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흑막이 칼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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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dos
작품등록일 :
2023.11.2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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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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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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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1)

DUMMY

생전 처음 보는 검법이었다.


쾌검(快劍)이라기엔 느렸고.

강검(强劍)이라기엔 부드러웠으며.

중검(重劍)이라기엔 가볍고.

환검(幻劍)이라기엔 정직했다.


무엇도 되지 못하는 검.

그러나 달리 말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검이기도 했다.


쐐애액!


섬광의 산란과 함께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악!”

“헉!”


부하들은 피 분수를 쏟으며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순식간에 열댓 명이 바닥에 드러누웠고 빛이 번뜩일 때마다 서너 명씩 단말마를 내질렀다.


잠시 후 빛살이 자취를 감추자 끔찍한 광경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으으······.”

“살, 살려주십시오.”


그들의 머릿수는 순식간에 열 명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핏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부하들.

삼 형제는 당장 그들의 안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당한 고수다. 틀림없이 절정지경(絕頂之境), 어쩌면 그 이상······.’


번오의 등허리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검로가 변화무쌍하며 현묘하니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렵구나. 명문 정파의 적전제자, 혹은 세가의 적통인가?’


흑의인은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상황.

까딱하다간 그 밥이 제삿밥이 될지도 몰랐다.


번오는 찰나 간에 결단을 내렸다.

번오가 양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인을 몰라뵈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손속에 자비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

“본의 아니게 고인을 욕보였으나, 그것은 이자와 저희의 은원 때문입니다. 그러니······ 큭.”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빛살이 날아들었다. 번오는 이를 악물고 도를 휘둘렀다.


챙!


쇳조각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역시 이 자의 목적은······.’


번오는 침을 삼키며 신전흥을 흘깃거렸다.


임무가 아무리 중하다 해도 목 위의 물건보다 중하지는 않다.


그러나 곱게 물러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저희는 사실 호남(湖南)의······.”


챙!


“이자는 어떤 물건을······.”


챙!


“아니, 제 말을 좀······.”


챙!


입을 열 때마다 암기가 쏟아진다.

번오는 울화를 삼키며 암기를 받아내고 또 받아냈다.


괴인은 입을 꾹 닫은 채 대답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적을 보내주라고.


“······아무래도 오늘은 길일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하여 저희는 이만 물러나려고 하는데······.”

“······.”


암기는 날아오지 않았다. 다행히도 몰살까지는 바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고절한 무공이었습니다. 안계를 크게 넓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나 저희는 어떤 억하심정도 없습니다. 외려 둘도 없는 기연이라······.”


삼 형제는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괴인의 쇠꼬챙이가 다시금 너울거리며 춤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기는 삼 형제의 목젖 대신 지면으로 향했다.


카가가각!


어슴푸레하게 달빛이 비쳐드는 흙바닥. 꼬챙이가 지나갈 때마다 기다란 선이 생겨났다.


‘뭔가를 쓰고 있다?’


번오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지면이 종이라면 꼬챙이는 붓.

괴인은 일필휘지의 솜씨로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그 와중에도 위아래를 뒤집어쓴 덕분에 글자는 곧장 읽을 수 있었다.


참으로 친절한 배려였으나 너무 놀란 탓에 번오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등선지로 요불가급(登仙之路 遥不可及)!”


등선지로 요불가급(登仙之路 遥不可及).


등선에 이르는 길이 아득하게 먼 곳에 있다.


번오는 괴인의 연원을 알 것 같았다.


‘이런 개 같은······.’


등선이란 도를 깨쳐 신선이 됨을 의미했다. 신선을 위해 수양하는 자들은 대개 도가의 일맥을 이은 자들이었다.


장생술을 연마하는 자들은 물론 도가 계통의 문파 또한 크게 보면 여기에 속했다.


호북의 무당파와 섬서의 화산파, 그리고 종남파가 대표적인 도가의 문파였다.


그러나 괴인은 셋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등선’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자들은 따로 있었다.


‘등선지로 요불가급’이라는 격언과 함께 그 이름만 회자 될 뿐인 전설 속의 문파.


그들의 후인이라면 저런 상승의 검학을 익힌 것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신선곡의 고인이십니까?”


괴인은 그제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단히 잘못 걸렸구나. 이 노괴가 신전흥과 연이 있었던 건가? 아니면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빌어먹을!’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문사는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재빨리 작별을 고했다.


“구명지은(救命之恩)에 감사드립니다.”


신전흥은 괴인에게 포권지례를 취한 뒤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삼 형제와 부하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돌아간다.”


괴인은 신전흥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삼 형제 또한 묵묵히 떠나보냈다.


곧 수습하지 않은 시체들 위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안유는 그제야 복면 대용으로 쓴 소맷자락을 풀어헤쳤다. 미소는 여전했으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했다.


털썩.


허물어지듯 쓰러지며 안유가 참고 있던 구역질을 쏟아냈다.


“우웨엑!”


촤아악!


족히 한 되는 될법한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커헉, 컥! 우웨엑!”


속여넘기는 데는 성공했지만 내상이 극심했다. 무리해서 무명구십구검(無名九十九劍)을 펼친 여파였다.


무명구십구검은 아흔아홉 개의 절기를 구현한 무학.


절기란 한 무학의 정수이자 완성이다.


단련되지 않은 몸으로, 게다가 미약한 진기를 쥐어짜서 사용할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고작 네 개의 초식을 펼친 것만으로 이 정도라니······.’


갈 길이 멀었다.


수많은 실전 경험과 그로 인한 깨달음은 충분했지만 근골과 내공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나 성과는 썩 만족스러웠다.


깊어가는 새벽. 날은 벌써 바뀌어 있었다.


오늘은 안유가 태어난 날.

전생에서는 오늘, 고향과 인연을 전부 잃었으나 이번 생은 달랐다.


‘아무것도······ 잃지 않았어.’


그렇다면 피륙의 상처 따윈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


안유는 몇 차례 토혈을 반복한 뒤 일어섰다.


곧장 떠나려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후두둑.


피투성이 쇳조각이 소맷자락에서 흘러내렸다. 꼬챙이가 제 역할을 다한 뒤 장렬하게 산화해버린 것이다.


‘분명 누군가가 들고 있었는데······ 찾았다.’


점 찍어둔 물건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꼬챙이와 비슷한 외양.

기다랗고 뾰족한 기형검.

안유는 주인이 채 휘두르지 못한 협봉검을 자연스럽게 챙겼다.


‘가볍고 휴대하기도 좋다. 구십구검을 펼치기엔 적당하지 않지만 무기에 휘둘리는 것보다야······.’


안유는 몇 번 허공을 그어본 뒤 소매 속으로 협봉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근처 등걸에 기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기를 반복했다. 미쳐 날뛰는 심맥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내상을 다스리는 동안 아침이 밝아왔다. 여명이 수풀 사이로 흘러들며 안유의 눈을 간지럽혔다.


눈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


낡은 사당으로 들어서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까래 위에서,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유유선 신전흥이었다.


“······반신반의했지만 역시 자네였군. 참으로 뛰어난 솜씨였네. 과연 신선곡의 후인이라 할 만하더군.”

“통 못 쉬셨나 봅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군요.”

“이를 말인가. 심경이 복잡하기도 하고, 또 자네가 오지 않아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네.”

“숨을 돌렸으니 편히 쉬시지요. 일단 배라도 채우시지 않겠습니까?”


안유가 불을 피우는 동안 신전흥이 산새 몇 마리를 잡아 왔다. 손질하고 꿰어 불에 올리니, 관제묘는 곧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찼다.


“솜씨가 좋군. 숙수까지는 아니어도 나 같은 먹물보다야 훨씬 나아.”

“하하,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피해서야 어찌 등선지로에 오르겠습니까. 야숙(野宿)에 익숙할 수밖에요.”

“음, 그것도 그렇군.”


신전흥이 날개 부위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신전흥이 뼈를 발라내며 운을 띄웠다.


“놈들, 강하고 집요하더군.”

“맞습니다. 굶주린 승냥이들이지요.”

“필시 꽤 규모가 큰 세력의 주구이겠지. 자네가 아무리 뛰어난 고수여도 이래서야 험난한 여정이 될 걸세.”


이번의 패퇴는 그저 요행이었을 뿐이라고.


잡졸을 쓸어버려 기선을 제압하지 못했다면 이쪽이 죽어 나자빠졌을 거라는 사실을, 안유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후환을 없애려면 꼬리를 완전히 떼어내는 편이 낫지 않았겠나?”


왜 전부 죽이지 않았느냐.


신전흥은 그리 묻고 있었다.


실로 무지(無知)하기에 가능한 질문이었다.


“완전히 떼어낼 수 있다면 그리 했겠지요. 하지만 어렵습니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놈들을 전부 주살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들의 정체에 관해 짐작 가는 바가 있나 보군. 이제 슬슬 말해줄 수 없겠나? 대관절 어떤 놈들이 이리도 흉험하게 쫓아오는지 말이야.”

“유독 강했던 세 명의 고수들, 기억나십니까?”

“내가 어떻게 잊겠나? 아직도 가슴이 서늘하다네.”

“그들은 거력도(巨力刀) 번오, 개산부(開山斧) 방일, 혈곤(血棍) 위연이라는 자들로 고죽삼귀(苦竹三鬼)라고도 불립니다.”

“고죽(苦竹)······? 고죽, 고죽, 잠깐. 고죽이라면 설마?”

“예, 그렇습니다. 그들은 고죽방(苦竹幇)의 무인들입니다.”

“음!”


신전흥이 침음했다.


안휘에서 나고 자라, 줄곧 그곳에서만 활동하던 신전흥도 고죽방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 고죽방이 우리를······. 내가 실언을 한 듯하군.”

“고죽방은 최근 몇 년 동안 급격하게 세를 불려 장사(長沙)의 흑도를 석권했습니다. 현재는 호남(湖南)에서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지요.”

“그래도 신선들께서 나서주시면······.”

“본 곡에도 사정이 있어 당장은 지원이 힘듭니다. 저와 신 대협, 둘이서 헤쳐나가야 합니다.”

“어렵군, 어려워. 어떤 복안(腹案)이라도 있는 건가?”


안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그리 나쁘지만도 않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꼬리는 끈덕지게 따라붙을 터인데······.”

“어차피 떼어내지 못할 꼬리입니다. 그렇다면 달고 다니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요. 이참에 다른 꼬리도 주렁주렁 붙여보려고 합니다.”


신전흥이 영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안유가 짤막하게 덧붙였다.


“목련서각의 사재 중 아직 세 분이 더 있지 않습니까?”

“고죽방이······ 그들도 노리고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안휘에는, 순전히 추측입니다만, 고죽방의 끈이 맞닿아 있었을 겁니다. 대협은 그 끈 때문에 예까지 오시게 된 거고요.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뭣하지만 신 대협은 운이 나빴습니다.”

“나머지 삼재들은 운이 좋았군. 지금까진 말이야.”

“그렇습니다. 고죽방이 불러들이는 이상 다른 두 분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서각의 백중(百中) 회합까진 꽤 많이 남았으니 액운이 들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이목을 끌자는 거군. 좋은 생각이네. 우리가 죄어주면 그쪽은 숨통이 좀 트일 테니까.”

“요령껏 그물질해야 합니다. 죄었다가 풀었다가, 또 죄었다가 풀었다가.”

“어렵군. 어려워.”


신전흥이 물을 들이켜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먼 길을 떠나려면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야겠지요.”

“준비?”

“우선 세 가지를 준비해야 합니다. 검과 지도, 그리고 행낭(行囊)입니다. 그런데 행낭은 챙겼으니······.”


안유가 신전흥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지도를 먼저 챙긴 다음 검을 찾으러 가볼까 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도록 하세. 내 안 소협만 믿고 있네. 이런 꼴로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신전흥이 기름기로 번질거리는 손가락을 멋쩍어하며 말했다.


“고맙네.”

“고맙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떠나기에 앞서 살 게 많습니다.”

“사다니?”

“말보다는 마차가 낫겠지요. 적당한 옷도 두어 벌 사야 하고 야숙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니 객잔도······.”

“······.”

“암기도 보충해야 하고, 아 건량도 챙기면 좋겠군요. 또······.”

“자네 혹시 행낭을 챙겼다는 게······.”

“필요한 게 떠오르면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유가 넉살 좋게 웃으며 새 구이를 뜯었다.


신전흥은 행낭과 전낭의 차이를 곱씹으며 괜히 물만 연거푸 들이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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