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 밴드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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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똘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3.08.26 17:04
최근연재일 :
2023.09.2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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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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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공주님, 강미선

DUMMY

기타로 멜로디를 연주하며 기현은 새롭게 붙인 가사를 노래했다. 기현이 노래하는 동안, 멤버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리고 연주가 막이 내리면.


“아, 형! 내가 그랬잖아요! 형 가사 잘 쓸 거라고!”

“이런 기막힌 가사를 가져와 놓고선, 뭐? 안 한다고?!”


감탄 섞인 아우성이 쏟아졌다.

이렇게 잘 쓰면서 왜 안 하려 했느냐며 나무랐다.


“하, 하, 하···.”


기현은 말 없이 애매하게 웃었다. 자신이 쓴 게 맞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쓴 게 아니니까. 이상하게 양심이 간질거렸다.


23년의 장기현은 결코 이런 시적인 가사는 못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발 ‘정말 형이 썼어요?’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기도가 무색하게, 기현이 빈 것과 정확히 같은 문장으로 성호가 물어왔다.


“정말 형이 쓴 가사예요? 정말, 와. 죽이는데요?”


묻는 말에 대답은 해주어야 했지만, 사실대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사실 가사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어. 아, 형 드디어 미쳤어요?


굳이 겪지 않아도 상상이 갔다.


“내가 쓴 건··· 맞는데.”

“맞는데가 뭐예요? 꼭 형이 쓴 게 아니라는 것처럼.”

“술 먹고 써서 기억이 잘···.”

“아···.”


술 먹고 썼다는데, 왜인지 이해했다는 얼굴이다.


*


대중음악연구회가 연습에 매진하는 사이, 대학가요제 참가 신청 기간이 다가왔다. 대학가요제 예선이 근처로 다가오자, 조용하던 학교도 시끌벅적해졌다.

교내가 노래로 가득했다.


‘평소에 밴드 관심 없던 사람들도 갑자기 다 밴드하네.’


한국대학교에 밴드는 대중음악연구회 말고는 없었는데, 대학가요제가 다가오니, 죄다 밴드를 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방송의 영향이 이렇게 대단했다.


‘우리 학교에 밴드가 이렇게 많았었나?’


밴드 하는 놈들이 이렇게나 많았었나, 싶을 정도로 마주치는 놈들마다 마다 어깨에 기타를 매달고 있었다.

귀에 거슬릴 정도로 실력이 없는 건 덤이었다.


‘얼른 합주실에나 가자. 합주실은 좀 괜찮겠지.’


기현은 강의를 마치고 합주실로 발을 재촉했다. 어서 조용한 합주실에서 연습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안고 합주실에 도착했는데···.


지잉- 징-

삐이익-


조용한 합주실에서 연습하고 싶었던 바람과 무색하게 이미 합주실을 차지한 놈들이 있었다.

엉성한 멜로디가 서로 어우러지지도 않았다.

원래 합주실을 쓰던 대중음악연구회 멤버들은 먼저 합주실을 차지한 놈들 때문에 합주실 바깥으로 쫓겨난 채였다.


“밖에서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악기는 왜 다 바깥에 있고?”


합주실에 대한 자초지종을 몰랐던 기현은 대중음악연구회 멤버들이 바깥에 쫓겨나 있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드럼부터 해서, 기타, 신디사이저, 콤보 오르간이 죄다 복도에 나와 있었다.


“···합주실 뺏겼어. 젠장, 성수기라 그런가.”


미선은 구부정하게 앉아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당장이라도 욕설이 튀어나올 정도로 험악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선은 합주실을 차지하기 위해 점심도 굶고 달려왔다.


“대학가요제 철에는 항상 이래요. 미선 누나도 이렇고요.”


미선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병철이 덧붙였다.


“저 합주실 우리 거 아니었어?”

“네. 저 합주실, 사실 우리 전용 합주실은 아니에요. 교내에 저희 같은 서클이 없어서 거의 전용으로 쓰고 있었던 것뿐이죠.”

“공공재인 줄은 몰랐네. 그럼, 저 녀석들 합주 끝나야 우리가 쓸 수 있는 거야?”

“그렇죠.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연습하는 걸 보니, 조만간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무턱대고 저 녀석들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았다.


“이러다가 우리 연습도 못하고 망하게 생겼어요.”


성호가 반쯤 우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합주실이 계속 이런 꼴이라면 대학가요제 동안 연습다운 연습은 물 건너간 일.


“내일은 아침부터 나와야 할까 봐. 통금 끝나자마자 나오면 아무도 없겠지?”


성현은 비교적 차분했다. 아마도.


이렇게 가만히 합주실을 뺏긴 채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대책 강구가 필요했다.

그때, 계속 고개를 푹 숙이고 구부정하게 있던 미선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자.”


신디사이저와 콤보 오르간을 앞으로 뒤로 이고 진 채 일어난 그녀는 대뜸 어디론가 가자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었다.


“···어딜?”

“우리 집.”


기현은 이 여자가 점심 못 먹어서 드디어 미쳤나,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가 너무 결연하고 진지해서,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대중음악연구회 멤버들은 얼떨결에 미선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왜 미선이 대뜸 집으로 향하자고 말했는지, 그 모든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서울, 성북동 330번지.


“······.”

“······.”


미선은 포드 코티나 마크 V를 끌고 와, 90년대 오렌지족도 아니고 냅다 ‘야 타’를 시전하더니, 정말로 어디론가 향했다. 악기 때문에 미선이 차와 택시, 두 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성북동 330번지.

대한민국 최고 부자들이 모여있는 곳.


인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으리으리한 회장님 저택에 대중음악연구회 멤버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지어 차고에는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던 그라나다 V6까지 세워져 있었다.


미선이 잘 사는 줄은 알았지만, 회장님 저택에 사는 자제 분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미선의 이 모든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멤버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미선을 뒤따랐다.

미선은 아주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저 왔어요. 연습 때문에 친구들 데려왔어요.”

“어머, 아가씨 오셨어요? 친구분들이랑 같이 오셨네요?”

“지하실에서 연습할 테니까, 식사는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걸로 부탁드려요.”

“네, 아가씨.”


학교에서는 영락없는 두목이었던 그녀는 집에서는 완전히 부잣집 아가씨, 그 자체였다. 내가 모르던 내 친구의 이중생활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미선을 뒤따라 미선의 집 지하실로 내려갔다. 집 내부도 전경만큼이나 으리으리했다. 고즈넉하지만 위압적인 벽돌집.

병철이나 성호, 성현네 집도 제법 방귀 좀 뀐다는 집이었지만, 미선의 집은 완전히 넘을 수 없는 벽, 그 자체였다.


‘아방궁인가···?’


애초에 코르그 CX-3을 들고 다니고, 코티나 마크 V를 자가용으로 끌고 다니는 걸 보고 짐작 했어야 했다.


지하실에는 그녀를 위한 피아노 연습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시절에는 구하기도 힘든 스타인웨이의 S-155 그랜드피아노와 같은 클래식 피아노와 무그의 미니무그, opus3, polymoog 203a 모델 같이 보기도 힘든 고가의 신디사이저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얘는 한 대도 갖기 힘든 무그를 무슨 세 대씩이나···.”

“콩쿠르 때문에 해외 갈 일 있을 때마다 한 대씩 사 모은 거예요.”


그런 어마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거짓 안 보태고 학교 합주실만큼 컸다.


“···누나는 정체가 뭐야? 대통령의 숨겨진 딸···?”

“넌 미친 소리 그만하고 드럼이나 설치해.”

“옙.”


미선의 기에 눌린 대중음악연구회 멤버들은 잠자코 악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


“대체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집안이 노랫소리로 소란했다. 소음의 주인은 분명 그의 딸일 게 뻔했다.

딸의 연습실에는 방음을 톡톡히 해 놓아, 그다지 시끄럽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조금 소란한 기운이 일었다.


그는 현시점,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법무법인 태향의 대표 변호사이자 오너, 그리고 강미선의 아버지이기도 한 강태선이다.


“미선이 친구들이 왔어요. 낮부터 와서, 저녁도 거르고 지금까지 이렇게 지하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있네요. 그래도 그렇지, 미선이 이 녀석, 아버지가 왔는데, 얼굴도 안 비추고.”

“친구들?”


딸아이가 친구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그래서 호기심이 일었다. 딸아이가 데려온 친구들이라는 게 누구일지.


“얼굴 보니, 죄다 남자애들이더라고요.”

“뭐? 얘는 대체 어디서 뭘-”


모두 시커먼 남자애들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심기가 불편해졌다.


“너무 노하지 마세요. 같이 그룹사운드 하는 학교 서클 친구들이래요. 요즘 곧 대학가요제 기간이잖아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 올해가 마지막인가? 그나저나, 누구 딸인지, 포기도 안 하는군.”

“다 당신 닮은 거죠.”

“어차피 올해도 별 소득 없이 지나가겠지.”


태선은 지난 대학가요제를 떠올렸다.

딸아이는 여러 콩쿠르에서 우승한 재능 있는 실력자였음에도 대학가요제에서는 동료 운이 좋지 않아, 좀처럼 맥을 추지 못했다.


“이번에는 그래도 다르던데요? 특히 노래 부르는 친구가 정말 잘해요.”

“하면 얼마나 하겠어.”


태선의 아내이자, 미선의 엄마, 노정희는 나긋나긋한 심성의 소유자였지만, 예술 작품을 보고 듣는 안목 하나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아내가, 칭찬을?'


그래서 태선은 조금 호기심이 일었다.


무엇 하나 대단하다, 잘한다고 칭찬하는 법 없는 아내가, 딸아이의 피아노도 칭찬해본 적 없는 아내가, ‘정말 잘한다’고 칭찬하다니.


“한번 슬쩍 보고 오세요.”

“됐어. 저녁도 거르고 연습하고 있는 애 방해해서 뭐 하나.”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딸아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녁부터 먹지. 미선이 저녁 못 먹었다며? 연습실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게끔 간단히 주먹밥이나 샌드위치 같은 거 만들어서 가져다줘.”

“그렇게 할게요.”


정희는 태선이 저러면서도 미선의 연주를 궁금해하고 있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태선은 굳이 자신이 그런 걸 티 내고 싶어 하지 않는 근엄하고 부끄럼 많은 남자였다.


‘좀 솔직해져도 좋으련만.’


미선은 그런 태선이 이해가 가면서도 불만스러웠다. 딸아이에게는 좀 솔직해져도 좋을 텐데.

이내 정희는 방으로 올라가려던 태선을 일부러 붙잡아, 샌드위치와 주먹밥이 가득 든 트레이를 건넸다.


“이거 가져다주고 오세요.”

“내가?”

“아버지로서 하실 수 있잖아요? 미선이 얼굴도 좀 보고요.”

“······.”


태선은 어쩔 수 없이 트레이를 받아 들고 지하로 향했다. 지하에서는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가 난생처음 들어보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였다.


작가의말

오늘의 곡

잔나비- 작전명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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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공주님, 강미선 +3 23.09.02 4,100 121 11쪽
8 국어교육과 장기현, 꿈은 시인 +4 23.09.01 4,126 114 10쪽
7 우리 음반 하나 냅시다 +7 23.08.31 4,184 109 10쪽
6 이게 이 곡이라고? +10 23.08.30 4,247 117 11쪽
5 선언 +7 23.08.29 4,266 123 11쪽
4 저 사람 괴물 아녜요? +7 23.08.28 4,426 113 10쪽
3 대중음악연구회 +11 23.08.28 4,576 121 9쪽
2 80년, 동명이인 장기현 +10 23.08.27 4,862 121 11쪽
1 1980년에 떨어졌다 +11 23.08.26 5,991 13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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