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절세미녀 로마공주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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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렁컨66
작품등록일 :
2024.07.25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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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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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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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6쪽

욕실의 여자 노예

DUMMY

<1>


띵동!


정각 9시.

오늘도 하루 일상이 시작된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번호표를 먼저 건네는 아줌마.

전입신고서와 임대차계약서 등을 건넸고, 민원 처리를 시작했다.


"바로 처리해드릴게요. 앞에 앉으세요."


업무를 진행하는 동안,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오늘은 그 진상 민원인이 안 오겠지.


띵동!


또 다른 민원인이 나타났고, 이것저것 업무 처리를 진행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업무 처리를 하다 보면, 금방 점심시간이 온다.


이곳 주민센터는 따로 점심 시간이 없어 식사를 1차, 2차로 나누어 먹는데, 1차는 11시 30분에서 12시 30분까지, 2차는 12시 30분에서 1시 30분까지다.


나는 2차에 속해 있어 12시 30분까지 꼬박 기다려야 한다.


“김 주무관, 오늘 칼국수 어때?”

“네. 좋죠.”


어느덧 12시 30분이 되자, 5년 선배인 박 주무관 등과 함께 주민센터를 나섰다. 바로 근처에 있는 허름한 칼국수집. 간판도 허름하고 내부 시설도 좋지 않지만, 음식 맛이 일품인 곳이다. 골목에 숨어있는 맛집이 바로 이런 곳이다.


“근데 오늘은 왜 안 왔지?”


식당 테이블에 앉자마자 박 주무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늘 아침마다 주민센터를 찾아오는 후드티의 어느 백수.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 백수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이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았다.

그는 언제나 난데없이 횡설수설을 하고, 때로는 민원인 대기석 쪽에서 난장판을 피운다.

더는 볼 수가 없어 우리는 경찰에 신고했고 업무방해 혐의 등을 언급했다.

그렇게 경찰에 연행됐지만, 며칠 전부터 그는 다시 나타났다.

그래도 변화는 있다.


'좀 조용해졌어.'


민원인 대기석에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머리만 푹 숙이고 있는 남자.

그러나 언제나 일촉즉발의 모습이다. 뭔가 일이 터질 것 같다. 그래서 다들 조마조마한 상태.

그러나 그는 오늘은 나타나지 않았다.


“김 주무관. 애가 4살이라고 했지? 어때? 지금이 제일 귀여울 때 아냐?”

“네. 귀엽긴 한데, 하아! 얼마나 힘든 데요. 자기 주장이 점점 세지고 있고, 자기가 싫어하는 건 절대 안 하려고 하고.”

“와! 그래? 하하하! 이것 좀 봐! 완전 지 아빠 고집 닮았잖아!”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무슨? 제가 무슨 고집이 있다고요?”


나는 어리둥절해 하며 그를 쳐다봤다.


솔직히 나는 주민센터 공무원으로서 민원인들이 뭐든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있다.

선배들 지시엔 언제나 군말 없이 따랐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저번에 진행했던 한끼 밥상 프로그램 말이야. 노인들에게 효도 밥상하는 건 다 좋은데, 아니 대체 서울 거지들이 왜 여기에 다 몰려들어? 그딴 거 진행한다고 민원 쏟아진 거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나는 정색하며 좌우를 살폈다.

그러나 함께 식당에 온 동료들은 다들 박 주무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벌컥 화를 냈다.


“아니, 박 주무관님! 그건 추석을 앞두고서 잠깐 진행한 건데, 그게 대체 뭐가 나쁩니까?”

“아니, 내가 말하는 건, 그 뜻이 아니잖아."

"무슨 말씀입니까?"

"이봐! 어른들한테 따뜻한 밥상 준비하는 거까진 좋아. 근데 왜 거지새끼들까지 받아들여?”

“주무관님, 그것도 복지 아닙니까! 그 프로그램 취지가 복지인데, 그 사람들 상황이 아주 딱한데 누구 누구 가릴 게 있습니까?”

“진짜 아직도 고집이네! 김 주무관! 내가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게 냄새나잖아! 어르신들이 싹 다 냄새난다고 다들 민원 집어 넣은 거 몰라? 우리 동네가 정말 그런 동네야? 못 사는 동네가 아니라고! 다들 질 떨어진다고 난리야.”


내가 휴! 하며 한숨을 내쉬자, 박 주무관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김 주무관 고생하는 건 잘 아는데. 좋은 대학 나와 이곳저곳 불려가 일도 많이 도와주는 거 잘 알고 있고. 한데 불우이웃 돕기가 좋긴 하지만, 목적은 좀 가려서 하자. 이놈 저놈 다 받으면 그게 시장 바닥이지 뭐야?”


“주무관님. 근데 아시다시피 그 예산은 짜투리 복지 예산입니다! 거기 예산이 좀 남아서 그거 오픈한 건데, 도대체 뭐가 문젭니까? 원래 취지가 나눔 밥상 아닙니까?”


“거지들한테 밥 주는 거, 그거 동의하는 주민들이 없어! 그거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잖아. 여긴 집값이 애매하단 말이야. 다들 집값 올리려고 다들 난린데. 거지 새끼들 몰리면 집값 떨어진다니까. 그러니까 민원이 쏟아지지.”


“저도 잘 압니다. 그래서 잠깐 식사 지원만 한 거 아닙니까? 제가 무슨 복지에 미친 놈도 아니고.”


“하! 진짜 말이 안 되네. 알았어. 그 이야긴 그만하자. 이미 끝난 일인데. 이봐! 김 주무관! 근데 내가 봤을 때, 김 주무관은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니까. 종교 쪽으로 가든지 아니면 정치를 하든지.”


그러자 옆에 있던 정미희 주무관이 피식 웃더니 참견했다.


“박 주무관님, 그건 절대 아니죠. 김 주무관님이 무교잖아요. 그리고 진짜 모르세요?”

“뭘? 내가 대체 뭘 모르는데?”

“그 나눔밥상을 왜 거기서 했는지 정말 모르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 아니에요.”


순간, 정미희 주무관은 흠칫하더니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내가 쏘아봤기 때문이다.


“정 주무관. 대체 무슨 일이야. 말해 봐! 뭐야?”


그러나 내가 다시 눈치를 주자, 정미희 주무관은 씩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해 본 소린데,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도대체 왜 그래? 나만 모르는 게 있나?"

"아, 아닙니다. 주무관님."


정미희 주무관이 두 손까지 젓자, 할 수 없다는 듯 박 주무관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암튼, 이야기가 좀 길어진 것 같은데, 이거 하나 명심하자. 우린 민원인 눈치 제대로 살펴야 돼. 괜한 트집 잡히지 말고, 그냥 무난히, 무난히 가자고. 자자! 우리 빨리 먹고 들어가자.”


박 주무관은 더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칼국수 먹는데 집중했다.

반면, 나는 계속 정미희 주무관을 흘겨봤다.

그 비밀은 절대 입 밖으로 나와선 안 되는 그런 비밀이기 때문이다.



주민자치센터의 하루는 점심시간이 끝나면 좀 더 빨리 지나가게 된다.

점심시간 이후에는 식곤증 때문에 계속 하품이 나오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금방 오후 5시가 된 것을 보게 된다.


근데 문제는 그 이후다.

오후 5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그때 그 시간은 정말 느리게 간다.

특히, 퇴근 시간을 앞두고서 말이다.


민원인들의 방문이 점점 끊기는 시각.

어느새 오후 5시 30분.


‘하, 오늘도 이렇게 가네. 하루가.’


더는 일할 게 없어져, 그저 무기력함만 온몸으로 파고드는데,

그때부터 나는 그저 시계만 쳐다봤다.


‘근데 뭔가 정말 다른 수가 없나.’


솔직히 내가 공무원이 된 것은 특별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정년이 보장된다는 것, 또한 공무원 연금 때문이었다.


나는 철학과를 졸업했다.

주로 서양 고대 문명과 철학 등에 관심이 컸고,

그러나 이공계 출신이 아니다 보니, 일찌감치 공시를 준비했다.

5급 공무원 시험이나 로스쿨 같은 것도 목표가 될 수 있었으나 그건 애초에 포기했다.


내 인생의 기조는 바로 적당히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리고 인생을 여유롭게 살자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편해 보이는 주민센터 공무원이 눈에 들어왔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공시 합격, 그리고 금방 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7년째, 이제는 점점 한숨만 나온다.


터벅터벅.


가방을 둘러멘 채 주민센터에서 나왔다.


-----


이제 퇴근 시간.


거리로 나오자, 나도 가을을 타는 듯 거리 모습이 뭔가 황량하다.

단풍잎들이 여기저기서 떨어지고 있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좀 더 빨리 주변은 어두워진다.


뭔가 공허하고 쓸쓸하다.


남자는 가을을 탄다던데.


집은 이곳 근처.


얼마 전까지 나는 자전거를 타고서 다녔으나 결국 자전거를 도난당했다.


도대체 누군지 몰라도 그걸 어떻게 훔쳐간단 말인가.


그래서 그날부터 나는 걷기 시작했다. 버스비를 아낄 겸해서.


뚜벅 뚜벅 뚜벅.


-----


그래. 오늘도 끝났다. 아무런 일 없이.

그리고 항상 나한테 하는 말.


'김동호 주무관! 넌 오늘도 수고했어. 넌 멋진 공무원이야!’


그렇게라도 해야만 나는 이 생활을 견딜 수 있다.

언제나 무기력함과 싸우면서.


'근데 아깐 좀 위험했단 말이야.'


골목길로 접어들면서 나는 문득 정미희 주무관을 떠올렸다.


동네 노인들을 위한 효도 밥상.


그런데 그 행사에 내가 거지들까지 받아들인 이유는 사실 다른 목적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갑자기 떠넘겨진 복지 프로그램. 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또한 취지에 맞춰 잘 운영하겠다는 그런 목적도 있었지만, 겸사겸사 나한테 득이 되는 일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무료 급식이 진행된 곳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 빌라 근처다. 내가 일부러 주변 거지들에게 홍보를 하며 거지들을 끌어모은 것은 그 앞에서 행사를 하게 되면, 주변 전셋값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일시적인 행사라 가시적인 폭락은 없었지만, 그래도 전셋값 딜을 할 때 나름 괜찮았다.


그 덕분에 나는 시세보다 5천만 원 싸게 빌라 전세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었다고.'


그래도 나는 선행을 하지 않았나. 나한테 쬐금 도움도 됐지만.


‘근데 와이프는 내가 이런 노력을 한 걸 절대 모를 거야.’


하! 미치겠네.


공무원 월급은 왜 이렇게 짜냐고!


그래. 조용히 내 살 길을 열어가는 건, 지금으로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


“여보, 두부 좀 사와. 빨리!”


“두부?”


“김치찌개 하잖아! 빨리 사와!”


귀찮아 죽겠다.


어느덧 밤 8시.


맞벌이를 하는 와이프가 늦게 퇴근했고, 그래서 저녁 식사 시간도 늦어졌다.


그동안 나는 어린이집에 들러 아이를 데려왔고, 내내 아이와 놀아줬다.


그렇게 진을 뺀 뒤, 잠시 소파에 누워있는데 바로 일을 시키는 아내.


할 수 없이 일어났고, 츄리닝 상의를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을 열고 빌라 1층으로 내려갔다.


어느새 더 컴컴해진 주변.


'날씨도 좀 춥네.'


으으으.


어깨를 움츠렸다가 나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골목길,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거기에 슈퍼마켓이 있다.

거기서 두부를 사오면 될 것이다.


'근데 바람은 왜 이렇게 차냐?'


어느덧 겨울을 눈앞에 두고 있어, 밤 기운이 확실히 달라진 것 같다.


'좀 더 빨리 걷자.'


그래서 어두운 골목길을 빠르게 지나 어느 모퉁이를 돌던 중, 이때 흠칫 하며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아, 저건 대체 뭐지?’


높은 담장 때문에 더 어두운 골목길.

뭔가 묘한 기척이 느껴져 그쪽을 쳐다봤다.


더 어두운, 앞쪽 모퉁이 쪽.

거기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 같다.


누구지?


유심히 쳐다보며 조금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다가 나는 이내 피식 웃으며 좀 더 발걸음을 빨리 했다.


누군가 등을 돌린 채 벽을 향해 머리를 푹 숙이고 있다.

우엑, 우엑 하는 게 마치 구토를 하는 것 같다.


‘이 시간에 벌써 술이 좀 됐나. 저기서 구토를 하면 민원이 들어올 텐데.’


그러나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취객한테 괜히 시비 걸 이유가 없고, 저긴 내 집도 아니니까.

박 주무관은 정말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적당히 잘 살자는 그런 신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곧장 옆을 지나치려고 하는데,

그런데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별안간 나한테 달려드는 게 아닌가.


갑자기 움찔하며 바로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큼직한 손으로 내 목을 잡았고, 내가 까무러치며 놀라며 비명을 지르려고 하자, 내 목을 힘껏 뒤로 밀었다. 그 바람에 나는 고개가 뒤로 밀려났다.


“누, 누구세요?"


그래도 위험을 느끼고서 내가 외치자,

바로 그 순간, 후드티 모자를 눌러 쓰고 있는 남자는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내 가슴 쪽에 바짝 대고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와 ???을 위해 넌 죽어야 한다.”


너무 당황했다. 앞쪽 말은 잘 들리지 않으나 뒤쪽 말은 분명히 들렸다.


뭐야? 내가 죽어야 한다고?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따지려고 할 때, 돌연 내 옆구리에 뭔가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치 활활 달구어진 불쏘시개 같은 거.


그게 내 옆구리로 푹 들어오는 듯한 느낌.


찰나 온몸이 뒤틀리며 엄청난 고통이 옆구리에서 올라왔다.


이때, 남자가 무섭게 날 밀었다.


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그 충격보다는 나는 황급히 내 옆구리를 쳐다봤다.

내 옆구리에 깊이 박혀 있는 칼을.


이때, 후드티의 남자는 다시 달려들었다.


부르르 떨며 앞을 막는 내 손을 밀치고는 그는 내 옆구리에 박힌 칼을 뽑았고, 그걸 다시 쥐고서 미친 듯이 날 찌르기 시작했다.


“23번! 23번은 찔러야 돼.”


알 수 없는 말들을 계속 지껄이는 남자.

그는 쉴 새 없이 칼로 날 찔렀다.


푹! 푹! 푹!


날 찌르는 소리.

그 끔찍한 소리들.


점점 의식은 희미해졌고, 나는 살려달라며 힘없이 외쳤다.

그러나 실성한 듯 중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와 ???을 위해 넌 죽어야 한다. 넌 죽어야 한다. 넌 죽어야···.”


어느 순간, 내 눈앞의 모든 게 새카맣게 변해갔고,


어느 순간, 나는 고개가 옆으로 꺾였으며,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2>


쏴아아.


기분 좋게 쏟아지는 물소리.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눈을 감고서 한참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저절로 주먹을 쥐었고, 온몸이 마치 경련하듯 바르르 떨렸다. 갑자기 일어난 엄청난 통증 때문이다. 날카로운 창이 머릿속에 박혀 내 머릿속을 헤집고 있는 것 같았다.


그사이 머릿속엔 알 수 없는 기억들이 계속 밀려 들어왔고, 기존의 내 기억과 뒤엉키기 시작했다.


'으으으.'


아무래도 깊숙한 곳, 머리 안쪽.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쪽에서 뭔가 큰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한참 움직일 수가 없었고, 경련하다가 이때 누군가 내 어깨를 만지는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그렇게 정신을 차렸으나 잠시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도련님, 이제 향유를 발라드리겠습니다. 도유실로 가시겠습니까?”


목소리?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까무러치며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깨달았기 때문.


또한, 상대 역시 다 벗고 있는 여자.


황당함을 넘어 그 문화적 충격에 숨이 턱 막힐 때,


새록새록 떠오른 기억들 덕분에 지금 이 상황이 어떤 건지 대략 이해가 되었다. 황당하게도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는 됐지만, 반감은 더 커진다. 내가 알고 있는 도덕적 잣대와 너무나도 다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긴 목욕탕 같은데?’


그러나 현대식 목욕탕이 아니다.


여기저기 남녀 나체 조각상들이 있고, 벽면은 대리석.


곳곳에 아름다운 꽃들이 꽂힌 화병들이 놓여 있다.


저 옆에는 여러 병의 포도주가 있고, 각종 간식도 놓여 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여자는 바로 욕실 노예였다.


도유실로 가자는 것은 거기서 향유를 발라주겠다는 것이고,


목욕 후에 향유를 바르는 방이 바로 도유실이었다.


'근데 내가 어떻게 그 도유실을 알지?'


주민센터 공무원 김동호.


그게 바로 나다.


그러나 이때 기괴한 기억들 외에도 또 다른 이름이 내 머릿속에서 교차하듯 뒤엉켰다.


그 바람에 나는 두통을 느끼고서 인상을 찡그렸다.


“도련님, 불편하시면 안마를 해 드릴까요?”


미끈한 손이 내 어깨에 다시 닿는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 손을 손등으로 쳐냈다.


“괜찮아. 물러서.”


“네. 그리 하겠습니다. 도련님.”


공손하게 뒤로 물러서는 여자 노예.


그제야 조금 시선은 편해졌다.


나는 등을 돌리고서 욕탕에 앉은 채, 멍하니 그 욕탕 물을 쳐다보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곳은 아주 화려한 욕실이다.


아침마다 내가 목욕하는 곳.


솜씨 좋은 노예로부터 마사지를 받는 장소이며, 온몸에 싱싱한 기운과 활력을 얻게 되는 그런 아늑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기억들과 함께 공무원 김동호의 기억들이 다시 섞이면서 이내 불편함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노예 제도.


이 제도 역시 저절로 내 머릿속에 인식되었는데, 그러니까 저 여자 노예 때문에, 그걸 내가 깊이 의식한 탓에 이제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이곳은 야만적인 사회다.

이 사회는 노예 제도가 있다.

일종의 법칙이며, 사회의 율법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허벅지를 사납게 꼬집었다.

설마 꿈을 꾸고 있나.


윽!


그러나 통증이 느껴진다.


현실.


그리고 머릿속도 이게 현실이라고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내 이름···.’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어.'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나는 두부를 사러 갔다가 골목길에서 칼에 찔렀다.


후드티를 입고 있던 정체불명의 남자가 날 찌른 범인이다.


그런데 이럴 수가!


나도 모르게 주먹을 다시 꽉 쥐고 만다.


그땐 너무 당황해서 미처 그 정체까지 확인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 남자는 주민센터에서 난동질을 부렸던 그 진상 민원인이다.


그가 밤중에 갑자기 나타나 날 그렇게 찌를 줄은 몰랐다.


그냥 미친 사람.


끊임없이 뭔가 중얼거리며 칼로 날 찔렀던 남자.


그런데 도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걸 떠올리자, 문득 나는 그 엄청났던 통증도 기억이 났고, 황급히 내 옆구리와 내 복부, 가슴 등을 쳐다봤다.


'어? 이상한데?'


그런데 내 몸은 지금 멀쩡하지 않은가.

칼 자국의 흔적조차 없고, 흉터조차 없다.

그저 매끈할 뿐.


'이건 또 왜 이러지?'


나는 정색하며 다시 손으로 내 복부와 가슴을 만져봤다.


그러다가 인상을 썼다.


적어도 나는 아침마다 동네를 뛰며 몸 관리를 했고, 그래서 뱃살 같은 게 없다.


그런데 지금 내 손에 만져지는 것은 묵직한 지방들.


이건 진짜 내 몸이 아니다.


‘설마?’


좀 더 아래쪽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흠칫 하며 황급히 두 손으로 거길 가렸다.


‘좀 더 커진 것 같은데.’


19금.


으으. 이건 안 돼.


역시 내 몸에 뭔가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나는 김동호인데, 지금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거울 좀 가져와.”


내가 지시하자 노예는 바로 청동 거울을 가져왔다.


현대의 거울과는 다른 청동 거울.


그러나 대략적인 얼굴 윤곽이 이 거울에 나타난다.


역시 내 얼굴이 달라졌다.


짧은 머리, 날카로운 눈썹, 그 아래에 보이는 새카만 동공. 이국적인 외모답게 턱이 아주 날렵해졌고 아주 젊은 남자의 모습이다. 정말 이국적인 모습.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런 모습을 직접 보자, 좀 더 선명해진다.


내 이름은 카리우스, 어느 귀족 가문의 장남.


이게 바로 나한테 갑자기 입력된 기억들이다.


아직도 혼란스럽다.


그러나 그 이상한 기억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게 되면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좀 더 이해가 되었다.


‘여긴 뭔가 로마 시대 같은데?’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내가 공부를 통해 알게 된 로마제국 시대와 지금 내 머릿속에 강제적으로 입력된 새로운 기억들 사이에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화폐 제도, 정치 상황, 문화 등등, 이런 것들이 같은 듯 달랐고,


설마 역사 왜곡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가 배웠던 지식으로부터 많은 게 어긋나 있었다.


‘여긴 로마제국 같으면서도 로마제국 같지가 않아.’


새로운 기억과 내 고유의 지식이 계속 충돌한다.

물론, 많은 부분에서 흡사한 점도 있다.


이곳 역시 노예를 바닥에 깔고서 평민 계급이 있고, 이런 평민 계급은 자작농, 상인, 해방 노예, 하급 관리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기사 계급이 있으며, 그다음으로 귀족 계급 등이 있다.


내 뒤에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은 바로 가장 하층 계급인··· 노예들이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좀 더 생각을 정리해야 했고 벌거벗은 내 상황도 난감해서 함부로 일어설 수가 없다.


그런데 바로 그때 뿌연 한증막 욕탕으로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하체를 긴 수건으로 슬쩍 가린 남자.


어느 노예가 그 수건을 바로 가져가자, 그는 벌거벗은 채 온탕 안으로 들어왔다.


이때 그를 보자마자 새로운 기억 덕분에 나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카리우스의 아버지 마르쿠스.


또한, 나는 흠칫 했다.


내가 아버지 마르쿠스를 아주 두려워한다는 사실도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는데, 동시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힐끔 쳐다보던 그는 온탕에 조용히 앉았다. 그러고는 눈을 감으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박에 미쳐 그 많은 돈을 날리고서 아직도 밤새 그 짓거리를 했느냐! 조만간 폐하께서 널 찾을 게다. 로마를 떠나봐야 니놈은 정신을 차리겠지.”


무척 차가운 목소리.

그러고는 그는 인상을 쓴다.


이때 나는 이런저런 기억들이 더 떠올랐다.


간밤에 내가 도박을 했던 기억. 정신없이 포도주를 마셨던 기억. 매춘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기억.


그러고 보니 나는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이다.


향락과 도박에 미친 젊은 도련님, 그게 바로 나 카리우스였다.


그리고 이때,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나는 얼른 탕에서 나왔다.


내 본능은 지금 어서 여길 벗어나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노예가 즉시 따라온다.


그러나 나는 재빨리 노예의 손을 쳐낸 뒤 향유를 바르지 않고, 제모사에게 몸을 맡기지도 않은 채 그냥 목욕탕에서 나왔다.


그러고 보니 향긋한 향유를 바르는 도유실 한쪽 침대엔 팔다리가 긴 어느 젊은 남자가 등을 돌린 채 누워 있다.


여자 노예들에게 몸을 맡긴 그 남자를 얼핏 보는 순간, 나는 카리우스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나 카리우스의 동생 페르투스라고 한다.


어머니가 다른 이복동생.


그러나 지금의 나는 누구하고 대화하는 게 당혹스러워 그냥 그곳을 지나쳤다.


우선, 바깥으로 나가 이 새로운 기억들부터 확인해 보고 싶고, 또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도대체 나한테,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3>


“이번 전차경주는 누가 이길 것 같나?”


“쿨라님. 제 생각은 포르투스와 팔라드의 경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번에 스타비아에 전차경주장에 있었던 대결에서 포르투스가 이겼습니다. 포르투스는 현재 챔피언입니다. 그러나 팔라드가 이를 갈고서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누구한테 베팅해야 하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쿨라.


그는 거만하게 푹신한 담요에 몸을 기댔다.


흑인 노예들은 그를 태운 가마를 양쪽에서 메고서 천천히 걷고 있고, 수행 노예들은 앞쪽에서 길을 열고 있다.


쿨라는 자신의 바로 옆에서, 가마의 움직임에 맞춰 걸어가며 음흉하게 웃는 테니우스를 다시 쳐다봤다.


“어제 얼마나 벌었다고 했지?”


“아우레우스 금화(aurei) 5개, 데나리우스 은화(denarii) 20개입니다.”


아우레우스 금화 한 개는 데나리우스 은화 스물 다섯 개에 맞먹는다. 금화 5개와 은화 20개, 이 정도 돈이면 병사 만 명의 한끼 식사로도 모자람이 없다.


“카리우스가 큰 돈을 잃었군.”


“모든 게 쿨라님 덕분입니다.”


“오늘 그 돈으로 주점 헤타란으로 가자.”


그 말에 테니우스는 입꼬리가 올라가며 다시금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헤타란은 고대어로써 아름다운 히아신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원래 히아신스라는 꽃은 종교의식, 황궁 행사 등에 사용되는데, 로마 뒷골목에선 아름다운 매춘부를 가리키는 속어다. 고급 창녀를 일컫는다.


“소인이 쿨라님을 모시겠습니다. 헤타란에 얼마 전, '세실리아'라는 이름의 이쁜 노예가 들어왔습니다. 소인이 그 아이를 오늘 밤 대령하겠습니다.”


“흠, 세실리아? 어디 출신이라고 했나?”


청동 장식품과 인간 노예 등을 쿨라 상단에 납품하고 있는 상인 테니우스. 그러나 상점 운영은 아내에게 맡기고 언제나 쿨라를 옆에서 모시고 있다. 그는 준귀족 계급인 쿨라에게 언제나 바위를 맞춰주고 있다.


“브리타니아에서 잡아온 전리품입죠. 어느 공주라고 하던데 지금은 그저 노예 신세일 뿐입니다.”


“나쁜 혈통은 아니군. 그렇다면 먹어도 배탈날 일은 없겠군.”


쿨라는 무척 기분이 좋은 듯 떠들어대다가, 한편 맞은 편 저 멀리서 다가오는 가마들을 유심히 쳐다봤다.


아주 화려한 가마들.

보랏색 아이리스 꽃들이 장식된 이쁜 가마들.

저런 값비싼 가마를 타고 다니는 자들은 대체로 귀족 가문의 귀부인들이다. 혹은 아가씨들이거나.

또한, 덩치가 좋은 흑인 노예들이 좌우로 긴 대열을 이루며 따르고 있어 보통 가문이 아닌 것 같았다.

그 행렬은 단연 눈길을 끈다.


“쿨라님, 아무래도 저 가마들은 드루투스 가문의 가마 같습니다. 아이리스 꽃은 주로 칼라디아 아가씨가 즐기는 꽃입니다. 드루투스 부인도 같이 타고 있습니다.”


그 순간, 쿨라는 기겁하며 외쳤다.


“빨리 방향 바꿔! 돌아서 가자!”


그 바람에 쿨라의 가마는 즉시 좌측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


사람들이 붐비는 대로를 피해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 금은방, 서점, 비단, 전당포 등은 보이지 않았고 어느덧 허름한 상점들이 나타났다. 또한, 푸줏간의 비린내가 풍기고, 가축에서 벗겨낸 생가죽 냄새가 주변 하수구의 악취와 함께 섞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인상을 쓰던 쿨라.


그는 황급히 자신의 손등을 코로 가져갔다.


손등에 잔뜩 뿌려 놓은 파출리 향을 맡기 위해서다.


신선한 향으로써 비린내와 악취를 떨쳐내기 위한 목적.


"여긴 빨리 지나가자."


여긴 주변 행인들의 행색도 더 남루해졌다. 천막을 치고서 길가에 노숙하는 자들도 있고, 오래된 호도와 솔방울 등을 팔고 있는 하급 상인들도 더러 보인다.


"좀 더 빨리 가자."


노예들을 더 재촉하자, 가마 속도가 더 빨라졌다.


조금 전, 쿨라가 드루투스 가문의 칼라디아를 피한 이유는 최근의 일들 때문이다.


솔직히 쿨라는 자존심이 상했다.


"쿨라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머지않아 좋은 기회가 반드시 올 겁니다."


테니우스의 위로에도 쿨라의 표정은 내내 굳어 있다.


최근 원로원에서 새로운 집정관을 발표했는데, 정치적으론 민회에서 선출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제와 원로원의 지지를 받은 집정관이었다.


그 새로운 집정관은 바로 드루투스 가문 출신.


실바 아리우스 드루투스, 그가 새로운 집정관이 되었다.


물론, 현재의 집정관은 단순 명예직이며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다.


과거 공화정 시대엔 집정관이 권력의 핵심이자 국가를 운영하던 최고 지위자였으나 이제는 상징적인 직위일 뿐.


황제의 권위가 그 모든 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집정관이 특정 가문에서 배출됐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즉, 그 가문이 번듯한 귀족 가문이라는 걸 대외적으로 알리는 선포와도 같았다.


황궁에서 이런저런 행정 일들을 도왔으나 그 근원은 겨우 상인 가문이었던 드루투스 가문.


그런 가문이 일약 귀족 가문이 되자, 쿨라는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


드루투스 가문이나 자신의 가문은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다른 점은 저 요부 칼라디아의 존재.


칼라디아는 원로원의 실세, 늙은 의원의 정부(情婦)가 되었고, 그 덕분에 드루투스 가문은 원로원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쿨라님, 그래서 항상 말씀드리지만, 전리품으로 여자 노예를 최대한 확보하시는 게 앞으로 출세하실 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쁜 것들은 항상 비싸고 가치가 있어. 하지만 지금 나한텐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느냐?"


그러자 테니우스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곧 더 좋은 기회, 더 많은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백인장(켄투리오) 자리도 빼앗는 게 어떨까? 도박으로 말이야."


"하하,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카리우스는 절대 쿨라님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백인장(켄투리오)은 로마군단의 실질적인 중추라고 할 수 있다.

귀족 자제인 카리우스는 아버지 덕분에 백인장(켄투리오) 직위를 갖고 있다.

물론, 그 배불뚝이가 군에 들어갈 이유는 없겠지만, 쿨라는 그 직위를 빼앗아올 생각이다.


요즘 로마는 각종 비리가 끊이질 않는다.


황제마저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의원 직위까지 공공연하게 팔고 있다.


원로원 의원들 역시 각종 직위를 팔고 있다.


이런 혼란한 세상에서 방탕아 카리우스의 백인장 직위 정도는 못 빼앗아올 이유가 없다.


돈도 챙기고, 직위도 챙기고, 특히 군단 직위를 챙기는 것은 향후 다양한 전리품 획득에도 유리했다.


거기다가 카리우스가 난처해지면, 누군가가 무척 좋아하고 무척 기뻐한다. 그게 바로 꿩 먹고 알 먹기! 쿨라에겐 다시 없는 좋은 기회였다.








<4>


나는 한참 멍하니 쳐다보다가 또 멍하니 쳐다봤다.


우뚝 솟아 있는 신전.


그리고 금빛의 기둥. 또 다른 대리석 기둥 등등.


눈으로 보고 있지만, 도저히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다.


‘저건 바로 아칸투스 잎사귀 무늬 같은데.’


이곳은 고대 건축양식인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을 따른 각종 기둥들이 세워져 있다.


옷을 대충 챙겨 입은 뒤, 곧바로 로마 거리로 나왔는데, 이런 놀라운 것들을 금방 보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 들어온 새로운 기억들과 내 앞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을 대조하며, 나는 계속 놀라고 또 놀랐다.


'저건 꼭 트리글리프 같은데.'


사진으로 봤던 형태들.


도리아식 고대 건축양식에서 보이는 특이한 지붕 아래 소벽 형태는 '트리글리프'라고 불리는 것이다.


아주 깨끗하게 빛나는 모습으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저건 또 팀파늄 양식 같고.’


그런 양식과 어우러진 신들의 조각상들.


고대 문명의 흔적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나는 그런 모습들을 정신없이 살피다가 어느덧 넓은 광장으로 들어섰다.


내 옆에는 노예 호위병들이 지근거리로 따라다녔고, 혹시라도 내 다리가 아플까봐 가마가 계속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


나는 정말 신기했다.


저기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으로 불리는 공회당이었고, 각종 특이한 이름을 따서 불리는 공회당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곳은 바로 로마제국의 중심이 맞다.


저 멀리 보이는 언덕 위의 웅장한 건물들. 저기가 바로 황궁이라고 한다. 이른바 팔라티눔 황궁이다. 저 황궁에는 키벨레 신전, 아폴로 신전 등도 있다.


나는 잠시 후 공회당 층계에 앉아 그 앞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가마를 타고 가는 귀족들 혹은 준귀족 계급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고,


중간중간 무장한 병사들이 척척 발소리를 맞추며 지나가는 모습과 일반 평민들이 뭔가 바삐 움직이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인종도 좀 특이한데.’


현재 로마는 세상의 중심이라고 한다.


이집트인, 브리타니아인, 갈리아인, 에티오피아인 등 각종 종족들이 섞여 있다.


‘확실히 내가 로마에 온 게 맞아.’


그러나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나는 그때 수없이 칼에 찔렀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심장 쪽까지 찔린 것 같다.


폐도 찔렸다.


당시 호흡할 수가 없어 숨이 막혔고, 숨을 쉴 수가 없어 점점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거기서 죽었다는 말인데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면 이게 빙의인가.


그러나 조금 이상하다.


단순한 빙의 같지는 않다.


카리우스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강제적으로 주입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억들은 점점 더 내게 익숙해지고 있다.


그 때문에 내가 김동호인지 내가 카리우스인지, 기억들이 뒤엉키며 점점 헷갈리는 듯한 느낌도 든다.


다만,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두 사람의 성격.


그렇다면, 김동호의 성격과 카리우스의 성격은 어떠한가.


우선, 내 성격은 좋은 게 좋은 거고, 때로는 고집이 세며, 때로는 주변 상황을 잘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카리우스는 그렇지 않다.

오로지 방탕한 녀석.

도박을 즐기며, 향락에만 취했다.

그런 성격부터가 다르다.


'알다가도 모르겠는데.'


나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층계에서 일어섰고, 이때 바로 내 지척에서 날 호위하던 호위병으로부터 작은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도련님, 이제 원형경기장(콜로세움)으로 가시겠습니까? 파비우스 검투사 양성소에서 쿨라님과 약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쿨라? 나는 고개를 다시 갸웃거렸다가 이내 한 남자의 얼굴이 기억났다.


이상한데. 쿨라와 이런저런 기억들은 많은데, 나 카리우스가 좋아했던 사람은 절대 아닌 것 같다.


여하튼 조금 더 생각하다가 나는 그 여자 호위병을 다시 쳐다봤다.


이집트 노예 출신인 호위병.


그녀는 고대 무기인 기형적인 칼 코피시를 손에 들고 있었고, 이름이 '키르케'라고 한다.


아버지 마르쿠스가 나에게 특별히 붙인 노예 호위병.


꽤 이쁘장하게 생겼으나 칼을 아주 잘 쓴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저 호위병이 내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원형경기장(콜로세움)이라는 단어 때문에 나는 금방 다른 호기심이 생겼다.


"그럼 바로 거기로 가자."


충분히 로마 거리를 구경했고, 그 때문에 이제 콜로세움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래서 저 멀리 보이는 원형의 거대한 건물 콜로세움을 쳐다보며 그쪽으로 한참 걸어가려고 할 때, 바로 그때!


두두두두!


갑자기 지축을 울리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


우측에서 들려오는 아주 굉장한 소음이었다.


나는 멈칫하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때, 아주 빠른 속도로 광장을 통과하고 있는 기병들.


- 으아, 피해.

- 물러서라! 물러서라!


수많은 소란과 함성이 울리며, 수많은 인파가 크게 놀라며 일제히 좌우로 흩어졌다.


근데 어떻게 저렇듯 그냥 치고 들어올 수 있을까.


광장에 사람들도 많은데.


하지만 기병들은 아주 일사분란했고, 사람들 역시 이런 경험이 많은 듯 아주 빠르게 좌우로 흩어지고 있다.


그렇게 기병이 먼저 나타난 뒤, 뻥 뚫린 광장을 향해 병기 전차 형태인 이륜전차들도 나타났다.


요란한 바퀴 소리와 함께 빠르게 질주하는 이륜전차들.


긴 망토를 두른 로마 갑옷병들은 그 전차의 말들을 조종하고 있었고, 그 뒤를 달리고 있는 세 대의 사륜마차 안에선 누군가 고개를 내밀고서 아주 시큰둥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


이때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가장 앞선 사륜마차.


그 안에서 무척 거만한 남자가 밖을 쳐다보고 있는데 온통 황금빛 의복이었고 금발 머리에 금빛 월계관을 쓰고 있다.


"모두 물러서라!"


다시 누군가 외치자, 마치 썰물이 빠지듯 인파가 더 빨리 흩어졌다.


그리고 바로 뒤.


뒤따라오는 사륜마차에선 아주 아리따운 아가씨가 고개를 내밀며 또한 주변을 살피고 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설마 저 남자가 로마의 황제인가.


내가 황제를 본 것인가.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금방 내 눈앞에서 사라졌고,


뻥 뚫렸던 광장은 다시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도련님, 이제 가시죠."


날 재촉하는, 흑요석 같은 새카만 눈동자의 호위병 키르케.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근데 그러고 보면, 길가에서 연예인 한번 만나기도 힘든데, 나는 조금 전 이 제국의 황제를 본 것이었다.


'우선, 이 시대가 어느 시대인지 그것부터 빨리 확인하자.'


퍼뜩 든 생각.


대략 기원후 AD 10년에서부터 100년 사이 같으나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점점 더 뚜렷해지는 기억들.


그렇다면 정말 이 시대가 네로 황제 시대일까.


그 와중에 현대 지식과 카리우스의 지식이 혼합되며 내 머릿속은 점점 더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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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절세미녀 로마공주와 결혼했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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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학살자는 충성을 원한다 NEW 6시간 전 325 12 11쪽
29 누군가는 황제가 되고 누군가는 신이 되었다 +4 24.09.18 610 19 7쪽
28 안토니아 공주의 침실 +5 24.09.17 737 24 18쪽
27 첫날 밤, 그리고 태동 (2) +2 24.09.16 814 24 7쪽
26 첫날 밤, 그리고 태동 (1) +4 24.09.14 926 20 18쪽
25 수부라의 현인 +4 24.09.12 980 26 31쪽
24 안토니아 공주와의 첫날 밤 (2) +5 24.09.10 1,180 18 25쪽
23 안토니아 공주와의 첫날 밤 (1) +4 24.09.07 1,413 29 23쪽
22 카리우스 네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5 24.09.05 1,348 33 25쪽
21 황제가 되다 (2) +3 24.09.03 1,370 30 30쪽
20 황제가 되다 (1) +3 24.08.31 1,514 30 14쪽
19 쿨라의 결단, 새로운 로마황제 +5 24.08.30 1,502 35 23쪽
18 우연히 시작된 로마 혁명 +2 24.08.28 1,546 41 29쪽
17 로마의 흑막이 되다 +7 24.08.24 1,663 44 23쪽
16 로마 식기 마트 +3 24.08.22 1,611 41 16쪽
15 로마를 바꾸자 +2 24.08.20 1,749 49 21쪽
14 강철의 주인 +4 24.08.18 1,868 57 24쪽
13 안타까운 이혼 공주 +3 24.08.15 2,005 52 21쪽
12 안토니아 공주 +3 24.08.13 2,006 57 21쪽
11 황금 궤짝 +2 24.08.11 2,048 54 24쪽
10 돈이 넘친다 +4 24.08.09 2,180 53 28쪽
9 영웅 (2) +5 24.08.07 2,161 52 23쪽
8 영웅 (1) +4 24.08.06 2,203 48 17쪽
7 내가 유명해지다 (3) +4 24.08.05 2,286 47 24쪽
6 내가 유명해지다 (2) +3 24.08.02 2,336 54 28쪽
5 내가 유명해지다 (1) +5 24.08.01 2,464 61 20쪽
4 출세의 길이 보인다 +9 24.07.30 2,575 65 22쪽
3 향락의 밤, 벌거벗은 무희들 +4 24.07.28 2,728 60 20쪽
2 특별한 능력 +4 24.07.27 2,889 61 22쪽
» 욕실의 여자 노예 +2 24.07.25 3,463 65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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