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피아니스트의 영혼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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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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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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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5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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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1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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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늦었어

DUMMY

고등부까지 모든 연주를 마친 예선전.

남은 것은 단 하나, 결과 발표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대 위, 마이크를 들고 서 있는 사회자와 시상할 준비를 하는 심사위원들.

노헌은 관객석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봤다.


“사과할 준비나 해, 노헌아~”


그의 내기 상대인 이재은과 함께.


내기에서 진 사람이 해야 할 것은 그저 단순했다.

진심을 담아서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


‘그런데, 내가 대체 뭘 잘못 했어?’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이재은.

노헌은 그저 그녀의 히스테리를 참다못해 그녀의 잘못을 짚어줬을 뿐이었다.

제3 자가 봐도 아무 잘못도 없어 보이는 노헌, 그러나 그는 재은이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었다.


‘대충 자기 심기를 거스른 걸 사과하라는 거겠지.’


자존심 강한 그녀의 성격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사과는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겠지, 재은아.”


노헌이 그녀의 빈정거림을 똑같이 되돌려준 순간.


“지금부터 서울 드림 피아노 콩쿨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연주회장에 울려 퍼지는 사회자의 목소리.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무대 위를 주목했다.


“우선 학년 대상입니다.”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각 학년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를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었다.


“초등부 학년 대상, 185번 한주희.”


발표와 동시에 한 구석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

수상자로 보이는 초등학생과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이 두 손을 맞잡고 펄쩍 뛰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다 학생이 무대 위로 올라오는 걸 확인한 사회자는 두 번째 수상자를 발표했다.


“중등부 학년 대상, 259번 김준서.”


바로 노헌의 앞 순서였던 준서였다.

저 멀리, 구석에서 일어나 태연하게 무대 위로 올라가는 그.

마치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마지막으로 고등부 학년 대상, 306번 박주선.”


쭈뼛쭈뼛 일어나 올라가는 큰 키의 고등학생까지.

학년 대상 수상자들이 모두 모였을 때, 전체 대상이 발표되었다.


전체 참가자 중 가장 독보적인 연주를 한 사람에게 주는 전체 대상.

수상자는 모두가 예상하다시피.


“전체 대상, 축하드립니다. 219번 정하린!”


정하린, 바로 그녀였다.



♪♪♪



- “정말 실망이야.” -



노헌과 준서가 대기실을 나섰을 때, 딱 한 마디를 남기고 뒤돌아선 하린.


‘쟤가 뭔데 나한테 실망을 해?’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애초에 하린과 마주친 건 오늘이 두 번째.

준서가 물어봤을 때도 그랬지만, 그녀와 노헌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린이 일방적으로 노헌에게 기대를 품고 있었을 뿐.

그러나 그 사실을 노헌이 알고 있을 리는 없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한 달 동안, 현묵의 밀착 강의를 받으며 피아노를 쳤다.

늘 포기하고 싶었지만, 버틴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고작 실망이라니.

노헌은 억울할 따름이었다.


“노헌, 너무 서운해하지 마. 정하린도 나쁜 의도는 아니다.”


그런 노헌을 달래주는 준서.

오랫동안 그녀를 봐왔던 준서로서 어느 정도 하린이 이해가 가긴 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정하린에겐 1, 2등을 다투던 여자애가 있었는데, 지금은 유학을 가버려서, 허전해서 그럴 거다.”


노헌이 전에 재은에게도 들었던 말.

리나의 이야기였다.


“그런 거면··· 어쩔 수 없지.”


리나가 유학을 가던 날, 노헌은 웃으면서 보내주었다.

자신의 꿈을 찾으러 간다기에.

하지만, 가족 같던 친구가 하루 만에 사라졌다는 허전함은 쉽게 달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사람이 바로 현묵.

그는 노헌에게 제안했다.

시작의 「아라베스크」를 쳐보지 않겠냐고.


처음에는 단순히 현묵의 의도가 궁금해 피아노를 배웠다.

혹시 무언가 노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러나 그는 성심성의껏 가르쳐 주었고, 영상 때 이후로는 수상쩍은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콩쿨에서 뜨던가.”


그러다가 시작된 이재은과의 콩쿨 내기.

노헌의 참가곡은 리나가 예전 무대에서 연주했던 드뷔시의 「아라베스크」였다.


‘그래, 이 곡으로 떠나보내 주자.’


가족보다 더 가족 같던 그녀.

볼 때마다 걱정되어 저절로 잔소리하게 되는 친구.

꿈을 찾기 위해 세계로 떠난 소녀.


노헌이 시작의 「아라베스크」를 연주할 때, 담겨있던 것은 리나와의 추억이었다.


“그래도, 다음부턴 정하린이 직접 설명하라고 해.”

“그래, 이해해줘서 고맙다.”


누구보다 그녀의 빈자리를 느꼈던 노헌이었기에 하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마지막으로 예선을 통과한 참가자들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본선에 참가할 수 있는 인원은 수상자들을 포함한 각 학년의 5명입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초등부 5명의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한 사회자.

이 순간이 재은과 결판을 지을 시간이었다.


“중등부. 정하린, 김준서, 이재은―”


본선에 반드시 진출하는 예선의 수상자.

하린과 준서의 이름 바로 뒤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재은은 벌써 자신이 이겼다는 듯 노헌을 바라보았다.


【아직 두 명이나 더 남았잖아. 포기하지 마.】


긴장되는 순간.

노헌은 현묵의 말과 함께 눈을 감았다.


“최지우 그리고―”


마지막 하나 남은 이름.

여기서 반드시 나와야 했다.

두근거리는 심장.


‘제발!’


등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간절히 빌자―


“이노헌입니다!”


사회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기다렸던 이름.


【봐! 할 수 있잖아!】

“하아아···.”


노헌은 곧바로 녹초가 되어 의자 밑으로 흘러내렸다.


“·····.”


반쯤 바닥에 앉은 상태로 흘깃 옆을 쳐다보자, 아무 말 없는 재은.

어떻게 보면 노헌과 그녀, 둘 다 본선에 진출했기에 무승부나 다름없었다.


“이상으로 서울 드림 피아노 콩쿨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느새 고등부까지 발표를 마치고 예선 종료를 알리는 방송.

연주회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본선···.”


그때 재은의 입에서 조그맣게 흘러나오는 말.


“뭐?”

“본선에서 다시 붙어.”


정확한 순위까지 알려주는 본선.

그때 결판을 짓자는 뜻이었다.


“그래.”


노헌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본선, 전국 드림 피아노 콩쿨이 열리는 날은 다음 주 토요일.

연습할 시간이 일주일이나 더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좀만 더 노력하자.’


연주회장을 나가며 노헌은 다음을 기약했다.



♪♪♪



연습은 순조로웠다.

애초에 한 달 동안 했던 것을 일주일 더 하는 것뿐, 특별히 그의 생활에서 바뀐 점은 없었다.


오늘 역시도 평상시처럼 학교가 끝나면 연습실로 향하려 했었는데―


“노헌아, 오늘 진로상담 있으니까, 방과 후에 남아라.”


하교 시간, 담임 선생님의 통보.

그렇다. 지금은 중학교 3학년이 끝나가는 12월.

고등학교의 진학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진로상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끌려간 상담실.

노헌은 담임 선생님과 책상에 마주 앉았다.


“그래서 피아노 전공은 생각해봤니?”


먼저 운을 띄우는 선생님.

저번에 천예고등학교에서 들어온 스카우트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선생님도 노헌이가 피아노 치는 건 몰랐는데 말이야. 하하.”

“괜찮아요. 저희 부모님도 모르는걸요.”


아니, 여동생, 이나은이 말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웬만하면 부모님 귀엔 안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하고 노헌이 생각하는 사이.


“노헌아, 너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선생님은 진로상담의 본론을 꺼냈다.


장래희망.

좀 더 재밌고 생기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정해야 하는 것.

솔직히 노헌은 이것이 굉장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딱히 하고 싶은 건 없는데···.’


그저 평범하게 대학교에 가고 취업을 하는 순탄한 인생.

가족의 도움 없이도 홀로 독립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출 수 있다면 만사 오케이였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노헌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고등학교는 어디로 진학하게?”


그러자 바로 넘어가는 다음 질문.

이제 중학생 시절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슬슬 고등학교를 정해야 했다.


“그냥, 현성고 갈 거 같은데요?”


노헌이 다니는 현성중학교는 현성고등학교 산하의 중학교였다.

그러다 보니, 이 학교의 학생들은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바로 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현성고에 갈 거면 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겠네?”

“그렇겠죠?”


노헌은 한시라도 빨리 이 상담을 끝내고 연습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끝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선생님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노헌아, 이건 강요는 아닌데, 만약 하고 싶은 게 없다면 피아노를 전공하는 건 어때?”

“아뇨, 전공은 별로···.”


전공은 자신이 아닌, 하린이나 준서, 그리고 리나 같이 진심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노헌은 생각했다.


‘그리고 어차피 못할 게 뻔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세 사람의 풍경.

엄마, 아빠 사이에서 손을 잡고 있는 나은의 모습, 그 자리에 노헌은 없었다.


그런 노헌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건네는 선생님.


“저번에 노헌이가 피아노 친 영상을 봤었거든?”


현묵이 대신 피아노를 쳐주었던 영상 이야기였다.


“솔직히 선생님은 그쪽 분야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웃으면서 피아노를 치는 네 모습이 너무나 즐거워 보였어.”

“그건···.”


제가 아니라 강현묵 피아니스트예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하린, 김준서, 천예고등학교의 교사 정미영.

영상을 본 사람은 모두 노헌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노헌이 아닌 현묵의 연주.


노헌이 아니었다.


“저는 남들처럼 그렇게 잘―.”

“못 치면 어때? 배우려고 전공하는 거 아니야?”


노헌의 말이 턱 막혔다.


“노헌아, 아직 인생은 길어. 직업을 하나 가질 수도 있고, 여러 개를 가질 수도 있어.”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 시작하는 것이 수월한 직업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나전칠기 장인, 도자기 장인 등 세월을 쌓아야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는 직업들이었다.

그리고 예술가도 마찬가지.


“화가들은 자신마다 고유의 그림체가 있잖아? 그게 과연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걸까?”


수많은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결과물.


“만약 네가 어른이 되고 나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물론 시간이 걸려도 노력하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책임감이라는 게 생겨.”


스스로 설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세금을 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남자인 노헌은 군대에 가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 점점 꿈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정말 많거든. 그래서 선생님은 노헌이가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


만약 그때 피아노를 전공했다면.

조금이라도 어릴 때 시작했다면.

포기하지 않았다면.


‘만약 내가 어른이 됐을 때, 이런 후회들을 안 할 자신이 있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지.

고민하던 찰나, 들려오는 현묵의 목소리.


【노헌아, 사실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기엔 이미 늦었어.】


그건 일방적인 선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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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탑의 정상 +2 23.06.24 65 6 11쪽
37 선장과 선원 +2 23.06.21 69 6 11쪽
36 축제 +3 23.06.21 79 6 12쪽
35 밴드부 탈퇴? +3 23.06.18 80 8 11쪽
34 벚꽃이 흩날리던 밤 +3 23.06.16 90 8 11쪽
33 데이트 신청 +3 23.06.15 88 9 11쪽
32 쇼팽 콩쿨 +2 23.06.13 98 7 11쪽
31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3 23.06.11 100 7 11쪽
30 나은과 나비 (2) +2 23.06.09 90 9 12쪽
29 나은과 나비 (1) +3 23.06.07 88 10 12쪽
28 재회 +2 23.06.06 99 7 12쪽
27 All in +2 23.06.05 104 8 12쪽
26 엇갈림 +2 23.06.04 119 8 12쪽
25 졸업식 +2 23.06.03 112 8 11쪽
24 김준서의 목적 +2 23.06.02 121 9 12쪽
23 피아니스트의 대답 +2 23.06.01 122 11 11쪽
22 소년의 답장 +2 23.05.31 135 10 11쪽
21 걱정이 너무 많아 +2 23.05.30 138 11 12쪽
20 독일에서의 만남 +2 23.05.29 151 9 12쪽
19 그거 거짓말이지? +2 23.05.28 154 11 11쪽
18 리나의 선생님 +2 23.05.27 147 12 12쪽
17 랩소디 인 블루 +2 23.05.26 174 10 12쪽
16 싸라기눈 +2 23.05.25 173 9 11쪽
15 기적 +2 23.05.24 186 11 12쪽
14 두 번의 사과 +2 23.05.23 184 10 12쪽
13 그래도 나는 +2 23.05.22 193 11 12쪽
» 이미 늦었어 +2 23.05.21 206 11 11쪽
11 여정의 끝 +3 23.05.20 223 13 11쪽
10 천재와 범재 +2 23.05.19 217 1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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