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대 없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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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최근연재일 :
2022.12.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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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5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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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사상검증

DUMMY

찬호는 얼굴을 한껏 찡그리면서 투덜댔다.


“이런 곳에서 헤로인이라니 좀 뜬금없네요. 끙······.”

“저놈에게 목을 졸렸을 때 귀밑에서 만칼리 삼각형을 봤습니다. 기르불도 봤을 겁니다. 그렇지요?”

“뭔가 시꺼먼 게 있긴 하더라.”

“영보교에게 어떤 안 좋은 일을 당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싫어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 옷을 보고 발광했던 건가요?”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르불과 찬호는 지원의 추리 중에서 굳이 부정할 요소도 긍정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뭐, 어찌 됐든 상관없지, 그래서?”


지원은 허리띠에 달린 특별히 단단하고 빡빡한 주머니에서 비닐에 쌓인 캡슐 알약을 꺼냈다.


“제 자살약입니다. 치사량의 모르핀이 들어있습니다. 이걸 사용하겠습니다.”


모르핀을 개량하면 헤로인이 된다. 흡수 속도 이외에 둘의 차이는 거의 없다.


“사용? 누굴 죽이려고? 무괴를?”

“무괴를 죽이려면 이 약이 10개는 더 있어야 합니다. 옥토끼에게 쓸 겁니다. 모르핀으로 놈의 중독 증세를 약화한 다음 대화를 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무괴도 무작정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겁니다.”

“그 대화는 또 어떻게 하시려고요?”


찬호는 그게 제일 걱정스러웠다.

지원이 특유의 무표정하고 뚱한 얼굴로 발광하고 있는 옥토끼 앞에서 ‘싸우지 맙시다’라고 한마디 뇌까린다면······, 머리에 구멍 뚫리는 데 5초도 안 걸릴 것이다. 추방자들 시체로 해 먹지 못했던 뇌 꼬치구이가 지원으로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원은 걱정을 유발하는 그 표정을 고수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찬호, 당신의 외투를 주십시오.”


찬호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지만 외투를 넘겼다.

그녀는 찬호의 팔다리를 누르며 가만히 누워있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기르불을 불렀다.


“찬호는 못 움직이니 기르불이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래.”

“목표는 옥토끼, 모르핀을 투여하는 것이고 당신은 무괴로부터 저를 보호합니다. 제가 지시한 대로 행동하시되, 전투 상황이 오면 자율적으로 움직이십시오.”

“음······노력하겠지만, 결국 네가 조심하는 게 제일이다. 무리하지 마. 알겠냐?”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슬슬 뜨거워지기 시작한 기르불이 든 외투를 안아 들고, 불갈대를 한 주먹 꺾어내 강변으로 나섰다.


옥토끼의 경련은 전보다 악화된 상태였다. 무괴는 여전히 그 밑에서 맴도는지 아래에서 빙글빙글 도는 물의 흐름이 보였다.


지원은 수면을 발로 퉁퉁 두드렸다. 기르불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들어라! 옥토끼! 무괴!”


타카슬이 그 소리를 들었다. 그는 두 눈을 수면 위로 빼꼼 내밀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 무괴였지만, 아담한 체구의 인간이 강변에 서 있다는 걸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 인간이 어떤 행동을 했다. 타카슬은 총이나 작살을 꺼내는 줄로 알고 곧바로 잠수했다. 하지만 총성이나 수면에 착탄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익숙한 뜨거움이 머리 위에 드리웠다. 인간을 도왔던, 살아있는 불덩이였다.


기르불이 말했다.


“네 머리 위에 있는 토끼 녀석이 크나큰 무례를 저질렀지만, 동정심 많은 내 동료가 특별히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그녀는 너희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타카슬은 직전의 전투에서 뜨거움이라는 것을 생전 처음 느꼈다. 그래서 기르불을 잔뜩 경계했다. 그는 말로 꺼내지 않고 기르불 몰래 츠카에게 텔레파시를 전했다. 하지만 아무 조언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자기 스스로 대꾸했다.


“우리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말 한마디 듣는 게 어렵나? 좋은 말로 할 때 올라와라, 좀.”


타카슬은 느닷없이 휙 바뀐 말투에 황당함을 느꼈다. 기르불은 그러든 말든 위로 훅 올라가 버렸다.


타카슬은 텔레파시로 츠카에게 다시 말을 걸어보았지만, 여전히 괴로운 신음만 들렸다.


그는 마지못해서 위로 올라갔다.


기르불이 옥토끼의 주위에서 떠다니는 불갈대를 약하게 태우며 그의 오른쪽에 자리했다.


“좋아, 이놈도 좀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 하는데. 그래, 그게 뭐였더라······.”


기르불은 약에 취해 적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인사불성인 옥토끼를 보며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인간들에게 들은 그 단어를 최대한 비슷한 발음으로 흉내 냈다.


“페로인? 아니, 헤로인?”


텔레파시에 발음은 중요하지 않지만, 기르불은 헤로인 같은 인간의 마약에 대해서는 지식이 거의 없었기에 정확한 청각적 정보를 전달해주어야만 했다.


첫 소절에 자신이 올바른 발음을 구사했다는 확신을 얻었다. 옥토끼가 움찔거리며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말했다.


“헤로인. 내 동료가 말하길, 너에게 그 마약을 공급해줄 수 있다고 한다. 그걸 넘겨줄 테니 대신 더 싸우지 말자고 제안하는 바이다.”

<헤로인······.>


기르불은 그 텔레파시를 듣고 츠카가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우리는 너한테 관심도 없다. 너 때문에 부상자도 생기고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못 끝내게 되었지만 어쨌든 너를 죽일 수도 없고 죽여봤자 이득이 없다. 약을 건네줄 테니, 더 건드리지 마라. 먼저 공격당한 우리로서는 억울할 정도로 자비로운 처사다.”


지원이 이리 오라고 휙휙 손짓했다. 기르불은 츠카와 타카슬을 버려두고 그녀에게 돌아갔다.


한편 츠카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헤로인, 단 한 단어만 있었다.

뇌를 갉아먹는 갈증이 그 무엇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타카슬이 계속 텔레파시를 시도했지만 타카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기르불의 말이 함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헤로인만 있으면 무슨 상관이 있으랴.


만류하는 타카슬을 버려두고, 츠카는 지원에게 다가갔다.


지원은 츠카를 뚫어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둘의 거리가 좁아질수록 긴장감이 다리를 꽉 죄었다. 츠카의 밑에서는 불안정한 염력 때문에 물이 끓는 것처럼 진동하며 튀겼다. 기르불은 지원의 배에 안겨 그녀의 신호를 기다렸다.


타카슬이 츠카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따라왔다.


지원과 츠카가 3m까지 가까워졌을 때, 지원이 말했다.


“멈추십시오.”


츠카는 멈췄다.


“약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잘 들으십시오.”


지원은 아주 잠깐, 2초 정도 뜸을 들였다. 심호흡을 위한 시간이었지만 츠카에게는 2시간보다 길었다.


츠카가 인내심을 잃었을 때, 지원이 소리쳤다.


<빨리······.>

“카추샤 개썅년!”


소리치면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르불은 갑자기 거세진 압력에 놀랐다.

츠카는 ‘카추샤’라는 이름에 잠깐이지만 취기가 달아나는 걸 느꼈다. 카추샤의 이름은 하염강 위에 계속 울려 퍼졌다.


“시발년! 애미 뒤진 좆같은 년! 살인마에 사이코패스 저능아 새끼!”


카추샤 다음은 네흘류였다.


“네흘류 돼지새끼! 살 뒤룩뒤룩 찐 대머리 주걱턱 병신!”


지원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샤투카도 욕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더 다채로운 욕설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행동으로 넘어갔다. 싸움의 원흉인 주브만칼리풍 외투를 휙 벗었다. 햇빛 아래에 뚜렷이 보이는 만칼리 삼각형을 두 손으로 잡았다. 지원은 이를 악물고 외투를 쫙 찢었다.


동시에 기르불을 감쌌던 셔츠가 툭 떨어졌다. 기르불은 기겁하며 밖으로 나왔다.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원은 씩씩거리며 모르핀 알약을 손가락으로 집어 츠카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네가 원하는 거다. 먹고 떨어져!”


그녀는 알약을 허공에 흔들었다. 츠카는 홀린 듯 약을 향해 다가갔다.


지원은 츠카의 멱살을 잡아챘다. 타카슬은 당황해서 앞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기르불도 상황 파악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타카슬을 막아섰다.


타카슬이 소리쳤다.


“안 건드린다면서!”


기르불은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그게······안 건드린다고 했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야?”


지원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츠카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츠카의 입 안에 약을 쑤셔넣었다. 츠카는 공격하려 했지만, 입안에서부터 퍼지는 모르핀 향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원이 말했다.


“네가 나를 뭐라고 생각하든,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미친년이라고 하든 애미 없는 고아라고 하든 마음대로 해. 그런데 카추샤의 졸개라고?! 선 넘지 마라. 토끼 새끼야.”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파르르 떨렸고 손톱이 멱살을 파고들었다. 지원은 츠카를 던졌다. 그는 힘없이 날아가 기르불을 통과해 타카슬의 머리에 명중했다.


기르불은 지원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셔츠를 다시 집어 들었다. 여전히 츠카와 타카슬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능숙하게 기르불을 감쌌다.


지원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흐린 눈빛과 차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타카슬은 대답 없이 입에 츠카를 물었다. 그는 지원과 기르불을 주시하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지원은 다시 한 번 똑같은 말을 되물었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그래, 그래, 알아들었대.”


기르불이 타카슬과 지원 사이를 가로막았다.


지원은 뒤로 돌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옥토끼의 귀 뒤를 보면 어떤 조치가 취해져 있을 겁니다. 가능하다면 그게 뭔지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녀는 갈대밭 사이로 사라졌다. 타카슬은 지원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도 10초를 더 기다렸다가 물밑에 내려갔다.


작가의말

혹시 본문에서 글씨를 기울여서 쓸 수 있는 방법을 아시는 분 계시나요? 작가의 말에서는 가능한데, 본문에서는 그게 잘 안 되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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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거짓말 22.06.24 20 2 9쪽
30 4형제의 배 이야기 +1 22.06.22 40 3 9쪽
29 왕검 코츠불 22.06.21 18 2 10쪽
28 평화 22.06.21 27 2 13쪽
27 도마뱀 꼬리 +3 22.06.19 40 2 11쪽
26 추적대, 공작대, 구출대 22.06.19 23 2 10쪽
25 공중지원 요청폭격 +2 22.06.18 37 2 11쪽
24 주브만칼리의 상식 22.06.17 22 2 11쪽
23 살기 22.06.16 27 2 11쪽
22 달콤한 휴식 22.06.15 23 2 9쪽
21 구조대 +1 22.06.14 28 3 10쪽
20 화령 +1 22.06.14 30 2 11쪽
19 구조요청 +2 22.06.13 47 2 10쪽
18 서로만, 옥토끼와 인간의 도시 22.06.13 26 2 10쪽
17 우물 안에는 개구리, 아루신 안에는 옥토끼 22.06.12 21 2 10쪽
16 오월동주 22.06.12 32 4 9쪽
15 옥토끼의 본능, 본성 22.06.11 22 3 11쪽
14 적과의 동행 22.06.10 27 4 10쪽
13 영원에 고립된 옥토끼 22.06.09 27 4 9쪽
12 협박, 작은 보복 22.06.07 24 4 11쪽
11 제 3의 세력 22.06.07 23 4 11쪽
10 실패는 결말이 아니다 +2 22.06.06 31 3 11쪽
» 사상검증 +1 22.06.05 31 5 10쪽
8 임무 실패 22.06.04 24 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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