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대 없는 배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최근연재일 :
2022.12.05 15:08
연재수 :
64 회
조회수 :
2,119
추천수 :
208
글자수 :
296,472

작성
22.06.26 20:58
조회
23
추천
3
글자
9쪽

달빛 없는 밤

DUMMY

지원은 숨도 거의 쉬지 않고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달이 뜨지 않는 밤이었다. 빛이라고는 조종실에서 흘러나오는 기르불의 희미한 빛 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위의 모든 것이 대부분 암흑에 덮여 있었으며, 끊임없이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도 지원의 눈에는 그저 검은색으로만 보였다.


결국, 지원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눈을 돌리면 비교적 밝은 조종실이 있지만 지원은 그곳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지원은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로 자신의 귀를 한가득 채웠다. 명죽림에서 얻은 만성 환청이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귀를 채울 수 있는 다른 소리가 절실했다.

조종실 안에는 주브만칼리에서 챙겨온 명죽림으로 만든 단소 하나가 있었지만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들지 않았다.


지원은 줄곧 입을 압박하고 있던 양손을 천천히 얼굴에서 뗐다. 맨얼굴이 허공에 드러났다. 얼굴의 근육이 조금씩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원은 캄캄한 어둠 속에 있었고, 누구도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지원은 스스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받을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편안했다.


웃었다니······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가 어떻게? 지원은 스스로를 힐난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의 반석으로 삼은 것은 가족과 이웃들에 대한 복수였다. 눈을 감으면 그들의 시체가 아직도 생생하다. 지원이 명죽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것도 그 반석 덕분이었다. 계속해서 마음을 갉아먹던 환각은, 오히려 지원이 계속해서 과거의 다짐을 되새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고작 저런 시시한 대화 때문에 웃었다고?


자신에게 웃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웃어선 안 되는 사람은 카추샤지 그녀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은 피해자로서 그 누구보다도 웃음을 즐길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웃고, 떠들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복수를 다짐했을 때의 결의가 점차 마모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두려운 것은 먼 훗날, 어쩌면 그리 멀지도 않을 미래에, 자신의 입에서 ‘이제는 내 행복을 위해서 살게.’라거나, ‘보란 듯이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일 거야.’ 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었다.

복수에 실패하는 것은 각오한 일이지만, 복수를 포기하는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원은 계속해서 흐려져가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겼다. 머리와 가슴이 점차 차가워졌다. 지원은 조금씩 카추샤를 향한 평온한 분노를 되찾았다.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더이상 표정이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스스로를 진정시키다가 다시 조종실로 들어가고자 했을 때, 바다 쪽에서 크게 첨벙 소리가 났다. 지원의 눈에 바다는 어둠에 덮여 있었기에 소리의 근원을 알 수는 없었다.


텔레파시를 통해 누군가가 지원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야?”


타카슬이었다. 지원이 되물었다.


“무슨 일이라니, 왜 그러십니까?”

“네 소리가 들렸어. 나를 부르려고 했던 거 아니야?”


지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겠지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나오지 않는 게 좋아. 달이 없으니까.”

“조금만 여기에 있다가 들어가겠습니다.”

“위험해.”


타카슬은 평소에는 배 위의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찬호가 수영을 하고 싶다고 루니에게 염력으로 자신을 붙잡고 바다에 담궈달라고 요청했을 때도, 그리고 그걸 실행에 옮겼을 때도 그들에게 다가와 교류를 시도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저 배 주위를 유유히 떠돌았을 뿐이지만, 오늘의 타카슬은 예민했다. 달이 없는 밤이기 때문이었다. 달빛이 없다면 무괴들이 깊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을 억제하지 못한다.


“루니와 츠카가 무괴가 다가오는 것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주위에 무괴가 없으니 괜찮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니야. 많아. 소리가 들려. 나는 들을 수 있어.”

“소리······,”


물에 사는 짐승들은 소리에 민감하다. 그리고 물은 무괴의 영역이니, 루니와 츠카보다는 타카슬을 신뢰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지원은 어둠과 파도 소리 속에 타카슬을 등지고 돌아섰다.


----------------------------------------------------------------------------------


지원이 성큼성큼 조종실로 들어왔다.


루니와 츠카는 텔레파시로 감정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지원의 마음은 다시 굳게 닫힌 채였다. 그들과 기르불은 찬호가 지원의 표정을 읽어내 주기를 기다렸다.


찬호의 눈에 지원은 뛰쳐나갔을 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지원은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서 루니와 츠카에게 질문을 던졌다.


“루니, 츠카, 주변에 타카슬 말고 다른 무괴가 있습니까?”

<<아니, 없는데.>>


두 명의 파장이 동시에 울렸다. 찬호는 머릿속이 울리는 것 같은 것을 붙잡고 말했다.


“그건 왜요? 타카슬이 뭐라고 했어요?”

“네, 타카슬이 말하길 이 근처에 무괴가 많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낙관적인 정보보다는 비관적인 정보를 우선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루니는 귀를 퍼덕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가 하나밖에 없었기에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잡히는 신호가 없는데······. 츠카, 네가 좀 해봐.>

<방금 해봤어. 나도 모르겠어.>

<뭐 상관없지. 지원이 넌 이미 저놈 말을 믿기로 했잖아? 그럼 이제 우리한테 할 일을 정해줘야지. 설마 알아서 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루니는 찬호에게만 들리는 텔레파시를 보냈다.


<지금 무슨 기분인지 알겠어?>


찬호는 텔레파시를 받고는 루니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지원을 한 번 더 흘긋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편 기르불이 걱정스레 물었다.


“내가 나설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혹시라도 연료통을 건드리게 될 수도 있으니까.”


배에는 엔진을 돌리기 위한 연료, 즉 석유가 한가득 실려 있었다.

혹시라도 기르불이 석유와 접촉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갑판 아래로 밀어넣어 두었지만 기르불이 지나치게 흥분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가 갑판을 통과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게 될 수도 있었다.


지원이 기르불을 안심시켰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기르불, 당신은 전투를 수행하는 일이 거의 없도록 합시다. 램프에 기름이 별로 없으니 아껴야 합니다.”

“알았어. 그럼 누가······.”


그때 파도로 인해 배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찬호와 지원은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조종실 구석으로 밀려났다. 츠카와 루니는 그들을 붙잡아주기보다는 배 전체를 염력으로 지탱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파도가 너무 강력해서 제대로 진동을 잡지 못했다.


<미안! 못 잡아줬어!>


츠카가 사과했다. 지원은 찬호에게 깔려 욱신거리는 팔뚝을 문지르며 말했다.


“루니, 파장을 내뿜어서 무괴들이 배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십시오. 타카슬은 제외하시고. 츠카, 당신이 타카슬에게 이 배에서 동쪽으로 100m 이상 떨어지라고 전달해주십시오.”


루니와 츠카는 지원의 말에 따랐다.


텔레파시를 경험해본 적 없는 야생 무괴들은 뇌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낯선 잡음에 소스라치게 놀라 바닷속 깊은 곳으로 달아났다. 타카슬은 츠카의 요청에 배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이건 오래 못 갑니다. 루니, 기르불을 들고 하늘로 올라가십시오. 기르불은 바닷속 상황을 계속 저희에게 알려주셔야 합니다. 가세요!”


루니는 기르불이 든 램프를 들고 둥실 날아올라 하늘을 딛고 섰다.


그의 눈에 발밑은 완전한 검은색이었다. 바다 위에는 어떤 광원도 없어, 어디에 동료들이 있고 어디에 무괴들이 있는지 분간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르불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루니는 기르불이 말해주는 방향에 의지해 타카슬의 위쪽으로 자리잡았다.


기르불은 잠시 물러났던 무괴들이 다시 나타나 타카슬을 중심으로 회전하듯이 맴도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상세하게 지원에게 설명했다.


지원이 모두에게 말했다.


“다른 무괴들이 서로 싸우게 하고, 타카슬을 난장판에서 빼내는 게 최선입니다. 타카슬에게 전달하십시오. ‘절대 먼저 달려들지 마’라고.”


하지만 기르불의 다음 대사는 지원을 절망에 빠뜨렸다.


“달려드는데?”

“예?”


타카슬은 타오르는 전의를 참지 못하고 한 놈에게 달려들어 선빵을 날렸다. 아니, 정확히는 ‘본능’을 참지 못한 것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돛대 없는 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7 입국 22.07.02 21 2 10쪽
36 윈스반 22.07.01 21 2 9쪽
35 폭력을 중재하기 위한 폭력 22.06.28 19 2 9쪽
34 무괴의 본능, 본성 +2 22.06.27 28 2 9쪽
» 달빛 없는 밤 22.06.26 24 3 9쪽
32 이름을 모르는 무괴 22.06.25 16 2 11쪽
31 거짓말 22.06.24 20 2 9쪽
30 4형제의 배 이야기 +1 22.06.22 39 3 9쪽
29 왕검 코츠불 22.06.21 18 2 10쪽
28 평화 22.06.21 27 2 13쪽
27 도마뱀 꼬리 +3 22.06.19 40 2 11쪽
26 추적대, 공작대, 구출대 22.06.19 23 2 10쪽
25 공중지원 요청폭격 +2 22.06.18 36 2 11쪽
24 주브만칼리의 상식 22.06.17 22 2 11쪽
23 살기 22.06.16 27 2 11쪽
22 달콤한 휴식 22.06.15 23 2 9쪽
21 구조대 +1 22.06.14 26 3 10쪽
20 화령 +1 22.06.14 30 2 11쪽
19 구조요청 +2 22.06.13 47 2 10쪽
18 서로만, 옥토끼와 인간의 도시 22.06.13 26 2 10쪽
17 우물 안에는 개구리, 아루신 안에는 옥토끼 22.06.12 21 2 10쪽
16 오월동주 22.06.12 31 4 9쪽
15 옥토끼의 본능, 본성 22.06.11 21 3 11쪽
14 적과의 동행 22.06.10 26 4 10쪽
13 영원에 고립된 옥토끼 22.06.09 27 4 9쪽
12 협박, 작은 보복 22.06.07 24 4 11쪽
11 제 3의 세력 22.06.07 23 4 11쪽
10 실패는 결말이 아니다 +2 22.06.06 30 3 11쪽
9 사상검증 +1 22.06.05 30 5 10쪽
8 임무 실패 22.06.04 23 5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