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11개월차
“조선측 경계는?”
“거의 없습니다.”
“강 상태는 어떠한가?”
“충분히 도보와 마필로 건널 만 합니다.”
“좋다. 도하한다.”
마침내 압록강을 건너 청국군이 상륙했다.
이미 도하를 포함한 여러 훈련을 무력 시위를 할 겸 오랫동안 해 왔던 터에 강도 얼어붙어, 그들의 도강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조선군의 방어나 저항 또한 없었다.
“청국군이 도하를 시작했습니다!”
“그럴 것 같았다. 예측한 그대로이구나.”
“어찌 하오리까?”
“성을 버려라!”
“...네?”
“이미 조선은 망했다. 너도 얼른 가서 네 식솔과 재산을 챙겨 가거라.”
청국의 대병력이 도하를 하는 것을 본 조선군은 지휘관부터 성을 버리고 그대로 튀었기에, 그들은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도강 후 상륙까지 단번에 해낼 수 있었다.
그나마 봉화가 올랐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원래 수비를 맡아야 할 군졸 대다수는 서류상에만 있던 터였고, 낙하산으로 떨어진 문관 출신 지휘관이 가장 먼저 도망쳤으며, 훈련은커녕 무기조차 마지막으로 써본 것이 몇 세대 전인지 모를 정도로 부실했기에, 수비군들이 도망갔다고 그들 탓만 하기에도 힘든 것이었다.
애초에 저번 조선-청 국경에서 청국 관리가 총에 맞은 이후 청국군의 침략을 두려워한 자들이 서로 근무를 서지 않으려 했던 것도 있었고, 어지간히 눈치 있는 자들은 어떻게든 근무에서 빠졌던 것이었다.
식량도, 소금도, 군포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것이 거의 반 년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사실 수비군에 군적을 올린 자들도 호구지책을 마련하느라 자리를 지키지 않은 지 꽤 오래 된 것이 조선의 사정이었다.
먹고 살 길이 없는데 나라를 지키겠다는 자가 몇이나 되었겠는가.
기본적인 녹봉과 피복이 지급되지 않는데 무장 상태가 좋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법도대로라면 매년 1인댱 닷냥 이상의 화약과 탄환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고, 화살과 화포, 각종 냉병기의 재고 또한 1인당 최소 1가지 이상은 지급 가능하게 준비되어있어야 했으나, 그 또한 장부상에만 있을 뿐이었다.
식량도, 무기도, 피복도, 심지어는 인원도 극도로 부족한 것이 조선 수비군의 상황이었다.
반면, 청국군들은 각자 쌀 다섯 근과 양쪽에 짐 보따리를 매달은 막대기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모두들 담요와 누비이불이나 솜이 든 겨울 옷가지를 비롯해 면으로 만든 덧신, 바늘, 실, 소금 등으로 꾸린 배낭을 등짐처럼 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조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화승식 조총이 아닌, 강선을 파고 수석식으로 개량한, 영국군 브라운 베스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거나 조금 더 뛰어난 수준의 조총을 주력 무장으로 한 부대였던 것이다.
1인당 화약과 탄환을 종이에 싼 종이 탄포 12개씩을 소지하고, 본대를 따르는 보급대에는 병사 1인당 60발씩을 더 쏠 수 있는 탄포와 식량 서른 근씩을 계산하여 챙겨 따라오고 있었다.
반면, 의주에서부터 평양 이북까지는 사실상 방어체계가 전무한 상태였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지도 어언 20년이 넘게 지났으나, 평안도를 포함한 서북 지방은 여전히 그 상처를 다 지우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니, 상처를 치유해줄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처가 곪고 썩어들어가 이미 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리라.
서북 지방이 차별을 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시작과 그 시기가 거의 같았다. 애초에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유언으로 “서북 지방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이었다. 그 이후에 서북 지방은 기본적으로 유형을 보내는 지역으로 유명해져 버렸고, 범죄자의 소굴이라는 인식이 박혀버리게 되었다.
여기에 홍경래의 난까지 더해졌으니 완전 반골의 지역으로 찍혀 버린 것이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설령 노오오오력을 하여 과거를 봐서 합격한다 하더라도 고위직에 진출 할 수 없었고, 무과를 응시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임용이 되는 예가 드물었다. 그러니 양반 지위를 유지하는 가문이 사실상 전멸했고, 중앙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도 없었다.
사실 홍경래의 난 자체도 저런 차별이 쌓이고, 거기에 삼정의 문란이 더해진 까닭에 일어난 탓이 컸다. 사실상 중앙의 관심이 없는 지역이었으니, 오는 행정관은 죄다 세도가문에다 뒷돈을 먹이고 온 낙하산들이었고, 그런 낙하산들의 목표는 바친 돈보다 더 많은 돈과 재물을 긁어모으고 권력의 참맛을 느끼며 향락과 사치에 빠지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살다 살다 못 살겠어서 엎어버리고자 난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문제는, 엎으려면 화끈하게 엎었어야 했으나, 엎는데 실패했으니 남는 것은 보복뿐이었다. 가뜩이나 살기 힘들었던 서북 지방이었는데 홍경래의 난 이후로는 더더욱 살기 힘든 곳이 되고 말았다.
그 이전에는 벼슬길도 막히고 농사도 힘든 지역의 특성상 상업에 전념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터라 크게 성공한 상인들이 많았고, 이에 기대어 살 길은 있었던 지역이 서북 지역이었다. 그러나 홍경래의 난 이후, 돈이 있었기에 반란이 가능했다고 생각한 조정과 이 지역 상인들에게 상납을 받던 세도가들의 꼬리자르기로 인해 많은 상인들이 가산을 몰수당하거나 처형당했고, 이러한 상인들에게 기대에 살던 많은 장인들과 일꾼들도 결국 삶의 터전을 버리고 흩어지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떠날 여력이라도 있는 자들은 다행이었다. 떠나지도 못할 만큼 배운 것 없고 가난하고 힘없던 자들은 매 해 봄과 겨울마다 굶어죽거나 얼어죽었고, 그 시체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여 죽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썩어 백골이 되는 풍경이 일상이었다.
제대로 못 먹고 시체조차 수습하지 못한 지역에 전염병이 도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공출과 역은 여전히 부과되고 있었으며, 죽은 자와 실종된 자에게 부과되었던 군포와 환곡, 그리고 땅도 없는 자에게 부과된 전세도 여전했다. 못 견딘 사람들은 몇 차례 소규모 민란을 일으켰으나, 그것도 금새 진압되고 말았다.
그렇게 20여년이 지나고, 서북 지방은 사실상 거점 도시 몇몇을 제외하고는 무인지대에 가까운 곳이 되고 말았고, 거점도시라고 할 수 있는 의주, 안주, 정주, 곽산 등등도 그 인구가 거의 절반 가까이, 혹은 그 이상 줄어든 상태였다.
그러니 조선이 침략당할 때 들불처럼 일어나던 의병이 일어나 훈련 잘 된 청국군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살려주십시오.”
“동무들, 반갑소. 지금 동무들은 조선 왕실의 수탈과 패악으로부터 해방되었소.”
미처 피난가지 못했던 의주성 주민들은 공포에 매우 어리둥절했다. 당연히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청국군 중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민심을 얻으려 하는 것이었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요?”
“동무들, 안심하시오. 우리는 절대 그대들을 죽이거나 구타하지 않소.”
이런 일이 평양성 앞까지 계속 반복되자, 오히려 서북 지방 사람들이 청국군, 정확하게는 “오직 황제폐하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를 지원해주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이미 기나긴 수탈과 학살로 조선 조정에 대한 민심이 떠난 것도 있었으나, 청국군이 조선인들에게 식량을 풀어 잘 곳과 땔감을 사갔던 것도 큰 이유였다.
“해방된 조선인의 소지품은 일절 다치게 하지 않기로 되어 있소.”
노농적군은 황제가 직접 세운 ‘삼대기율’과 ‘팔항주의’를 철저하게 학습한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군중의 바늘 하나, 실오라기 하나도 취하지 않는다. (不拿群眾一針一線)”
“매매는 공평하게 한다. (買賣公平)”
“빌려온 것은 반드시 되돌려준다. (借東西要還)”
“구타나 욕설을 하지 않는다. (不打人罵人)”
등등이었고, 실제로 그들은 꽤 괜찮은 거래를 하고, 저항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비교적 친절하게 대하며 남하해왔다.
물론 북쪽의 겨울은 매섭고 혹독했으나,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땔감과 집이란 식량과 기꺼이 맞바꿀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개중에는 노농적군에 지원하여 입대하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서북지방의 민심 이반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가족 중 한 명이 입대하면 식량 다섯 근과 피복을, 두 명이 입대하면 열다섯 근과 피복 두벌을 주겠소.”
물론, 식량 사정이 어렵기에 노농적군에 자원 입대하면 남은 가족들에게는 식량과 옷을 지원해준다고 한 것 때문에 입대한 자들도 꽤나 있을 정도로 서북 지방 식량 사정이 좋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매서운 겨울 추위를 뚫고 내려왔음에도 인적 손실도, 충돌도 거의 없이 평양성까지 쉽게 내려왔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수성전을 준비하던 평양을 포위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내려오며 하던 것처럼, 정중하게 항복을 권했다.
“우리는 여러분을 다치게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조선 왕실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러 왔소. 성문을 열고 투항하면,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을뿐더러, 재산과 생명 모두 보장해주겠소. 우리는 한양을 바로 들이치려 하니, 문을 열고 길을 내어주시오.”
그리고 평양성에서 온 답장은
단 6자였다.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어주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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