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사웨이 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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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5.08 12:18
최근연재일 :
2024.07.1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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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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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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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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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아이라 1장 (2)

DUMMY

남자는 굳은 얼굴로 다가와 보호막에 손을 올렸다.


그가 손을 밀어 넣으려는 듯 계속해서 손아귀에 힘을 주었으나 보호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두꺼운 벽에 손을 댄 것 같았다.


지금도 아이라의 손이 보호막 안에 들어가 있는 것과 대조되는 광경이었다.


"가호는 이상이 없군."


멀뚱멀뚱 쳐다보는 아이라에게 남자는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한 거지?"


"네···?"


"어떻게 카난시아의 가호를 뚫을 수 있었냐는 말이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와 봤더니 천칭이 있었어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또각또각.


갑자기 들려온 발소리에 남자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창고 문이 닫히지 않고 살짝 열려 있었다.


열린 틈새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문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창고로 다가오고 있었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라."


남자는 급히 문으로 다가갔다. 그가 문손잡이를 낚아채기 직전에 문이 반쯤 열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부가 보이기 직전에 남자의 큰 키에 틈새가 전부 가려졌다.


문밖에서 한 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아까 전시실을 관리하던 수녀인 것 같았다.


"어라? 거기 계셨군요, 루그 사제님."


"무슨 일입니까?"


"아, 창고 문이 살짝 열려 있길래···"


"성배 전시가 끝나서 점검차 잠시 확인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성물이니까요."


"그랬군요. 나중에 강림절 예배가 있으니 늦지 않게 오세요. 뭐, 루그 사제님이라면 알아서 잘하시겠지만요."


"알겠습니다."


"저는 로트 사제님을 찾으러 가 봐야겠네요. 예배 시간만 되면 어디로 사라지시는지 참···"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멀어지다가 문이 닫히면서 완전히 끊겼다.


아이라가 멍하니 쳐다보는 가운데, 남자가 돌아보았다.


"들었겠지. 나는 이곳 카난시아 대성당의 사제, 루그라고 한다. 넌 이름이 뭐지?"


"아이라에요."


"그래, 이상한 느낌을 따라서 왔더니 천칭이 있었다고 했었지. 어쩌다가 엘리야드까지 오게 되었는지 말해다오."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아이라는 집에 가고 싶었다. 근 5년간 집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나 아무튼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리 사제라고 해도 갑자기 사람을 붙잡아 놓고 취조해도 된다는 법은 없었다. 비록 창고에 제 발로 들어오긴 했어도 부당한 처사였다.


"그럴 수는 없지. 먼 고대부터 지금까지 천칭의 가호는 한 번도 뚫린 적이 없었다. 네게 무슨 비밀이 있는지 알아야겠다."


루그가 가까이 다가섰다. 아이라의 작은 몸이 큰 그림자에 덮였다.


아이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비밀이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이대로 비밀 공간으로 끌려가 감금이라도 당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카난시아 대성당 지하에는 교단 최대 규모의 감옥이 있다던데.


아이라는 불길한 상상을 억누르며 루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직후, 루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뭘 어쩌긴. 보호해야겠지. 내 예상이 맞다면 넌 카난시아의 후손일 테니까."


천칭이니, 가호니,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다가 갑자기 나온 놀라운 이야기에 아이라는 굳어버렸다.


"제가요?"


"위대한 자 중 하나, 정의로운 자 카난시아는 천칭을 성배로 만든 다음 자기 피를 이용해 가호를 내렸다. 같은 피를 가진 자 외에는 모두 배제하는 강력한 가호였지."


카난시아의 가호는 긴 역사 속에서도 성배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이 강력한 힘은 성배에 깃든 질서의 권능과 호응해 성배를 대성당 밖으로 옮기지 못하게끔 억제했다.


가지고 나가려고 해도 보호막째로 옮겨야 했으며 성당에서 일정 범위를 벗어나면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외부의 모든 마법 혹은 물리력을 막아주는 건 기본이었다.


상징성과 힘을 동시에 가진 엘리야드 최고의 보물답게 긴 역사 속에서 탈취 시도가 빈번했으나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고 성배의 명성만 높여줄 뿐이었다.


"그 강력한 가호를 아무렇지 않게 돌파했다는 건 네가 카난시아의 후손이라는 명백한 증거다."


"그럴 리가···"


"못 믿겠나? 나도 그렇다. 기록에 따르면 정의로운 자는 누구도 성배에 손대지 못하게 하려고 제 몸속의 아이까지 포기했다고 하니까."


루그는 다시 백색의 보호막으로 손을 뻗었다. 역시 이번에도 가로막혔다.


"한 번만 다시 손을 넣어 보지 않겠느냐? 부탁하마."


딱히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기에 아이라는 루그가 시키는 대로 보호막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이 닿은 부분이 일시적으로 무너지며 손바닥이 내부로 쑥 들어갔다.


"으음···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군."


루그는 착잡한 얼굴로 아이라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고뇌하던 그는 아이라에게 제안을 건넸다.


"너의 과거를 들어보고 싶구나. 말해주면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하마."


"정말요?"


"나는 사제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


아이라는 루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갑고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느낌이었으나 적어도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킬 것 같은 단호함이 느껴졌다.


아이라는 창고에 무단으로 침입한 잘못도 있으니 억지 부리지 말고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이리저리 재면서 간계를 꾸미는 건 성미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귀찮은 일이었다.


아이라는 가문에 내려오는 경고와 테라미드를 떠돌게 된 이야기를 모두 전했다.


"엘리야드에 가지 말라··· 그런 식으로 타협했단 말이군."


루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이라는 엘리야드에 가지 말라는 경고가 왜 대대로 전해 내려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나 후손이 성배를 악용하거나, 혹은 피에 깃든 힘을 알아본 타인에게 이용당할 것이라는 우려한 탓이었다.


루그는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천칭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포기했다는 기록을 접했을 때는 실로 정의로운 행보라고 생각했다만··· 다 거짓말이었군. 위대한 자도 결국 인간이었던 모양이야."


추측한 모든 이야기가 진실이고, 카난시아가 만약 정말로 아이를 포기했다면 아이라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후손 앞에서 저런 식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니 상당히 차갑고 무정한 사람 같았다.


사색에 잠긴 듯한 루그를 아이라는 무심히 쳐다보았다.


"이제 가도 되죠?"


루그는 시선을 돌려 아이라에게 당부했다.


"이번 일은 너와 나만의 비밀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알아요. 떠들고 다녀 봐야 좋은 일은 없겠죠. 어차피 누가 믿어줄 것 같지도 않고."


"나이에 맞지 않게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다 경험이죠, 뭘. 그럼, 이만."


아이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그리고 가기 전에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 들어주지 않겠느냐?"


"또 뭔데요?"


"혹시 수녀가 되어 볼 생각은 없느냐?"


"수녀···요?"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으나 루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일견 일리가 있었다.


여신교는 모든 흐름에는 제약이 없어야 한다는 교의 아래 수도자를 받을 때 신분에 따른 제한이 거의 없었다.


외부인이라고 해도 신원을 보증할 수단만 있다면 일원으로 받아 주었다. 고아원 출신이 수녀가 되는 경우도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출신으로 차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런 실정이니 현직 사제가 추천서라도 써준다면 견습 수녀가 되는 것쯤이야 어렵지는 않았다.


물론 수녀가 된다면 공부는 많이 해야 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움직여야 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며 규율을 몸에 익혀야 했다.


그래도 매일 짐을 한가득 싸 들고 떠돌아다니는 생활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 보였다.


아이라에게 자유로움이란 곧 가난하고 외로운 방랑자의 삶을 뜻했으니 적당한 통제는 곧 그녀가 원하던 바였다.


게다가 5년 간의 떠돌이 생활은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생채기를 남겼다.


가는 마을마다 떠돌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만 하면 매번 따돌림당했고 아비 없는 자식 소리를 듣는 일 정도는 예사였다.


기적적으로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아도 얼마 못 가서 떠나야 했기에 친분을 쌓을 시간이 없었다.


한곳에 정착할 수만 있다면, 신분에 상관없이 온갖 사람이 모이는 집단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동안 쌓인 결핍을 해소할 수 있을 듯했다.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다. 다만 아이라는 이런 큰 결정을 마음대로 내리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다.


아이라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엄마한테 물어볼게요."


"···예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같이 가보자꾸나."



***



엘리야드 외곽의 허름한 여관방.


그 안에서 아이라의 엄마는 사제 서임 증명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따님을 제게 달라 뭐 이런 말씀이네요?"


"크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어쩐지 긍정하고 싶지 않은 표현이군요."


표정이 굳은 루그를 보며 아이라의 엄마는 씨익 웃었다.


"제 딸이 어디가 마음에 드셨죠?"


"개인적인 기호에 따라 성직자를 뽑지는 않습니다. 굳이 이유를 밝히자면 따님에게서 대단한 잠재력을 보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루그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라를 바라보았다.


"하긴 이 애가 보기보다 힘이 세긴 하죠. 초인이니 뭐니 하던데 저는 잘 모르겠지만요."


루그가 말한 잠재력은 그런 의미가 아닌 것 같았지만 아이라는 괜히 끼어들기 싫어 가만히 있었다. 아이라의 엄마는 땀에 절어 엉겨 붙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가 5년 동안 구르면서 배운 게 이런 것뿐이라 헛소리가 길었네요. 저는 제 딸아이가 하고 싶다면 딱히 말릴 생각은 없어요. 다만···"


"말씀하시죠."


"제가 마을을 이곳저곳 떠돌면서 행상인을 하고 있는데··· 물건이 많다 보니 저 아이가 없으면 이동할 때 상당히 곤란하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아이라의 엄마는 말을 잘했다. 5년간 행상인을 하면서 단련된 말재간과 협상력은 둔감한 아이라도 대단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그 재주를 발휘하기도 전에 루그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엘리야드에 자리 잡고 싶으시다는 말씀이군요."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쾅!


루그는 나무로 된 탁자 위에 묵직한 주머니를 올려 놓았다.


"얼마 전에 상점이 딸린 건물이 매물로 나왔더군요. 크기도 적당해서 잡화점을 차리면 좋을 겁니다."


"허억···"


아이라의 엄마는 너무 놀랐는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루그가 덤덤히 물었다.


"또 필요한 것 있으신가요?"


아이라의 엄마는 그대로 아이라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탁자에 닿을 정도로 푹 숙였다.


"없습니다. 당장 데려가서 엘리야 여신님의 충직한 종으로 만들어 주시죠."


"그러면 내일부터 성당에 보내는 걸로 하시죠. 전 이만 강림절 예배를 드리러 가보겠습니다."


루그는 내일 아이라를 성당에 데려오면 주겠다며 주머니를 가지고 돌아갔다.


인생을 바꿀 큰 거래가 한순간에 끝났다. 거센 폭풍이 지나간 대지처럼, 모녀만 남은 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충격에 빠져 있던 아이라의 엄마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뭘 했길래 저런 분을 데려온 거니?"


"음···."


창고에 무단침입했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는 아이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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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아이라 1장 (3) 24.07.18 4 0 18쪽
» 아이라 1장 (2) 24.07.17 7 0 11쪽
51 아이라 1장 (1) 24.07.16 8 0 15쪽
50 시그윈 1장 (29) 24.07.15 5 0 15쪽
49 시그윈 1장 (28) 24.07.12 5 0 11쪽
48 시그윈 1장 (27) 24.07.11 6 0 11쪽
47 시그윈 1장 (26) 24.07.10 9 0 16쪽
46 시그윈 1장 (25) 24.07.09 8 0 20쪽
45 시그윈 1장 (24) 24.07.08 7 0 15쪽
44 시그윈 1장 (23) 24.07.05 8 1 19쪽
43 시그윈 1장 (22) 24.07.04 9 1 16쪽
42 시그윈 1장 (21) 24.07.03 7 1 15쪽
41 시그윈 1장 (20) 24.07.02 7 1 13쪽
40 시그윈 1장 (19) 24.07.01 8 1 11쪽
39 시그윈 1장 (18) 24.06.28 8 1 12쪽
38 시그윈 1장 (17) 24.06.27 8 1 14쪽
37 시그윈 1장 (16) 24.06.26 9 1 11쪽
36 시그윈 1장 (15) 24.06.25 10 1 20쪽
35 시그윈 1장 (14) 24.06.24 8 1 13쪽
34 시그윈 1장 (13) 24.06.21 9 1 20쪽
33 시그윈 1장 (12) 24.06.20 6 1 14쪽
32 시그윈 1장 (11) 24.06.19 9 1 13쪽
31 시그윈 1장 (10) 24.06.18 9 1 19쪽
30 시그윈 1장 (9) 24.06.17 9 1 16쪽
29 시그윈 1장 (8) 24.06.14 9 1 17쪽
28 시그윈 1장 (7) 24.06.13 9 1 20쪽
27 시그윈 1장 (6) 24.06.12 9 1 14쪽
26 시그윈 1장 (5) 24.06.11 9 1 16쪽
25 시그윈 1장 (4) 24.06.10 9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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