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귀 소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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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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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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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4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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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 죽어보는 것도(1).

DUMMY

육감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오감 너머의 여섯 번째 감각.


그런 육감을 깨닫기 가장 쉬운 방법은, 너무도 자명했다.

오감을 모두 배제하면 된다.


단순한 소거법이지만, 그만큼 명료하고 확실한 방법. 그렇게 오감을 제거한 다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육감인 것이다.


하지만 그게 쉬운 것도 말이었을 때다.


실제로 오감을 배제하고 생활하기란 쉽지 않다. 말하자면 오감은,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세계는 오감으로 이루어져 있고, 나아가 그 오감이 전달되는 뇌가 곧 삶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오감을 버리라는 말은, 곧 삶을 내려놓으라는 말.


“참고로 이걸 버틴 놈은 별로 없었네.”


그렇게 말한 하오문주의 소매에서 이번에는 가죽 주머니가 튀어나왔다.


문주는 주머니를 소일도에게 던지고, 철편을 휘둘러서 날카로운 칼바람을 일으켰다.


찢겨나간 주머니에서는 하얀 가루가 퍽 터졌다. 가루는 바람을 타고, 소일도의 눈과 코와 귀와 입으로 들어갔다. 피부에도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용케도 딱히 거부하지 않는구나.”

“수련이 될 테니까.”

“좋은 자세야. 말해두지만 중간에 기권은 받지 않겠네. 이렇게 말을 들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안 남았군.”


소일도의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어디 시야뿐이던가.


소리도 점차 사그라들고,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물며 온 몸의 감각까지도 둔해지는 듯했다. 만약 지금 누군가 온 힘을 다해 그를 걷어차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달포는 죽었다고 생각하게. 한 번쯤 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뭔가 말하고 싶었는데, 혀가 둔해져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혀는 멀쩡히 움직이고 있는데, 그걸 느끼지 못하는 것은 소일도 자신일지도 몰랐고, 소리가 나고 있지만 인지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었다.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 보게.”


그렇게 소일도의 세계가 암전됐다.


지켜보던 왕필이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방금 뿌리신 게 뭡니까?”

“탈광혼독(奪光混毒)이네. 아마 지금쯤 어떤 말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느끼지지도 않는 상태겠지.”

“그럼 어떻게 삽니까?”

“어찌 사냐니.”

“그야,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밥을 먹고 물도 마셔야 하지 않습니까? 제때 잠도 자야 하고, 측간도 가야 할 텐데, 저 상태로는 불가능하잖습니까.”


그것도 달포씩이나.


삼십 일이나 아무런 감각 없이 지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오문주는 피식 웃었다.


“그럼 죽는 거지 뭐.”

“예?”


태평한 말에 왕필이 반문했다.

그러나 하오문주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일단 저대로 놔두게. 문도들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괜히 가까이 갔다가 다치는 이들이 없도록 해.”

“......”

“그 다음에는 며칠 안에 굶어 죽든가, 적응하든가. 결과가 나오겠지.”

“알겠습니다.”


머뭇거리던 왕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저의를 눈치챈 하오문주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왕필에게 말했다.


“그새 정이 들었나?”

“괜찮은 친구입니다. 만약 제가 이런 입장이 아니었다면 좀 더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까지 말한다라.”


하오문주가 목을 젖혀 하늘을 바라봤다.


왕필의 성격을 잘 아는 그녀였다.

왕필은 문주인 극하린이 직접 임명했고, 그만큼 간부들 중에서도 나름대로 마음에 든 사내였기에.


하지만 하오문주는 눈을 꾹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니까. 발버둥치다가 다른 누가 가라앉는다고 해도 그것은 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녀가 떠안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강호의 명운 그 자체였기에.


“괜찮을 걸세.”


이윽고 하오문주는 왕필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직관이지만, 저 검객은 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감, 입니까?”

“그래.”


왕필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뭘 말인가?”

“이 수련을 거치고 미쳤거나 행동불능이 되지 않은 채 살아남은 자들의 비율 말입니다. 방금은 뭉뚱그려서 간혹 있다고 하셨지요.”

“감이 좋네.”

“저도 이제 강호에서 지내온 세월이 있습니다.”

“으음.”


하오문주는 잠시 고민했다.


“하나 유념해야 할 것은, 이 수련을 받기 시작한 자들은 가능성이 충분하던 자들이었다는 것이네.”

“감안하고 듣겠습니다.”


유망한 이들을 거르고 걸러 행해진 시험이라는 말이었다.


“열에 둘.”


하오문주가 검지와 중지를 펼치며 말했다.


왕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열 명중에 두 명이나 살아 남았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희망적이었기 때문이다.


확률로 따지면 이 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로만 엄선했다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확률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오문주의 다음 말이 왕필의 안심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살아남은 사람 중 하나는 본녀이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 도왕(刀王)이라 불리는 사내지.”

“......하북팽가(河北彭家)의 그 도왕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럼 나머지 여덟 명은?”

“모두 죽었네.”


왕필의 안색이 급격하게 사그라들었다.


“도왕이나 문주님과는 오성 차이가 큰 자들이었습니까?”


하오문주는 천천히 그들의 하나하나 얼굴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신원을 자세히 알려줄 수는 없지만, 재능으로 따지면 당시의 도왕이나 본녀보다 뛰어난 자들이 대부분이었지.”


그러자 왕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하북팽가의 도왕이 누군가?


천하의 하고 많은 도객들 중 으뜸이라 평가 받는 자가 바로 도왕이다.

세상천지를 다 뒤져봐도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도 몇 명.

사도련을 다 뒤져도 하오문주 정도의 고수가 아니면 도왕의 앞에서 어깨를 펼 수 있는 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밖의 신비문파나 기인이사를 전부 합쳐도 열 다섯이 될까 말까.


그런데, 그런 도왕보다 대단한 자질을 가진 자들이 더 있었다는 것도 신기하건만 그런 이들이 수련을 하다가 모두 죽었다니!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수련을, 그토록 오성 뛰어나던 이들이 죽음을 감수해가면서 받아야 했던 이유가 대체 뭡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왕필의 시선으로는 그랬다.

만약 자신에게 도왕이나 하오문주 정도의 재능이 있었더라면, 무림의 정점에 서서 막연하지만 지금과는 다른 길을 걸었으리라.


하지만, 정작 그 자질을 가진 자들은 허무하게 죽었다고 한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지.”


하오문주가 씁쓸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강호가 앞으로 도래하리라는 것을.”

“대체 무슨......”


거기까지 말한 시점에서 하오문주는 단호하게 손을 뻗어서 질문을 제지했다.


“그만. 거기까지 하지. 더 이상 아는 게 늘어나면 본녀도 그대의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으니.”

“......”


더 뭔가를 질문할 수도 없다.


왕필은 그저 황망한 눈으로 하오문주를 바라봤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왕필은 소일도를 보았다.


탈광혼독을 들이킨 순간부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소일도였다.


“절대 도움을 줘선 안 되네.”


왕필의 시선을 느낀 하오문주가 딱 잘라 말했다.


“그 어떤 도움이던 간데, 지금 저 검객에게는 도움이 아니라 비수가 될 뿐이니까. 타인의 손길이 닿는 순간 오히려 주화입마에 빠질 테지.”

“그럼......”

“지켜보는 수밖에.”


하오문주는 팔짱을 꼬고 돌처럼 굳어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소일도를 응시했다.


아주 잘 하고 있다.


이미 저 수련을 한 번 해봤던 그녀이기에 알 수 있었다.


오감이 차단된 순간, 필요한 것은 오감에 의존하지 않는 ‘기준’이다.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그저 붓을 놀리기만 한다면 그림은 종이를 삐져나가거나, 완성한다고 해도 정체 모를 흉한 먹자국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종이의 크기와 위치를 정확히 가늠하고 팔꿈치를 땅에 댄 채로 그린다면?


그럼에도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확률은 현저히 낮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붓을 휘갈기는 것보다는 백 배, 천 배 나았다.


지금 소일도가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팔꿈치를 내리는 것.


알맞은 위치에, 정확히.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위치에 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녀와 검왕과 함께 이 수련을 했을 당시, 그 팔꿈치조차 제대로 내리지 못해서 삼 일을 헤메다가 물도 먹지 못하고 죽은 이가 반절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작업이었고, 지금 소일도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팔꿈이가 엇나가 영영 기준을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자, 이제부터다.’


훗날 강호의 최정상에 오를 고수가 이곳에서 탄생할 것인가.

아니면 시체 하나를 치우게 될 것인가.


결과는 둘 중 하나일 터였다.


* * *


소일도는 신비한 감각을 느끼고 있다.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기분이다.


빛과 어둠도 없으며, 느껴지지 않으니 자신의 존재조차 확신할 수 없다.

모든 소음이 사라졌고, 또 모든 간섭으로부터의 독립이기도 했다.


남은 것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 뿐.


이 상태가 된 지 아직 일 각도 흐르지 않았음에도, 소일도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했다.


아니, 생각할 수 있으니 아직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는가?


그는 최대한 생각이 끊기지 않도록 아무런 생각이나 떠올렸다.


우선, 움직일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지금 상태로는 움직여도 움직였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것이며, 넘어지든 칼에 찔리든 아무런 이변을 느끼지 못할 터였다.


이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서 빨리 육감을 깨달아야 했다.


육감이란 무엇일까.


오감을 제외하고 남는 것은, 결국 생각뿐이다. 생각, 즉 머리로 깨우쳐야 한다.


생각해라. 눈을 감기 전의 주변은 어땠나?


스스로의 걸음걸이, 보폭, 힘을 주는 정도. 평소에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던 간격, 그 모든 박자를 잃어선 안 된다.


자칫하면 과호흡증이 올 수도 있고, 여차하면 눈꺼풀 감는 것을 잊어서 시력을 잃을 수도 있었다.


평소 오감을 통해 숨 쉬듯 받아들이고 있었던 정보를 직접 머리로 계산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 감각이 가져다주는 정보가 얼마나 막대한 양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아니지.’


아무리 계산하려고 해도, 그것을 감각이라 부르기는 어려웠다.


말 그대로 정보를 취합한 결과일 뿐.


감각이라 칭하려변 적어도 이것보다는 직관적이어야 한다.


계산하지 마라.

상상하지도 마라.


그러자 남는 것이 있었다.

느껴지는 것이.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생각을 거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각이 생겼다.


높은 곳에서 바위를 놓으면, 당연히 그것이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는 예감.

분수가 뿜어지면 그것은 포물선으로 떨어지리라는 예감.


감, 혹은 직감이라 불리우는 그것이었다.


만물에 존재하는 상호작용.


세상과 세상의, 자신과 세상 사이에서 일어날 당연한 일.

그것을 말하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느끼지 않아도 미리 알고 있는, 인류의 기원부터 있었던 능력.


그제야 제대로 보인다.


아니, 보이지 않아도 안다. 듣지 않아도, 느껴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툭.


발 밑에 있던 수통을 잡았다.

손에는 수통의 질감도, 물을 출렁임도 전달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에는 수통이 있었고, 입을 벌리고 흘려넣으면 그것을 마실 수 있다.


팔꿈치.


소일도는 팔꿈치를 내렸다.


그가 탈광혼독을 들이킨 지 삼 일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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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칼이나 갈아주시오(1). +3 23.05.24 905 1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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