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귀 소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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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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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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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이 있을지도 모르고(3).

DUMMY

하오문주가 여인이라는 것은 의외의 사실이었다.


설마하니, 왕필 같은 호탕하고 후덕한 사내를 가녀린 여인이 거느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은 분명한 하오문의 문주였다.


왕필의 태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단순한 포권이 아니라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있다.

상급자에 대한 존중이 묻어나는 태도였다.


“왕필 지부장.”

“예.”

“그대는 내 손으로 직접 임명했었지.”

“맞습니다.”


하오문주의 눈이 고개 숙인 왕필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직 낭인이었던 그대가 내게 도전했을 때가 생각 나는군. 본녀가 한 대라도 맞으면 문주직을 내놓겠다는 내기였나?”

“그랬지요. 결국 한 대도 맞추지 못해서 패배했습니다.”

“생각 나는군. 꽤 아슬아슬했지.”

“농담도.”


왕필 같은 사내가 어째서 하오문의 지부장이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던 거였다.


뭐가 재미있는지, 하오문주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어떤가? 지금이라면 문주직을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가? 무위도 많이 오른 듯한데.”

“문주님.”

“응?”

“이제 저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망아지가 아닙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자 하오문주는 아쉽다는 듯이 콧소리를 냈다.


“그런 생각 말게나. 원래 올려다 보는 벽은 높아 보이는 법. 그대도 충분히 오를 수 있는 벽이야.”

“......”

“조만간 다시 도전하러 오게. 가르침을 내려 주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왕필과의 대화를 마친 하오문주가 소일도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바라봤을 뿐이건만, 하오문주의 시선은 마치 거대한 뱀이 온 몸을 휘감는 듯한 감각이었다.


시선이 닿는 피부에 감각이 느껴질 정도로 샅샅히 탐색되는 느낌.


“확실히, 대단하긴 하구나.”


하오문주가 살포시 다가왔다.

여우 같은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소일도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오문주 극하린(極賀璘)이라 하네.”

“소일도라 하오.”

“한 자루 검이라, 누가 지었는지 이름 하나는 잘 지었구나. 성씨는 무어냐?”

“소(昭: 밝을소)자요.”


빛나는 한 자루의 검.


절묘하다.

아직은 절대 발설할 수 없는 정보였지만, 하오문주는 강호에 음영이 드리우는 지금 그 이름이 운명적이라고 느꼈다.


‘지금은 직감에 불과하지만.’


입매를 끌어올린 그녀가 소일도에게 물었다.


“계약서를 두 장 썼다지?”


적가장의 정보를 받으면서 한 장.


수혼귀의 토벌에 나서면서 한 장.


지금 소일도와 하오문 사이에는 두 개의 계약서가 있었다.

내용은 동일했다.


하오문의 요구를 한 가지 이행할 것.


단, 불가능한 일, 자결이나 자해를 요구하는 일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일, 일 년이 넘는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일, 그 외 얼토당토 않은 억지로 계약을 늘리는 일은 제외하고서.


소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장이 맞소.”

“우리 지부장이 일을 잘 했군. 복주 지부장에게는 추후에 도전하러 왔을 때 성과금을 하사하도록 하지.”


하오문주는 흡족한 듯이 웃음을 흘리고는 소일도의 손에 들린 깃털을 가리켰다.


“그건 비휴의 깃털인가?”

“무림맹답네. 의심도 많지. 하지만 이번 협상에는 써먹을 만 하겠구나. 그것을 이리 주시게.”


비휴의 깃털을 받아든 하오문주가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꽤 무거운 것이, 이전에 이미 몇 번 시험해 본듯했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오문주는 바윗덩이 같은 깃털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든 채 입을 열었다.


“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자네 새외사궁(塞外四宮)을 아는가?”


새외사궁.


새외는 중원의 밖을 뜻했고, 사궁이라는 말은 즉 네 개의 궁전(宮殿)이라는 의미.


각각,


남만야수궁(南蠻野獸宮).

포달랍궁(布達拉宮).

대소뢰음사(大小雷音寺).

북해빙궁(北海氷宮).


이렇게 중원을 둘러썬 네 개의 거대 세력을 총징하는 말이 새외사궁이었다.


“야수궁, 포달랍궁, 뇌음사, 빙궁, 맞나?”


삼백 년 동안 이 지식에 변화가 있었을 수 있기 때문에 소일도는 재차 확인했다.


다행히도 사궁에 변화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새외사궁과 중원이 십 년 간격으로 교류회를 열어왔다는 것도 알겠네.”


그러자 소일도의 눈빛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듣소.”


삼백 년 전을 기준으로, 새외 세력과 중원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문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야만인이라며 무시해왔던 까딹이다.


교류회를 할 정도로 새외사궁과 중원의 관계가 풀어졌다는 것은 금시초문.

사실이라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모른다니 의외군. 그래도 벌써 삼백 년이 된 전통인데.”

“......삼백 년.”


검귀가 살았던 시대.


아무래도 그 시대를 기점으로 중원과 새외의 관계는 크게 변곡점을 맞이한 듯 싶었다.


“뭐 각설하고. 몰라도 상관 없네. 결국 요점은, 십 년 마다 그들이 중원으로 오거나 중원에서 궁을 찾아가거나 번갈아가며 교류의 장을 연다는 것이니까.”

“그렇군.”

“이미 눈치 챘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이거네.”

“그 교류회에 나가 달라는 건가?”

“바로 그거지.”


맞았다는 듯이 하오문주가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소일도가 물었다.


“날 내보내는 이유가 있나?”

“말하자면 복잡한데. 하오문은 일단 소속이 사도련이라서, 그런 격식 차리는 교류회에는 참가가 불가능하네.”

“음.”


거기까지만 들어도 사정은 알 만했다.


“요컨대 정파들의 모임이다 이거군. 이게 두 번째 요구인가?”

“대화가 빨라서 좋네.”

“허나 나도 딱히 정파 세력에 속해 있지는 않은데. 참가가 가능한가?”


소일도의 물음에 하오문주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물론 그냥은 안 되지. 자격 증명이 필요하네.”

“증명?”

“그래. 교류회에 동행할 후지기수들을 뽑는 선발대회가 십 년 마다 열리거든. 명문가 자제부터 거지새끼까지 누구든 참여할 수 있어. 거기서 상위권에 들어주면 되네. 간단하지?”


말이야 물론 간단했다.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참가 조건에 제한이 없다고 했으니, 내로라 하는 대문파의 제자들이나 오대세가에서 양성한 후계자들, 각지의 풍운아들을 꺾고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소일도는 두말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지?”


결국 중요한 것은 이거였다.


가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가서 뭘 할 것인가.


이에 하오문주가 입을 열었다.


“이번 교류회는 북해빙궁에서 열리네. 한데 그 빙궁주가 최근 들어 이상한 세력에게 붙은 것 같아서 말이야. 그의 뒷조사를 해줬으면 하네.”


뒷조사.


그것도 빙궁주의?


소일도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이건 계약사항 위반 아닌가?”


분명 계약서를 적을 때, ‘자결이나 자해를 요구하는 일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일은 요구하지 않겠다’는 조항이 있었다.


빙궁주는 말 그대로 한 궁의 궁주.


적어도 그 강함이 무림맹주나 사도련주에게 비견할 만한 고수일 것이다.


지금 소일도에게 그런 빙궁주의 뒷조사를 맡긴다는 말은, 사실상 가서 죽으라는 말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하오문주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물론, 우리도 날강도는 아니야. 그냥 가라고는 하지 않겠네.”

“방법이 있나?”

“그야 있지.”


하오문주가 손목을 쭉 뻗었다.


그러자 옷소매에서 철선(鐵扇: 철로 된 부채)이 쑥 튀어나와서 손에 쥐어졌다.


그게 그녀의 무기인 것 같았다.


“선발대회까지 넉 달. 그 안에 그대에게 빙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모든 기술을 전수하겠네.”


넉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무공 수련의 성과를 보기에는 영 부족한 시간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몇 년을 수련해도 좀처럼 강해지기 어려운 경우도 허다했으니.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가능하지. 적어도 본녀는 그렇게 믿네.”


하오문주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어차피 자네가 들키면 나를 포함한 하오문의 관계자들은 모두 죽네. 여기 있는 왕필도. 사도련이 심은 무림맹의 간자가 빙궁주의 뒷조사를 하다 걸렸으니 오죽하겠나?”

“......”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하오문주는 옷소매로 입을 가렸다.


눈은 달처럼 휘어져서 웃고 있었는데, 입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만큼 그녀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궁금한 게 많겠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마지막 말을 하는 하오문주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하지만 단언할 수 있어. 자세히는 말해줄 수 없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네. 나든, 하오문이든, 구파일방이든, 사도련이든...... 그리고 자네도 예외가 아니지.”


그 말에 소일도의 눈살이 낮아졌다.


“뭔가를 알고 있군.”

“다녀오면 알려주겠네. 중요한 건 이거 아니겠나?”


하오문주가 들고 있던 비휴의 깃털을 다시 소일도에게 건넸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것은, 처음 그녀에게 주었을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깃털의 무게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했던 말들은 모두 진실이었다.

적어도 하오문주 본인은 그렇게 믿고 있으리라는 증거였다.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라는 말.


그거면 됐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닥치리라는 것은, 계약서를 썼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이제부터 한 배를 탄 셈이군.”


소일도의 말에 하오문주가 샐쭉 웃었다.


“잘 부탁하네.”


일이 채결된 이상, 하오문과 소일도는 운명공동체나 다름 없다.

직접 북해빙궁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실력이 뛰어난 후지기수를 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오문의 사람을 보냈다가 무림맹과 마찰이라도 빚는다면?


그것이 북해빙궁, 나아가 새외사궁과의 갈등으로 번진다면?


만약 분쟁이 시작만 된다면 사도련과 무림맹의 시시비비도 시작될 것이고, 불씨는 근처의 거목들을 모조리 집어삼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일도는 안성맞춤이었다.


공로가 인정 되어서 무림맹의 일원으로 보내기 손색이 없었다.

실력은 한 눈에 보아도 안다. 말할 것도 없이 나잇대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마침 하오문에 계약서까지 작성했으며.


결정적으로 마인을 토벌한 경험이 있었다.


‘절묘하다, 절묘해.’


어찌 이리 딱 맞는 인재가 등장했단 말인가?


사실, 비휴의 깃털이 없었더라면 상대방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은 소일도가 아니라 문주, 극하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보낸 간자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 정도로 딱 맞는 인재, 딱 맞는 때였다.


“자, 그러면 인사치례는 각설하고.”


하오문주가 손목을 살짝 퉁기며 철편을 촤라락 펼쳤다.


“남은 넉 달. 빙궁주에게서 살아남는 방법을 전수하겠네. 물론 하오문을 비롯한 무림의 명운이 걸렸을지도 모르는 만큼, 그냥 무공 몇 개 가르쳐주고 땡이라는 말은 안 해.”

“무공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었나?”


의외의 말이라서 소일도가 반문했다.


“본녀가 오늘부터 자네에게 가르칠 것은 인간이 가진 오감(五感) 너머의 것. 육감(六感)이네.”


하오문주는 씩 웃어보였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오감 없이 생활해야 할 거야. 공기처럼 풍족했던 것이 사라지는 것은 꽤 답답하지. 미쳐버리는 자들도 가끔 있네.”


각오하게.


하오문주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순간 소일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풍족했던 것이 사라져?’


그것은 마치.


약야한조(若耶旱燥).


결코 마르지 않는 약아강의 물이 마르다.

‘철연수개검의 다음 층계의 이름과 유사하지 않은가?’


범상치 않은 우연.


따지고 보면, 이 협상은 무림맹의 수레에 있던 비휴의 깃털로부터 시작했으니.


‘기연이 들어 있던 게 맞았군.’


왕필이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 정말 그렇게 된 거였다.


이렇게 보니 인생사 새옹지마가 맞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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