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추풍검 - 5분 후 갈라져 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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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렉스
작품등록일 :
2023.05.1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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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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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6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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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산검 진림 1

DUMMY

10월 27일.


제주도 한라산 중턱.


새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수첩을 꺼내 펼쳤다.


[20XX/10/22]

[이름 : 최서용]

[문파 : 불명]

[무공 : 환림비검]

[유언 : "아이야··· 실로 번뜩이는구나."]

[78]


"오오, 꽤 많이 죽였네."


둘째 형이 수첩에 얼굴을 들이밀며 한 말이었다.


"상대 팀을 78명이나 처리했다고. 78킬 0데스네. 하하."


둘째 형은 두 팔 벌려 한라산의 공기를 마셨다.


"상쾌하지? 지리산 공기처럼."


전혀, 라고 말할 순 없었다.


그에게 뺨을 맞을 게 뻔했으니까.


둘째 형에겐 거역할 수 없었다.


"다리 겁나 아프네. 왜 이놈도 산에다가 집을 지어놓은 거야?"


둘째 형이 허벅지를 두드리며 불평을 내뱉었다.


"아버지도 아니고. 그렇지?"


그의 말대로였다.


나와 둘째 형이 속한 이가살수문은 지리산 중턱에 있었다.


그런 알려진 장소에 문파를 세우는 건 보통 명망 높은 무림인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 생각해보자면, 이 한라산에 문파를 세운 '진림'이라는 자도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나는 오늘 처리해야 한다.


"삼도문三道門의 석산검법石蒜劍法, 우리 집의 무공들만큼 살법에 특화되어 있진 않지만, 검술의 수준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네."


둘째 형이 말했다.


"내 전문 분야는 검술이 아니니까. 이번엔 네가 상대해야겠지?"


그가 이죽거리며 웃었다.


'이번엔'이 아니라, '이번에도'이겠지.


"월아, 이가살수문의 명예를, 우리 가족의 명예를 수호할 기회를 네게 양도해 주는 거야.'


그래, 어련하시겠어.


"나랑 아버지를 실망시키면 안 되겠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


"이월, 대답해라."


"···응."


"좋았어. 가볼까."


둘째 형은 팔다리를 크게 벌리며 목표물이 살고 있을 저택으로 향했다.


우리 집은 바위와 덩굴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진림의 저택은 그런 게 없이 사방이 탁 트여 있었다.


"이리 오너라!"


둘째 형이 나무로 된 대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마당에서 청소하던 문하생들 몇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모두 민머리에, 검은색의 도복을 입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문하생 하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내 또래로 보였다.


"삼도문에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아아."


둘째 형이 거드럭거리며 대답했다.


"너희 장문인을 만나러 왔다."


"사부님 말씀이십니까? 사부님께선 잠시 삼도문을 비우셨습니다."


"뭐야?"


둘째 형이 인상을 찌푸렸음에도 문하생은 싱글벙글거렸다. 둘째 형이 재차 물었다.


"진림 맞지? 너희 장문인 이름."


"네, 그렇습니다. 안쪽으로 안내해 드릴 테니, 잠시 기다리시지요."


문하생은 나와 둘째 형을 데리고 안뜰로 향했다.


안뜰은 돌바닥으로 되어 있었으며, 돌길의 양옆에 형형색색의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어 있었다.


청소하기는 힘들어 보였지만, 관리만 잘 된다면 낙원이라고 할만한 장소였다.


안뜰의 안쪽에는 숙소가 세워져 있었다.


문하생은 숙소에 딸린 사랑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사방이 창호지 문으로 막혀 있었는데, 이것들을 모두 열어 사방의 각기 다른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남쪽엔 방금 우리가 건너온 안뜰이, 북쪽엔 작은 호수가 하나 있었다.


호수에도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새 소리는 들려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하생들이 양발 발로 마룻바닥을 밟는 소리, 조곤조곤 대화하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식기 두드리는 소리, 단련하는 소리 등 수많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들은 모두 생기 넘치는 소리.


생명의 역동을 고스란히 담은 소리였다.


우리 집은 돌로 지어졌고, 침입을 막기 위해 사방을 돌과 함정으로 둘러싸 적잖이 답답했다.


여긴 나무와 기와로 지어진 저택이었지만, 침입자가 없어 이곳 사람들은 무릉도원의 신선처럼 안빈낙도하며 살고 있었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니 그들이 조금은 부럽게 느껴졌다.


내게도 안식이 주어진다면.


내게도 자유가 주어진다면.


잠시 후 문하생들이 나와 둘째 형 앞으로 밥을 내왔다.


사찰 음식처럼 채소밭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고기도 있었다.


"우리 집밥보다 맛없네."


둘째 형은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그들이 내어 준 밥을 모두 먹어 치웠다.


"하아아아움."


식사를 끝마친 뒤에는 퍼질러지듯이 앉아 하품과 함께 배를 두드렸다.


"겁나 지루하네."


형은 쇠구슬 5개를 꺼내 '공기공기놀이'를 하기도 하고, 쇠구슬 10개로 '2배수 공기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의 지루함은 씻어낼 수 없는 듯했다.


"여긴 뭐 아무것도 없어. 피시방도 없고, 클럽도 없고. 그냥 뭐 놀거리가 없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곧 있으면 진림이 오겠지."


"아가리 닥쳐."


"미안."


"안 되겠어."


둘째 형은 한 손으로 쇠구슬들을 촤르륵 거두고는 벌떡 일어나 안뜰을 바라보았다.


젊고 어린 문하생들이 정갈하게 모여 검술 수련을 하고 있었다.


"배도 꺼트릴 겸 운동이나 좀 해야겠어."


둘째 형은 안뜰로 나가 큰 소리로 문하생들에게 외쳤다.


"거, 나도 좀 끼워주쇼!"


문하생들은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문하생들을 지도하던 청년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물론이죠. 저희 삼도문 검술을 한 번 체험해 보시지요."


"괜찮겠냐? 너희 검술이 외부에 드러나도."


"괜찮습니다. 분명 사부님께서도 똑같이 말씀하셨을 겁니다."


"하, 태평한 양반이로군. 월아!"


둘째 형이 나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쳤다.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와라."


"밖에?"


"아까 올라올 때 시냇가 있던 거 기억나지? 거기서 물 좀 떠와라."


"거, 거기까지 가라고?"


"형 말 안 들을래?"


"아, 아니야. 갔다 올게."


나는 급히 일어나 안뜰로 향했다. 문하생 하나가 낄낄 웃으며 박을 잘라 만든 바가지를 건네주었다.


"저희도 가끔 사부님이 시냇가에서 물 떠오라 시키시거든요."


"아아, 예."


나는 멋쩍게 고개를 숙이며 안뜰을 빠져나갔다.


저택 밖으로 나오니 광활한 푸른 하늘과 다시 한번 맞닥뜨렸다.


"후우."


또 아래까지 내려갔다 올라올 생각을 하니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둘째 형과 잠시나마 떨어져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리 나쁘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산 아래로 향했다.


10분 정도 걸어 시냇가에 도착했다.


돌멩이들이 좌우로 수북이 쌓여 있고, 그 사이로 물길이 나 있었다.


물은 유리처럼 깨끗했다. 무심코 퍼마시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실제로 마셨다.


시원했다.


그런 다음엔 신발을 벗고 시냇물 안에 발을 담갔다.


전에도 이런 일을 한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니 방금 물을 마신 게 조금 더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물은 흘러가는 법이니 발을 씻은 물도 남아있지 않을 테고, 그럼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거꾸로 안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바가지로 물을 퍼낸 뒤 거기다 발을 담가 둘째 형에게 가져다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며 낄낄 웃었다.


한편 이 주변엔 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웬 사내가 웃통을 벗은 채로 시냇물 안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가 길었는지 위로 묶어놓고 있었다.


'괜찮은가, 이런 곳에서 목욕해도.'


여기 문주에게 걸리면 한 소리 듣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나는 슬슬 자리를 뜨기로 했다. 물론 바가지 물에 발을 잠시 담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록 오르막길이었지만, 둘째 형에게 엿을 먹일 생각에 발걸음이 아까보다 한층 가벼웠다.


그런데, 올라갈수록 이상하게 공기가 답답했다.


청정한 풀 내음 사이에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냄새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피 냄새였다.


피 냄새는 저택으로 다가갈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근처에 다친 생물이 보이지도 않는데, 이렇게나 피 냄새가 강렬하다니.


불안했다.


'설마.'


설마 그건 아니겠지.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결코 숨이 차서가 아니었다.


그가 '어떤 짓'을 한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서였다.


그리고 내가 저택에 다시 발을 들였을 때,


그 불안감이 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수많은 문하생이 안뜰의 돌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까까진 검었던 그들의 도복이 지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바닥의 돌도 붉게, 차츰차츰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안뜰에서 두 다리로 서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


나의 둘째 형, 이열이 피 칠갑이 된 채로 등 돌려 서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어어, 왔냐."


그의 얼굴, 안경에 피가 튀어 온통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분명 더러운 걸 싫어할 것이 뻔했음에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상쾌하네. 지리산 공기처럼."


"혀, 형."


나는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야? 가 아니라, 뭐 한 거야? 라고 물어야지."


"대체 뭘 한 거야?"


"운동."


그의 대답은 너무나도 간결했다.


"형, 설마."


반면 나는 분노를 눌러 담아 그에게 물었다.


"이런 짓을 하려고 내게 심부름을 시킨 거야?"


"그래. 네가 있었으면 이런 짓 하지 말라고 말렸을 거 아냐."


"불필요한 학살을 말리는 게 나쁜 행동이야?"


"새끼야, 살수는 사람 좀 죽여도 괜찮아. 너도 지금까지 78명이나 죽였잖아."


"형!"


"안쪽 호수에서 피 좀 씻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둘째 형은 피 묻은 발을 숙소 마룻바닥에 들였다.


그는 내게 무참한 학살 현장과 피비린내를 남기고 떠나갔다.


-삼도문에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물론이죠. 저희 삼도문 검술을 한 번 체험해 보시지요.

-저희도 가끔 사부님이 시냇가에서 물 떠오라 시키시거든요.


아까 그렇게나 싱글벙글 웃던 문하생들이 지금은 말 없는 주검이 되어 있었다.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나라로 내려가 버렸다.


이건··· 도저히 아니다.


이런 건··· 인간으로서의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야.


나는 둘째 형처럼 사람을 식후 운동하듯이 죽일 수 없어.


그렇다면 나는 살수가 아닌 건가?


지금까지 78명이나 죽였는데?


우뚝, 기다란 그림자가 안뜰에 드리웠다.


서쪽으로 져가는 햇빛을 등지고, 살아있는 누군가가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는 젊고 잘생긴 청년이었으며, 허리까지 내려오는 생머리를 갖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검은 도복엔, 붉은 석산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반면 그의 얼굴은 매화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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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하품하생下品下生 2 23.06.12 138 5 13쪽
25 하품하생下品下生 1 23.06.09 146 5 12쪽
24 쟁탈전 삼參 - 종언과 회자정리 +2 23.06.08 148 5 13쪽
23 쟁탈전 삼參 - 백살존과 백살존 23.06.07 150 5 13쪽
22 무엇을 위해 바람은 부는가 3 +2 23.06.06 153 7 15쪽
21 무엇을 위해 바람은 부는가 2 +1 23.06.05 168 6 11쪽
20 무엇을 위해 바람은 부는가 1 23.06.02 155 8 13쪽
19 쟁탈전 이貳 - 원공수라검 원지원 2 23.06.01 162 5 13쪽
18 쟁탈전 이貳 - 원공수라검 원지원 1 23.05.31 183 8 14쪽
17 쟁탈전 일壹 - 정주폭렬공 류지열 2 +1 23.05.30 230 7 14쪽
16 쟁탈전 일壹 - 정주폭렬공 류지열 1 +2 23.05.29 236 12 14쪽
15 병급 작명공 김송하 2 23.05.26 252 13 14쪽
14 병급 작명공 김송하 1 23.05.25 303 14 16쪽
13 열식탄지공 이열 3 +3 23.05.24 346 17 13쪽
12 열식탄지공 이열 2 23.05.23 336 14 12쪽
11 열식탄지공 이열 1 +2 23.05.22 371 16 13쪽
10 벽력독립창 노루아 2 +2 23.05.19 357 19 10쪽
9 벽력독립창 노루아 1 23.05.18 351 21 11쪽
8 석산검 진림 2 +1 23.05.17 356 19 13쪽
» 석산검 진림 1 +1 23.05.16 387 20 11쪽
6 환림비검 최서용 2 23.05.15 445 25 16쪽
5 환림비검 최서용 1 +3 23.05.12 520 27 11쪽
4 만상발도공 조황현 2 23.05.11 542 32 10쪽
3 만상발도공 조황현 1 +1 23.05.10 650 34 12쪽
2 문둥검 문영화 +5 23.05.10 903 38 13쪽
1 이십사수매화검 천추강 +7 23.05.10 1,617 4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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