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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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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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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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가이란은 적막감이 흐르는―― 작게 바람 소리만이 들려오는, 평소보다도 조용한 마을을 걸어 교회로 돌아왔다.


정문을 열고 보이는 광경에는 눈을 두지 않았다. 곧장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갔다.


똑똑똑.



“가이다. 지금 막 돌아왔단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절대 열지 말라는 지시에 따라 아이들은 문을 열지 않았다. 쑥덕거리며 허둥대는 안쪽의 상황을 느끼면서도 가이란은 차분히 기다렸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문을 연 소년이 틈으로 눈을 굴리며 밖을 살폈다.


꽤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잡고 있다 한들 어른이라면 억지로 문을 열고 침투하는 것쯤은 손쉬웠으니. 그렇지만 굳이 짚을 건 아니다. 가이란은 눈에 띄게 안도하는 소년을 달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들키지 않고 나갈 길을 찾았다.”


기뻐하며 화색이 든 아이들에게 가이란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 천천히 빠져나갈 계획을 설명했다. 너무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이해시키기는 힘드니, 그 부분은 대충 좀 더 나이를 먹은 아이가 손을 잡고 가는 것으로 정하였다.


모두가 알아들은 것을 확인한 가이란은 부모님의 방에서 가장 구석진 벽으로 다가갔다.



“위험하니까 다들 물러서거라.”


아이들이 물러난 것을 확인한 가이란은 벽면에 손을 붙였다. 그리고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여 벽을 밀어내 그대로 부셨다.


가이란은 환호하는 아이들을 진정시키고는 한 명씩 밖으로 나가게 했다.



“이제부터 날 따라오거라.”


조용히 이동해야 한다고 알린 가이란은 아이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마을을 빠져나왔다.


발견되는 일은······ 없었다.


가이란은 아이들을 데리고 교황청까지 데리고 갔다.


아이들의 발로는 3달이 걸릴 거리였지만 괜찮았다. 먹을 건 지천으로 널렸다. 그날그날 먹거리를 구해 식량을 조달하고, 밤에는 야영하면서 느긋하게 나아갔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아이들은 군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츰 그늘진 분위기가 밝게 변한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가이란에게 달라붙어 요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의 구분 같은,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배워갔다.


옷가지들도 아직 사람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놔두고 가이란 혼자 지나가는 마을에 들려 구해와 갈아입혔다. 이때 마을에선 거구의 가이란이 아이의 옷을 많이 구해가자 잠시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으나, 신관으로서 고아들을 보호하고 있다니 대번 시선을 거뒀다. 그뿐이랴, 아이들을 주라며 남는 옷가지들을 더 얹혀줬다.


평생 누더기 같은 옷을 입어왔던 아이들은 처음에는 어색해했지만, 이내 저들끼리 떠들며 좋아했다. 사이즈가 맞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지만 얼굴에선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시간이 흘러 교황청에 도착했을 땐, 학대당했다는 사실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두 밝아졌다.



“어, 어서 오십시오, 신관님.”


많은 아이를 데리고 교황청으로 오는 건 전대미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문을 지키고 있던 성기사의 환영 인사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 애초에 63구역에 들어서면서부터도 그랬으니.


처음에는 긴장했던 아이들도 지금은 완전히 풀어져 교황청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바빴다. 사람을 무서워했던 기척도 이젠 희미해져 있었다.


많은 시선을 받으며 가이란은 대성당으로 향했다.


고향에 간다며 떠난 신관이 몇 달 만에 돌아온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졌는지 곧장 신관이 나와 아이들과 함께 객실로 안내해줬다.



“잠시······.”


아이들에겐 들리지 않게 가이란은 귓속말로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이야기를 들은 신관의 눈이 살짝 커졌으나, 현 상황을 보고 납득했는지 알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고, 잠시 후 그 신관이 다시 들어왔다.



“이리 오십시오. 안내하겠습니다.”


눈짓으로 알겠다고 대답한 가이란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벽지부터 모든 게 다 새로웠던지 여기저기 흩어져 객실을 구경하던 아이들은 곧장 눈을 빛내며 달려왔다.



“너흰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네~!”

“얌전히들 있어야 한단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일.


물론 아쉽지는 않다. 그런 기분 따윈 조금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 완전히 자신을 따르게 된 아이들의 머리를 한명 한명 찬찬히 쓰다듬어줬다.


그렇게 본인조차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나서야 가이란은 신관을 따라나섰다. 아쉽게 따라붙는 아이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마음을 비웠다.


그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금 있을 만남은 가이란에겐 아주 중요하였다.



“저는 이만.”

“예. 감사했습니다. 평온하시길.”


가슴에서 2개의 정십자를 그려 예를 표한 가이란은 몸을 돌려 눈앞의 방문을 보았다. 이 방을 쓰는 자의 검소함이 엿보이는 초라한 문이었다. 그렇지만 가이란은 여느 때보다도 긴장했다.


몸가짐까지 확실히 하고 나서 가이란은 문을 지키고 있는 성기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렇다. 무려 성기사가 지키고 있는 것이다. 겨우 방 하나를. 그만큼 이 안에 있는 인물은 쉽게 만날 수 없는 분이었다. 갑작스러운 알현 요청이 받아들여진 게 이례적이라 할 만큼. 가이란조차도 설마 이렇게 쉽게 허가가 떨어질 줄은 몰랐기에 내심 놀랐었다.


그러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가이란은 방으로 들어가는 즉시 상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예하께 인사드립니다.”

“어서 오게. 신학교에 진학한 이래로군. 여태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하네.”

“개의치 마십시오. 저는 일개 신관. 예하의 입장상 발걸음이 어렵다는 건 충분히 주지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고개를 들게.”


교황―― 30여 년 만에 만나는 예하는 어린 시절 보았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힘찬 맥동도, 호수처럼 잔잔한 분위기도 전과 똑같았다.


천 년 가까이 교황으로서 지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초로의 노인이 이 시간 동안 변함이 없다는 건 불가능하다.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분명 루시아스의 곁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니.


다만 이전과 달리 한 가지 안 사실이 있다. 그건 바로 교황이 강자라는 것이다. 첫 만남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는 바로 막강한―― 범인으로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강자의 기척이었던 것이다.


재차 경이로웠다. 이토록 강대하다면 멋대로 살 법도 하건만.


――자신의 부모님처럼.


인간이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생물이다. 조금이라도 힘이 생기면 그걸 주체하지 못한다. 그걸 부모님들의 행보에서 톡톡히 느꼈다. 인간은 무척이나 불완전한 존재라고.


그러하건만······.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교황이 무척이나―― 전과는 다른 의미로 굉장하다는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무얼 위해 기도드리느냐?”

“재차 당신을 교황으로 선지하신 여신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건 무척이나 고맙군.”


이번에도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준 교황은 자리에 앉으라며 권하였다.


그래도 되는 건가, 가이란은 고민했지만 묵묵히 기다려준 교황에게 예를 보이고는 지시에 따랐다.



“그럼, 용건을 들어보겠네. 다름 아닌 자네다. 그냥 보자고 한 건 아닐 터.”

“예.”


한 번 심호흡을 한 가이란은 고향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것은 고해성사. 자신이 저지른 일도 모두 빠짐없이 밝혔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교황은 작게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로 안타까운 사건이로군······.”


순간 교황은 날카로운 눈을 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무얼······ 말씀하시는 건지?”


처벌이라면 알겠다. 숨기지 않고 모두 샅샅이 밝혔으니. 율법에 따라 죄를 물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되묻는 건 또 뭐란 말인가. 가이란은 이해되지 않았다.


교황은 그런 가이란을 재밌다는 듯이 보았다.



“아이들의 거처를 말하는 걸세. 그것 말고 달리할 이야기가 있나?”

“예······?”

“흠. 여태까지의 고생에 대한 보답은 아니지만 보다 나은 환경을 제공해야겠지. 어디 보자······. 사람을 어려워할 수도 있으니 좀 한적한 곳이 좋으려나······? 아. 아니면 혹시 자네가 봐둔 곳이 있나?”

“어째서······. 왜 제 죄를 묻지 않습니까?!”


가이란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가슴은 차가웠으며, 머리는 냉정했다. 그저 납득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교황은 침착하기만 했다. 되려 의아스럽다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어떤 죄를 말하는 겐가?”

“저는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니 하는 말일세. 우리의 율법은 오직 하나―― 내 이웃을 사랑하라. 그게 전부라네.”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들은 이웃이 맞나?”

“예······?”

“이웃이 맞냐고 물었네. 여신님의 성지에서 그런 불미스러운 짓을 저지른 이들이다. 그 자들은 사랑하고 아낄 이웃인가?”

“무, 무슨 말씀을······.”

“자네가 착각하는 게 있네.”


교황은 검지를 펼쳤다.



“분명 우리의 율법은 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네. 사도 디바오러께서 전해주신 귀중한 여신님의 말씀이지. 그건 절대적이야. 어긴다는 건 있을 수도, 감히 행해서도 아니 될 불경일세.”

“그렇습니다. 여신님께서 정해주신 율법이 있기에 지금의 성국이 있는 겁니다.”

“자, 자. 들어보게.”


가이란은 자신을 진정시키는 교황의 말에 따라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우리의 율법을 중히 여기는 자네의 마음은 실로 경건하다네. 재차 본받을 정도로. 그렇지만 율법은 딱히 살생을 저지르지 말라는 뜻이 아닐세. 생각해보게. 만약 그러면 성국에 고기가 유통될 리가 있겠나? 게다가 풀 또한 일종의 생명. 우린 아무것도 먹지 못해 굶어 죽겠지.”

“······.”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이기 때문에.


살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먹는다. 숨이 붙어있는 존재로서의 지극히 당연한 활동이자 불변의 법칙이다.


하지만 율법에 따른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풀조차도 그렇다. 마물의 경우 명백히 의사가 있다. 그 근본이 되는 풀과 잡초도 하나의 생명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


완벽한 모순이다. 즉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는 처음부터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웃’을 한정하는 겁니까······.”

“교황이라는 자가 한심한 소릴 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네. 그러나 현실적인 부분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지 않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존재는 극히 한정되어 있으니 말이야. 여신님을 모시려면 살아있어야 하고.”

“저는······ 모르겠습니다.”

“쉽게 생각하라면 불경이겠지만, 좀 더 편히 여기게나. 그래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범죄자를 생각해보세. 이곳 성도는 압도적으로 범죄가 적기는 하나, 그래도 매해 몇 건의 범죄가 발생한다네. 하지만 그런 이들도 율법을 따른다면 사랑하는 이웃. 사랑하는 이웃에게 죄를 어찌 묻겠는가.”


――그리고 자신 또한 율법에 의거, 죄를 물을 수 없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가이란은 여기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렸다. 율법을 따르면 따를수록 처벌할 방법이 없다고······.


이래저래 자신을 배려해준 교황의 마음 씀씀이에 가이란은 가슴에 정십자를 보여 감사함을 전했다.



“필요악이로군요.”

“아니. 필요악이란 세상에 없네. 악은 악, 선은 선. 오직 이 두 가지만이 존재하네. 그리고 그걸 어찌 받아들일지는 당사자의 마음뿐이지.”

“암만 끔찍한 악행을 저질러도 본인이 선행이라 여긴다면 선행이라는 겁니까?”

“그 본인의 마음에 한 점의 어그러짐이나 거짓이 없다면 그렇겠지.”


그렇기에 필요악이란 없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짓을 벌이더라도 본인이 선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선이니. 필요악이란 단지 타인을 이해시키기 위한 표현에 불과할 뿐, 선인지 악인지 정할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만이 가능하다.


교황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것이다.



“받아들일 수 없겠나?”

“······아닙니다. 모두가 같은 선악관을 지니고 있다면 전쟁이나 여타 분쟁 따윈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 각자 처한 환경과 배워온 것들에 따라 차이가 존재하겠죠.”

“그러면 묻겠네. 그들은 자네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었나?”


가이란은 마음속으로 생각해봤다.


고뇌스러웠다. 고향 주민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쭉 봐왔던―― 다른 의미에서는 가족과도 같은 관계였다. 눈을 감으면 곧잘 놀았던 소꿉친구들과 미소로 먹을 것들을 주던 촌장과 옆집 아저씨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런 가족들에게 과연 자신이 한 행동은 옳은 것이었을까······.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아이들을 믿고 맡길 곳을 구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교황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저 미소가 과연 무슨 뜻을 담고 있었을지······.



“자넨 어떻게 할 건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도움은······ 필요 없겠군.”

“예. 다른 분들에게 불편한 마음을 안게 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제 손으로 마무리를 짓고 싶습니다.”

“알겠네. 아이들은 검증된 곳에서 제대로 돌볼 것을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미안하네. 교황으로서 참으로 면목이 없구먼.”


조용히 머리를 숙이는 교황.


보통이라면 성직사로서 예를 표했을 텐데······. 사과에 담긴 뜻도 다양했고.


지위를 막론하고 대등한 입장으로 내려온 교황의 행동에 가이란은 놀랐다. 동시에 탄복했다. 도대체 얼마나 넓은 마음을 지닌 건지, 그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교황에 어울리는―― 아니, 이러하기에 여신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당당히 근 천년의 세월 동안 앉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 마음을 전하기 위해 기도를 드린 다음 가이란은 집무실을 나왔다.



“조심하게나.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게.”


등 뒤로 걱정해주는 말을 들으며 가이란은 그 길로 곧장 아이들에게 향했다.


가이란이 돌아오자 아이들은 빠르게 모여들었다. 그러고는 재잘재잘 이게 신기하다느니 마구 떠들어댔다. 거기에 담긴 감정은 오로지 순수함만으로, 대성당답게 비싼 세간들이 즐비했으나 조금의 욕심도, 욕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나이가 많은 소년조차도.


때 묻지 않은 모습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 가이란은 커다란 몸을 숙여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자. 진정들 하고 내 말을 들어보거라.”


달래는 게 왠지 아까 전의 교황 같다고 생각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이들은 곧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이가 많은 소년만은 얼추 예상했는지 제법 담담하였는데, 그래도 꽤 섭섭한지 침울한 기색이었다.


아무도 억지는 부리지 않았다. 처했었던 환경 탓인지 다들 군말 없이 수긍하였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았는지 한 여자아이가 옷깃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가이 아저씨랑은 이제 헤어져야 하는 거야······?”


어째서인지 알 수는 없었다. 왜인지 자꾸만 올라가는 입가를 신경 쓰면서 가이란은 아이들을 살짝 따스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영원한 이별이 아니란다. 시간 날 때마다 곧잘 들리겠다고 약속하마.”

“정말······?”

“물론이지. 너희는 잊었을지 모르지만, 이 아저씨는 신관이야. 약속은 반드시 지킨단다.”

“아. 맞다. 그랬었지······.”


맨날 아저씨라고 불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여자아이는 새삼스레 놀란 눈을 했다. 정말 까먹은 듯하다.


그만큼 여정이 편안했던 것이겠지······.


어쩐지 우스웠던 가이란은 작게 숨을 토해내고는, 대기하고 있던 신관에게 잘 부탁한다며 뒷일을 맡겼다. 객실을 나오기 전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걸렸으나, 남은 일이 있기에 애써 떨쳐냈다.


생각보다 찝찝하긴 했지만, 마음을 굳히고 할 일을 하러 다시금 여정을 떠났다.


정보 수집에는 인연이 없었던 터라 상당히 헤맸다. 목표로 하는 곳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제법 돌아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없는 만큼 속도를 낼 수 있었고, 63번 구역 주변을 샅샅이 뒤진 끝에 결국은 찾아냈다.


75구역의 어느 한 저택 앞에 선 가이란은 천천히 철문으로 다가갔다.



“응? 신관님? 신관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경비까지 고용했는지 철문 옆을 지키고 있던 사람 중에서 한 명이 머리를 갸우뚱거리면서 물었다.



“별일 아닙니다. 훌륭한 저택이길래 저도 모르게 눈이 갔을 뿐입니다.”

“아아. 그러하시군요.”

“혹시 어떤 고명한 분이 사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글쎄, 잘 모릅니다. 나리와 마님은 본인들에 대해 암말 없으셔서. 다만 상당한 부호인지 씀씀이가 꽤 좋습니다. 사실 저희도 여기 급여가 좋아서 지원한 것입니다.”

“맞습니다요. 여간 좋은 게 아닌지라, 여긴 다른 곳에 거의 2배는 급료가 높아요. 그만큼 근무 시간이 길긴 하지만요. 하하. 잡일도 조금 시키고. 뭐, 사사건건 개입하시는 분들은 아닌지라 불만은 없습니다요.”


이럴 때 신관이란 직책은 참으로 편리했다. 경비는 아무 의심도 없이 저택을 돌아보고는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해주었다. 약간은 부족했던 정보조차도 함께 경비를 서고 있던 동료가 채워줬는데, 그자 또한 의심은 전혀 없었다.



“그렇군요. 근무 중임에도 말씀 감사했습니다.”

“뭘 이 정도 가지고요. 가시는 길 살펴 가십시오!”

“예. 여러분들의 앞날에도 여신님의 가호가 있기를 빌겠습니다.”

“오오. 신관님께서 직접 기도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반가이 배웅해주는 경비들을 뒤로한 채 가이란은 저택을 지나쳐갔다.


지금 당장 자신을 알리고 들어가려고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분명 모르는 사람인 척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저 저택의 주인이라면 조사한 정보대로 절대로 그러할 것이었다. 결코 들켜서는 안 되니 말이다.


게다가 아직 확정적인 게 아니다. 여태까지의 정보로 보자면 틀림이 없으리라는 건 자명하였으나, 최종 확인을 한 건 아니었기에 냉철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가이란은 그대로 잡아놓은 여관으로 가 여신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서서히 날이 저물고,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행동을 개시했다.


짐을 싹 정리한 가이란은 늦은 밤이라 걱정해주는 여관 주인에게 감사를 전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대도시답게 곳곳에 놓인 마도구의 등불이 빛을 비추어 제법 환하였다. 밝다는 것은 곧 활동 시간이 길다는 것으로,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꽤 인파가 있었다. 물론 낮처럼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도시보다는 한참 많았다.


다만 자신에게 시선이 모인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앞으로의 일이나 혹여 나중에 발목이 잡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가이란은 쳐다보고 있던 한 명에게 가서 왜 그런 건지를 물었다.


설마 물어볼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는지 남자는 굉장히 당황했는데, 이윽고 눈치를 엄청 보며 조심스럽게 말하기로는, 2m 가까이 되는 신장과 커다란 덩치 때문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그런 사람이 신관 차림인 게 신기하여 시선이 갔다나.


이 말을 들으니 고향의 촌장과 주민들이 떠올랐다. 전모가 밝혀져 몰려졌음에도 덤벼들지 않았던 이유가 신관이기 때문이 아니라, 혹시 덩치 때문에 무서워했던 건 아닐지······.


혼자서는 깨달을 수 없었던 사실을 알려준 남자에게 감사를 전하고 가이란은 천천히 인적이 드문 길로 빠졌다. 빛이 적어져 어둑했으나 마력으로 시력을 강화할 수 있었기에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범죄의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 성도는 이런 으슥한 길목에서조차도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시민의식이 높기 때문이다. 신께서 직접 내려다보시기도 하고. 오히려 고향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특이한 경우였다.


그렇게 아무 걱정 없이 낮에 갔었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은 낮에와는 다른 경비가 철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그리 긴장감은 없었다. 서로 잡담이나 하는 등 잔뜩 늘어졌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성도의 범죄율은 타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낮다. 경비를 고용하는 곳은 한정되어 있고, 매일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으니 긴장감이 생기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낮에 왔을 때도 어떤 고명한 자가 사는지를 물은 것이다. 보통이라면 경비를 고용할 일 자체가 없을 테니. 단순히 사제였기에 의심을 사지 않은 게 아니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경비들도 그저 집주인이 어딘가 덕이 높은 사람인 줄로만 알겠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집과 집 사이에 있는 좁은 터에서 추이를 지켜보던 가이란은 사뿐히 담벼락을 넘었다.


정원을 비롯, 부지에는 경비가 없었다. 저택의 주인도 설마 이 성도에서, 그것도 대도시에서 주거침입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상황이 좋다고 생각한 가이란은 구석진 곳의 창문을 열어―― 닫혀있던 것을 강제로 뜯어 내부로 침투했다.



“이거 대단하군. 내 봉급이 이 정도로 많았나?”


75구역 내에서도 눈길을 끄는 훌륭한 대저택인 것도 그러했지만, 복도를 가득 메우는 그림과 동상들을 보니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저택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놀라리라.



“어쩌면 돈을 불리는 일에 재능이 있으셨을지도.”


덤덤하게 감상평을 중얼거린 가이란은 적막감이 흐르는 복도를 거닐었다. 저택의 구조는 미리 정보를 입수해놓았던 터라 헤매진 않았다. 사용인이 더러 있긴 했다만, 마력을 감지하면서 움직였기에 그들에게 발각될 일은 없었다.


이내 중후한 문 앞―― 목적한 곳에 다다른 가이란은 잠깐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고리에 손을 올려 살며시 문을 열었다.


잠기지 않은 문은 곧장 열렸고, 가이란은 그곳에서 곤히 자는 ‘부모님’을 발견했다.


그렇다. 이 집의 주인은 가이란의 부모님이었다.


미리 정보를 수집하여 대충 예상하기는 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조금은 참담했다. 하지만 금세 감정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부모님들이 누워있는 침대에 다가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보십시오.”


갑자기 깨우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더니 몸을 일으켰다.



“누구――”

“――쉿. 접니다.”

“가, 가이란?!”

“――조용히 하십시오.”


제법 힘을 담아 말하자 패닉에 빠졌었던 부모님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그렇게 진정할 시간을 주자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는지 둘의 눈에 이성의 빛이 담겼다.


차분히 대화할 수 있음을 느낀 가이란은 조용히 말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여길······.”

“어째서일까요?”

“마을······의 일이 들킨 것이냐?”


가이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교황청에 발각됐습니다.”

“무, 뭣이······?! 설마······ 넌, 우리를 잡으러 온 게냐?!”

“아뇨. 기도드리고 있다가 우연히 소식을 접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으러 온 겁니다. 성기사들보다 먼저.”

“그 말은······?”

“수배령은 이미 발령 났을 테지요. 어서 성국을 떠야 합니다.”

“오오.”


구원의 빛을 보았는지 부모님들은 역시 내 아들이라며 무척이나 추켜세워줬다. 더불어 벌써 성국에서 탈출한 미래를 그렸는지 눈에는 가득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일 경비와 이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쉬게 하십시오.”

“응? 지금 바로 나가지 않고?”

“갑자기 사라진다면 오히려 눈길을 끌 겁니다. 그건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신성단―― 어둠에서 활약한다는 비밀조직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들어는 보셨겠지요?”

“이, 일신성단······. 겨우 그런 일에 그 조직까지 움직인다니······.”

“겨우라뇨. 고아원의 운영은 교황청의 관할입니다. 지원비를 받았으니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말이 나온 김에 묻습니다만, 지원비와 제가 보내준 봉급들은 어찌하셨습니까?”

“어, 어쩌긴······.”


어물쩍 말을 흐린 아버지는 곁에 있던 어머니와 시선으로 의견을 나누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도피 생활을 하면서 짐을 주렁주렁 달고 다닐 생각은 아니시지요? 장물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날이 밝자마자 환금할 테니.”


다그치자 고민하던 부모님들은 빠르게 일어나 방 이곳저곳에 있던 물건들을 가져왔다. 그것들은 하나 같이 성직자와는 연이 먼 값비싼 귀금속들이었다.


놀랍게도 이게 다 장물인가 보다.


대충 모아도 이 정도라니······. 새삼 자신의 봉급과 지원금이 이리 많았나 생각하면서 가이란은 건네주는 귀금속들을 자루에 담았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꼭 말씀드린 대로 내일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을 모두 쉬게 하십시오.”

“타, 탈출 계획은?”

“내일 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분은 의심받지 않게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길은 알아봤으니까요.”

“이 아비를 버리지 않다니. 넌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아버지도. 제 자랑스러운 아버지입니다.”

“고맙구나······.”


무척 감격하면서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은 자신이 알던―― 이전 존경심을 가득 품었었던 아버지와 닮았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예전 그대로였다.



“그럼, 저는 이만.”

“그래. 내일 보자 꾸나.”

“예. 안녕히······.”


작별 인사를 나눈 가이란은 왔던 길을 되돌아 저택을 빠져나왔다.


별다른 기분은 들지 않았다. 모든 일이 사실로 밝혀졌음에도 감정의 변화는 없었다. 약간의 씁쓸함조차도 없다. 되려 뿌듯하기만 했다.


자신의 부모님은 여전히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이어서.


결코 틀어졌던 게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마을 주민들에겐 그들이 편하도록 일꾼을 베푼 것이다. 그렇다. 지금도 남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도 변함없이.


그저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더는 타인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랄까······.


하지만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루시아스 교의 가르침 대로 인간은 본디 선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다시금 루시아스의 곁으로 가 정화되어 다시 태어난다면 이번에야말로 한도 없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리라.


왠지······ 마음이 가볍다.


밝게 내리쬐는 달빛을 한 번 올려다본 가이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그리고는 조용한 75구역을 벗어났다. 뒤돌아보는 일 없이 당당히······.


모든 일을 끝마치고 교황에게로 찾아갔다. 이번에도 배견은 너무나 손쉽게 이루어졌다.


가이란은 놀라지도 않고 반겨주는 교황을 만나자마자 제일 알고 싶은 것을 물었다.



“아이들은 어디 있습니까?”


아이들은 대성당이 있는 63구역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40구역에 있는 한 성당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가이란은 예를 보이고는 그곳으로 향했다.


무척이나 예의 없는 짓이었다. 그렇지만 교황은 나무라지 않았다. 그뿐이랴, 어떠한 것도 묻지 않고 잘 다녀오라며 배웅해주기까지 했다.


그런 교황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하고는 마력까지 아낌없이 쏟으며 최대한 빠르게 알려준 고아원으로 갔다.


아이들의 시간은 빠르다고 하여 잊었을 줄로만 알았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가이 아저씨!”


수개월만의 만남이었음에도 아이들은 마치 이산가족을 상봉한 듯이 너무나 기뻐하며 반겨줬다. 고아원을 담당하는 성당의 신관에게 제대로 인사를 못 할 정도였다.


어렵사리 진정한 아이들을 둘러보니 제법 살이 붙어있었는데, 확실히 교황이 직접 지정한 곳이었던 만큼 여러모로 잘 돌봐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기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지만 신관은 기꺼이 승낙해주었다.


그렇게 5달을 보낸 결과, 이 고아원은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게 됐다. 신관과 사제들은 성실하고 신심이 깊었으며, 아이들도 무척이나 좋아하며 잘 따랐다.


신체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걱정은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다음 가이란은 고아원을 떠나기로 했다. 재차 헤어짐에 아이들이 슬퍼했지만, 이번에도 곧잘 찾아올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달래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그리 책임감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기왕 도와준 거, 아이들이 건강히 지냈으면 했다.


그렇게 한 명씩 인사를 나누고, 신관에게는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장물을 환전한 돈을 줬다. 처음에 신관은 거절하였으나, 고아원과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하니 겨우겨우 받아들였다.


나름 정든 성당을 뒤로 한 가이란이 향한 곳은 대성당이었다.


일사천리로 또 다시 배견하게 된 교황은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으로 물었다.



“만족했는가?”

“만족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교리에 따라 행동했을 뿐인 당연한 일입니다.”

“과연. 그 또한 그러하군.”


기분이 좋게 한 번 웃은 교황은 맡은 편 자리를 권했다.



“자네도 하고 싶은 말이 있기에 여길 왔겠지. 하지만 그전에 우선 내 쪽에서 이야기를 함세.”

“알겠습니다.”


동의하자 교황은 집무실 책상의 서랍을 열어 안에서 종이 다발을 꺼냈다. 그리고 빠르게 앞 장을 읽고 말하였다.



“자네의 고향 마을에 대한 조사가 끝났는데······, 48명 전원이 변사체로 발견됐다네. 그 탓에 진실규명은 무척이나 애를 먹었지. 그렇지만 여러 조사 끝에 학대의 정황을 어렵사리 찾아냈다더군.”

“그게 뭡니까?”

“농기구라네. 밭은 멀쩡히 가꾸어져 있는데 주민들의 집에는 농기구가 하나도 없었다는군. 있더라도 잔뜩 먼지가 쌓여, 최소 수 년은 손도 안 댔을 거라고 하네. 그에 비해 아이들이 있던 교회에는 농기구도 많았을뿐더러, 최근까지도 사용한 흔적이 남았다지. 확정적이라 하기엔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학대의 증거로 볼 여지는 있다네. 뭐, 이제 와서 진실을 밝히기란 어렵지만.”

“그렇군요······. 그 부분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는데, 다음에는 조심해야겠습니다.”

“죄를 밝힘에 있어 억울한 자가 나와서는 안 되니 말일세.”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암만 자백과 정황상의 증거가 있다고는 하지만 신중했어야만 했다. 성급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자책과 반성하는 동안 교황은 종이 뭉치를 몇 장 넘겼다.



“다음은 주민들의 사인이다만······ 묘한 점이 있더군. 다들 아무런 외상이 없었으나 전부 뇌가 비었다고 하더군. 물론 머리가 나쁘다는 뜻은 아닐세. 말 그대로 뇌가 없다는 소리지. 예상하기로는 아마 머리 내부에서 작은 폭발이 있었을 것이라고 검시관이 그러더군.”


슬쩍 섞은 교황의 농담은 가볍게 흘려듣고 가이란은 물었다.



“그런 것도 알아낼 수 있습니까?”

“해부학이라는 게 있네. 생물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는 학문이지. 다른 나라에는 생소하겠지만 성국은 오래전부터 데이터를 쌓아왔다네. 뭐, 이번에는 사후 시간이 흘러 조사에 모호함이 많았지만 말일세. 자네의 고향은 알다시피 외지인의 발길이 드문 곳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조사관들이 도착할 때까지도 아무도 방문하지 않은 모양이야. 덕분에 현장은 잘 보존되었지만.”

“그렇군요······.”


생명의 신, 루시아스를 모시는 것답게 저런 학문에도 제법 투자를 한 모양이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은 가이란은 고개를 주억거렸는데, 문득 지긋이 쳐다보는 교황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런가 싶어 기다렸으나 교황은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침묵이 흘렀다.


몸이 내려앉는 듯한 무거운 침묵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읽어보려 해봤으나 겨우 30여 년밖에 안 산 가이란으로서는 무리였다. 도리어 자신의 속이 낱낱이 교황에게 읽히는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을 이어가던 교황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물어보겠네. 그들을 어떻게 죽였는가?”

“송구하지만, 말씀에 어폐가 있으십니다. 전 그저 여신님의 곁으로 보내줬을 뿐이니 말이죠.”

“그렇군. 그럼 다시 묻겠네. 그들을 어떤 방법으로 여신님께 보내줬는가? 검시관의 소견으로는 거의 동시에 사망했을 거라는데.”


거기까지 알아낼 수 있는 거냐며 놀라고는 가이란은 대답했다.



“조사하신 그대로입니다. 제 마력을 모두에게 주입. 머리로 이동시킨 뒤 동시에 폭주시켰습니다. 사망 시간에 차이가 없는 건 이 때문입니다.”

“그러한가······. 허나, 타인의 마력은 독이라네. 어지간히도 둔한 자가 아니라면 주입된 시점에서 곧장 알아차렸을 텐데?”


가이란은 의아하게 교황을 보았다. 정말 이해가 안 되어서였다.



“마력이 독으로 작용하는 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교리를 저버린 어리석은 자들뿐입니다. 예하께선 물론이고, 이 성국에서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흔한 일이지 않습니까?”

“물론 틀리진 않았다네. 일단 나도 가능은 하니. 하지만 자네랑은 상당히 다른 이유일 거라네. 왜냐하면 ――난, 인간을 너무나 싫어하니 말일세.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나와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네.”

“그게 무슨······.”


되묻는 말에 답하지 않고 교황은 의자에 몸을 뉘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정말 순수한 사람이로군. 자네는. 분명 자네 같은 사람이야말로 교황의 자리에 어울리는 자겠지.”

“황송한 말씀이오나, 저는 예하를 뛰어넘는 교황은 없으리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아니. 나 스스로가 교황엔 어울리지 않다고 자각하고 있네. 과분하다고 해도 좋네.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님은 확실하지. 여신님께 가장 근접하는 것이니만큼 나보다는, 모두를 아울러 사랑할 수 있는 자네야말로 어울릴 것이 분명해.”

“······.”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에 이르러서도 저 말에 가장 들어맞는 사람은 바로 교황 자신이기에······.


하지만 그리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무게감마저 느껴지는 듯한 교황의 말에 토를 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담담히 교황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대신 언젠가는 교황의 짐이 가벼워지기를 여신님께 빌었다.



“시간이란 참으로 무섭구먼그래. 몹쓸 청승이나 보게 하고. 미안하게 됐구려. 사죄의 뜻으로 이후의 상황은 간략하게 정리하겠네.”


가볍게 예를 표한 교황은 이어서 말했다.



“우선 마을은 전염병에 전멸한 것으로 처리했네. 대외적으로는 뇌가 쪼그라들어, 이윽고 사라지는 무서운 질병 정도로 발표한다만······, 괜히 성국에 불안감을 심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소극적으로 알리려 한다네. 소문은 그리 퍼지지 않을 거고, 또 그러는 편이 자네의 부모님과 이웃 가족들의 명예도 지켜줄 수 있겠지. 다만, 전염병인 만큼 소각처리는 피해 갈 수 없는지라 마을은 불태웠다네. 소중한 것도 있었을 텐데 미안하게 됐구려.”

“아닙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택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염려해준 덕에 경비를 비롯하여 사용인들도 무사히 다른 곳에 취직했네.”

“알아차리셨습니까?”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웠으니 말일세. 게다가 난 자네를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자네라면 그러지 않았겠냐고 자연스레 상상됐네.”


교황의 추측은 정확했다.


부모님의 저택에서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저 휘말렸을 뿐이었다. 앞선 대화와 미리 파악한 정보들로 이를 먼저 파악했었다.


피해를 끼치는 건 고사하고, 앞으로의 삶에 영향이 있어선 안 된다.


그래서 모두를 쉬게끔 했다.


고용주의 이변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근무에 불성실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새겨지지 않도록.


한 번 새겨진 낙인은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어쩌면 평생을 따라붙을 수도 있을 터. 그들이 같은 직종――어쩌면 일자리 자체――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그때의 사건을 모르는 도시로 떠나야 할 것이다.


그런 억울함을 어찌 지게 할 순 있겠는가.


다시 직장을 알아본다는 불편함을 끼치는 것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지만, 최대한 영향이 가지 않게 쉬는 사이 고용주가 봉변당했다는 상황을 연출해야만 했다. 그리고 노렸던 대로, 그들 모두는 무사히 새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거기에 교황도 힘을 보태줬겠지. 그들이 모르게······.


교황도 그러했듯, 가이란도 왠지 눈앞에 있는 교황이라면 그랬을 것 같았다. 굳이 주민과 가족들의 명예를 지켜준 그라면 반드시.


그것도 포함해 정중히 감사와 함께 예를 표했다.


역시나······. 교황은 작게 미소 짓는 것으로 답하였다.



“마지막으로, 자네의 부모님들은 한날한시에 생을 마감한 사이좋은 부부로 처리했다네. 신원을 특정할 물건이 없어 저택과 기타 가구들은 모두 국고로 환수했지. 자, 이것으로 내 이야기는 끝났다만······. 더 궁금한 게 있는가?”

“없습니다.”

“그럼, 자네의 용건을 들어보지. 날 찾아온 이유는 뭔가?”


앞선 교황의 이야기는 그저 행정 처리의 일환. 단순히 사건의 관계자인 가이란에게 이를 알렸을 뿐이었다.


본론은 지금부터다.


가이란은 조금이지만 긴장하며 부탁을 입에 담았다.



“저를 일신성단에 넣어주십시오.”


교황은 눈을 가늘게 했다. 무슨 의도인지 읽으려 하는 것이다.


숨길 건 없다. 가이란은 교황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번 사건으로 부모님의 행방을 조사하다가 묘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제 고향 마을의 뒷조사를 누군가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한 개인인지 단체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을 아는 건 극히 일부분. 게다가 성기사의 모습은 찾을 수도 없었죠.”

“그래서 일신성단의 존재를 확신하게 됐다?”

“아닙니다. 정황상 지극히도 높은 확률이긴 했으나 속단하진 않았습니다.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

“맹목적으로 믿을수록 그 실패에 대한 반작용은 더욱 거대해지니 말일세. 의심이란 일종의 안전 수단이지.”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저 또한 최후의 최후까지 답을 내지 않았다가 지금에서야 겨우 답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방금 막 알려주신 예하의 말씀을 통해.”

“전염병으로 발표한다는 이야기 말이로군.”

“예. 그때 확신했습니다. 일신성단은 정말로 존재한다고. 너무나도 평온한 대성당의 분위기가 이를 증명했죠.”



전염병이다. 그러한 것이 퍼졌다면―― 벌써 마을 하나가 사라졌다는 걸 들었다면 절대 이처럼 될 리가 없다. 조용한 긴장감 같은 게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실로 훌륭하군.”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듯 교황은 몇 번이나 훌륭하다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자네를 일신성단으로 배속하지. 다만, 한 가지만 말하겠네.”

“예.”

“순수하다는 건, 곧 무언가에 깊게 몰두할 수 있다는 뜻일세. 그건 광기와도 닮았다네. 자네도 맹목적인 것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겠지. 머뭇거리지 아니 하되, 언제나 의심하도록 하게. 과연 자신이 나아가는 길이 옳은 것인지를.”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잔소리는 이만이네. 부디 자네가 갈 길에 여신님의 축복이 있길.”


그렇게 가이란은 일신성단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가게 됐다.


성실한데다 재능까지 넘쳤던 가이란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무얼 배우든 금세 그 모든 것들을 습득해버렸다. 사람을 죽이는 기술까지도······.


거리낌은 없었다. 애초에 무얼 배우는 곳인지는 알고 있었고, 사랑하는 이웃을 더는 담을 수 없게 된―― 그릇이 깨진 이들을 여신님께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되려 벅차오르기만 하였다. 새로운 걸 배우고 습득하는 건 고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릇의 크기가 남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자신은 제한 없이 타인을―― 이웃을 사랑할 수 있었던 거다.


이때가 되어서야 교황이 이야기했던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예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인간은 같은 인간을 싫어한다는 그 이야기를.


괜히 타인의 마력은 독이라는 소리가 나온 게 아니었다. 한탄스럽게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가 작은 것이었다. 기껏 해봐야 1~2명 내지다. 오히려 부모님들은 큰 편에 속했다. 48명의 마을 주민을 모두 담을 순 있었으니. 괜히 쭉, 지금까지도 존경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 따윈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어떻게 하면 더욱 열심히 여신님을 섬길지나 고민했다.


그런 노력은 빛을 보아, 가이란은 당당히 교육기관을 수석으로 졸업하게 됐다. 그리고 그 직후 바로 교황의 추천으로 일신성단에 추대되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던지라 처음에는 동지들로부터 여러 의혹을 받았다. 그러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더니 그런 의혹은 금세 떨어졌으며, 어느새 교황 직할의 금익편성으로 발령되기에 이른다.


심판관이란―― 비록 말석이라도 존재를 아는 자들이라면 무조건 부러워할 자리였다. 그렇지만 가이란은 변함없었다. 전혀 기뻐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여신님께 보탬이 되는 것만을 생각했다.


임무는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심판관의 특성상 혼자 지내는 일이 많아졌지만, 처음부터도 그런 건 조금도 상관없었다. 암살이든 정보 수집이든, 주어진 임무를 완벽히 해내었고, 그러한 일들이 쌓일수록 인생에 충실함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덕분에 자기 자신에게도 조금은 관대하게 대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러는 편이 이웃이 자신을 더 쉽게 사랑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맡긴 성당에도 틈틈이 들리는 등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다, 세월이 흘러 만나게 됐다.


이스피리아를······.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좀... 늦었군요...

변명을 하자면 플롯을 짜다 생각지 못하게 많은 시간이 지나서랄까... 어설프게 1부를 마무리 짓고 싶지 않았습니다.

헤헤... 봐주실거죠?

흠흠. 어쨌든 다음화는 1부의 마지막화가 될 거 같고, 190화와 함께 에필로그를 업로드 할 거 같습니다.

물론 늦지 않게... 이번 주? 쯤에 올릴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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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192 +2 23.06.23 102 0 46쪽
225 191 (2부) +2 23.06.15 73 0 41쪽
224 Epilogue +2 23.04.20 109 0 25쪽
223 190 23.04.20 89 0 42쪽
» 189 +2 23.04.10 97 0 41쪽
221 188 +1 23.03.30 131 0 43쪽
220 187 23.03.21 94 0 31쪽
219 186-2 23.03.21 7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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