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피아니스트의 영혼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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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븐
작품등록일 :
2023.05.1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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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5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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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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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걸음질

DUMMY

“솔직히 안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요.”


이재은과 말다툼을 한 그날 밤.

노헌은 일찌감치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만큼, 자존심이 세다는 거겠지.】


그가 보고 있던 것은 예정돼있는 피아노 콩쿨의 리스트.

제일 상단에 있는 것이 재은이 제시한 콩쿨이었다.


“서울 드림 피아노 콩쿨?”

【아, 이거구나? 내가 중학교 1학년 땐가 나가서 전체대상 받았었는데.】

“오··· 역시, 선생님.”


전체대상.

초, 중, 고등, 대학부를 총 통틀어 가장 훌륭한 연주를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그런데 이 콩쿨은 꽤 유명해서 웬만한 잘 치는 애들은 다 올 텐데?】

“그런 콩쿨에 제가 나가도 될까요···?”


솔직히 노헌은 콩쿨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재은과 다툴 때도 그저 말 몇 마디만 하고 끝낼 생각이었을 뿐.

그러나 현묵의 입에서 나온 단 두 글자, 콩쿨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외치고 있었다.


- “그럼, 콩쿨에서 뜨던가.” -


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뒤늦게야 아차 싶었지만,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이재은은 노헌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콩쿨의 이름까지 말해줬으니까.


“어쩔 수 없죠. 일단 해보는 수밖에요.”

【그런 긍정적인 자세 좋아.】


긍정적인 자세? 아니 노헌은 지금도 포기하고 싶었다.

어차피 질 것이 뻔하니까.


그러나 현묵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부터 한 곡만 죽어라 치면 할 수 있어, 그리고 네 선생님이 누군데?】


노헌의 손에 남아있는 현묵의 연주 감각.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가르침.

마지막으로 시작의 재미를 느낀 노헌의 노력.


이 세 가지만 있다면 충분히 할만하다고 생각한 현묵이었다.


【우선 참가 신청 먼저 하자.】


노헌은 고개를 끄덕이곤 신청 사이트에 들어갔다.


참가 자격은 중등부.

이름과 학교,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를 작성한 후, 남은 빈칸은 단 하나.


“참가곡은 뭐로 하죠?”


콩쿨에서 연주할 곡을 골라야 했다.

하지만, 질문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본 현묵은.


【그거야 당연히 드뷔시의 「아라베스크」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곡을 정했다.


“네? 「아라베스크」도 괜찮아요?”

【왜 안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노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리나의 옛 콩쿨 영상.

아마 그녀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 「아라베스크」를 연주했던 거로 기억하고 있었다.


“저는 중등부인데 이재은이 쳤던 쇼팽의 「흑건」처럼 더 어려운 곡 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실 노헌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중등부에 들어서면 어려운 입시 곡을 연주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러나 그건 보통 사람들의 경우.


【그건 예전부터 꾸준히 연주한 친구들 얘기고 너는 다르잖아.】


노헌은 고작 3일밖에 안 된 초보자였다.


지금부터 아무리 그가 노력해도 입시 곡을 완성하는 건 현묵이 봐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물론 「아라베스크」가 테크닉적인 면에선 입시 곡보단 쉽겠지, 그런데 피아노란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야.】


피아노뿐만이 아니다.

노래를 부를 때도 그저 고음만 잘 부른다고 다가 아니지 않은가?

호흡 하나하나에 감정을 실어 듣는 사람이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또한 노래의 일부분.


【피아노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하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 그게 관건이지.】


충분히 이해되는 현묵의 설명.

그렇게 노헌의 참가곡은 정해졌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로.



♪♪♪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아직 중학생이구나.’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현묵으로선 천만다행.


재은과 노헌이 싸울 때, 현묵은 그저 콩쿨, 단 두 글자를 흘렸을 뿐, 다른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현묵이 흘린 미끼를 노헌이 덥석 물어준 것뿐.

만약 노헌이 조금 더 성숙했다면 콩쿨에 도전하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도 분명 있었다.


‘그렇게 됐다면 쇼팽으로 가는 길은 더욱 험하고 멀어졌겠지.’


안 그래도 노헌은 천예고등학교의 스카우트를 거절한 상황.

아무리 그가 현묵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재미를 느껴도 전공을 하지 않는다면 쇼팽으론 절대 다가갈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노헌이 조금 더 전공의 길로 갈 수 있을까?’


하고 현묵이 생각하던 참에 나타난 것이 바로 이재은이었다.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악역.

아무리 노헌이 어른스러운 편이라도 아직 어린 중학생일 뿐, 참고 참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마치 화산이 한계에 도달하면 불꽃을 뿜어내듯.

누군가는 싸움으로, 누군가는 욕설로, 누군가는 눈물로 분을 삭인다.

현묵은 그저 노헌에게 콩쿨이라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해준 것이다.

그의 목적을 몰래 숨겨서.


‘그래도 아직 몰라, 콩쿨을 준비하는 과정에 포기할 수도 있고, 결과가 안 좋아 피아노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도 있어.’


그렇게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지금의 내 역할이지만.


지금도 학교 수업을 받는 노헌.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며 현묵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



‘피시방은 당분간 그만 가야겠어.’


학교를 마치고 연습실로 가는 길, 노헌은 생각했다.

콩쿨이 끝나기 전까진 피아노에만 집중하자고.


계기는 어젯밤 잠들기 전 본 영상.

리나의 「아라베스크」.

피아노를 치기 전에 매일 들어도 대단하게 느껴졌지만, 피아노를 배우자···.


‘이런 연주를 초등학교 때부터 하고 있었구나.’


배우기 전까지만 해도 몰랐던 섬세함이 귀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나도 이렇게 치고 싶다.’


이런 아름답고 감미로운 「아라베스크」를 모두 앞에서 당당하게 연주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계속 연습해야겠지.’


노헌은 마음을 다잡고 어느새 도착한 연습실에 들어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검은 그랜드피아노.

그리고.


【오늘부터 체르니는 잠시 멈출 거야.】

“네?”


진도를 멈춘다는 현묵의 선언이었다.


“이제 콩쿨까지 1달 정도 남았는데 진도를 안 나가면 어떡해요?”


콩쿨 날짜는 11월 30일.

내일이면 11월이 될, 10월의 마지막 날로서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시간도 부족한데 진도를 멈춘다니···.’


하지만, 언제나 마찬가지로 현묵은 노헌에게 답을 가르쳐주었다.


【고작 1달이라는 시간이기 때문에 진도를 멈춘다는 거야. 노헌, 네가 오늘부터 연습해야 할 건 바로···.】


콩쿨의 참가곡, 「아라베스크」니까.


“네? 오늘부터요? 하지만 전 아직 아라베스크를 칠 실력이―”

【또 그런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지 말라 했지?】


노헌은 피아노를 배우기 전 현묵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들 처음에는 못 하는 게 정상이라고.


“아,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거까진 아니고.】


콩쿨 준비.

그것은 단 한 과목만 보는 시험이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보는 시험은 여러 가지 과목을 한 번에 공부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콩쿨은 참가곡, 단 한 개만 죽어라 연습하면 된다.


물론 참가곡이 하나가 아닌 두, 세 개인 콩쿨도 있긴 했지만, 노헌이 이번에 참가하는 콩쿨은 단 한 곡이면 충분했다.


【한마디로 한 달 동안 한 곡만 벼락치기 하면 된다는 거지.】


진도를 나가지 않더라도 「아라베스크」는 현재 노헌 치고 있는 책보다는 훨씬 어렵기에 연습하다 보면 실력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연습해 보자】

“네.”


노헌은 리나의 책장에 들어있는 악보집을 꺼내왔다.

두툼한 악보집, 그 안에 들어있는 「아라베스크」의 악보.

한눈에 봐도 지금까지 노헌이 쳤던 곡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자, 급하게 할 필요 없어, 왼손, 오른손 따로 천천히 연습해 보자.】


노헌은 오른손으로 악보를 따라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아직 악보를 읽는 데에 서툴러 한 음, 한 음, 치는 것에 시간이 걸렸지만, 버벅거리면서도 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기의 걸음마.

그러나 언젠가는 저 푸른 초원을 달릴 수 있는 그의 첫걸음이었다.



♪♪♪



집, 학교, 연습실.

이 세 곳을 오간 지, 2주가 지났다.

평일에는 학교 끝나고 곧장 연습실로 향했으며 주말도 별반 차이는 없었다.

집에 있는 시간은 그저 밥을 먹거나, 잠을 잘 때뿐.


이날도 평소처럼 학교를 마친 후 연습실에 갔다 온 날이었다.


“오빠, 요즘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집에 들어오자 말을 걸어오는 동생, 나은.


“그냥, 피아노 연습 좀 하다 왔어.”


노헌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오빠, 학원도 안 다니잖아, 연습은 어디서 하는 건데?”


어째선지 평소보다 질문이 많은 동생에 노헌은 조금 당황했다.


“어, 어? 그··· 리나네 집.”

“뭐? 리나 언니 집? 프랑스로 유학 갔다면서.”

“피아노 연습할 때가 없어서 빌렸지.”


노헌의 대답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는 나은.


“이제 됐지?”


그 말을 끝으로 노헌이 방으로 들어간 순간이었다.


“엄마, 아빠한테 말하면 되잖아···.”


등 뒤에서 들리는 자그마한 목소리.

노헌은 말없이 방문을 닫았다.


무거운 분위기.

가정사는 항상 물어보기 어렵다.

위로를 해주고 싶어도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도 나름 정들은 제자였기에 현묵은 위로를 하려 입을 열었다.


【노헌―】

―위잉 위잉


그러나 갑작스레 핸드폰에서 울리는 진동.

전화를 건 사람은 친구, 리나였다.


“여보세요?”

“봉쥬르~ 노헌!”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활기찬 그녀의 목소리.


“피아노는 잘 치고 있어?”

“당연하지! 나 이리나야.”


자신감이 가득한 그녀의 대답에 무거웠던 분위기는 어느새 가벼워져 있었다.


“그러는 너는 잘 치고 있어? 내 피아노는 어때? 소리 엄청 좋지!”


질문 폭탄을 던져대는 리나.


“열심히 연습 중이지, 그리고 확실히 그랜드피아노라 소리가 되게 좋더라.”

“내 피아노라서 좋은 거야!”


리나의 목소리만 듣는 것만으로도 현묵은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글쎄 여기 애들이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잇는 리나.


“뭐라 부르는데?”

“리나리라고 불러!”

【푸핫!】


이리나를 영어 이름으로 쓰면.

Lina Lee.

한국 발음으로 읽으면 리나리.


“선생님 이게 재밌으세요?”


핸드폰을 입에서 멀리한 채, 노헌이 물었지만, 여전히 웃느라 대답하지 못하는 현묵.


“에이! 이노헌! 왜 아무 말도 안 해! 재미없게!”

“아아, 무슨 말 했었어?”

“됐네요!”


노헌은 한동안 리나의 프랑스 이야기를 들었다.

달팽이 요리를 먹었는데 식감이 별로라느니, 에펠탑이 생각보다 낡았다느니 등등.


“그래도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엄청 많더라!”


그렇지만, 항상 그녀의 이야기는 피아노로 끝났다.


“배울 부분이 많아서 유학 오길 진짜 잘한 거 같아!”


신난 리나의 목소리를 듣자, 노헌은 이재은이 떠올랐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그녀가.


“너는 너보다 잘 치는 사람 보면 질투 같은 거 안 나?”

“야야, 질투할 시간이 어딨어, 살아남기 바빠죽겠는데.”


역시 리나는 노헌이 알고 있던 리나다웠다.


【정말 대단하네, 나는 그러지 못했는데···.】


그때 나지막이 흘리는 현묵의 혼잣말.

무슨 의민지 물어보고 싶은 노헌이었지만, 계속해서 핸드폰에서 넘어오는 리나의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나, 다음 달에, 독일에서 열리는 콩쿨 나가기로 했어!”

“콩쿨?”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노헌이 가장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이었다.


“응, 여기서 우승하면 유명한 오케스트라랑 협주도 할 수 있대!”


오케스트라와의 협주.

노헌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우승하면 비행기티켓 보내줄 테니까, 꼭 보러와야 해?”

“어어, 그래.”


길었던 통화를 마치자, 방금까지만 해도 떠들썩했던 분위기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노헌의 방에 남은 것은 침묵.


‘대단하네, 리나는···.’


노헌은 항상 밝고 긍정적인 리나가 존경스러웠다.


‘나는 고작 2주 쳤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생각보다 더 어려운 「아라베스크」.

이제 콩쿨까지 남은 날은 고작 2주.

그럼에도 노헌은 곡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 내가 전공은 무슨 전공이야. 전공은 선생님이나 리나 같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쇼팽에서 한 발짝 멀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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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첫 번째 콩쿨 +2 23.05.18 218 10 13쪽
8 천예중, 정하린 +2 23.05.17 217 12 11쪽
7 콩쿨 견학 +3 23.05.16 221 9 13쪽
» 뒷걸음질 +1 23.05.15 229 12 12쪽
5 천예고등학교 +1 23.05.14 235 10 12쪽
4 88명의 친구 +2 23.05.13 260 11 12쪽
3 시작의 아라베스크 +1 23.05.12 318 13 12쪽
2 피아니스트와 중학생 +1 23.05.11 397 10 12쪽
1 하늘에서 떨어진 피아니스트 +2 23.05.10 688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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