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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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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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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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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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gin again.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자퇴를 한 후, 빠르게 시간이 흘러 4월을 앞두고 있다.

류지호는 하루의 시간을 좀 더 알차게 쓸 수 있게 되었다.

태권도 수련 시간을 늘릴 수 있었고, 영어회화 학원도 등록했다.

단편영화 시나리오도 틈날 때마다 연습장에 메모했다.

가끔 목수인 고성재를 따라 막노동판에 나가는 것이 신문배달을 하는 것보다 수입이 좋았다.

신문배달은 한 달 동안 200부를 돌려야 10만원을 받았다.

그것도 처음 시작할 때보다 인상된 금액이다.

그 마저도 고우찬과 절반으로 나눠야 했다.

반면에 막노동 잡부는 한 달에 네 번만 일해도 그 돈을 번다.

잡부 일당으로 2만원을 받을 때도 있고, 2만 5천원을 주는 현장도 있다.

88올림픽으로 건설붐이 일어나면서 전체적으로 노임이 오른 영향이 컸다.


“검정고시 본다고 하지 않았어?”

“8월로 미뤘어.”

“너무 급박해서?”

“우찬이가 아직 준비가 안 되기도 했고.”

“네가 이래저래 고생이 많아.....”


김준우가 안쓰럽다는 듯 말을 흐렸다.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효정의 도움을 받아 웨딩비디오 사업자 등록과 회사 설립을 위한 모든 절차를 끝냈다.

미성년자가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친권자인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했다.


“미국의 윌리엄 어르신께서 전폭적인 지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신효정의 말에 심영숙은 하는 수 없이 인감날인을 해주었다.


“개인사업자는 설립 시 비용이 크게 들지 않아요. 또 자본금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소득 또한 개인사업자일 경우 법인과 달리 대표 개인의 소득으로 귀속돼요. 중요한 건 법인이 되면 연금과 의료보험 같은 것도 책임져야 한다는 거예요. 정확하게 매출의 규모를 예측할 수 없는 현재는 자영업으로 시작하는 게 맞아요.”

“알고 있어요.”

“개인 사업자로 창업 하고, 규모가 커지고 자금조달이 필요할 때 법인으로 전환하는 걸 추천하겠어요. 그때 친구들에게 지분을 나눠주면 됩니다.”


신효정의 조언을 친구들이 모두 동의했다.

채연지가 챙겨준 과일소주 로열티와 그 간 조금씩 모아놓은 돈 등을 합쳐 100만원을 은행에 자본금으로 넣었다.

류민상은 박광렬 측으로부터 받은 합의금의 일부를 운영비로 쓰라고 내놓았다.

받을 수 없었다.

당장 그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황재정은 공무원인 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신효정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며 꼼꼼하게 진행 상황을 챙겼다.

은근히 그런 과정을 즐기는 것 같아 친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변호사 아줌마가 다 알아서 했어.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어. 아버지한테 여쭤보니까 그렇게 하는 거라더라. 한번 볼래?”


황재정이 사업자등록 서류를 꺼내 건넸다.

류지호는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신변호사 아줌마가 네가 원하는 업종도 다 넣었어.”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자꾸 아줌마라고 하지 마.”

“우리끼리 있는데 뭐 어때?”

“암튼, 관련 법규와 업종이 없다고 하더니, 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야.”


류지호는 사진촬영과 영상제작유통 외에 방송제작업종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사인방의 스튜디오는 웨딩촬영 뿐만 아니라 음반영상물 기획·제작·공급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우찬아, 간판은 어떻게 됐어?”

“네가 준 디자인 아빠한테 보여주고, 같이 간판집 가서 맡겼어.”

“촬영조끼는 양키시장에 주문했어?”

“등판에 오바로크 멋지게 박아달라고 내가 특별히 얘기했어.”

“잘 했어. 수고했다. 우찬아.”


모두가 폼 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직원이라고 해봐야 달랑 고등학생 네 명.

누군가 잡무를 해야 했다.

게다가 류지호를 제외하고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직원은 고우찬이 유일했다.

총무는 황재정이 보기로 했다.

김준우는 박상우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배우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고우찬은 이런저런 잡다한 일을 할 수밖에.

어설픈 고우찬의 일처리는 고성재가 뒤에서 돌봐주고 있다.

류지호가 짝! 박수를 한 번 치고 친구들의 시선을 모았다.


“좋아. 3월과 4월은 공쳤지만, 다음 달이 결혼의 계절인 5월이야. 일단 일가친척, 지인들부터 공략해보자. 재정이하고 준우는 중간고사 공부 소홀히 하지 말고.”


황재정과 김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우는 잠시 있어봐.”


류지호가 편집실에서 수십 권의 잡지를 품에 안고 나왔다.


탁.


류지호가 잡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준우는 이거 가져가서 틈날 때 마다 참고해.”


김준우가 잡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표지에는 ‘BRIDE(新新郞)’라는 한자와 영어가 섞인 글자가 박혀있다.

대만에서 계간(季刊)으로 발행되는 웨딩잡지다.

그 밖에도 일본의 ‘MISSWEDDING‘, 미국의 ‘BRIDES’ 같은 잡지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작년부터 웨딩전문 잡지 ‘더 웨딩‘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걔네들보다 웨딩사진은 한참 늦어. 그러니까 이미 트렌드가 지나갔다고 무시하지 말고, 꼼꼼히 보고 배워. 특히 야외보다 스튜디오 연출사진들을 잘 배워둬.”


김준우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잡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황재정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잡지들을 하나하나 들췄다.


“재정이 너는 왜?”

“어, 빨간책 숨겨놨나 해서.”

“......!”

“지호야, 나도 가져가서 봐도 되냐?”

“빨간 책 없어!”


류지호가 화를 내거나말거나 미국잡지 몇 권을 챙기는 황재정이다.

친구들이 그런 황재정을 묘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지호처럼 영어 공부하려고 하는 거야!”


황재정이 버럭 소리쳤다.


“누가 뭐래?”


고우찬이 친구들의 분위기를 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제 회의 다 끝났으니까 밥 먹자!”

“으이구~ 이 돼지! 회사도 출범했는데 이제부터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황재정이 면박을 줬다.

고우찬이 콧방귀를 뀌고는 중국집 메뉴판을 찾으러 갔다.

김준우가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류지호의 얼굴을 보고 농담을 던졌다.


“제법 노가다 태가 나는 것 같네.”

“약 올리나?”

“일은 할 만해?”

“빡세지. 괜히 노가다일까.”

“술 마실래?”

“노가다 해서 번 돈으로 술 얻어먹고 싶어?”


류지호가 막노동판에 나가는 것을 부모님은 알고 있는 눈치다.

‘하라’ ‘하지마라’ 잔소리하면 아들이 더욱 마음을 다잡지 못할까 매우 조심스러워 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을 뿐.

부모님들은 류지호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준우가 사는 거야?”

“말도 마. 아씨~ 아직 월급도 안 받았는데, 용돈은 벌어서 쓰래.”


아버지들에게는 허락을 받아냈지만, 어머니들은 여전히 탐탁치 않아했다.

김준우의 엄마 조성자가 특히 심했다.

조성자는 중간고사 성적을 보고 판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미안해.”

“뭐가?”

“난 배신자야.”

“무슨 배신?”

“엄마가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나만 하래.”

“그건 엄마 입장에서 당연한 거야. 섭섭한 건 있지만 그건 엄마니까, 엄마에게는 너만 들어오니까. 지호하고 우찬이는 남이잖아.”

“아냐! 엄마한테 난 빠졌다고 거짓말 했어. 엄마는 그렇게 알고 있어.”

“진작 말을 하지 뭣 때문에 그렇게 뜸을 들인 거야. 이 미련한 놈아!”

“하여튼 준우는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가? 가끔 보면 계집애 같아. 친구가 싸우는데 의리 없이 같이 다구리 놓을 생각은 안하고 뭐 말려?”


류지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가 조폭이냐? 의리랑 우정은 다르지 않을까?”


류지호의 말에 친구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친할 친(親), 옛 구(舊). 오래두고 가깝게 사귄 벗. 친구가 좋은 게 뭔 줄 아나? 바보 같은 짓을 해도 괜찮다는 기다... 친구야~”


류지호가 짐짓 10여년 후 유행할 사투리 영화 대사를 흉내 냈다.


“괜찮다. 친구끼리 미안한 거 없다. 우리 친구 아이가...”

“뭐래? 이 븅신이~”

“중간고사 시작하면 다시 합숙할거야. 미리 어머니께 말씀 드려.”

“너희들은 시험 안 보잖아?”

“검정고시 공부.”

“근데 나도 붙을 수 있긴 해?”


고우찬이 중국집 메뉴판을 들추며 물었다.


“당연하지. 60점만 넘으면 돼. 전 과목 공부해서 시험 보는 거 아니야. 과목 수도 적어. 내가 도와줄게. 지난번에 내가 암기노트 만들어 준 거 외운 것처럼 딱 60점만 넘도록 해보자.”

“수학은 내가 도와줄게.”


황재정이 나섰다.


“사회과목하고 예체능은 내가 담당.”


김준우도 돕겠다고 나섰다.


“지호 저 새끼가 공부시키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니들은 좀 참어.“


고우찬이 진저리를 쳤다.

중국집 배달원이 각종 음식을 테이블 위에 차려놓고 떠났다.

김준우가 조심스럽게 고우찬에게 물었다.


“욱하는 게 아버님 닮았나봐?”

“나도 그날 처음 봤어. 원래 우리 아빠는 맨 정신에는 말도 잘 안하거든. 술 취해야 주사를 피우는데 말이야.”


고우찬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황재정이 은근히 목소리를 낮췄다.


“그 이야기 들었냐?”

“무슨 이야기?”

“교감 있잖아. 평교사로 강등 돼 어디 섬으로 발령 받았대.”

“잘린 게 아니고?”

“눈 가리고 아웅 아니겠냐.”


사인방이 류지호를 돌아봤다.

류지호는 관심 없다는 투로 조용히 음식을 먹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양아치 똥개 그 새끼 학교에서 치웠잖아. 학교가 좀 조용해지지 않았어?”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우찬이야 등빨도 있고, 쌈질 좀 했다 치고, 지호 너도 잘 싸우더라. 다시 봤어.”

“쌍코피 터졌어, 저놈.”


고우찬이 슬그머니 류지호를 놀렸다.

친구들이 큭큭 웃었다.


“찰리 채플린이 그랬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가까이서 보면 슬프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우스꽝스럽다는 거야.”

“학교 잘린 게 웃기냐?”

“나중에 지나고 보면 그건 그것대로 추억이란 거야, 인마!“

“우찬이 관 뚜껑에 아주 못질을 해라.”


하하하.


사인방이 일제히 웃어재꼈다.


“지호야...”

“왜?”

“네가 보는 명언집 나 좀 빌려줘.”

“뭔 개소리야?”

“그런 멋진 말은 원래 문예부인 내가 해야 하는 거야.”

“내가 정신연령이 오십이다. 네 까짓 고삐리가 무슨 수로 따라 올래?”

“지랄하고 앉아있다.”

“앞으로는 나만 믿고 따라와. 누구보다도 더 파란만장하게 살게 해줄게. 절대로 한 맺힐 일 없게 말이야.”

“그래. 알았다. 절대로 한 맺힐 일 없게 해줘.”

“풍운아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해주라.”

“당연하지.”


과거의 굴레를 벗어버린 류지호는 마음과 몸이 모두 편했다.

또한 세상이 제아무리 혼탁하더라도,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말미암은 잘못된 결과에 스스로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 순리다.

교감과 박광렬 패거리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었다.

꼭 류지호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 ❉ ❉


끼이익 -


판사진관 앞에 트럭이 한 대 정차했다.

고성재가 조수석에서 내려 사진관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류지호와 박상우를 데리고 나왔다.

고성재가 트럭의 화물칸으로 뛰어 올라가 천을 치웠다.

한글과 영어가 섞인 세련된 간판이 드러났다.


판 & 가온 웨딩 스튜디오

PAN & GAON

Wedding Studios


옥외광고물등관리법시행령에 따라 외국문자로 표시할 경우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한글과 병기하여야 한다.

때문에 한글 상호는 크게 하고 영어 표기는 작게 디자인했다.

황재정이 ‘세상의 중심이 되리라’는 의미에서 가운데의 옛말 ‘가온’이란 업체명을 추천했는데, 사인방은 이 야망이 느껴지는 단어에 즉각 찬성을 표했다.

옥외대형 간판 외에 입간판에는 ‘결혼식 비디오 촬영’ 이라는 한글 문구를 넣어 혼란을 방지했다.

판은 기존의 박상우의 사진관 상호고, 가온은 사인방의 비디오촬영 업체명이다.

두 업체가 동업은 아니다.

일종의 협력업체 관계로 정리했다.


‘아... 좋네.’


류지호는 건물 벽에 고정되는 간판을 바라보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고성재가 말없이 다가와 그런 류지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류지호는 업자들이 멋들어진 간판을 건물에 단단히 고정하고 떠날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류지호가 마지막까지 남아 간판 고정을 확인한 고성재에게 감사를 표했다.


“일부러 시간 내서 와주셔서 감사해요.”

“이 아저씨가 도울 일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말해.”

“예.”

“우리 모자란 우찬이 잘 부탁한다.”

“걱정 마세요.”


고성재까지 사진관을 떠나고 나서야 류지호는 사진관으로 들어갔다.


“미친개가 퇴임했단다.”

“섬으로 발령 났다고 하더니, 가기 싫어서 그냥 관뒀나 봐요?”

“그 정도가 아냐.”

“....?”

“파면이래.”


파면은 공무원 징계 중 가장 무거운 처벌이다.

해임 처분까지는 연금과 수당을 모두 받을 수 있지만, 파면 처분을 받게 되면 연금과 퇴직수당을 50%만 받을 수 있다.


“자업자득이네요. 사필귀정이려나.....?”


신포고 교감은 학부형들로부터 수년 간 200만 원 상당의 현금 및 선물을 받은 혐의(뇌물수수)와 대학입학 부정입학 알선 등 업무상 방해 및 배임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을 예정이다.


“동문회에서 나오는 얘기로는 최소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 떨어질 거래.”

“청탁이 없었다고 하면 무죄가 나올 걸요.”


촌지를 받은 것으로 교사가 징역형을 받았다는 기억은 없다.

이 당시에는 유야무야 넘어갈 일이기도 하고.

그런데 캐서린 파커가 이 문제에 끼어들면서 일이 묘하게 돌아갔다.

그 사연은 이랬다.

신효정이 뉴욕의 캐서린으로부터 모종의 부탁을 빙자한 지시를 전달받았다.

신효정은 자신의 인맥과 캐서린의 본가인 그레이엄 가문의 영향력을 동원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교감에게 형사법상 뇌물수수와 업무방해 혐의가 적용되어 기소된 것.


“비디오로 찍힌 게 있어서 빼도 박도 못한다더라.”

“때에 따라서는 증인석이 서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네가 왜?”

“<추적24시>에 나온 비디오가 촬영 될 때 저도 교무실에 있었거든요.”

“하여간 미친개 그 인간은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구나.”


류지호가 촬영한 몰래카메라 테이프가 증거로 인정될지 알 순 없다.

어쨌든 경찰이 신포고 방송부 캐비닛을 압수수색해서 원본 테이프를 가져갔다.

결론적으로 류지호와 방송부 누구도 증인석에 설 필요가 없다.

교감에게 청탁성 뇌물을 주었다가 대학입학에 실패한 학부형들이 관련해서 피해를 호소했기 때문이다.

결국 교감은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게 되고, 또한 파면이란 중징계를 받게 됨으로써 연금과 퇴직금에서도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안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던 박광렬의 부친은 모든 업장을 정리한 후, 가족과 함께 인천을 떠나게 된다.

이후로 다시는 인천에 발을 딛지 못하게 된다.

신효정이 인맥을 동원해 압박한 것도 있지만, 인천 지역의 토착 폭력조직 한곳에서 은연중에 영업방해를 했기 때문이다.


“앞으론 신포고 선생들도 몸 좀 사리겠지?”

“안 그럴걸요?”

“미친개가 징역을 살지도 모르는데?”

“촌지를 빙자한 뇌물은 조선시대 훨씬 이전에도 있었어요. 안 없어져요. 영원히.”


학교 내 부조리를 교육청에 신고하는 짓은 바보 같은 짓이다.

교육계도 그 나물에 그 밥일 수밖에 없다.

가령 교육청의 장학사급 이상의 고위직 대부분이 교사 출신인데다가, 따지고 보면 인천지역의 현직 교사부터 고위직까지 사범대 선후배, 전 직장(학교)동료, 동향, 혈연 등 각종 연줄로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서로서로 적당히 밀어주고 끌어주고 무마해주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교육청에 신고한 학생과 학부형이 피해를 보지 않으면 다행이랄까.

단 피해를 입은 학생의 부모가 상류층이나 부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류층이면 학교와 교사에 외압을 행사하면 되고, 부자라면 소송을 통해 학교와 교사를 괴롭혀줄 수가 있다.

물론 그런 가정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불이익을 받을 상황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지만.


“대학입시 제도가 바뀌던지 해야지. 쯧.”


박상우의 혀 차는 소리를 뒤로 하고 류지호가 편집실로 들어갔다.

류지호가 쏘아 올린 작은 불꽃이 누군가의 초가삼간을 홀랑 태워버린 격이다.

분명 산천초목을 태워버릴 정도까지는 아니다.

다만 쥐뿔도 없는 열일 곱 고등학생이 한 일 치고는 꽤나 파장이 컸다.

비록 혼자의 힘으로 해치운 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 ✻ ✻


하하하.


윌리엄이 한국에서 보내온 류지호의 편지를 보며 대소를 터트렸다.

반면에 신효정은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녀는 류지호의 사정을 듣은 윌리엄이 불같이 화를 낼 줄 예상했다.

때문에 바짝 긴장했다.

그런데 윌리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보였다.

서재에 함께 있는 제임스와 캐서린 부부도 마찬가지다.


“미스 신이 왜 긴장하는지 모르겠군.”


윌리엄이 물음에 신효정이 여전히 긴장한 채 대답했다.


“지호에게 경호원을 붙여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임스가 신효정에게 물었다.


“한국은 치안이 비교적 안정이 된 나라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습니까?”

“이런 경우는 치안하고 상관없는 사안입니다.”


윌리엄이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 학교 그만 둔 것이 뭐가 대수라고. 정 뭐하면 미국으로 불러들이면 돼.”


제임스와 캐서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파커 가족의 반응을 확인한 신효정이 안도했다.

다시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갔다.

캐서린이 두 남자에게 류지호의 위치를 상기시켰다.


“지호가 십대라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


두 남자는 새삼 류지호의 나이를 떠올렸다.


“그렇지. 녀석은 십대였지.”

“질풍노도의 시기였어.”


류지호가 아무리 어른처럼 굴고,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매우 구체적인 미래를 구상하고, 신중하다고 해도 이제 겨우 17살이 되었을 뿐이다.

어른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엿한 한 명의 성인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류지호의 행동과 사고방식이 남다르다고 해도 청소년이란 사실과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샌님인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네.”


제임스가 실소하며 말했다.

그러자 캐서린이 정색하는 얼굴로 남편을 흘겨봤다.


“폭력적인 건 좋지 않아. 감정에 휘둘린다는 거잖아.”


윌리엄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열정적이란 뜻도 되지. 어린 갱들과 싸움을 벌인 것도, 벌써 돈을 벌기 시작한 것도 대견한 일이야.”


열정은 그냥 좋아서 열심히 하는 것과 어떤 명분이나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불사를 정도로 달려드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윌리엄이 보기에 류지호는 두 경우 모두에 해당됐다.


“앞일도 정확하게 내다보고 말이죠.”


제임스의 말에 캐서린이 단박에 물었다.


“또 지호가 무슨 예감이 안 좋다고 해?”

“이번에도 재미있는 분석을 내놓았어.”

“뭔데?“

“이란과 이라크 전쟁이 곧 끝날 것 같다는 것, 다음 미국 대통령은 부시라는 것. The Republican Party will beat the Democratic Party(공화당이 민주당을 이길 거야)라더군."

“타임을 읽고 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예상이야.”

“그것만으로는 재밌지가 않지. 지호가 내게 공화당과 민주당의 주별 선거인단과 지명된 두 후보의 대선공약을 보내달라는 거야. 그래서 보내줬지. 아, 물론 회사자료가 아닌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으로.”

“그랬어?”

“처음에는 영어와 미국의 대통령선거에 대해 배우려나 싶었지. 근데 이 녀석이 미스 신에게 계속해서 자료를 요구했다지 뭐야.”

“나름 열심히 분석하고 연구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그런 거지.”

“지호는 주술사인지도 모르겠어.“

“이번에도 들어맞으면 지호는 초능력이 있는 거야. 예지력이라는.”

“지호를 타임리나 AC 코믹스에 소개시켜 줄까? 태권보이 어때?”


서로 농담을 주고받던 파커 부부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호호호.


가만히 웃음이 멈추길 기다리던 신효정이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조지 부시가 대통령이 될 거라는 걸 모르는 분은 없지 않습니까?”

“맞추고 못 맞추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난 과정에 주목하고 있어요.”


제임스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저 이럴 것이다 또는 저럴 것이다. 이런 건 누구나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항상 근거를 가지고 접근하려는 태도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겁니다. 나는 그걸 높이 사는 겁니다. 지호가 앞으로 회사를 경영하든 또 다른 무엇을 하든 리더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에요. 미스 신도 잘 알고 있겠지만.”


말을 마친 제임스가 신효정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윌리엄이 흐뭇한 얼굴로 류지호를 추켜세웠다.


“천재들은 어릴 적부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면이 있다고 하지.”


신효정은 자신이 칭찬 받은 것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류지호가 비밀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근거를 갖다 붙인 것 뿐.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파커가 사람들은 그런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일 수도 있고, 은인이라는 이유로 눈에 콩깍지가 낀 파커가족의 너그러운 마음 때문일 수도 있다.


“편지에 쓴 것 말고, 다른 건 없나?”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면서 영어가 많이 늘었습니다.

“호오. 그래?”


윌리엄이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류지호와 대화가 통한다면 편지보다는 직접 전화로 대화하는 것이 당연히 좋다.


“다음에 만나시게 되면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풀이 죽어서 지낸다면 내가 당장 달려가 혼쭐을 내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신효정은 지금 한창 의욕에 불타고 있을 류지호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지호는... 여전히 씩씩합니다.”


윌리엄이 제임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잃은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그렇지 않아 제임스?”

“지호 말대로 확실히 미래는 윈도우와 네트워크가 주도하겠어요.”

“설마 지호가 제임스보다 부자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캐서린이 농담조로 말을 보탰다.


하하하.


두 남자가 또 다시 대소를 터트렸다.

신효정은 이들 가족의 웃음의 의미를 몰랐다.

멀뚱히 있을 수밖에.


“흠. 그렇다면 이참에 내가 녀석의 후견인이 되어줄까?”


윌리엄이 누군가의 후견인이 된다는 건 파커가의 진정한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이미 이들은 류지호를 반쯤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그것은 감정적인 영역이다.

후견인이 된다는 건 공식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공인하겠다는 것.


“윌리엄, 그건 시간을 좀 두고 생각해 보세요.”

“파커는 충동적으로 중요 문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캐서린과 제임스는 윌리엄이 심사숙고할 것을 권유했다.


“알았다. 시간은 많으니까.”

“지호를 아끼는 아버지 마음을 모르는 건 아지만, 지나친 관심은 자칫 독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말이다. 제임스.”


윌리엄이 잠시 뜸을 들였다.


“애벌레가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비로 변하는 법이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어린 지호는 이제 겨우 날개를 펼쳤을 뿐이에요. 아버지.”

“그렇지. 날 수 있을지 바닥에 떨어질지는 누구도 모르지....”


윌리엄의 의미심장한 말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파커가의 사람들을 알지 못했다.

멀리, 그리고 높이 날순 없었을지는 몰라도 류지호는 이미 날갯짓 하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다는 것을.


작가의말

새로운 한 주의 시작입니다. 보람되고 활기찬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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