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대의 종말
하렌 영주에게서 시선을 뗀 페인은 주변을 훑어봤다.
주변에는 싸움을 멈춘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페인과 하렌 영주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영지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영주가 붙잡혔다.
그들을 재촉해야 할 가신들도 대부분 도망가거나 죽은 상황.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거였다.
그리고 페인은 그것을 결정할 수가 있었다.
그의 결정에 따라서 죽을 자가 살고, 살 자도 죽게 될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하렌 영주는 죽는다!”
페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진다.
성 내부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저건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고하는 선언이다.
그제야 병사들은 페인이 어디에 서있는지를 깨달았다.
성의 중앙에는 광장이 있다.
광장은 대개 영주의 뜻을 전하는 자리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영주의 뜻을 알리던 자리가 영주의 최후를 알리는 자리가 되었다.
방금 전까지 목숨을 노리던 자들의 시선이 페인에게로 향했다.
하렌 영주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무얼 그리 잘못했다고 복수를 운운한단 말인가?
“내, 내가 다 잘못했다! 제발 용서해다오!”
“네가 뭘 잘못했는지는 아나?”
“······어. 그게 그러니까······.”
페인의 물음에 하렌 영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긴장으로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하나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있으면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말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그렇지.’
페인은 실망감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자기가 잘못하는 걸 알면 이 지랄을 떨지 않았을 테니까.
무덤덤한 페인의 태도에서 하렌 영주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입을 열어 다시금 목숨을 구걸했다.
“자, 잠시만, 내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민해봄세! 그러니 잠시만 시간을 주-!”
“좆까.”
페인은 그런 하렌 영주의 말을 싹 무시했다.
더는 개소리를 들어주는 것도 시간이 아까웠다.
페인의 손이 움직인다.
무뎌진 롱소드의 칼날이 하렌 영주의 모가지로 떨어졌다.
촤아악!
칼날은 단숨에 하렌 영주의 목을 잘라냈다.
하렌 영주가 남긴 말은 ‘켁’이었다.
“켁.”
뭔가 말을 하려던 것 같으나 그것은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그저 페인이 휘두른 검에 의해 몸과 머리가 분리돼서 죽었다.
데굴······.
하렌 영주의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자신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지 경악스러운 얼굴이었다.
페인의 시선은 바닥을 구르는 하렌 영주의 머리통으로 향했다.
서늘하기 그지없는 그 시선에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은 긴장감에 목이 말랐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킨다.
충격적인 광경에 사람들은 말을 잊은 사이 닫혔던 페인의 입이 열렸다.
“다음. 불만 있는 새끼 나오도록.”
오늘 끝장을 보겠다!
그런 마인드로 페인은 주변을 훑어봤다.
하나 페인과 시선을 마주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하렌 영주가 죽었다.
페인은 부모님의 복수에 성공했다.
줄곧 그것만 보고 달려왔기에 감정이 들끓는다.
하나 복수를 끝냈다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그들이 남긴 동생들이 남아있다.
동생,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나아가야 할 터.
‘일단 잔당부터 소탕해야겠군.’
하렌 영주가 남긴 막대한 양의 유산들.
그것들을 두고 아귀다툼이 벌어질 것이다.
이를 사전에 차단하려면 하렌 영주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
또는 항복하지 않는 자들을 치워야만 했다.
“페인 경, 남아있는 잔당이 항복을 거부합니다!”
“반항하면 죽여라.”
윌슨의 물음에 페인은 단호히 대답했다.
그는 칼 들고 설치는 놈들을 살려줄 정도로 마음이 넓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페인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반란군은 대부분이 영주와 호족의 폭정에 시달렸었다.
남아있는 잔당 대부분은 하렌 영주에게 들러붙었던 기득권들.
그들은 페인을 새로운 영주로 인정하지 못하고 영지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네 이놈들! 너희는 하렌 영주님에 대한 충성심도 없단 말이더냐!”
“새로운 영주는 우리를 배려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싸웁시다! 우리의 것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외다!”
“나도 그에 합류하겠소!”
“나도!”
“우리도!!”
탐욕스러운 기존의 기득권들이 반기를 들었다.
그 소식을 접한 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페인은 그들의 반항이 오히려 기꺼웠다.
기득권이 싹 쓸려버리면 권력층에 빈 공간이 생긴다.
거기에 자기 사람을 심으면 페인의 자리도 공고해질 터.
그렇기에 그는 윌슨에게 잔당 토벌을 명령했다.
하나 얼마 뒤 윌슨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돌아왔다.
“페인 영주님. 그, 잔당이 이미 소탕되었습니다.”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잔당이 이미 소탕되었다.
이 알 수 없는 답변에 페인의 정수리에는 간만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
당황한 것도 잠시.
페인은 윌슨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자세히 설명해봐라.”
“예, 그게 주민들이 자진해서 잔당과 호족들을 잡아들이고 있답니다.”
“주민들이? 병사가 아니고?”
“주민이 맞습니다. 영주님께 받은 은혜를 갚고자 자기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의외의 말에 페인은 머릿속을 뒤졌다.
자기가 언제 주민들에게 은혜를 입혔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딱히 은혜랄 걸 베푼 적이 없었다.
오히려 대량 징집으로 사람을 빼갔으니 원망을 받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하나 그건 페인의 생각이고 현실은 조금 달랐다.
페인은 빠른 진격을 위해 얻은 전리품을 마구 뿌렸다.
단순히 뿌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뒤를 생각하지 않았다.
내일이 없다는 것처럼 달리니 그 콩고물은 고스란히 주변 마을이 주워 담았다.
굶주림과 가난에 죽어가던 이들에게 페인이 흘린 부산물은 빛과 같았다.
“영주님께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우린 진작 굶어 죽었을 겁니다!”
“내 아들이 병사가 된 게 어찌나 좋은지 편지로 계속 자랑을 한다니까?”
“우리 애도 그분을 따라갔어야 했는데, 에잉······.”
오히려 페인을 따라가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민심이 이러니 설령 죽더라도 페인을 위해서 죽겠다는 이들도 여럿 나왔다.
한데 이런 페인을 지역 호족과 귀족들이 없애야 할 적이라고 선동을 했다.
“놈을 죽여야 우리가 산다!”
“복수하자! 하렌 영주님을 살해한 찬탈자를 쓰러트리는 거다!”
그러자 주민들은 눈이 돌아가서 그들을 때려잡았다.
“네가 뭔데 우리 페인 님을 죽이니 마니 지껄이는 거냐!”
“뭐, 뭐라? 이 농노가 지금 뭐라고 지껄였어?!”
“여러분! 이놈들이 우리를 다시 굶기고 재산도 빼앗겠답니다!”
“기사님을 죽이겠다니, 저놈들 살려둬선 안 되겠구만!”
“다들 무기를 들어라! 우리의 새로운 주인을 위하여 싸우자!”
와아아아아!
······이러한 사정으로 영지 곳곳에서 발호하려던 불순분자들이 소탕되었다.
이는 페인이라는 희망과 주민들 스스로가 살아남고자 하는 열망으로 만들어진 일이었다.
윌슨을 통해서 대략적인 사정을 들은 페인은 혀를 찼다.
‘그러게 평소에 좀 베풀고 살든가.’
얼마나 악랄하게 굴었으면 선동되기는커녕 선동한 자들이 외려 때려 잡힐까.
어찌됐든 페인으로선 일이 편해졌다.
“죽은 놈들의 재산은 그놈들을 잡은 주민들끼리 나눠가지라고 전해라.”
“전리품을 회수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필요 없다.”
하렌 영주가 남긴 유산만으로도 페인은 정신이 없었다.
여기에 지역 호족과 귀족들 것까지 추가되면 가뜩이나 부족한 행정력이 폭발해버린다.
어차피 이 미개한 세상에서 작정하고 숨기면 되찾을 방법도 없고.
그래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이런 명령을 내렸더니 주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새로운 영주님 만세!”
“역시 우리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만세! 만세! 좋은 세상 만세!!”
그야말로 구시대의 종말이었다.
***
페인은 연일 영지에 뭐가 있는지 살펴봤다.
워낙 개판으로 운영된 탓인지 영주의 재산조차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중에는 웬 이상한 양아치가 소유권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죄다 두들겨 패고 노예로 만들어 개 같이 굴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영지의 업무에 익숙해질 무렵.
잡다한 일들의 처리가 얼추 끝나자 여유가 생겼다.
“뻐근하구만.”
강철 같은 체력을 자랑하는 그지만 그것은 무기술로 제한되어 있다.
싸우는 것보다 서류와 씨름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니 온몸이 찌뿌둥했다.
‘그러고 보니 무덤도 만들긴 해야 하는데.’
페인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던 일들을 처리하기로 다짐했다.
즉시 인부를 시켜서 고향 땅에서 어머니의 유해를 가져왔다.
복수를 이루기 전만 해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 한 수에 모든 걸 쏟아 붓느라 그럴 여유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영혼의 유교DNA가 발동했다.
자고로 가족이 죽으면 무덤을 만들어서 기려야 하는 법이다.
그는 프랭크푸트 성에 무덤을 마련했다.
‘도심에 무덤을 만드는 건 특권이지.’
이만하면 부모님도 만족하실 것이다.
원래 무덤은 혐오시설이라 사람 사는 곳 가까이 만들지 못한다.
그걸 할 수 있는 자들은 대개 권력과 가까웠다.
페인은 이곳에서 권력의 정점에 서있으니 당연히 가능했다.
문득 그는 농노였던 시절 죽어나간 자들을 어떻게 처리했었는지가 떠올랐다.
땅에 묻는 것도 힘들어서 겨우겨우 했었다.
겨울에는 그마저도 힘들다며 대충 숲속에 던져놓기도 하는 미개한 세상이다.
그런 걸 감안하면 확실히 페인이 성공하기는 했다.
‘빌어먹을 아버지, 시체 정도는 남겨도 됐잖습니까.’
그나마 어머니는 시신이라도 남겼지만 아버지 햅슨은 시체도 남기지 못했다.
죽은 것도 몇 달이 지나고서야 촌장이 알려줘서 알았는데 뭔 수로 찾겠는가?
하는 수 없이 아버지가 쓰던 물건 몇 개를 무덤에 넣었다.
뭐, 원래 이런 건 정성이 중요한 것이니 깊게 고민하지 말자.
페인은 동생들을 데리고 새로 만든 무덤을 방문했다.
시종일관 신난 상태였던 동생들도 이 순간만은 분위기가 무거웠다.
“흑흑, 엄마아-!”
“아빠 보고 싶어······.”
“······.”
셋째 리암과 넷째 아일라가 운다.
둘째인 페일은 나름 꾹 눌러 담고 있지만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목소리는커녕 얼굴의 생김새조차 점점 갈수록 기억에서 희미해지겠지.
그런 동생들의 사이에서 페인은 짧게 묵념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엔 묵은 감정이란 보이지 않았다.
“자, 궁상떠는 건 이걸로 끝. 저녁으로 뭐 먹고 싶어?”
“훌쩍! 난 고기!”
“나도 아일라처럼 고기!”
“······전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좋아,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와아아! 밥이다, 밥!”
밥 먹는다는 소리에 리암이 신나서 뛰어다닌다.
리암이 그러자 아일라도 무덤 주변을 빙빙 돌며 뛰었다.
페인은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저 피식 웃고는 말았다.
‘질질 짜는 것보단 이게 낫지.’
애는 웃으면서 커야 하는 법이다.
페인은 동생들에게까지 개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슬쩍 무덤이 있는 뒤쪽을 훑어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뭔가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어쩌면 뒤져서 귀신이 된 부모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동생들을 앞장세운 페인은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아무도 보지 않을 뒤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프랭크푸트 성으로 카로크 영지의 사신이 도착했다.
- 작가의말
내일도 오후 6시 연재!
가시기 전에 좋아요와 알림 설정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