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대 없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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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최근연재일 :
2022.12.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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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0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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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행

DUMMY

넓은 하늘 한켠에 태양빛 한 조각이 녹아 있는데, 황혼인지 여명인지 알 수 없었다.


지원은 시간 감각도, 방향 감각도 잃어버렸다.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것처럼 멍했다.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는 판단조차 서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을 땅바닥에 누워 있으니, 온몸이 쑤셨다. 그녀는 자신의 팔다리가 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몸을 움직이자 바닥과 닿은 부분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아주 딱딱했다.


감각은 연쇄적으로 깨어났다. 지원의 귀에 졸졸졸 흐르는 평화로운 물소리가 들렸다. 물에 잠겨 있는 다리는 차가웠다.

이곳은 하염강 어느 지점의 한가운데 툭 튀어나와 있는 돌덩이였다. 지원은 물에 도로 빠지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운 후 몸을 비틀었다. 힘을 주는 것조차 힘들었다.


지원은 고개를 숙여 물을 마셨다.


불갈대 군락을 집어삼킨 화재는 이제 수그러든 상태였다. 지원은 뭍에 가고 싶었다. 그녀는 일어섰다. 몇 시간, 어쩌면 몇십 시간 동안 굽혀 있었을 허리를 쫙 펴니 골반에 시원한 자극이 왔다.


그때 지원의 등짝에 물보라가 튀겼다. 등 전체가 젖고 차가운 물이 바지에 스며들었다. 주변 물 흐름은 잔잔했기에 물보라의 존재는 의외였다.


지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커다란 무괴가 머리만 수면에 내민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원은 놀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냉정이 침착함 때문인지, 아니면 지쳐서 경계 태세를 취할 여력이 아니기 때문인지 헷갈려했다.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죽이려면 진작에 죽였겠지······.”


저 무괴가 왜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원은 다 때려치우고 푹신한 진흙 위에 눕고 싶었다.


물보라가 한 번 더 튕겨졌다. 무괴의 꼬리가 위로 움직이고 물이 지원의 머리 위로 쏟아졌으며 그녀는 홀딱 젖게 됐다. 그런데 물만 쏟아지는 게 아니었다.


지원의 등 뒤에 노란색 무언가가 첨벙하고 떨어졌다.

뭔가 하고 보니, 익숙한 보따리였다.


“저건······.”


찬호의 보따리. 임무의 목적인 기계장치가 든 그것이었다. 몽롱한 정신이 퍼뜩 깨어났다.지원은 손을 뻗어 물 속에서 보따리를 건져냈다.


“이게 왜? 아니, 왜 이것만?”


지원은 그제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멀리 산이 보이긴 했지만 위치를 완벽히 가늠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과 똑같은 주변 환경이 펼쳐져 있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밟고 서 있는 돌덩이였다.


“유찬호! 기르불!”


목청껏 소리쳤지만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지원은 패닉에 빠질 것 같은 기분을 억눌렀다.


기르불이야 알아서 잘 하겠지만 찬호는?

지원은 이 넓은 땅 어디에서 찬호와 기르불을 찾아야 할 지 막막해졌다. 설령 찾는다해도, 그녀의 간호 없이 며칠을 방치된 찬호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애초에 살아는 있을까?


갈곳없는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무괴에게 향했다. 그녀는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으로 말을 건넸다.


“너······혹시 내 말 알아듣겠어?”


뚜렷한 반응이 없었다. 지원은 골머리를 앓았다.


“타카슬이라고 했던가? 네 이름이 타카슬이라고?”


반응이 있었다. 타카슬은 자신의 이름을 듣자 주둥이를 끄덕였다.


반면 지원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죽일 각오로 싸우고 욕설을 주고받고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상대와 정성스런 교류를 나누고 있는 지금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심각한 상황에 우스움이 느껴진다는 것도 이질적이었다.


“타카슬, 그래. 옥토끼는 어디갔니?”


타카슬은 타카슬에만 반응하고 나머지 말은 못 알아들었다. 최소한 옥토끼가 주변에 없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혹시 만칼리 어는 알아들을지도 모르겠네. 네 친구, 어디갔어?”


그 무괴는 또 한 번 물보라를 일으켰다.


뭐에 긍정하고 뭐에 부정하는지 헷갈렸다. 옥토끼가 있어야 텔레파시로 소통을 해 볼텐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 내가 뭐하고 있는건지······.”


그녀는 푹 젖은 보따리를 짊어지고 강변으로 헤엄쳐갔다. 일단 기르불을 찾아야 했다. 기르불의 도움 없이 이 넓은 땅에서 찬호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기르불은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신호를 보낼 것이다. 옥토끼와 싸우면서 큰 폭발을 일으켰던 것처럼. 이제 지원은 지사리가 뭘 할 수 있는지 안다.


그만큼 인간이, 특히 다리 다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도 안다.


머릿속에 찬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다. 자신이 그를 찾아나서야 할지, 아니면 혼자서라도 임무를 위해 침투를 계속할지 갈등이 일었다. 만일 찬호가 강 밑으로 가라앉아 익사했다면 애초에 찾을 수도 없었다.


뭍으로 가는 길은 수위가 깊어져 헤엄을 쳐야 했다. 하지만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는 쉽지 않았다. 지원이 헐떡대며 개헤엄을 치고 있을 때, 무괴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그에게는 밧줄이 묶여 있었다. 지원은 손을 허우적대다가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팔에 강한 관성이 느껴지고 순식간에 강변으로 옮겨졌다.


지원은 비틀거리면서 땅에 걸어올라왔다.


“고마워. 어, 고마워.”


축축한 불갈대의 재 냄새가 물씬 풍겼다. 신발로 땅을 헤집으니 재 속에는 꺼지지 않은 불씨들이 벌레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눕거나 앉으면 화상을 입을 것이다.


희망이 생겼다. 이렇게 뜨거운 재가 남아있다면, 기르불은 강의 상류에서 하류까지 무괴처럼 빠르게 왔다갔다 하면서 동료를 수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사리의 시력으로 강 한가운데에 눈에 띄게 걸쳐져 있던 지원을 발견 못 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지원이 지금 혼자라는 건, 찬호를 보호하느라 지원을 신경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찬호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사리가 하룻밤을 꼬박 지새워 맞서야 하는 위협이 있다면 그것도 문제이긴 했지만······.


지원은 옷 위를 더듬었다. 그리고 그 난리 속에서도 용케 주인에게 붙어 있어준 자신의 칼을 꺼냈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명죽림의 대나무를 잘라 지팡이를 만들었다. 질척한 진흙 위에서 걸으려면 필요했다.


무괴는 그때까지도 지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 아직도 여기 있지? 너라면 직접 옥토끼를 찾아나설 수 있을 텐데.”


무괴의 반응을 보기도 전에, 지원은 직접 그 이유를 추론했다.


“옥토끼가 날 감시하라고 시켰군. 됐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지원은 그를 무시하고, 상류를 향해 걸어보기로 했다. 격전이 일어난 곳까지 걸어간 다음, 도로 강을 따라 내려오는 게 기르불과 찬호를 찾는 확실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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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은 타카슬을 해칠 수 없지만 타카슬은 지원을 해칠 수 있다.


하지만 상대에게 다가가는 걸 꺼리는 쪽은 타카슬이었다. 그는 지원이 자신의 민감한 콧등에 칼빵을 꽂은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상처가 시큰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기르불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유효타였지만, 그런 이성적인 분석을 감정에 끼워넣으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기르불은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데에는 초보자였다.


반면 지원은 무서워하지도, 경계하지도 않았다. 무괴가 진심으로 인간을 덮칠 때 대처할 방법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태연할 수 있었다.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해결법은 있었다. 명죽림으로 우회한다면야 타카슬을 어느정도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싫었다.


결국 무괴라는 위험요소를 안고 전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강가에서 물고기를 낚고 있을 때 옆에서 타카슬이 스윽 지나가도 놀라지 않았다. 다만 한숨 몇 번과 욕지거리 몇번 정도는 했다.


“얼쩡거리지 마라. 다 도망가잖아.”


타카슬은 못 알아듣기 때문에 계속 얼쩡거렸다. 그래서 지원은 계속 짜증을 냈다. 그녀가 돌덩이 하나를 들어서 바닥에 내리꽂아 겨우 작은 놈 몇 마리를 잡았을 때야 타카슬은 슬쩍 물러섰다.


기껏 잡은 고기도 잔가시만 많은 놈이라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뼈쨰 씹어먹고 있었을 때, 타카슬은 강 한가운데서 등만 내놓고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원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며 그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다.


무괴가 머리가 좋긴 하지만, 공격성이 아주 높다. 같은 종족끼리도 잡아먹을 정도니까. 하지만 타카슬은 지원을 공격할 때와 공격하지 않을 때를 구분했다. 그렇다면 그 공격성을 조절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주브만칼리 정부는 츠카의 텔레파시 능력을 사용해 무괴를 군대에 써먹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시켰다거나······. 간단한 만칼리 어를 알아듣는 걸 보면 꽤 고려할 만한 의견이었다.


군대를 구성하려면 더 많은 무괴가 있어야 할 텐데. 어디 있을까? 어림잡아 100마리 정도라고 해도, 그만한 무괴를 양성할 만한 넓고 물이 채워진 공간이 지원이 아는 한 주브만칼리에는 없었다. 샤다치호 정도라면 20마리까지는 가능하겠지만, 애초에 샤다치호는 하염강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입안을 쿡쿡 찌르는 가시의 불쾌한 느낌을 잊기 위해, 지원은 더 열심히 씹으면서 생각에 몰두했다. 그리고 더 생각할 건덕지가 떠오르지 않았을 때 다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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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입국 22.07.02 22 2 10쪽
36 윈스반 22.07.01 21 2 9쪽
35 폭력을 중재하기 위한 폭력 22.06.28 20 2 9쪽
34 무괴의 본능, 본성 +2 22.06.27 28 2 9쪽
33 달빛 없는 밤 22.06.26 24 3 9쪽
32 이름을 모르는 무괴 22.06.25 16 2 11쪽
31 거짓말 22.06.24 20 2 9쪽
30 4형제의 배 이야기 +1 22.06.22 39 3 9쪽
29 왕검 코츠불 22.06.21 18 2 10쪽
28 평화 22.06.21 27 2 13쪽
27 도마뱀 꼬리 +3 22.06.19 40 2 11쪽
26 추적대, 공작대, 구출대 22.06.19 23 2 10쪽
25 공중지원 요청폭격 +2 22.06.18 36 2 11쪽
24 주브만칼리의 상식 22.06.17 22 2 11쪽
23 살기 22.06.16 27 2 11쪽
22 달콤한 휴식 22.06.15 23 2 9쪽
21 구조대 +1 22.06.14 27 3 10쪽
20 화령 +1 22.06.14 30 2 11쪽
19 구조요청 +2 22.06.13 47 2 10쪽
18 서로만, 옥토끼와 인간의 도시 22.06.13 26 2 10쪽
17 우물 안에는 개구리, 아루신 안에는 옥토끼 22.06.12 21 2 10쪽
16 오월동주 22.06.12 32 4 9쪽
15 옥토끼의 본능, 본성 22.06.11 22 3 11쪽
» 적과의 동행 22.06.10 27 4 10쪽
13 영원에 고립된 옥토끼 22.06.09 27 4 9쪽
12 협박, 작은 보복 22.06.07 24 4 11쪽
11 제 3의 세력 22.06.07 23 4 11쪽
10 실패는 결말이 아니다 +2 22.06.06 31 3 11쪽
9 사상검증 +1 22.06.05 30 5 10쪽
8 임무 실패 22.06.04 23 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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