤 오래 술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심영숙이 중간에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밤새 질문공세에 시달릴 뻔 했다.

대한민국은 88올림픽을 전후로 해서 내수가 급신장한다.

기본적으로 3저 호황의 영향이 컸다.

또한 국내적으로 작년 6월 항쟁 이후에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과 올해 최저임금법 제정으로 임금이 크게 높아진 영향도 무시하지 못한다.

3저 호황으로 이른바 마이카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에 따라 레저산업이 급신장하는 등 이전과는 생활환경이 많이 변화한다.

소득수준도 이전보다 꽤나 좋아진다.

당연히 소비가 증가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웨딩비디오의 전망은 매우 밝다고 할 수 있다.


❉ ❉ ❉


인천실내체육관에서 인천지역협회 주최 태권도 대회가 한창이다.

오랜만에 사인방이 결혼식장이 아닌 곳에 와 있다.

고우찬을 응원하기 위해서다.


와아아-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경량급 경기에서 멋진 KO 경기 나왔다.

사인방이 기계적으로 박수를 쳤다.

그들 옆으로 김민아와 그녀의 친구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곧 고우찬이 출전할 예정이다.

누구하나 긴장한 기색이 없다.

단 여자친구인 김민아만 제외하고.

황재정이 통닭의 날개를 뜯으며 류지호에게 물었다.


“우찬이가 선수급이야?”

“애송이지. 경험 쌓게 해주려고 출전시킨 거라더라.”

“설마 첫판부터 깨지지 않겠지? 완타치 쪼개는 거랑 시합은 다르잖아.”

“우찬이가 피지컬이 좋잖아. 맥없이 얻어터지진 않을 걸.”

“너하고 우찬이하고 붙으면 누가 이겨?”

“체급이 달라.”

“곧 죽어도 지가 깨진다고는 안 하네?”

“우찬이가 이겨, 됐냐?”

“힘내. 지호야.”


김준우가 닭다리를 내밀며 격려했다.

류지호가 손을 들어 사양하고 말을 이었다.


“대회에서 메달 몇 개만 따면 대학입학도 영 불가능한 게 아닌데. 태권도를 너무 늦게 시작했어.”


황재정이 닭뼈를 쪽쪽 빨아먹으며 입을 열었다.


“우찬이도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올해는 88올림픽 때문에 전국체전이 열리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이런 대회에서도 입상하면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


올해는 88올림픽이 개최되는 영향으로 소년체전, 전국체전이 열리지 못했다.

대신 전국에서 벌어지는 개별 대회들의 성적을 종합해 선수들의 순위를 정했다.

학생 선수들에게 중요한 교육감기 태권도대회는 당연히 학교팀이 참가한다.

고우찬은 출전할 수가 없다.

따라서 각 지역협회 주최 대회에 출전할 수밖에 없다.


“우찬이도 많은 걸 경험해 보면 좋겠지.”

“후회도 하면서 계속 도전하고.”

“불가능 따위 생각하지 말고.”

“부딪쳐서 깨지는 걸 두려워 말고.”


류지호와 황재정의 죽이 척척 맞았다.


벌떡.


김준우가 일어서서 손가락으로 시합장을 가리켰다.


“저기! 우찬이 나온다!”


80kg 이상의 헤비급에 출전하는 고등부 선수는 20명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두 번의 시합에서 이기면 결승진출이다.

고우찬은 무난하게 결승에 올랐다.


“우찬아, 파이팅!”

“KO로 끝내버려!”

“밟아 버려!”


고우찬이 친구들의 응원을 들으며 성큼성큼 시합장으로 들어섰다.


“시작!”


심판의 구령에 따라 시합이 시작되었다.


팡팡.


고우찬은 자신의 호구를 손바닥으로 힘차게 두드리고 상대에게 접근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발차기 사정권에 들어갔다.


슉!


상대가 기습적으로 돌려차기를 날렸다.


움찔.


슬쩍 피하며 반격을 가하려던 고우찬이다.

헌데 여의치 않아 사이드 스탭을 밟았다.

저돌적인 고우찬과 치고 빠지는 스타일의 상대.

고우찬의 시합은 언제나 구도가 똑같다.


“멧돼지처럼 돌진만 할 줄 알았더니 피하기도 하네.”


황재정의 감상처럼 예전의 고우찬이 아니다.

여전히 유연성은 떨어져 보였지만, 태권도 스탭을 뛰고 있다.

무모하게 상대에게 뛰어들지도 않았다.

세계선수권이나 지역대표급 선수들이 겨루는 시합이 아니다.

서로 열심히 뛰고는 있지만,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

2회전 동안 상대가 차곡차곡 포인트를 쌓았다.

상대의 기량이 고우찬보다 앞선다는 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상황.

마지막 3회전.


“시작!”


상대는 무릎을 이용해 가볍게 스탭을 뛰었다.

마치 약을 올리는 것만 같았다.

고우찬은 흔들리지 않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잔뜩 웅크린 맹수처럼 가만히 서있다.

스탭을 뛰던 상대가 별안간 고우찬에게 달려들며 돌려차기를 날렸지만.


퍼억!


고우찬의 번개 같은 뒤후리기가 상대의 안면을 강타했다.


“......!”


고개가 옆으로 젖혀질 정도의 충격.

상대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썩은 고목나무처럼 시합장 바닥에 고개를 처박을 뿐.


벌떡!


류지호와 친구들이 반사적으로 관람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가 쓰러진 거야?”

“우찬이가 크게 한 방 먹인 거 맞지?”


잔뜩 흥분한 친구들이 류지호에게 물었다.

대답 없이 류지호가 주먹 쥔 양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고우차안!”


카운트를 세던 심판이 쓰러진 선수를 일으켜 세워 헤드기어를 벗겼다.

눈동자가 풀려있다.

시합 재개가 불가능한 상황.

명백히 고우찬의 승리다.

의도했는지, 얻어 걸린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역전의 한방이 터졌다.


“아우, 씨발.... 소름 돋아.”


온몸에 전율이 짜르르 흐르는 것만 같았다.

분명히 2회전까지 자신이 열세였다.

하지만 끝내 역전을 이뤄냈다.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다.


‘우찬아... 잘했다. 분명히 쉽지 않은 시합이었어. 그렇지만 시합도 인생도 끝날 때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사인방 가운데 가장 뒤쳐져 있던 고우찬이다.

그렇지만 자신만의 걸음을 뚜벅뚜벅 걷고 있다.

마음껏 기쁨을 분출하는 고우찬을 지켜보던 황재정이 류지호에게 물었다.


“아쉽지 않냐?“

“뭐가?”

“태권도 시합 못 나간 거.”

“내년에는 나도 나가보려고.”

“그럴 수 있을까?”


황재정이 보기에 회의적이다.

가온웨딩은 매주 4곳의 예식장을 돌며 촬영을 하고 있다.

게다가 류지호는 편집까지 책임졌다.

영업도 하고, 상담도 하고, 회계까지 챙겼다.

하재근과 팀을 이뤘던 한수호는 학력고사에 집중해야 한다.

류지호가 그의 촬영까지 부담을 져야 했다.

비록 예약이 넘쳐나는 상황은 아니라지만, 두 사람이 4곳을 책임지는 건 확실히 무리다.

아마 올해와 마찬가지로 내년에도 류지호는 태권도시합 준비를 할 여력이 없을 것 같았다.


“내년에 나하고 준우는 입시 공부해야 하잖아.”

“수호형하고 재호형이 재수만 안 하면 합류할거고, 경리 겸 상담직원도 한 명 뽑으려고.”

“그건 생각 잘 했다. 꼭 필요한 사람은 뽑자. 근데 믿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 둔 사람이 있어.”


사인방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실내체육관을 빠져나왔다.

나중에 합류한 고우찬이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내가 1등이다!”

“전국대회도 아니고 겨우 인천에서 1등한 주제에....”

“흥! 재정이 넌 3등. 난 1등. 까불지 마.”

“그래, 니 똥 굵다.”


사인방은 우쭐대는 고우찬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맘껏 드러냈다.

시벌로마(施罰勞馬).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채찍질을 한다는 뜻을 가진 신조어다.

고우찬에게 시벌로마가 필요했다.

그의 성격 상 가혹하게 다루어야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하니까.

어떤 이들에겐 당근보다 때론 채찍이 더 유용할 때도 있는 법이다.


작가의말

행복한 저녁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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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Whiplash...! (1) +9 22.01.21 9,712 208 27쪽
60 말할 수 없는 비밀. +12 22.01.20 9,707 217 21쪽
59 이런 날도 오는구나... (3) +3 22.01.20 9,629 206 21쪽
58 이런 날도 오는구나... (2) +4 22.01.19 9,736 201 26쪽
57 이런 날도 오는구나... (1) +4 22.01.19 10,042 203 21쪽
56 Begin again. (4) +5 22.01.18 9,717 214 20쪽
55 Begin again. (3) +7 22.01.18 9,596 216 24쪽
54 Begin again. (2) +8 22.01.17 9,759 211 21쪽
53 Begin again. (1) +11 22.01.17 10,300 200 24쪽
52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6) +14 22.01.16 9,823 211 19쪽
51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5) +8 22.01.15 9,530 194 19쪽
50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4) +15 22.01.15 9,559 186 20쪽
49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3) +16 22.01.14 9,621 192 22쪽
48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2) +12 22.01.14 9,586 196 21쪽
47 절망 없이는 희망도 없다! (1) +6 22.01.13 9,859 194 21쪽
46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3) +7 22.01.13 9,988 204 22쪽
45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2) +20 22.01.12 10,195 204 24쪽
44 사업으로 성공할 자신 있어요! (1) +14 22.01.12 10,843 211 24쪽
43 Carpe diem... (4) +12 22.01.11 10,464 215 19쪽
42 Carpe diem... (3) +14 22.01.11 10,409 229 18쪽
41 Carpe diem... (2) +12 22.01.10 10,551 237 20쪽
40 Carpe diem... (1) +12 22.01.10 10,928 225 20쪽
39 얘는 혼자 어디 딴 세상이라도 살다 왔나? +8 22.01.09 10,993 240 20쪽
38 연풍(戀風). +12 22.01.08 11,020 232 17쪽
37 영화밥 먹고 살 팔자... (6) +7 22.01.08 10,820 225 22쪽
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563 235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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