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림이의 운명
강당건물 가장 안쪽에는 방송실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는데 평소에는 잠겨져 있다. 하지만 지금은 문이 열려있었다. 지금 강당 안에는 축제의 일환으로 학생들과 축제 참가객이 함께 진행하는 배드민턴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한준은 보는 사람이 있다 확인한 후 얼른 방송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도 열어놓고 사람이 없다니. 아무리 축제라지만 너무 안일한 거 아냐?'
보아하니 관리자도 배드민턴 경기를 보는 거 같았다. 한준은 보는 사람이 없는 지 확인한 후 방송실로 냅다 뛰어들었다. 방송실 안쪽으로 들어가 사다리를 타고 위쪽으로 올라간 한준은 곧 건물 밖에 난 철골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벽에 붙박혀있는 철골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강당 옥상에 도달했다.
강당은 둥근 지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붕 가장자리에는 사람 두 명 정도가 다닐 수 있는 복도 같은 공간이 있었다.
둥근 지붕 때문에 옥상 건너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준은 가장자리를 따라 달렸다. 코너를 돌았을 때, 한준은 옥상 모서리 난간에 이미 아슬아슬하게 서서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림이를 발견했다.
"미림아!"
슬픈 얼굴로 눈물지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면 미림이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한준은 미림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미림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안 돼!"
"미림아! 잠깐만 기다려!"
한준이 달리기 시작했고, 미림이는 그런 한준을 보다가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녀의 몸은 옥상 아래로 사라졌다.
"안 돼!"
"미림아! 내가 널 지켜줄 거야! 그러니까 잠깐만!"
한준이 달리기 시작했고, 미림이는 그런 한준을 보다가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녀의 몸은 옥상 아래로 사라졌다.
"안 돼!"
"제기랄! 대체 뭐가 문제야! 말을 좀 하라고!"
한준이 달리기 시작했고, 미림이는 그런 한준을 보다가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녀의 몸은 옥상 아래로 사라졌다.
"안 돼!"
"미림아! 난 너 없이는 못 살아!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가지마!"
한준이 달리기 시작했고, 미림이는 그런 한준을 보다가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녀의 몸은 옥상 아래로 사라졌다.
"안 돼!"
"우우욱!"
코너를 돌기전 한준은 가까스로 멈춰섰다. 현기증이 나고 구토가 올라왔다. 무심코 흐르는 땀을 닦은 한준은 그게 땀이 아니라 피라는 걸 눈치챘다. 또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한준은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왜! 왜 막을 수 없는 거지? 왜 나만 보면 뛰어내리는 거야! 대체 뭐가 문제야!'
주먹으로 바닥을 꽝꽝 내리치던 한준은 얼굴을 처참히 일그러뜨렸다. 잠시 고민하던 한준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미림이는 떨리는 눈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높이는 4층에 달했다. 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려오는 높이다. 난간을 잡고있는 한쪽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싫어.'
미림이는 죽기 싫어하는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온 몸과 온 마음이 살고 싶다고 절규하고 있었다. 미림이는 다시 '기억'을 떠올렸다. 엄밀히는 기억이 아니다. 기억이라는 건 과거에 겪은 것인데. 미림이가 떠올리는 건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기 때문이다.
몸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좌절은 그녀에게 죽음에 대한 용기를 주었다.
"이건 내 선택이야."
미림이는 아래를 보다가 문득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건물 동아리가 있는 쪽. 한준이 있는 쪽이었다.
"한준아, 미안. 난 이제 지쳤어."
서럽게 감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구어졌다. 한참을 흐느끼던 미림은 결심한 듯 난간을 잡고있던 한 손을 놓았다. 그녀의 몸이 난간 끝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미림은 눈을 감고 왼쪽 발을 한 걸음 허공으로 내딛었다.
"안 돼!"
그녀의 몸이 앞으로 기우려는 찰나 억센 손길이 미림이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미림이는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어?"
그녀는 경악했다. 그녀의 몸은 허공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미림이는 당황해서 어 어 소리내며 허우적 대었고, 허공은 그녀를 거칠게 옥상 안쪽으로 집어던졌다. 손바닥이 까진 것 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성난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미림이는 너무 놀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삑. 파지지직. 푸른 번개가 일더니 허공이 일렁이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복을 입고 용접 마스크를 쓴 모습에 미림이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알루미늄 보이?"
한준은 벌컥 마스크를 잡아 제꼈다. 미림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하...한준아..."
마스크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준이 씩씩 거리며 미림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준은 마스크를 떨어뜨리곤 입을 열었다.
"대체 왜! 왜 그런 거야! 왜 뛰어내린 거야! 내가 그렇게 애타게 불렀는데도! 그냥 뛰어내리는 법이 어딨어!"
한준의 외침에 질린 상태에서도 미림은 한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뛰어내리는 걸 봤구나.'
한준의 처절한 목소리가 옥상을 울렸다.
"화났고! 슬펐고! 무서웠어! 네 시체를 보는 내 기분이 어떤 지 알아? 네가 옥상 아래로 떨어져버리는 걸 보는 기분이 어떤 지 아냐고!"
울분에 흐느끼며 피눈물을 훔친 한준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질렀다.
"너를 구하고 싶어서 지금껏 준비했단 말이야. 네 어려움을 도와주고, 널 지켜주고 싶었단 말이야. 그런데 넌 나에게 벽을 치고는! 아무 말도 없이 혼자서 투신하려 했어!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고! 그래도 나, 너의 남자친구인데! 왜 나에게 의지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거야!"
그 말을 들은 미림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말을 하려는 듯 입이 열렸지만 나온 것은 울음이었다.
"으흐으윽. 으아아앙!"
미림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몇 번 눈물을 훔치던 미림이는 결국 눈물 닦는 걸 포기하고 그냥 바닥을 본 채 서럽게 울었다.
머리도 어지럽고 몸도 무거워진 한준은 미림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가만히 미림이의 손을 잡았다. 미림이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한 10분을 쉴 새 없이 울었을까. 미림이의 울음이 서서히 가라앉아 갔다. 간간히 훌쩍이는 정도까지 진정되자 한준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런 거야, 미림아? 나한테 이야기 해주면 안 돼? 혹시 그때 그 아저씨가 몹쓸 짓 한 거야?"
미림이는 힘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아저씨는 나에게 아무 짓도 안 했어."
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미림이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직은..."
미림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아저씬. 그래. 새아빠나 마찬가지야. 결혼식은 안했지만, 혼인신고도 하셨고 같이 살고 있으니까."
잠시 말을 멈춘 미림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언제인지는 몰라. 어느날 집에 있는데. 아저씨가 술에 취해서 들어오게 돼. 그리고는 갑자기 내 방에 쳐들어와서 막 나를 다그치기 시작해. 넌 어른에게 버릇이 안 되있다고. 매일 와서 방에만 처박혀있고,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말도 안 한다고. 그러다가 기어코 손찌검을 하게 돼."
떠올리는 것만으로 미림이는 부들부들 떨게 돼.
"굉장히 심하게 때려. 얼굴값 한다고 얼굴을 계속 때리다가. 나중에는 야구 방망이를 가져와."
한준은 얼굴을 굳혔다. 대체 왜? 저 미림이가 뭘 잘못했다고?
"엄마는 부엌에서 안절부절하다가 아저씨가 야구방망이까지 들자 매달려서 말리다가 방망이에 머리를 맞고 기절해. 그리곤 나를 때리기 시작하지.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 울고 빌고 빌어도 계속 나를 때렸어. 뼈가 부러지는 것 같아서. 정말 죽을 것만 같았어."
미림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깨어났어. 차라리 나를 때리라고. 애가 무슨 잘못이 있냐고. 노름할 돈 또 마련해줄 테니까 때리지 말라고."
한준은 어이가 없었다. 노름에서 돈 날린 걸 부끄러워해야할 판에 그걸 미림이에게 화풀이 해?
"아저씨가 그러더라. 버릇을 고쳐놔야된다고. 그리고는 다시 날 때려.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멈추질 않아. 엄마는 그걸 보며 울다가..."
미림이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나를 구하려고 식칼로 아저씨의 등을 찌르게 돼."
한준은 으음 하고 신음했다.
"척추 쪽이 찔렸나봐. 옆집 사람 신고로 경찰이랑 구급차가 왔고. 나랑 아저씨 모두 실려가지."
잠시 훌쩍이던 미림이는 다시 말을 이었다.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엄마는 재판이 진행되서 결국 징역을 살게 돼. 아저씨를...하반신 불구로 만들었다고. 그런데 사실은 아저씨는 척추를 다치긴 했지만 하반신 마비까지는 아니야. 의사랑 변호사에게 돈을 쥐어주고, 어머니를 모함했던 거야."
한준은 넋을 잃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더럽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병원에 누워있는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져. 두 가지 선택권이. 어쨌든 난 폭행을 당했으니까. 외할머니랑 연락을 해서 외할머니와 살던지. 아니면 아저씨와 대충 화해하고 아저씨를 부양하며 살던지."
그 대목에서 미림이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복지사도 차라리 외할머니랑 같이 살라고 하더라. 그런데. 외할머니에게 간다는 건. 여기를 떠남과 동시에... 신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라는 거나 마찬가지야. 마치...마치... 넌 어떻게 하든 무당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거다 라는 것처럼. 온 세상이 나에게..."
한준은 그녀가 처하게 되는 운명에 기가 막힘을 느꼈다.
"이...일이 언제 시작될 지... 몰라. 몇 달 후가 될 지... 내일이 될 지... 무당이 되던지... 엄마 없이 새아빠랑 둘이서 살던지... 선택하라고... 떠미는..."
미림이는 으극 하며 소리질렀다.
"그게 무슨 선택이야? 내 의지나 내 소망 따윈 안중에도 없이 다른 길을 모두 막아놓고 강요하는게. 그게 무슨 선택이야? 나에겐 선택권 따윈 없어.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말 거야. 아무 것도 바꿀 수가 없어!"
한참을 욱욱 거리던 미림이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유언 남기듯이 말했다.
"맞아서 아픈 거? 무당이 되는 거? 어떻게 보면 별 거 아닐 수 있지. 참을 수 있어. 받아들일 수 있어. 그런데 진짜 싫은 건... 죽을 때까지. 운명의 장난감이 되어서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한다는 거야. 고정된 미래에 무력하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그렇게 내 꿈과 희망이 짓밟히며 살아야한다는게...그게 너무 싫어. 그래서...그래서 죽을려고 하는 거야."
미림이는 간절한 눈빛으로 한준의 눈빛을 응시했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어. 마치... 운명이...한준이 너를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너는 운명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너를 다치게 해서 내 곁을 떠나게 할 수 없으니까. 대신 나를 괴롭힌다는 생각까지 들었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준은 입을 다물었다. 미림이도 본인은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울분이 차서 하는 말임을 알 테니까.
"너한테...말할 까도 생각했지만... 너도 바꾸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넌 너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은 피할 수 있지만... 타인의 운명을 바꿔주진 못할 거 아냐. 물론 내 운명은 내가 만들어가야하는 게 맞지만... 난... 도저히... 자신이 없어..."
울컥한 한준은 버럭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
미림이가 한준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 난 바꿔줄 수 있어!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난 네 미래를 바꿔줄 수 있어!"
미림은 눈을 깜빡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어..어떻게?"
"어떻게는 필요 없어."
한준은 잠시 이를 악물었다가 말했다.
"난 이미 네 운명을 바꿨으니까."
- 작가의말
많은 분들이 미림이가 죽는 것을 예상하셨군요. 으허허.
결과는 다음 편에...
그나저나 선작이 1000 이 넘었네요.
으아니. 수준 높으신 문피아 독자분들께 그래도 1000이나 선작 받다니. 감개무량합니다. 감사합니다.ㅎㅎ
그럼 즐감하세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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