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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5.08 12:18
최근연재일 :
2024.07.1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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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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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시그윈 1장 (25)

DUMMY

"기믹이 끝나면 지금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알려주겠다고 했지···."


쥬드가 계속 해를 바라보러 가자고 한 이유는 이제 알았다. 이제 남은 것은 그녀의 행방이었다.


마지막까지 함께 하겠다고 해놓고 어째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과연 살아는 있는지. 어떻게 해야 다시 만날 수 있는지.


모든 바람을 담아서 시그윈은 세계수에게 물었다.


"이제 말해 줘. 쥬드는 어디에 있어?"


바람에 세계수가 가지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마지막 아이야. 나와 하나가 된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 있어?"


세계수는 꼭 필요한 질문이라며 반드시 답해달라고 덧붙였다. 시그윈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냥 백일간의 기도 끝에 네 일부가 되는 거 아냐?"


"그건 결과지. 과정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 있어?"


"아니.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거 아냐?"


"···."


세계수가 딱하다는 듯이 끌끌거렸다.


"항상 그래. 너희는 나와 연관되면 의문을 가지지 않아. 언제나 쉽게 받아들이고 무엇이든 쉽게 내려놓지."


"···?"


"질서의 속박일까. 아니면 혼돈의 장난일까. 내가 만들었음에도 나는 너희를 잘 모르겠어. 자식은 항상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인가 봐."


세계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 일 기도는 존재를 바치는 과정이야. 존재는 무엇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글쎄? 몸과 마음?"


"그건 현재의 일부분에 불과해. 존재는 현재에 국한되지 않고 과거에서 시작해 미래까지 뻗어있지."


세계수는 줄기에서 나뭇가지 세 개를 키워냈다. 세 나뭇가지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빠르게 자라났다.


"존재의 미래는 수명이 결정하고···"


어떤 과거를 지니고 어떻게 현재를 살아가든 수명이 다하면 미래는 없다.


첫 번째 나뭇가지는 빠르게 말라붙으며 시들어갔다.


"현재는 인지가 결정하며···"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다면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으며, 선택할 수 없는 자에게 현재는 없다.


두 번째 나뭇가지는 어두운 그늘 속에서 더 이상 자라나지 못했다.


"과거는 기억이 결정하지."


마음에 품은 기억부터 몸에 잠든 기억에 이르기까지, 쌓인 기억이 과거를 형성하며 인격을 만들어낸다.


세 번째 나뭇가지는 뿌리가 가늘었기에 부러질 듯 얇고 허약한 모습으로 자라났다.


"나와 하나가 된다는 말은 존재를 바친다는 뜻이야. 존재를 바친다는 말은 한 존재의 미래를 지탱하는 수명, 현재를 보장하는 인지, 과거를 규정하는 기억을 모두 잃으면서 내 일부가 된다는 뜻이야."


세 개의 나뭇가지는 다시 줄기 속으로 말려들어 가 세계수와 하나가 되었다.


시그윈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그럼 나는 왜 멀쩡한 거야? 첫날에 내 기억을 가져갔다며?"


세계수가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그야 첫날 이후로 널 대신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날··· 대신해?"


시그윈의 생각이 길게 이어지기 전에 세계수가 맥동하기 시작했다.


"그 눈으로 확인해 봐. 그 아이가 널 위해 무엇을 바쳤는지."


부러진 나뭇가지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벽이 투명해졌을 뿐 세계수는 기믹을 완전히 끝내지 않았다.


나뭇가지는 공중에서 하얗게 불타오르며 사방으로 빛을 뿜어냈다.


"마지막 아이야. 과거를 마주할 시간이야."


빛나는 나뭇가지가 밖으로 빛의 파편을 흩뿌렸다.


주홍빛으로 빛나는 파편들은 시그윈 발아래에 떨어져, 보석처럼 반짝였다. 시그윈은 천천히 가장 가까이 떨어진 파편을 주워들었다.


손에 닿은 파편은 빛의 입자로 붕괴하더니 시그윈에게 흘러들었다. 어떤 기억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



첫 의식이 있었던 날 밤.


"그래서 인간이 이 늦은 시간에 루나에르에 침입한 이유가 뭐죠?"


집무실 안에서 엘프 장로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창밖에 떠오른 달빛에 얼굴이 비쳤다. 빨간 후드 아래로 커다란 눈망울이 반짝였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쥬드가 초조한 말투로 물었다.


"기도자를 바꿀 수는 없나요?"


"오자마자 하는 질문이 그거라니··· 아무래도 기도에 대해 아주 많이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장로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쥬드를 훑었다.


"솔라니아 엘프는 아닌 것 같고, 혹시 시그윈이 말해주던가요?"


쥬드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서렸다.


"네. 백 일간의 기도가 어떤 의식인지 전부 들었어요. 그리고 알았어요.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시그윈이 아니라 다른 엘프로 기도자를 바꿔 줬으면 좋겠다는 게 당신의 뜻인가요?"


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질문이 잘못됐네요. 제가 진짜로 하고 싶은 질문은 따로 있어요."


"뭐죠?"


"만약 기도자를 바꿀 수 있다면···"


쥬드는 고뇌 끝에 주먹을 꾹 쥐었다. 고개가 살짝 들리며 후드 아래 눈빛이 드러났다.


"인간도 기도자가 될 수 있나요?"


쥬드의 눈빛 속에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과 굳건한 결의가 공존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했지만··· 저는 인간이기에 시그윈이 소중한 것을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힘들 것 같아요. 제가 시그윈을 대신할 수는 없을까요?"


엘프 장로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그녀는 한참 쥬드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당신이 시그윈의 잊지 못할 경험인가 보군요."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단 따라오시죠."


엘프 장로는 책상 밑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무언가를 꾹 눌렀다.


쿠르릉.


집무실 중앙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 두 조각으로 벌어지더니 통로가 드러났다. 아래로 이어지는 돌계단 끝에는 조명이 달려 있어 내부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이건···?"


"루나에르는 솔라니아 엘프와 교류하지 않습니다만, 그들도 엘프이므로 세계수님을 뵐 권리는 있습니다. 그럴 때를 대비해 만들어 둔 통로입니다."


장로가 먼저 통로로 들어갔다. 쥬드는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통로는 간간이 이용되었는지 엘프들이 오간 흔적이 남아 있었고, 조명도 적당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흙 밟는 소리가 통로 속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걷는 도중에 장로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 기도자를 바꿀 수 있느냐고 물었죠?"


쥬드는 "네."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부터 답하자면 특별한 경우를 빼면 불가능합니다."


"그런가요··· 그럼 특별한 경우는 어떤 게 있죠?"


"기도란 곧 존재를 세계수께 온전히 바치는 의식입니다. 존재의 일부만 떼어 바친다는 건 불가능하죠. 그렇기에 한번 시작한 의식은 절대 무를 수 없고, 기도자도 중간에 바꿀 수 없습니다만..."


장로는 쥬드를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딱 두 가지 예외 사항이 있습니다. 의식이 중간에 실패하거나, 혹은 세계수께서 원하시는 경우죠."


"의식이 실패할 수도 있나요?"


"네. 하지만 그건 이따가 이야기하고 당신에게 해당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는 후자입니다."


장로는 앞서 말한 두 가지 경우에만 기도자를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아무나 기도자가 될 수는 없고 기존의 기도자와 같은 기억을 많이 공유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럼 조건을 충족하는 존재가 세계수님이 허락을 얻는다면 기도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죠?"


"예. 당신은 시그윈과 함께 지낸 기간이 있으니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만약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그때는 즉시 인간의 도시로 돌아가십시오. 초소를 무단 점거한 잘못은 눈감아 줄 테니까요."


"앗."


쥬드는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알겠어요···"


장로의 집무실에서 세계수의 영역까지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통로를 빠져나오니 하늘 위에 달이 높게 떠 있었다. 이슬 맺힌 수풀 너머로 세계수가 보였다.


장로는 쥬드를 세계수 바로 앞까지 데려갔다.


"자, 세계수님께 손을 대고 기도자와 함께 보냈던 기억을 떠올리세요."


쥬드는 거대한 줄기에 손을 올린 채로 눈을 감았다.


시그윈과 함께 한 기억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외롭게 죽기 직전에 만나 함께 괴조와 맞섰다. 순수한 부탁에 좋은 사람이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감정을 가르쳐 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피리 소리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해바라기 밭에서 과거를 이야기했다. 엘프를 사랑하는 인간이 되었다.


하나하나가 떠올릴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는 추억이었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를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보고 싶었어."


어린아이 같은 말투였으나 그 목소리는 영혼이 울릴 만큼 웅장했다.


쥬드는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손등에 흐릿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잠깐 보여주시죠."


엘프 장로가 쥬드의 팔을 잡고 문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잠시 후 담담하게 선언했다.


"이제 당신에게도 기도자의 자격이 생겼군요."


쥬드가 복잡한 눈빛으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시그윈은 이제 기도를 올리지 않아도 되나요?"


"아뇨. 기도자가 두 명이 되었을 뿐입니다. 시그윈도 여전히 세계수께 기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럼 의미가 없지 않나요? 시그윈은 매일 하던 대로 기도를 올릴 텐데..."


"왜 우리가 백 일이라는 기간 동안 의식을 진행하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군요. 세계수님이 하루에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의 총량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 그럼 제가 매일 먼저 의식을 진행한다면···"


"시그윈이 기도를 올려도 아무 일도 없겠죠."


이제 쥬드는 시그윈을 도울 수 있었다.


의식이 끝날 때까지 매일 시그윈보다 빨리 와서 의식을 끝내둔다면 시그윈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그 상태로 백 일이 지나면 시그윈은 자유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로님."


원하는 바를 이룬 쥬드는 장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며 돌아섰다.


그때 장로가 돌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가기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요?"


엘프 장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빛으로 쥬드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두렵지 않나요?"


"···."


기도자는 주고, 세계수는 받는다.


만약 기도자가 주기를 거부한다면 쉽게 기도자를 바꿀 수 없는 세계수는 큰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 지극히 일방적인 관계였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세계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엘프의 본성 덕분이었다.


"엘프는 본래 감정이 없습니다. 게다가 세계수를 위한다는 명분이 있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의문도 품지 않죠."


엘프 장로는 이러한 본성을 지키고 극대화하기 위해 세계수를 둘러싼 도시, 루나에르를 만들었다.


루나에르 엘프는 높은 성벽 안에서 순수한 존재로 자라나 살아갔다. 그러다가 세계수에게 기도가 필요한 때가 오면, 장로는 엘프들 중에서 희망자를 뽑아 기도를 올리게 했다.


희망자는 무조건 있었다. 솔라니아에서 태어난 엘프 중에서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엘프의 본성은 강력했다.


다만 루나에르에 모여 살며 본성을 유지한 엘프와, 반대로 자유롭게 인간과 교류한 엘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바로 감정이었다.


감정을 지닌 자는 마음이 너무나 쉽게 변했다.


세계수의 의지에 따라 기도를 희망하는 엘프만 모았음에도 중간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엘프가 달아난 사건이 있었다. 먼 옛날, 기도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엘프 장로는 수치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런데 저는 세계수님을 뒤로 하고 두려움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다 인간에게 배운 감정 때문이었죠."


"그럼 의식은···"


"실패했습니다. 의식이 끝나고 돌아와 보니, 저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가 저 대신 기도를 올렸더군요."


의식이 실패해 기도자가 바뀐 경우란 엘프 장로 본인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후회에 젖은 눈동자로 쥬드를 바라보았다.


"왜 제가 가장 감추고 싶은 기억을 오늘 처음 본 당신에게 꺼냈는지 아시겠어요?"


"···의식을 끝까지 치를 수 있겠냐는 말씀이시겠죠."


"그렇습니다. 엘프였던 저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달아났어요. 하물며 당신은 인간이지 않습니까. 정녕 두렵지 않나요?"


"···."


"기도를 이어받은 제 친구는 수명이 생겨 늙어 죽었습니다. 제가 기도를 한 달 정도 진행한 후에 이어받았음에도 그렇게 됐습니다. 지금은 기도를 단 하루밖에 진행하지 않았어요. 지금 의식을 이어받는다면 끝날 때쯤이면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꼴이 될 겁니다."


엘프 장로는 쐐기를 박듯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당신이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기에 미리 경고하는 겁니다. 나중에 가서 후회할 것 같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고민해 보라며 시간을 주었다.


쥬드는 밤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물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존재를 바쳐야 한다니. 사실은 미치도록 두려웠다.


자신을 이루는 대부분의 요소를 잃어버리고 세계수와 하나가 된다는 건 생각할수록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시그윈이 더 이상 내려놓지 않아도 된다면···


더 이상 소중한 것을 잃지 않아도 된다면···


이미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쥬드는 결연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을 마주한 장로는 지체 없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네."


"그대는 세계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나요?"


"인간은 욕심쟁이예요.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다만 단 하나. 가장 소중한 것 단 하나만 가슴에 품을 수 있다면, 나머지는 모두 내려놓을 수 있어요."


쥬드는 장로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장로님. 제가 의식을 대신 치른다면 시그윈은 무사하겠죠?"


"네. 엘프로서 약속드릴 수 있어요."


"그거면 충분해요. 시그윈은 제게 가장 소중한 존재니까요."


장로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잠시 눈을 감았다.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매일 해가 떠오르고 나면 여기로 오세요."


다시 뜬 눈에는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지켜보겠습니다."


"네."


쥬드는 돌아서기 전에 잠시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세계수에게 다가가 손을 얹었다.


"세계수님. 세계수님은 모든 루나에르 엘프와 이어져 있다고 하셨죠. 듣고 계신다면 혹시라도 시그윈에게 오늘 이후의 기억은 보여주지 말아 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엘프에게 슬픔은 너무나 무거운 감정이니까요."


곧 얹었던 손이 줄기 아래로 힘없이 미끄러졌다. 어깨가 축 처지며 후드 사이로 얼굴이 가려졌다.


"시그. 이런 방법밖에 떠올리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너는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라고 믿어."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슬픔을 모르는 너라면 혼자 남아도 괜찮을 거야."



***



아니야. 네가 없어지고 나서 깨달았어. 나도 네가 없으면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흐르는 강에 손을 뻗어도 붙잡을 수는 없다. 지나간 기억을 보며 애타게 외쳐도 쥬드에게는 닿을 수 없었다.


진실을 확인한 엘프는 둥둥 떠 있는 나뭇가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정말로 이상한 표현이지만··· 마음이 아팠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분명히 몸은 멀쩡한데 가슴 안쪽이 아팠다.


쥬드가 사라진 이후에는 마음이 뻥 뚫려 공허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터질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바보 같이 너무 늦게 깨달았다.


왜 갑자기 문양이 흐릿해졌는지.


기도 시간이 갑자기 왜 바뀌었는지.


의식에는 차질이 없다던 장로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무엇보다, 지금까지 왜 자신이 아무것도 잃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는지.


그건 모두 쥬드의 헌신 덕분이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잃어도 가장 소중한 것만은 남긴대."


"···"


"그 아이는 99일 동안 매일 너보다 빨리 와서 기도를 올렸어. 네가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도록."


그 말은 쥬드가 99일 동안 매일 조금씩 수명과 인지와 기억을 잃었다는 뜻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인지하자 시그윈의 사고는 쥬드가 보여줬던 100일간의 행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점점 길어졌던 장갑.


뜬금없이 시작했던 화장.


처음 했을 때에 비해 확연히 떨어진 게임 실력.


피곤하다며 사냥을 거부했던 일.


날이 갈수록 두꺼워졌던 복장.


모두 존재를 잃어가는 자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했던 행동들 아니었을까.


장갑은 손등의 문양을 가리는 동시에 쭈그러든 피부를 감추기 위한 용도였다.


화장도 마찬가지로 점점 늘어가는 주름을 감추려는 목적이었다.


게임 실력이 떨어졌던 건 기억이 사라지고 인지도 흐릿해진 탓이었고, 사냥을 거부했던 건 늙어 체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날이 갈수록 두꺼워진 복장과 얼굴을 가리는 복면은 변해가는 모습을 숨기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쥬드가 50일이 지나 사라진 이유도 이제 더 이상 존재를 잃은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모든 단서가 맞아떨어지며 그녀가 처한 가혹한 운명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그윈은 나락으로 걸어 들어가듯, 다음 기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그녀의 운명을 짐작했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모든 진실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무감일까. 아니면 실낱 같은 희망을 향한 발버둥일까.


그는 점차 나머지 빛의 파편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가 파편을 주우려고 허리를 숙인 순간이었다. 파편들은 입자로 변해 다시 나뭇가지로 빨려 들어갔다.


"그 이상은 안 돼."


나뭇가지가 공중에 떠올랐다.


"그 아이는 날 위해 단 하나를 빼고 모든 것을 바쳤어. 그리고 나에게 이 이상의 기억을 보여주지 말아 달라 소망했지."


부러진 상태에서도 어린 나뭇가지는 공중에 부유하며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소망을 이루어주고 싶어."


시그윈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돌려줘. 난 봐야 해."


"쥬드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돌려줘! 쥬드를 뺏어가지 마!"


"아이야. 흘러간 강물이 어디에 도달했을지 넌 이미 알고 있잖아."


"나도 알아! 그래도 나는 쫓아갈 거야! 이대로 잃어버릴 수는 없어."


시그윈은 거칠게 소리쳤다. 무너지는 마음 사이로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제발 나를 막지 마···"


"···."


세계수는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좋아. 너도 날 위해 가장 소중한 기억을 바쳤으니 기회를 줄게."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솟아 나온 나무덩굴이 시그윈의 발을 붙잡았다.


"앗!"


나무덩굴은 그대로 들판을 가로질렀다. 어떻게든 떨쳐내려 해도 상당히 질겨서 힘으로 끊어지지 않았다. 시그윈은 그대로 붙잡혀 영역 가장자리까지 끌려갔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세계수가 점점 멀어져 갔다.


나무덩굴은 성벽까지 시그윈을 끌고 간 후에야 겨우 땅 속으로 사라졌다.


들판 너머 저 멀리서 세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질서를 거스르고자 한다면 파훼해 봐."


땅에서 기괴하게 뒤틀린 덩굴이 지면을 뚫고 나왔다. 덩굴은 어지간한 나무의 줄기보다 굵었고, 표면에는 듬성듬성 하얀 가시가 돋아 있었다.


가시 돋친 덩굴은 꼬리를 문 뱀처럼 세계수를 겹겹이 둘러싸며 장벽을 만들었다. 새하얀 가시가 칼날처럼 번뜩이며 길을 가로막았다.


시그윈과 세계수 사이에, 마치 가시면류관을 씌운 것처럼 세 겹의 거대한 가시덤불이 만들어졌다. 성벽에 둘러싸인 루나에르처럼, 자연의 요새가 세계수를 둘러싸며 수호하고 있었다.


그 위로 어둠이 내렸다. 칠흑 같은 밤이 찾아오며 하얗던 구름이 이내 검은빛을 띠었다.


하늘마저 빛이 바래는 가운데, 세계수 위로 달이 떠올랐다. 마치 일식을 연상케 하는 검은 달이었다.


검게 물든 달은 세계수를 어둠으로 덮어씌웠다. 가시도, 가지도, 줄기도 모두 까맣게 물들어갔다.


온 세상이 그림자에 뒤덮이고 있었다.


"마지막 아이야. 나와 하나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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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시그윈 1장 (26) 24.07.10 9 0 16쪽
» 시그윈 1장 (25) 24.07.09 7 0 20쪽
45 시그윈 1장 (24) 24.07.08 7 0 15쪽
44 시그윈 1장 (23) 24.07.05 8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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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시그윈 1장 (21) 24.07.03 7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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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시그윈 1장 (17) 24.06.27 8 1 14쪽
37 시그윈 1장 (16) 24.06.26 9 1 11쪽
36 시그윈 1장 (15) 24.06.25 10 1 20쪽
35 시그윈 1장 (14) 24.06.24 8 1 13쪽
34 시그윈 1장 (13) 24.06.21 9 1 20쪽
33 시그윈 1장 (12) 24.06.20 6 1 14쪽
32 시그윈 1장 (11) 24.06.19 9 1 13쪽
31 시그윈 1장 (10) 24.06.18 9 1 19쪽
30 시그윈 1장 (9) 24.06.17 9 1 16쪽
29 시그윈 1장 (8) 24.06.14 9 1 17쪽
28 시그윈 1장 (7) 24.06.13 9 1 20쪽
27 시그윈 1장 (6) 24.06.12 9 1 14쪽
26 시그윈 1장 (5) 24.06.11 9 1 16쪽
25 시그윈 1장 (4) 24.06.10 9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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