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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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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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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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야방(8)

DUMMY

“절맥증이라고?”


백연의 말에 반응한 것은 뜻밖에도 팽악이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거한의 그림자가 소녀의 앞으로 드리웠다.


“그걸 어떻게 알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확실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팽악이 백연을 쳐다보았다.


“본래 혈도에 진기를 흘려넣어 보기 전에는 진단하기 힘든 병이다. 그것 조차도 뛰어난 의원이나 기감이 예민한 고수가 아니면 안되지. 그런데 어떻게 그리 말하는지 모르겠군.”

“절맥증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


백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또한 절맥증이 겉으로 보아 증세를 알아차리기 굉장히 힘든 병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증세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입니다. 바깥으로 한기가 새어나와요. 음(陰) 계열의 절맥증으로 보이는데, 이 정도로 심한게 아니었으면 저도 몰랐을겁니다.”

“......무슨 말이에요?”


소녀가 물어본다.


그 사이에 섞인 숨결에서는 응당 느껴져야 할 온기가 부족했다. 외려 극한(劇寒)의 빙공(氷功)을 익힌 이들이 무공을 시전할때 내뿜는 것 같은 차가운 호흡이다. 얼핏 겨울의 찬 공기와 섞여 분간하기 힘들었음에도 백연의 기감에는 선명히 느껴졌다.


“숨결이 차고, 이 날씨에도 볼이 창백합니다. 혈색이 돌지 않아요.”

“얼굴이 시체처럼 하얀건 네놈도 그렇지 않나?”

“그리고 무엇보다 입김이 없습니다.”

“......그건.”


팽악이 말을 흐렸다.


백연의 말대로였다. 선아의 앞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꼬마의 입에서는 응당 새어나와야 할 흐린 입김이 하나도 없었다. 심법을 익혀 추위와 더위를 평범한 이들보다 쉬이 견디는 무인들조차 그런 자연 현상은 어찌할 수 없거늘.


늦겨울이다. 곧 봄이 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눈앞의 소녀는 아니었다.


끝나지 않는 겨울을 가득 몰아 몸에 가둬놓은 듯 하다. 백연이 언급하고 나서야 팽악은 소녀로부터 느릿하게 새어나오는 차가운 한기를 인지했다.


“허.”


팽악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의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그토록 덩치가 큰 무인이 쳐다보면 무서워 뒤로 숨을법도 하건만, 손에 작은 조각을 쥔 소녀는 그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꼬마야.”


팽악이 입을 열었다. 소녀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이 무례하고 맹랑하기 그지 없었으나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추우냐?”

“......”


그의 물음에 고민하듯 입을 달싹거린 소녀가 이윽고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그러나 그 동작에 망설임이 묻어있다는 것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서있는 소녀가 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다는 사실도.


팽악이 혀를 찼다. 그가 백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치료할 수 있나?”

“제가요? 저는 의원이 아닌데.”

“좀......”


팽악이 퉁명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네놈은 뭔가 해결책이 있을 것 아니냐.”

“근거 없는 믿음이군요.”

“나를 이겨먹은 놈이면 그정도는 해야지.”


백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해결책이라. 절맥증은 위험한 병이다. 치료하기가 극히 어려운데,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의원을 찾는 것 부터 문제인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해결책은 모두가 안다. 막대한 양(陽)기로 음기를 중화시키면 그만. 하지만 그만한 열양지기를 지닌 영단을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눈앞의 소녀가 구할 방법은 더더욱 없고.


‘심지어는 영약이나 영단이 있다 해도 문제야.’


이 소녀는 너무 어리다.


“몇살이니? 이름은 뭐야? 언니한테만 말해주라.”

“......아홉 살. 석려려에요.”


열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막대한 열양지기가 내제된 영단을 먹고 무난히 버틸 수 있을까. 심법을 익힌 상태에서 뛰어난 고수가 진기도인을 해줘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심법은 커녕 기본적인 몸 상태조차 약해 보이는 상황.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야. 뛰어난 실력자가 필요한데.’


의술에 뛰어난 조예가 있는 인물. 동시에 이곳에서 멀리 있지 않을 사람.


잠시 고민하던 백연이 시선을 번쩍 들어올렸다.


“팽악. 이곳에 제갈세가가 와 있습니까?”

“제갈? 당연하지. 놈들이 비무제전에 빠질리가 없잖나.”

“혹시 제갈명이라고 아시는지요.”

“......제갈명?”


미간을 좁힌 팽악이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내가 이름을 모를 정도면 직계는 아닌가본데. 뭐하는 사람이지?”

“뛰어난 약사라고 하더군요. 저도 직접 만나본건 아닙니다만.”

“약사? 제갈의 약사면......설마 약선객(藥仙客)을 말하는건가?”


갑자기 튀어나온 별호가 높았다. 백연은 처음 들어보는 별호임에도 그 위명이 가볍지 않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약선이라뇨? 그 정도로 유명합니까?”

“아니, 아니. 약선객이다. 뛰어난건 맞는데 아직 젊어. 다만 굉장히 괴팍한 인물이고 제갈세가 출신이지만 가문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만 안다.”

“그렇군요.”

“나도 별호와 몇몇 소문 말고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놈이 이번 비무제전에 왔을 것 같지는 않다만.”

“확인은 해봐야지요.”


백연이 말했다.


제갈명이 이곳에 와 있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 했지만, 백연은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루주와 나눴던 대화 때문이었다.


-당신을 궁금해 하더라고요. 그 사람,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닌데.


백연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을 터다. 루주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이번 비무제에 참가한다는 사실도 이미 인지했을 터. 그렇다고 하면 한번쯤 방문했을 가능성도 낮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지만.’


당장 절맥증을 치료할 수 있는 의원을 찾을 방법이 따로 없었다.


“흠, 놈의 소문대로라면 가능할 것 같다만. 지금 당장 데리고 오기는 힘들 듯 보이는데.”

“확실히 증세가 별로 안좋습니다. 몸을 살펴봐야 할 것 같군요.”


백연이 선아의 옆으로 다가갔다. 소녀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석려려라고 했던가.


“려려라고 불러도 될까?”


백연이 생긋 웃으며 묻자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이름이 뭐에요?”

“백연이라고 해.”

“......저 아저씨는?”


석려려가 팽악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에 팽악이 헛웃음을 짓는 소리가 들렸지만 백연은 무시했다.


“팽악이라고 하는 아저씨야.”

“암화, 네놈......”

“그런데 려려야, 조금 춥지 않니? 괜찮아?”

“조금 추워요.”

“추운데 왜 이렇게 밖에 나와있어. 집에 들어가서 있지.”


백연의 말에 석려려가 고개를 저었다.


“똑같아요.”


집 안에 있어도 춥다는 의미. 날씨 때문이 아니라는 소리다.


백연이 한숨을 삼켰다. 이미 주변의 온도와 상관없이 추위를 느끼고 있는 상태이다. 절맥증 증세가 심화되고 있는 것인데,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석려려는 몸 안에서부터 강렬한 한기가 천천히 몸을 좀먹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잘 참는데.’


보통 어린 나이부터 절맥증을 겪는 이들은 광인(狂人)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부유하고 위세 있는 가문이 아닌, 절맥증임을 인지하지도 못할 평범한 아이들은 더욱 그렇다. 양기의 절맥증을 앓고 있는 아이들이 더 심하다지만 음기의 절맥증도 크게 다를것은 없다.


혈맥과 장기가 속에서부터 얼어붙는 것 같은 한기를 사계절 내내 항시 품고 사는데 어떻게 고통스럽지 않을까.


‘일단은 증세 완화부터 시켜야 해.’


백연이 생각했다.


치료는 그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당장의 한기 정도라면 그가 어느 정도 몰아낼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백연이 몸을 일으켰다.


“선아야. 물좀 가져다 줄래? 차 한잔만 끓이자.”

“알았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어난 선아가 어딘가로 향했다. 마을에 있을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 심산인 모양.


“팽악. 당신은 좀 주변을 살펴 주실수 있겠습니까? 석 야장이 나타는 것도 확인좀 해주시고.”

“알았다.”


왠일로 군말없이 수긍하는 팽악을 보며 백연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 발자국.”

“알고 있다.”

“조심하세요. 무슨 일이 일어나면 혼자 끝장을 보려 하지 말고 저부터 부르시면 됩니다.”

“아주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애로 보는군.”


혀를 찬 팽악이 가벼운 손짓으로 등 뒤의 도를 풀어냈다. 어깨에 큼직한 도를 비스듬히 걸친 팽악이 백연을 향해 말했다.


“일이 터지면 말로 안하겠다. 건곤연환탈백도(乾坤連環奪魄刀). 일초식이면 근방 전체에 들리겠지.”

“이제 좀 더 잘 다룰 수 있는겁니까?”

“원래 잘 다뤘다. 건방지긴.”

“첫 두초식은 넘어섰나 보군요.”

“이제 네 초식이다. 네놈 골통을 부숴버릴 수 있는 수준이지.”


씩 웃은 팽악이 몸을 돌렸다. 그가 가볍게 발을 구르는 순간.


파악!


눈발이 옅게 튀어오르더니 거한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마 마을 전체를 지켜볼 수 있는 곳으로 향했을 것이다.


‘아무일 없을 가능성이 높지만.’


옅은 불안감이 공기중에 흐르고 있었다. 백연은 이미 이번 일의 범인이 석 야장임을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중요한 것은 그쪽이 아니었다.


그와 얽혀있을 사람들. 우선은 석 야장이 무사히 이곳에 돌아올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이 할 일은 하나.


“려려야, 우선은 들어가 있을까? 석 야장님은 보통 언제 오시니?”

“할아버지는 저녁에 올거에요.”

“그렇구나.”


석려려와 함께 석 야장의 집에 들어갔다. 아담한 집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가득 새어나오고 있었다. 손녀를 위해 불을 아낌없이 떼준 모양이다. 따뜻한 것을 넘어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이건 뭐, 어지간한 세가들보다 더 따뜻한데.’


돈좀 있는 가문들에 가도 이리 불을 지피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상당한 비용이 들기 때문인데, 체온을 보존해야 하는 산달의 여인이나 환자들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없다 봐도 좋다.


그러나, 집 안에 들어서도 석려려의 창백한 얼굴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숨결에서 새어나오는 한기도.


그녀와 가까이 있는 것 만으로도 백연의 몸에까지 한기가 전해져 온다. 절맥증의 병세가 깊이 진행된 것 뿐만 아니라 절맥증 자체도 급이 높은 것인듯 했다.


‘태음(太陰)까진 아니어도 구음절맥(九陰絶脈)은 되나.’


자세한 것은 의원이 진찰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아가 돌아왔다.


“여기. 려려는 좀 괜찮아?”

“괜찮아요. 언제나랑 같은데.”

“언제나랑 같다니......”


선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의 적갈색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 깃들었다. 석려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녀가 이윽고 백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라도 해줄 수 있는거지?”

“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

“다행이다. 네가 있어서.”


한없는 신뢰의 눈길에 백연이 옅은 웃음을 지었다.


당장 해야할 것은 석려려의 절맥증 증세를 완화시키고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것. 그렇게 제갈명이 왔는지를 확인할때까지 아이의 병세를 붙들어 놔야 한다.


‘지금은 며칠 안에 급사해도 이상하지 않아.’


지나치게 음기가 강하다. 몸이 못 버틸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 의식이 흐려지는 단계까지 가지는 않았기에 다행이나, 이대로 놔두면 안된다.


백연이 품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내었다. 그것을 여는 순간 방안에 맑은 향이 탁 퍼져나갔다. 익숙한 향에 선아가 눈을 크게 떴다.


“어라, 그걸 가져왔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것은 선란으로 만든 영단이었다. 남은 영단의 대부분은 곤륜산에 보관해두고 왔지만, 유사시를 대비해 챙겨온 것이 있었다. 누가 다치거나 했을 경우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용도로 쓸줄은 몰랐지만.’


백연이 조심스레 영단을 손에 얹고 기파를 일으켰다. 섬세한 손길이 영단을 스치는 순간, 영단이 정확히 네 조각으로 갈라졌다.


그 중 세 조각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백연이 한조각을 선아에게 건네었다.


“이걸 넣고 물을 끓여줘.”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방 한구석에 치워져 있던 찻주전자를 찾은 선아가 영단을 담고 물을 끓이자 청아한 향이 방 안에 가득 들어찼다.


봄날의 향취였다. 그 향을 맡은 석려려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질 정도로 기분 좋아지는 향이었다.


“그건 뭐에요?”

“몸에 좋은거야. 우리 려려 주려고 만들고 있는데, 조금만 기다려 줄래?”

“맛있겠다.”

“맛은 그렇게 없을지도......?”


그동안 백연은 천천히 눈을 감고 스스로의 몸을 관조했다.


음기의 절맥증을 치료하거나, 증세를 완화시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양기를 받아들이는 것. 허나 선란으로 만든 영단은 그 기운이 투명하고 맑은 바람에 가깝다. 단순히 영단을 먹는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 기운을 양기로 바꿔야 한다.


태청신공, 현음공, 그리고 적양공.


그가 엮어낸 세가지의 내공운용법.


지금 필요한 것은 태청신공도, 현음공도 아닌, 하나였다.


‘적양공.’


그가 처음으로 만든 내공운용법이자, 열양지기의 극치를 달리는 화(火)기의 무공.


최근에 항시 일으키고 있던 태청신공의 묘리를 잠시 거둔다. 파도치는 현음공의 수기 또한 잠재웠다. 바람을 뚫고 내려가자, 그의 하단전 깊숙한 곳에 잠든 것은 하나였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불씨 하나.


그것을 품고 숨을 내쉬었다. 불씨 하나에 점차 숨을 더해 키워나간다. 조금씩, 조금씩.


이윽고 아주 느릿하게, 그의 혈도를 타고 적양공 기운이 뻗어나오기 시작했다.


‘무공을 쓸때랑은 다르게.’


아이의 몸이 못 버틸 힘을 뿜어내서는 안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연의 손끝을 따라 천천히 열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불꽃의 형태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이전보다는 확실히 뜨거워진 체온.


이윽고 백연이 눈을 떴다.


“자, 이걸 마시고 등허리를 펴고 앉아볼까?”

“......그러면 따뜻해져요?”

“그럴거야. 하지만 중요한게 있어.”


백연이 석려려와 눈을 마주치고 입을 열었다.


“조금 아플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움직이거나 소리를 지르면 안되거든. 할 수 있겠어?”


자칫하면 내기가 흔들려 주화입마가 올지 모른다. 아홉살 아이에게는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백연은 석려려의 참을성을 믿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절맥증을 품고도 잘 버텼으니.


석려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찻잔을 받아든 석려려가 찻물을 입으로 몇번 불지도 않고 들이켰다. 분명 뜨거운 찻물이었음에도 그녀의 손이 닿는 순간 급격하게 식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눈 감으렴.”


직후 허리를 피고 앉은 석려려의 등허리에 백연이 손을 올렸다. 그러면서 백연은 선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길에 선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생긋 웃었다.


“호법을 서줄게. 너는 집중해.”


그것을 마지막으로 백연의 의식이 가라앉았다.


‘혈도가 얼어붙었다.’


적양공으로 열기를 품은 기운을 석려려의 혈에 밀어넣는 순간 느껴졌다. 아예 강하게 틀어막힌 느낌이었는데, 함부로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백연 자신의 진기를 그냥 밀어넣는 것은 내가중수법을 시전하는 것과 다를바 없었다. 타인의 내공은 함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백연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혈도를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완전히 막힌건 아니야.’


적양공 불꽃을 실처럼 뽑아냈다. 가느다랗게 늘어난 기운이 석려려의 혈도를 타고 스며들어갔다. 느끼지도 못할만큼 미약한 진기. 그러나 그에 소녀의 근육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극히 미미한 불꽃에도 고통을 느끼는 듯 했다.


허나 백연은 멈추지 않았다. 얼어붙은 혈도를 따라 기운을 신중하게 옮겼다. 군데군데 완전히 막힌 혈도는 우회해 기운을 흘렸다.


‘아직 절맥을 치료할 때는 아니야.’


그건 자신이 할 일이 아니다.


이윽고 갈 수 있는 길을 모조리 찾아낸 백연이 완전히 막힌 혈도의 수를 가늠했다.


‘아홉.’


예상대로 구음절맥이었다. 끊겨버린 혈맥은 지금 당장 백연으로썬 어찌 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얼어붙은 길은 어느 정도 녹여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영단을 끓인 차를 석려려에게 먹인 이유였다.


백연 자신의 불꽃을 석려려에게 넘겨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허나, 그것이 석려려가 직접 섭취한 내공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몸에 그냥 흘러들어와 있다.’


혈도에 채 진입하지도 못한채로 몸속에 고여있는 영단의 기운. 본래 하복부에 단전을 형성하지 않은 평범한 이들이 영약을 섭취하면, 기운이 체내를 맴돌며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준다. 어디까지나 과하지 않을 때의 이야기지만.


하지만 지금 석려려는 기운이 돌기는커녕 멈춰 있었다. 얼어붙은 혈도 때문이었다.


그리고 백연은 그 멈춰버린 영단의 기운을 향해 불꽃을 흘렸다.


‘끌어당긴다.’


후욱.


적양공의 불꽃이 가느다란 실처럼 늘어져 영단의 기운을 휘감았다. 가볍게 잡아당겨 혈도로 진입시키자 석려려가 한번 더 몸을 긴장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혈도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을 터.


허나 그렇다고 멈춰서는 안된다.


영단의 기운을 이끌어 당긴다. 혈도를 따라 이어진 영단의 기운을 다시 등허리까지 끌어온다. 그렇게 닿은 기운을 백연 자신의 몸으로 끌어냈다가, 다시 집어넣는다. 한번 백연의 몸에 닿았다 나간 영단의 기운은 적양공에 의해 성질이 뒤바뀌었다.


양기를 만들어 낸것이다.


아주 조금씩, 불꽃이 석려려의 혈도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혈도가 그녀 자신의 불꽃에 의해 느릿하게나마 풀려나간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후.”


백연이 마침내 눈을 떴을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적갈색 눈동자였다. 흠칫 놀란 백연이 눈을 깜빡이자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던 선아가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갑자기 네 체온이 너무 올라가서 위험해지는 줄 알았잖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말을 뱉은 백연은 목이 바짝 말라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고 있는 무복의 소매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몸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뜨거울 정도였다.


“저녁이야. 그런데 려려는 괜찮은거야?”

“괜찮아요.”


선아가 묻는 순간,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전보다 한층 가벼워진 음성. 천천히 눈을 뜬 석려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상태도 백연과 크게 다를바가 없었는데, 머리칼이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 표정은 더없이 환했다. 창백했던 얼굴에 돌아온 미미한 혈색. 절맥증의 증세가 완화된 것이었다.


“이제 안추워요. 어떻게......”


그때였다.


문득 공기가 바르르 떨렸다.


직후.


쩌어어엉!


멀리서부터 사방을 휩쓰는 굉음이 닥쳐왔다. 석려려가 놀라 귀를 틀어막을 정도였다. 찻잔에 옅은 금이 새겨졌다.


가공할 범위와 파괴력의 무공. 보는 순간 백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젠장.”


건곤연환탈백도의 일초식. 팽악의 신호였다.


일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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