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귀 소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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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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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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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9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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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장(4).

DUMMY

조그마한 적가장의 장원에 마치 지옥을 옮겨놓은 듯한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누, 누가 살려줘어어!”


장주의 명을 받은 무력대원들이 방금 전까지 같은 편이었던 무사들을 무참히 도륙했고, 사방에서는 비명이 낭자했다.


공포감, 당혹감, 배신감.


섬뜩한 절삭음 뒤에 추수철 보리의 목처럼 후둑 떨어진 적가장 무사들의 얼굴에는 그런 감정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붉은 핏물이 바닥을 덮는다.


저항하는 무사들도 있긴 했지만, 일개 위사들이 정예 무력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상황은 어지럽게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소일도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인 적광에게 달려들지도 않았고, 상잔하는 적가장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애초에 적광을 앞에 두고 한 눈을 팔면 죽을 거였다.


그는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소일도가 중얼거렸다.


“마공이라......”


마공(魔功), 풀이하면 마귀의 무공이다.


말 그대로, 마귀에게 무언가를 바치는 대가로 배운다고 생각될 정도로 끔찍한 부작용을 견디지 않으면 익힐 수 없는 무공이 마공이다.


물론 마공도 다른 무공들처럼 종류도 수백수천 가지나 있을 것이고 부작용도 각양각색이긴 하지만, 적어도 마공에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 하나는 분명했다.


적광은 그런 마공을 익힌 것이다.


그리고 적광이 마공을 익혔다는 것은, 맨 처음 했던 소일도의 추측이 들어맞았다는 말이 된다.


적가장에서 사들인 여인을 흡음마공이나 흡성대법의 재료로 썼을 거라던 생각.


흡음마공의 재료는 여인의 음기다.


소일도는 나지막이 질문했다.


“적광.”

“......”

“네가 익힌 마공이, 흡음마공(吸蔭魔功)이 맞나? 내게 살수를 보낸 이유가, 그저 흑도와 거래했다는 추문을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여인을 거래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마공을 익힌 사실이 들통날까 봐서. 맞나?”


그러자 적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흡음공을 어찌 아느냐?”

“......”


소일도는 입을 꾹 닫았다.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적가장에서 굳이 흑도와 거래한 이유는, 여인을 사들인 뒤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한 여인을 적법한 절차로 데려온다고 해도, ‘적법’하다는 것은 신분이 존재한다는 말. 대거 들여서 마공의 재료로 음기를 모조리 빨아버리면 적가장 내에 존재해야 할 사람이 없는 격이니 덜미를 잡힐 테니까.


때문에 납치된 여인들을 쓴 것이다.


죽어도 뒤탈이 없도록.


그러니까, 무려 삼 년도 전에 납치를 당해서 팔린 소연은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을 거라는 말이었다.


몸에 있는 음기를 다 빨린 채로.


“......”


소일도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무언가가 이 순간, 뚝 끊어졌다.


겨우 붙잡고 있던 무언가. 희망이나, 어떤 목표점 같은 것이.


분명 동생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줄곧 생각해오긴 했는데,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었던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심장이 무겁다.


고아에 백치 병신. 길바닥에서 빌빌 기며 굶어 죽어야 했을 소일도에게, 소연은 손을 뻗어 주었다.


백치라고 해서 은혜를 모르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던 그에게.


철방주는 성을 물려주고 일도라는 이름을 주었다.

설 부인은 어린 소일도를 먹이고 재우고 쓰담았다.

소연은, 구원자였다.


하지만 전부 죽었다.


‘모르겠다.’


지금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그것은 검귀의 기억상에는 없었다. 그것은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배울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마공은......”


소일도가 쥐어짜듯이 입을 열었다.


“실전됐다고 들었는데.”

“실전됐지.”


적광이 덧붙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중원에서 마공은 완전히 실전되었다고 전해질 것이다. 오늘의 소동은 참가자 중 미친 검객이 날뛰어서 죄 없는 무사들을 살해한 것으로 일단락될 것이고.”

“그게, 대답인가.”


툭, 투둑.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일도는 고개를 살짝 들어서 빗방울을 맞았다.


빗방울이 굵었다.


확실한 건, 지금 오는 비가 금방 지나가는 소낙비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끄아아악!”


소일도가 미동도 않고 있는 동안, 어느새 적가장의 마지막 위사가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했다.


장원에 흩뿌려진 핏물이 때마침 내린 비에 씻겨나가고 있었다.


“오지 않을 거라면 내가 가겠다.”


적광이 새카만 장검을 뽑아들고 말했다.


칼자루를 쥔 소일도는, 그 어느 때보다 짐심을 담아서 대답했다.


“갈가리, 베어주마.”


* * *


빗속에서 두 개의 검이 맞부딪혔다.


고막을 찢을 듯한 파찰음을 토해낸 두 고수가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충돌하기를 반복했다.


적광의 검은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무겁고 빨라졌다. 눈은 번들번들한 광기로 물들었고, 검신에서는 거뭇한 마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소일도는 그런 적광의 시꺼먼 장검을 온 힘을 다해 밀어내고 있었다.


칼자루가 부서져라 꽉 쥐고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저 검격을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쩌-엉!


잠시 뒤 둘의 사이의 거리가 또 한 번 멀어졌다.


그러나 소일도는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거칠게 토해내고 있는 반면, 적광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생각보단 잘 버티는구나.”


적광이 고소를 머금었다.


“아예 말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인가. 하긴 말할 체력도 아껴야 할 테니.”


말이 끝맺음과 동시에, 적광이 소일도를 향해 돌진했다. 다시 마기가 서린 장검을 냅다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적가검법이고 초식이고 뭐고 없었다.


마공의 힘에 취해서 힘과 속도로만 휘두르는 검이었다.


검의 기본을 다 잊은 것을 보니, 흡음마공이 아무리 타인의 기운을 끌어다 쓴다지만 시전자의 머리에 마기가 침범하는 부작용까지 대신 져주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충분히 위협적인 검이라는 사실이었다.


검을 귄 손아귀가 서릿발처럼 얼어붙는 듯했다. 흡음마공의 음기가 점차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적광의 성취가 그다지 높지 않아 완전히 얼어붙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검을 쥔 손뼈가 부서질 것처럼 아렸다.


어쩌면 실제로 금 정도는 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소일도는 두렵지도, 아니면 그 어떤 동요를 느끼지도 못했다.


소일도는 마공의 실체를 알았다. 정확히는, 기억하고 있었다.


공포란 미지로부터 오는 것.


이미 아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투웅!


적광이 고작 한 번의 도약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파공성이 일어날 만큼 빠른 접근이었다.


소일도는 뒤로 빠지거나 피하는 대신, 적광을 마주 보고 달렸다.


카가가가가각!


적광과 소일도의 위치가 뒤바뀌며 스쳐간 자리에는 쇠가 갈리는 소리만 남았다. 소일도의 검면이 약간 갈려나가긴 했지만, 크게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곧바로 다시 뒤를 돌아본 소일도가 적광을 향해 쾌검을 내질렀다.


“음!”


적광은 만족스러운 듯이 소리를 내고 장검을 휘둘렀다.


벤다기보다는 몽둥이처럼 휘둘러진 적광의 장검이 소일도의 쾌검과 만났다. 또 한 번 우렛소리가 고동치며 소일도의 검은 살짝 이가 나갔다.


그 미세한 금속이 튀는 것을 놓치지 않은 적광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슬슬 내공이 바닥인가 보구나.”

“......”


그 말이 맞았다.


싸움이 길어지자, 늦깎이인 소일도는 검에 둘러서 경도를 높여야 할 내력이 점차 소모되기 시작했다.


반면에 적광이 무공을 수련해온 시간은 소일도의 수백 배였다. 게다가 마공으로 급격히 쌓은 마기가 더해지면서, 아직 한나절은 싸울 수 있는 상태였다.


“결국 이리 되는군. 검의 실력으로 결착을 내고자 했거늘.”


마치 아쉽다는 듯이 적광이 말했다.


소일도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다시 한번 몸을 낮추고, 마치 불나방처럼 적광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내공이 부족한 상황에서 체력을 소모해가며 먼저 달려드는 것은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조급함인가. 실망이군.”


그렇게 읊조린 적광이 마기를 더욱 짙게 피어 올렸다.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예 검을 부러뜨릴 생각으로 내지른 적광의 장검은, 소일도의 검을 살짝 뒤로 밀면서 가슴 위쪽에 작은 생채기를 냈을 뿐이었다.


“발악을!”


적광이 닥치는 대로 장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소일도는 베일 듯 베이지 않았고,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그의 검도 부러질 듯이 휘어지기만 했고, 계속해서 자잘한 파편만 튀었다.


‘왜지?’


적광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차이는 훨씬 이전부터 벌어졌다. 승부는 진즉에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소일도는 쓰러지지 않았다.


아무리 때리고, 부수려고 하고, 죽이려고 해도 교묘하게 치명상을 피해 살아갔다. 검에 종잡을 수 없는 현묘함이 있는 것도, 또 특별한 절기가 있는 것도 아님에도 그랬다.


다만 소일도의 검은, 검에 충실했다.


내공이 엄청나게 많지도 않았고, 검결이 무슨 용이나 벽력같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자신처럼 마공을 익힌 것도 아니었고, 날 때부터 백회혈이 타통된 천재도 아니었지만.


‘마치......’


소일도의 검은 마치, 검이란 이렇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차갑게, 날카롭게, 정밀하게, 우직하게.


소일도의 검은 그렇게 움직였다.


아니, 소일도와 검이 아니었다. 소일도가 곧 검이고, 검이 곧 소일도였다.


“신검합일(身劍合一)......”


적광은 그 말을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었다.


검과 몸이 하나가 되는 경지.


적광은 그 경지를 목도한 적 없었지만, 눈앞에 낫을 놔두고 기역 자를 모를 만큼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어찌 저 이른 나이에.’


하지만 감탄도 잠시, 검에 홀릴 듯하던 적광이 정신을 차리고 눈살을 내리깔았다.


참으로 아까운 재능이었지만, 지금은 척살해야 할 상대였다.


“그 재능을 가지고 요절하게 됐으니, 애처롭구나.”


소일도를 죽여야 하는 입장인 적광이 생각하기에도, 그는 충분히 잘 버텼다. 이만하면 저승에 가서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냈다고 자랑할 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상황에서 살아 나가기란 불가능했다.


“특별히 너는 내가 경을 외주마.”


끌어올린 마기가 더욱 짙은 색을 띠었다.


어쩌면 다시는 나오지 않을 천재를 제 손으로 부숴야 한다는 생각에, 적광은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끼며 장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적광의 검은 이번에도 막혔다.


게다가, 이제는 힘을 주어도 밀어낼 수 없었다. 맞닿은 소일도의 검이, 마치 산을 상대하는 것처럼 무거웠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체는 더 이상 검격을 받아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 텐데?’


의문이 떠오른 적광은, 맞댄 검 너머로 피부가 붉게 그을려 있는 소일도를 보았다. 그는 마치 전신에 화장을 입은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철연수개검(鐵蓮秀開劍)의 첫 층계.


적근산괴(赤菫山壞).


여기까지 오면서 얻은 깨달음이, 적광과의 일전으로 집대성된 것이다.


붉은 흙으로 이루어진 산이 무너지다.


적근(赤菫)은 특정한 산의 이름 따위가 아니었다.


산이란 즉 태초에 땅을 만들어낸 창조신 반고의 몸(身).


그러니 적근은 곧 소일도의 피부였다.


붉게 달아올랐던 그의 피부가 한 꺼풀 벗겨지고 있었다.


과한 기운을 견디다 못해 터질 것처럼 끓어올랐던 소일도의 피부가 점차 식어갔다.


하지만 힘이 풀렸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검을 쥔 손에 충만한 기운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손을 얼리던 음기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제야 소일도는 어째서 철연수개검의 첫 번째 층계가 이리도 괴랄한 입문 체계를 갖추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경도(硬度)를 시험하겠다는 건가.’


이 검법에 입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용광로 같은 기운 가운데 집어넣어도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철(鐵)과 같은 경지.


최소한 그것이 없으면, 철연수개검의 다음 층계는 영원히 밟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무공은 한없이 주조(鑄造)애 가까웠기에.


단전에서 새로운 기운이 꿈틀거렸다.


그그그극!


소일도의 검이, 검게 침식된 적광의 마검(魔劍)을 밀어내고 있었다.


‘무, 무슨!’


적광이 당황하며 마기를 끌어올렸지만, 밀리기 시작한 검을 멈출 수는 없었다.


장검이 점차 밀리면서 적광이 균형을 잡기 위해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그에 따라 소일도는 한 걸음 전진했다.


"이제부터는."


소일도가 죽일 듯이 적광을 노려보며 한 음절 한 음절 씹어뱉듯 말했다.


"최선을 다해 도망쳐야 할 거야."


전투의 양상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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