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환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9.19 18:16
연재수 :
364 회
조회수 :
1,818,952
추천수 :
36,000
글자수 :
2,695,046

작성
24.05.02 18:10
조회
2,389
추천
64
글자
17쪽

서주

DUMMY

※※※



“벌써 가시오?”


산문 앞이었다. 앞에 늘어선 이들이 많았다. 하나같이 백연과 소홍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들이었다.


“밤자락이 드리우는데 하루 머물지 않고.”

“일이 지급(至急:매우급함)합니다.”


백연이 흐린 미소를 지었다.


“밤새 달리면 아침에는 서주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서주의 난세. 어찌 흘러가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천라방의 정보가 전달된 시점을 따지면 사흘 전에는 버티고 있었다 판단해야 옳았다. 아침이 밝으면 나흘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청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도사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깃들었다.


“이해했소. 사천은 풍전등화구려.”

“성도의 싸움에서 얼마나 큰 전력을 잃은겁니까?”

“노부의 사형제들......그러니 장로 배분 다섯이 명을 다했소. 절세고수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서. 아미파의 피해가 더 컸을 것인데 그쪽은 어찌되었을지 모르겠소.”


백연이 미간을 좁혔다.


절세고수 하나.


초월의 위에 오른 수라궁주를 칭하는 것일 터이다. 청운진인 본인이 있었더라도 버텨내기 어려울 괴물의 앞에 배분은 큰 의미가 없었으리라. 애초에 검격이 통하지 않는 괴물이라 들었으니.


“그마저도 당가주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으면 몰살이었을 것이오.”

“당가의 정보망이 뛰어나 다행이군요.”

“당가주 본인은 매사에 무심해보이나, 동시에 철저한 인물이니 말이오. 허나 아무리 천독이라 해도 수라궁주를 격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려.”


초월자들의 싸움. 결말을 미리 판단할 수 없다. 사소한 것 하나로도 모든것이 바뀔지 모르는 경지인 까닭이다.


“그 거인은 가히 인세의 재앙이니......”


청진의 말을 듣던 백연이 고개를 살풋 기울였다. 말에 담긴 내용 탓이었다.


“궁주를 직접 보셨습니까?”

“먼 발치에서 봤소.”

“조금 더 이야기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백연이 물었다.


귀한 눈이었다. 수라궁주의 전투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쉽지 않을 경험. 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된다면 좋을 일이었다. 어떻게든 물리쳐야 하는 대적(大敵)이기에.


그에 고개를 끄덕인 청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림잡아 십척(十尺)이 넘는 거인이었소. 지독히 먼 거리에서도 자욱한 분진을 뚫고 그의 신형이 눈에 언뜻언뜻 보이더구려.”


그리 말하는 목소리에 서려 있는 것은 옅은 두려움이었다.


“그의 일권(一拳)이 성도의 문을 붕괴시켰소. 직후 무인들이 그에게 벌떼처럼 달려들었는데 그 누구도 피해를 입히지 못했소이다.”

“권법가입니까?”

“......그의 별호를 모르시오?”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궁주라는 명칭으로나 접했지, 그 별호에 대해서 들은적은 없었다.


“수라궁주라는 위(位)로 불리나, 본디 사도 무림에서 그의 명칭은 단 하나였소.”


청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권마(拳魔).”

“......”

“수라궁주는 주먹 하나로 모든것을 쳐부수고 올라와 궁주의 위에 오른 괴물이오.”


귓가에 틀어박히는 별호였다. 백연은 그것을 머리속에 새겼다.


“본래도 고강한 인물이었소만......성도에서의 그는 한층 다른 영역에 다다른 것 같기도 했소.”

“무엇이 또 있었습니까?”

“어둠 속에서 빛나던 붉은 눈. 그리고 하나 더 독특한 것이 있었지. 그의 주변은 마치 색(色)을 잃은듯한 잿빛이었소. 노부가 알려줄 수 있는것은 이게 전부구려.”


새겨둘만한 정보였다. 붉은 눈은 아마 맹화를 사용한 것일 터. 허나 다른 정보는 그도 알지 못하는 내용이다. 무언가 그가 익힌 무공의 공능인 듯 싶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전부 파훼해야 할 일이다. 청진에게 감사를 표한 백연이 옆에 내려놓았던 봇짐을 쥐었다.


“장문사형이 도착하는대로 조만간 따라가겠소. 그때까지 몸 성하기를 바라겠소이다.”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빠르게 회복하고 가는군요.”

“마땅히 은을 갚으려 노력할 뿐이오.”


흐리게 웃은 백연이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금자를 받아든 표국의 무인들이 천천히 산문의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제 또 가는가?”


장중의 물음이었다. 백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삿갓을 매만진 노인이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무운을 빌겠네.”

“감사히 받지요.”


곁에 서 있던 취풍은 큰 한숨과 함께 고개를 까딱였다.


“본인이 그대와 함께 싸웠던 일이 길이길이 자랑할 이야기로 남았으면 좋겠소.”

“거 무운을 빈다는 말을 어렵게도 돌려 말하네. 죽지 말고. 나중에 의뢰 있으면 또 와서 해줘. 돈만 주면 다 받으니까.”


두둑해진 주머니를 들어보인 예화는 씩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왔다.


“잘 가시게.”

“송가. 자네는 안가나?”

“외팔이 늙은이가 뭐하러 따라가서 짐만 늘리겠소.”


황력의 일행이었던 두 노인이 주름진 웃음을 지었다. 남은 이들과 가벼이 인사를 나누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각자 모두 다른 길로 흩어진다 했다. 크게 다친 몇몇은 청성산에 좀 남아 회복하기로 했고, 몇몇은 이전처럼 덕양으로 돌아가 일을 한다고. 장중과 취풍, 예화는 다른 도시로 떠난다 들었다.


그들의 면면을 모두 눈에 담은 백연이 미소를 지었다.


“감사했습니다. 연이 닿으면 또 뵙지요.”


그렇게 말한 백연이 가볍게 걸음을 내딛었다. 모두의 시선을 등 뒤로 한채였다. 이윽고 소홍과 백연의 신형이 삽시간에 산의 능선을 타고 한줄기 바람으로 화했다.


그리 경공 질주로 산 아래까지 도달하는 것이 찰나.


“잠깐만, 사형.”


백연은 푸른 별빛이 새겨진 장소에 멈춰섰다.


아직까지도 분분히 튀어오르는 진기 파동이 강렬하게 새겨져 있는 대지. 푸른 여뢰의 흔적은 언제 사라질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임지승의 흔적이기도 했다.


“갑자기 왜?”

“챙겨갈게 하나 더 있어서.”

“......충분하지 않아?”


백연이 진 봇짐을 보며 소홍이 미간을 좁혔다.


“그거, 기분 나빠.”

“알지만, 그냥 버려두고 가기에는 아쉬워서. 놈들의 뇌리에 새겨줘야지.”


씩 웃은 백연이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꽂혀 있는 거대한 쌍극을 향해서였다. 발로 툭 걷어차 그것을 뽑아낸 백연이 비틀린 쌍극을 어깨에 지고 소홍을 돌아보았다.


“이제 가자.”


고개를 끄덕인 소홍과 백연이 경공을 엮어내었고.


암청빛 하늘 아래 두줄기 푸른 바람이 서주를 향해 날아올랐다.



※※※



바람도, 하늘도 없었다.


대신 들어찬 것은 시야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묵빛의 고요 뿐이었는데, 그것이 천장인지 확실하지도 않았다.


사방을 따라 늘어선 거대한 기둥은 화려한 금과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장정들 스물을 모아놓은 것보다 두꺼운 기둥은 피로 적신 것 마냥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호흡이 무거워지는 공간이다. 사방을 내리누르는 알 수 없는 기묘한 위압감 탓에.


“갈수록 가관이구먼.”


그 사이를 따라 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있었다. 검 한자루를 품에 안고 허옇게 멀어버린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노검객.


“이러다 혈귀들의 궁보다 화려해지겠네만. 장주가 혈귀궁을 보고 감명이라도 받았는지 모를 일이야.”


쯧, 하고 혀를 찬 혈선이 옆을 돌아보았다.


“자네도 그리 생각하지 않는가?”

“전을 본적이 없어 모른다.”


그의 옆에 선 궁귀가 답했다. 길다랗게 늘어진 흑포가 붉은 기둥 사이에서 이질적으로 흔들렸다.


“이렇지 않았나?”

“전에는 그러했네. 이곳의 기둥들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네만......”


나직한 목소리로 낄낄 웃음을 흘린 혈선이 금새 무표정한 얼굴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장주가 알아서 할 일이지 않겠나.”

“그렇군.”

“뭐, 자네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자네가 가져온 말은 이제 전하도록 하겠네. 회담은 시간이 좀 걸릴 터인데, 쉬고 있는것이 어떠한가?”

“연무장이 있나?”

“아마 있을걸세. 구조도 별반 다르지 않으니.”

“알겠다.”


그 말과 함께 돌바닥이 옅은 신음소리를 내었고, 혈선의 옆에는 홀로 남은 바람 한줄기만이 땅으로 천천히 침잠했다.


“거참......신출귀몰한 보신경이로군. 노부의 기감에도 잡히지 않는 것이.”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활잡이의 몸놀림은 가장 날래야 하는 법이니.]


홀로 남아 중얼거리는 혈선. 문득 귓가에 들려오는 간드러지는 목소리에도 놀라지 않고 수염을 매만진다.


“자네는 빠르게 왔군? 일이 벌써 끝났나?”

[일은 아직입니다. 그런데 교주가 갑자기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잠시 보류된 상태지요.]

“호오. 기련산쪽에 무슨 일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아직 제압이 안된건가?”

[침입자를 평범한 혈귀들로 잡아내지 못한 모양이더군요. 때문에 교주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났지요. 후후.]

“그 나이에 그리 성질을 부리다간 훅 가는 수가 있는것을.”


킬킬 웃은 혈선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어느 순간 주변의 빛이 크게 일렁이더니 흐릿한 인영이 바닥에서부터 불쑥 몸을 일으켰다. 호리한 몸에 달라붙는 장포는 티 한점 없는 백색이었는데, 눌러쓴 가면 또한 마찬가지로 새하얀 종이같은 빛이었다.


그 위에 자리한 것이라고는 눈구멍이 있어야 할 부근에 웃는 상으로 그려진 길쭉한 눈매뿐.


“허면 진행하던 것에 성과는 있었나?”

[예. 모산파의 생각이 틀리지는 않아 보이더군요. 혈교를 이용할 생각을 한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인정을 해야겠지요.]

“호오라.”

[혈교의 혈법 특성상 육신을 만드는 것은 외려 간단해졌으니 말이지요. 헌데 그게 조건에 부합하는가는 또 별개의 문제인지라.]

“조만간 알게 되겠군.”

[재료가 너무 많이 필요한 것도 단점입니다. 하나 만들고 폐기하고를 몇번을 해대는지. 만귀라는 작자도 그런 점에서 인내심이 대단한......]


말을 하던 사내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돌연 코앞에 나타난 거대한 문(門) 때문이었다.


[......간만이군요. 이곳도.]

“그리웠나?”

[천만에요. 혈귀궁이 오히려 마음에 들더군요.]

“허허. 그곳이 취향에 맞는다니 그것도 놀랍군.”

[혈선께서는 어찌 지내셨는지요?]

“유유자적 돌아다녔네. 장주가 시킨 일 처리도 하고, 어린 아해가 어찌 지내는지 구경도 하고......”

[그러고보니, 안휘에도 걸음하셨다 들었었습니다. 그 씨앗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물음에 혈선이 고개를 저었다.


“남궁가주를 너무 낮잡아봤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더군.”


그리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거대한 문이 천천히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차가운 공기가 거셌다. 안에서부터 흐리게 떠도는 빛들이 영롱하게 주변을 비춰내었다.


이윽고 안의 풍경이 완전히 눈에 들어올때가 되어서야 움직이던 문이 천천히 멈춰섰고.


“들어가세.”


두 인영이 걸음을 옮겼다.


문 안은 바깥과 그리 다를바 없는 묵빛의 휘장이 사방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밖의 길과 다른 점은 그 묵빛 사이로 허공을 떠도는 빛들이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창백한 빛무리가 흩날리는 싸라기눈마냥 공기를 타고 일렁이며 주변을 비춰낸다. 그 아래로 널찍하게 펼쳐진 것은 일곱개의 자리였다.


비어있는 것은 셋.


나머지 넷은 이미 들어차 있었다. 혈선과 사내가 들어선 것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흘러나오는 대화 소리가 나직했다.


그에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혈선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다들 빠르구먼. 노부가 가장 늦었을 줄은 몰랐네.”

[얼굴 보기 힘든 이들이 전부 모인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군요.]


그렇게 한곳을 제외한 자리가 전부 채워지고.


“허면 이제 시작하도록 하지.”


혈선의 음성과 함께 앉아있던 이들의 시선이 노인에게 쏠렸다.


“그간 다들 잘 지냈는지 궁금하군.”

[당신이 호북에 개입했다 들었는데, 혈선.]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사방으로 메아리친다. 육합전성마냥 거대하게 부풀은 여인의 음성에 혈선이 미소를 지었다.


“그랬네. 결과부터 말하도록 하지. 모산파가 계획한 삼봉의 무흔을 훔치고, 그의 안배를 탈취하는 것은 실패했네.”

[애시당초 삼봉의 안배란게 존재하는지도 의문입니다.]

[말장난일지도 몰라요. 무연봉을 벤 자 아닌가요? 봉우리 자체가 무흔이라 하면 할말이 있을지 모르겠네.]

[모산은 무엇하러 그것을 찾으려 했는지 모르겠다.]


허공에 울리는 목소리가 제각각이다. 그 누구 하나 육성으로 대화하지 않는 거대한 울림 속에서 혈선이 고개를 저었다.


직후였다.


쩌억.


나무토막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였다. 별안간 혈선의 앞을 따라 일직선 허공에 있는 창백한 빛무리가 픽-흔들리더니 소멸했다. 길다란 빛무리 사이로 기묘한 어둠이 그어졌다. 빛살 사이로 끝없이 이어지는 길쭉한 검은 선은 유달리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치 검로(劍路)라도 된 듯이.


그와 동시에 좌중의 모든 시선이 혈선에게로 향했고, 자리에 걸터앉은 노인은 이전과 다를 것 없는 자세로 검을 품에 껴안고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다음에는 자네들의 목이네.”

[......여전하시군요.]


그때껏 입을 다물고 있던 하얀 가면의 사내만이 웃음기 섞인 음성을 흘렸을 뿐.


혈선은 수염을 쓸고는 미소를 지었다.


“여튼 이어 알려주겠네. 개방의 세력을 반파. 개방주 본인까지 죽이려 하였으나 검성(劍星)의 방해로 실패에 이르렀네. 그 대신 검성이 한팔을 잃었으니, 이제 그가 다시 이검을 다루는 일은 없을 것이야.”


그리 말한 혈선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반대편에 걸터앉은 어린 아이를 향해서였다.


“허면 이제 듣지. 자네들은 어찌 하고 있었나?”

[......눈을 닫았어요. 이제 천견의 눈은 북경에 닿지 못할거에요. 사방에 있는 것을 전부 틀어막았는데, 그 크기가 대체 얼마나 넓은건지.]


아이의 답에 이어 입을 연 것은 낡은 승포를 입은 중이었다.


[마교가 움직였다. 북방으로.]

“호오? 그것은 변수로군. 다른 자세한 내용은 없나?”

[마교주의 힘이 날로 강해진다. 자칫 잘못 걸리면 그의 손짓 하나에 죽을지도 모르는 일.]


뒤이어 베일을 내려쓴 여인의 음성이 자리 위로 내려앉았다.


[혈선이 다녀온 호북에서 무림맹(武林盟)이라는 연합이 결성되었는데, 그 힘이 방대하더군.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어.]

“흐음.”


수염을 쓸어내린 혈선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길쭉한 도(刀)를 지고 앉아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팽가주는 곧 죽습니다.]


별다른 높낮이 없는 평이한 어조. 그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인 혈선이 천천히 손을 모았다.


“바쁘게들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네만, 안타깝게도 회포를 풀 시간이 길지는 않네.”


잠시 좌중을 천천히 둘러본 혈선이 툭 내뱉듯 말을 던졌다.


“황제가 전언(傳言)을 보냈네.”


그 순간이었다. 모두가 흠칫 몸을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비어있던 한 자리 위로 그림자가 크게 늘어졌다. 거대한 장막처럼 드리운 묵빛 어둠이 스스로 몸을 숙이는 듯한 기괴한 형상.


어느 순간 창백한 빛무리를 장포처럼 두른 어둠이 마지막으로 비어있던 자리 위에 내려앉아 흐릿한 인영(人影)을 형성하고.


[그건 무슨 소식이지?]


성별을 분간하기 어려운 기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수십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합창하는 듯한 기묘한 울림. 겹겹이 이어지는 목소리가 옅게 허공을 타고 울려퍼진다.


“장주.”


어둠을 향해 고개를 까딱인 혈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가 선언했네. 조건이 맞는 육신을 찾았다고. 허니 그것을 이제부터 회수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며, 술법의 완성을 동시에 진행한다. 그리 전했네.”

[......]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여든 이들이 나직한 시선을 교환한다. 반면 혈선은 내려앉은 어둠만을 태연히 응시하고 있었다.


“장주. 자네는 어찌할 셈이지? 이대로 뿌려놓은 씨앗을 포기하고 황제의 움직임에 동조할텐가?”


어둠으로 이루어진 인영이 고민하듯 잠시 고개를 기울였고.


[......두가지 가능성을 모두 염두에 두지.]

“두가지란?”

[황제가 틀렸을 수도, 맞았을 수도 있으니.]


혈선을 향해 고개를 돌린 인영에서 기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함께 고려하지. 우선은 황제의 말에 따라 그 육신을 찾는 것으로 행동한다. 동시에 우리의 일은 별개로 진행하도록.]


메아리치는 만금장주(萬金莊主)의 목소리가 한없이 차가운 냉기로 화해 자리에 내려앉았다. 허공을 떠돌던 창백한 빛이 점차 얼어붙어 발치에 눈처럼 흩어졌다.


그 사이에서 혈선을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존명.”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7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곤륜환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78 기련산 +5 24.06.04 1,867 58 14쪽
277 천살문(2) +6 24.06.03 1,877 56 12쪽
276 천살문 +6 24.06.01 2,074 56 18쪽
275 떠나는 바람 +5 24.05.31 1,957 53 15쪽
274 휴식(3) +6 24.05.30 1,944 52 16쪽
273 휴식(2) +6 24.05.29 1,951 60 17쪽
272 휴식 +9 24.05.28 1,976 63 16쪽
271 검흔(3) +7 24.05.27 2,034 60 16쪽
270 검흔(2) +8 24.05.24 2,155 67 20쪽
269 검흔 +9 24.05.23 2,055 64 15쪽
268 천라방(2) +6 24.05.22 2,080 59 16쪽
267 천라방 +6 24.05.21 2,055 61 15쪽
266 천독(3) +7 24.05.20 2,008 62 15쪽
265 천독(2) +7 24.05.18 2,154 58 18쪽
264 천독 +7 24.05.17 2,024 64 15쪽
263 무극(無極)(3) +10 24.05.16 2,058 64 19쪽
262 무극(無極)(2) +6 24.05.15 2,083 62 22쪽
261 무극(無極) +10 24.05.14 2,083 65 20쪽
260 권마(拳魔)(5) +8 24.05.13 2,086 61 17쪽
259 권마(拳魔)(4) +9 24.05.11 2,170 63 18쪽
258 권마(拳魔)(3) +8 24.05.10 2,018 63 15쪽
257 권마(拳魔)(2) +6 24.05.09 2,050 60 16쪽
256 권마(拳魔) +6 24.05.08 2,134 64 16쪽
255 서주(4) +6 24.05.07 2,158 64 16쪽
254 서주(3) +7 24.05.06 2,132 65 14쪽
253 서주(2) +7 24.05.03 2,453 66 17쪽
» 서주 +7 24.05.02 2,390 64 17쪽
251 푸른 별(9) +7 24.05.01 2,200 67 16쪽
250 푸른 별(8) +6 24.04.30 2,225 61 16쪽
249 푸른 별(7) +8 24.04.29 2,225 67 2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