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귀 소일도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5.10 18:40
최근연재일 :
2023.06.15 23:20
연재수 :
38 회
조회수 :
34,948
추천수 :
618
글자수 :
204,305

작성
23.05.27 23:20
조회
862
추천
14
글자
12쪽

적가장(2).

DUMMY

소일인(昭一刃).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칼날인(刃)자는, 소일도의 마지막 이름인 도(刀)에 점 하나를 찍어서 만든 가명이었다.


제지를 받지 않고 적가장 깊숙이 들어가려면 무사 시험에 참가해야 했는데, 진짜 이름으로 참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적가장은 살수를 보낼 정도로 소일도를 죽이고 싶어 했고, 소일도는 이미 적가장이 보낸 살수를 베어버렸다.


명확하게 서로를 적으로 인지한 상황.


인피면구까지 써야 하나 싶었지만, 족히 수천은 되어 보이는 참가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이름만 바꾸고 참가한 것이다.


소일도는 일차 시험을 마치고 조금 더 깊숙한 전각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그다지 뛰어난 인재는 없군.’


그것이 현재로서 솔직한 평가였다.


하기야 시험만 통과하면 출셋길에 오르는 셈이니, 각지에서 냄새를 맡고 몰려든 약소 무인들이 너무 많았다. 일차 시험에서 그들 중 진짜배기를 마주칠 가능성은 애초부터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차 시험부터는 달랐다.


무작위 상대라고는 하지만 삼 연승을 해야만 통과할 수 있으니까.


거름망을 한 번 거친, 그대로 골대가 어느 정도 있는 무인들만 남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소일도는 이차 시험 직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므로 힘을 다 보이지도 쓰지도 않은 채 통과해야 한다는 불리한 제약까지 있었다.


‘내력 대결이라, 힘을 많이 빼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소일도는 전각 안에서 대기 중인 다른 무인들을 눈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차 시험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써야 할지 가늠해 보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자네, 내게 무공을 배워볼 생각 없는가?”


소일도가 말을 걸어온 자를 바라봤다.


키는 소일도와 비슷했지만 턱밑으로 검은 수염이 있고 주름살도 제법 있는 것이, 중년 정도의 무인으로 보였다.


“딱히 스승 노릇을 할 생각은 없네.”

“......”


중년인이 뭐라고 떠드는 동안, 소일도는 그의 기백을 관찰했다.


보아하니 태양혈도 볼록하고, 행동이나 몸짓 하나하나에 낭비가 없었다. 신발 뒤꿈치는 깨끗하며 앞꿈치는 헐었다. 손바닥과 정권에는 투박한 굳은살이 배겼다.


전형적인 고수였다.


하지만 그뿐.


경험 많고 노련한 무림인 특유의 여유가 느껴지긴 했지만, 제자로 들어갈 정도의 특별함은 없었다.


그리고, 무슨 보자마자 제자란 말인가.


소일도는 사내가 별난 자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별 괴상한 사람도 다 있군.”


그러자 일순 각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지켜보는 이들의 생각은 알 만했다.


‘지금 저놈 뭐라고 한 거지?’

‘대협의 제안을 거절했어?’

‘저 미친놈, 제자로 삼아달라고 간청해도 모자랄 판에!’


기절초풍할 것 같은 생각들이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막운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하긴 이미 스승이 있을 것 같았네. 이런 기재라면 누구라도 데려가서 키워보고 싶을 테니.”

“......”


스승은 따로 없다고 하려다가, 소일도는 그냥 입을 닫았다. 굳이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쉽게 됐군. 어디서 자네만 한 원석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야. 아마 이 시험도 적가장에 들어가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이유일 테지? 실력을 시험해 본다던가.”


소일도의 일관적인 무시도 막운엽은 굴하지 않고 물었다.


“뭐, 비슷하지.”

“그럴 줄 알았네.”


실력을 시험해 보기 위함이 아니라 적가장을 부수기 위함이었지만, 아무튼 무사가 되기 위해 시험을 치르는 건 아니라서 반쯤 맞는 셈이었다.


그 대답에 막운엽이 씩 웃더니 물었다.


“허면 이런 것은 어떤가? 내가 자네의 이차 시험을 책임지고 통과시켜주겠네. 대신 시험이 끝나면 자네는 나를 만나러 와. 어차피 적가장에 취직할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 정도는 괜찮겠지?”

“뭐?”


소일도가 한층 사기꾼을 보는 눈빛으로 막운엽을 흘겼다.


“당신에게 무슨 권한이 있다고 날 통과시킨다는 거요. 당신도 참가자면서.”

“다 방법이 있지. 그래서 어쩔 텐가? 할 거야 말 거야.”


막운엽이 채근하듯 말했다.


소일도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막운엽을 보다가, 어차피 밑질 것 없다는 생각에 그를 따라나서기로 했다.


“일단 그 방법이라는 걸 시도해 본 다음 생각해 보겠소.”

“현명하구먼.”


뒷짐을 진 막운엽이 전각 앞을 가리켰다.


아직 사람이 없는 이차 시험장이었다. 내일이면 내력 대결을 하는 참가자들로 가득 차겠지만 아직은 빗자루 들고 비질하는 겸인만 있었다.


“내가 장소를 써도 되는지 양해를 구해보지. 저리로 가서 서게. 내력 대결의 진수(眞髓)를 보여줄 테니.”

“내가기공의 고수신가?”

“그래, 협객단주 암추장(巖推掌)의 막운엽이란 것이 바로 나네.”

“......”


소일도의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막운엽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모르나 보구만.”

“강호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됐네, 알음알음 알려진 이름이긴 해도 그리 유명한 호(呼)는 아니니.”


손을 저어서 점잔을 뺀 막운엽이 근처에 있던 시험관에게 가서 시험장을 사용해도 되는지 양해를 구했다.


시험관은 막운엽의 얼굴을 보더니 긴장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된다는군.”


막운엽이 먼저 아무도 없는 시험장으로 가서 섰다. 그 뒤를 소일도가 따랐다.


* * *


바람에 흙먼지가 일어났다.


비질을 하는 겸인은 잠시 그늘막에 가서 앉아 휴식을 취했다. 전각 안에서 일차 시험을 통과한 참가자들이 몰려들어서 막운엽과 소일도를 구경하고 있었다.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막운엽이었다.


“잡게.”


소일도는 망설이지 않고 뻗어진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때부터는 말이 필요 없었다.


맞닿은 손바닥과, 손등을 꽉 물고 감싼 손가락들로 전해지는 내력이 입으로 하는 언어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막운엽의 내력은 담백했다.


내일 시험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극소량만 운용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한 힘을 내며 소일도의 내력을 밀어내고 있었다.


내력 대결에서는 밀어내는 자가 승자다.


상대를 압도하고 침투한 내력은, 몸 안에 들어 있는 화약과도 같다. 원하면 언제든 불을 붙여 터트릴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오장육부나 혈도, 기맥에 내상을 입게 된다는 말이며, 그것은 몸에 칼자국이 남는 외상보다도 치명적인 경우가 많았다.


즈즈즈.


하지만 전진하던 막운엽의 내력은, 어느 순간 소일도의 손목 위로 더 이상 침투하지 못했다.


소일도가 내력 대결의 감을 잡은 것이다.


‘그러니까, 가위바위보 같은 거로군.’


우스꽝스러운 비유였지만, 정말이었다.


뾰족한 가위처럼 세운 내력은 똘똘 뭉친 주먹을 뚫지 못한다. 밀도 높게 뭉친 내력은 보자기처럼 넓게 퍼져서 감싸오는 내력을 이길 수 없다. 반대로 부피가 늘어나서 강도가 약해진 내력은 뾰족한 내력에 쉽게 찢어진다.


물론 절대적인 내력의 양, 내력의 성질, 침투하는 속도 등도 승패를 좌우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랬다.


하지만 운으로 하는 가위바위보와는 달리, 재빨리 상대를 파악하고 내력을 운용해야 하는 점이라거나, 심리전을 펼쳐서 상대방의 내력을 뒤흔들어야 한다는 점, 반응속도와 조화로운 공방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 등 여러 조건 때문에 실력으로 좌지우지된다는 점이 달랐다.


소일도가 좀 더 대담하게 내력을 흘렸다.


암추장, 바위도 밀어내는 손바닥이라는 별호답게, 막운엽의 기맥도 그리 쉽게 뚫리지 않았다.


‘더 빠르게 해볼까.’


소일도가 그런 생각으로 조금 더 내력의 속도를 올렸을 때.


탁!


막운엽이 먼저 소일도의 손을 뿌리쳤다.


“......?”


손이 민망해진 소일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막운엽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자네 검수 아니었나? 내가기공을 수련한 적이 있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줘야 할 것 아닌가?”

“이번이 처음이오.”

“뭐라?”


처음으로 표정에서 여유를 잃은 막운엽이 못 믿겠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한 내력 대결이 처음이라고?”

“그렇소.”

“......이런. 제자는 무슨, 니미럴.”


궁시렁거린 막운엽이 소일도를 향해 손을 모아 포권했다.


“내가 졌네.”

“저만치에 바위 같은 내력이 남은 것을 느꼈는데. 아직 멀었던 것이 아니오?”


소일도의 물음에 막운엽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만, 이차 시험을 통과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었는데 내공을 다 빼먹으면 어떡하겠나. 결국 이겨도 진 것이 되니 약속을 지킬 수 없는 나의 패배네.”

“음.”

“그리고 나이 먹고 내력으로 젊은이를 이겨먹어서야 쓰나.”


내력은 무공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세월의 지분이 큰 부분이다.


그 어떤 절대고수라도 내력을 하루아침에 쌓을 수는 없으며, 내력의 지름길인 영약의 경우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한순간에 절대고수를 만들 수는 없다.


오직 꾸준함과 정진으로만 대성할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조금이라도 효율이 좋은 내공심법에 강호인들이 목을 매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튼, 약속을 지키기는 글렀으니 난 감세. 그 정도 실력이면 이차 시험은 걱정 없겠군.”


막운엽은 손을 저으며 터덜터덜 전각으로 돌아갔다.


구경꾼들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바, 방금. 막 대협이 먼저 손을 뗀......”

“허어,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전각은 한바탕 시끌벅적해졌다.


소일도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막운엽과의 내력 대결을 복기했다.


* * *


그렇게 전각에서 잠 못 이루는 하루가 지나고, 이차 시험이 다가왔다.


막운엽과 내력 대결을 펼쳤던 그 장소에서 다른 참가자들이 한창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홍 측, 소일인!”


이윽고 소일도의 이름이 불렸다.


소일도가 먼저 무대로 나섰으나, 상대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청 측, 막운엽! 안 계십니까? 대답하지 않으시면 실격 처리입니다.”


그때 전각 안의 누군가 번쩍 손을 들었다.


등 뒤에 장창을 패용했고, 근육질에 양어깨에 모포를 두른 사내였다.


“막 대협은 어젯밤에 적가장을 나가셨소. 이곳에는 제자를 찾으러 왔는데, 이제 딴 놈들은 영 눈에 안 들어온다고 궁시렁대면서......”

“그렇게 그냥 가셨단 말인가?”


시험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손을 든 사내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괜찮다면 내가 상대해도 되겠소?”


이미 증명된 실력자에게 구태여 도전장을 내민다. 그것은 강호인들이 호승심(好勝心)이라고 부르는 감정인 듯 보였다.


시험관은 이차 시험을 감독하던 다른 시험관들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내에게 말했다.


“그렇게 하시지요.”

“고맙소.”


허락을 얻은 사내가 표표히 장원으로 걸어 나왔다.


소일도는 어제 막운엽이 했던 것처럼 먼저 손을 내밀었다.


“......”


잠시 그 손을 바라보던 사내가 자신의 손 대신 등에 지고 있던 창대의 자루 부분을 쭉 내밀었다.


“규칙은 어찌 됐든 내력 대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이렇게 합시다. 우리 둘이 내력을 밀어 넣으면 창대가 터질 텐데, 터진 부분이 가까운 쪽이 지는 걸로.”


내력 싸움이란 즉 밀어내기 싸움이니까 합당한 이야기였다. 이렇게 하면 양측의 신체도 비교적 안전할 듯싶었다.


소일도가 창대를 붙잡았다.


사내의 입꼬리가 쓱 말려올라갔다.


‘걸렸군.’


창을 오랜 시간 다뤄보지 않은 이들은 모르겠지만, 창대 자루에는 저마다의 결이 존재한다.


살아 있는 나무를 깎아 만든 물건이기에, 목종이나 관리에 따라 고유한 질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내는 자신의 창대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지 낱낱이 알고 있었다.


내력 싸움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시작하겠소.”


소일도와 사내의 내력이 창대 자루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귀 소일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중 공지입니다. +2 23.06.15 292 0 -
38 한 번쯤 죽어보는 것도(2). +2 23.06.15 347 10 11쪽
37 한 번쯤 죽어보는 것도(1). 23.06.14 407 11 12쪽
36 기연이 있을지도 모르고(3). +2 23.06.12 519 13 12쪽
35 기연이 있을지도 모르고(2). 23.06.11 518 12 12쪽
34 기연이 있을지도 모르고(1). 23.06.09 583 16 11쪽
33 수혼귀(7). +4 23.06.08 579 14 12쪽
32 수혼귀(6). +2 23.06.07 564 13 12쪽
31 수혼귀(5). +2 23.06.06 603 17 12쪽
30 수혼귀(4). 23.06.05 614 12 11쪽
29 수혼귀(3). +3 23.06.04 666 14 12쪽
28 수혼귀(2). +1 23.06.03 719 13 12쪽
27 수혼귀(1). +1 23.06.02 758 11 13쪽
26 이 사내가 바로(3). +5 23.06.02 774 14 12쪽
25 이 사내가 바로(2). +1 23.06.01 737 14 12쪽
24 저 사내가 바로(1). +3 23.05.31 800 13 12쪽
23 적가장(5). +1 23.05.30 786 13 13쪽
22 적가장(4). +1 23.05.29 771 14 13쪽
21 적가장(3). +1 23.05.28 800 13 12쪽
» 적가장(2). +1 23.05.27 863 14 12쪽
19 적가장(1). +1 23.05.26 896 17 12쪽
18 칼이나 갈아주시오(2). +1 23.05.25 890 17 12쪽
17 칼이나 갈아주시오(1). +3 23.05.24 905 19 12쪽
16 풍문의 검객(3). +3 23.05.23 957 17 11쪽
15 풍문의 검객(2). +3 23.05.22 1,009 17 12쪽
14 풍문의 검객(1). +1 23.05.21 1,060 18 12쪽
13 흑사방(7). +2 23.05.20 1,057 20 12쪽
12 흑사방(6). +5 23.05.19 1,055 18 12쪽
11 흑사방(5). +1 23.05.18 1,080 18 12쪽
10 흑사방(4). +1 23.05.17 1,101 17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